[래더] 트위터는 @Rather_0613 (舊 새벽의덕후)

아 임신물 보고 싶다.

 

 

* 특별편! <How I met your mother/father!>

 

 

W.새벽의덕후

 

 

 

[슈짐]

 

 

분명 아주 평범한 학교생활이었다. 애들이랑 투닥거리고 의미 없는 몸싸움을 하고 키득거리면서 그렇게 지냈다. 정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너무나도 평범한 일상이었는데.

 

 

“새로 오신 교생 선생님이야. 말 잘 들어.”

“안녕하세요. 새로 온 음악 교생 민윤기라고 합니다.”

 

 

그냥 아무렇지 않은 인사에, 아무렇지 않은 표정에 나는 한순간에 반해버렸다. 열여덟 해를 살아오면서 이런 느낌은 처음이었다. 평소처럼 쉬는 시간이 끝나는 종이 울리고 나서야 음악 수업을 준비하고 있었고, 선생님이 들어오시고 나서도 앞자리 친구랑 투닥거리며 장난을 쳤을 뿐이었다. 그런데 음악 교생 선생님을 보자마자 그런 내 아무것도 아닌 일상이 뒤흔들리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내 첫사랑이자 짝사랑이 시작되었다.

 

 

*

“쌤! 쌤. 피아노 쳐 주세요.”

“아이, 또 무슨 피아노야.”

“아 쌤 작곡 전공 하셨다면서요.”

“그런 건 또 어떻게 알았어.”

“다 아는 수가 있거든요? 아 쳐주세요오.”

 

 

교탁 앞에 있던 선생님의 눈이 음악실 이곳저곳에 닿았다. 우리 반에서 가장 활발한 애가 대뜸 음악실에 들어선 교생 선생님을 향해 소리쳤고, 반 애들 전체가 웅성거렸다. 수업을 하려고 했던 음악 선생님도 당황한 티가 많이 났다. 음악 교생 선생님은 인기가 좋았다. 남자애들도, 여자애들도 선생님을 좋아했다. 마치 만인의 첫사랑이라도 되는 것 같았다. 나는 그저 구석에 앉아서 그런 선생님을 바라볼 뿐이었다. 부러웠다. 나도 선생님이랑 얘기를 해보고 싶은데 도저히 용기가 나지 않았다. 나름 학교에서 모범생이었고 선생님들과도 곧잘 이야기를 나눴다. 그런데 어쩐지 저 교생 선생님한테는 그럴 용기가 나지 않았다. 


여전히 웅성거리는 애들을 향해 선생님은 ‘진짜 원하냐?’ 하는 소리를 하며 음악실 안을 둘러봤다. 나도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슬쩍 보니 음악 선생님도 흐뭇하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교생 선생님의 눈이 내 쪽에 닿나 싶었지만 아쉽게 흘러갔다. 아, 눈 마주칠 수 있었는데. 아쉬움에 괜히 몸을 좀 움직여 선생님 쪽으로 고개를 뺐다. 선생님은 어느새 피아노 앞에 앉아있었다.

 

 

“이거만 듣고 다시 수업할 거야. 그때는 딴소리하지 마라.”

“네!”

 

 

선생님의 장난스러운 말이 끝나고 곧이어 피아노 소리가 들렸다. 아, 진짜 교생 선생님은 너무 완벽하다. 아무래도 또 반한 것 같았다. 악보도 없이 그냥 아무거나 연주하는데 이렇게 감미로울 수가 없다. 무슨 노래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귀에 익은 노래는 아니었지만 그냥 좋았다. 그 노래를 들으면서 그저 두 손을 무릎 위에 모아 쥐고 선생님을 바라봤다. 진짜, 내가 세상에서 본 사람 중에 제일 멋있다.

 


 *

“어? 이거 누가 준 거야?”

“몰라요오.”

“어, 뭐 누군지 모르겠지만 잘 먹을게. 고맙다.”

 

 

선생님이 계시는 곳까지 갔었지만 차마 음료수를 직접 건넬 수가 없었다. 음악실 문 앞에서 얼쩡거리다가 문밖으로 나오는 선생님과 부딪혀버렸고, 뭐라 말도 못한 채 꾸벅 인사하고 도망쳤다. 으아, 심장 떨려. 겨우 안녕하세요, 라는 말만 뱉고서 내달렸다. 벽 옆에 숨어 있다가 고개만 빼서 음악실 쪽을 쳐다봤다. 다행히 선생님이 내 쪽이 아닌 반대편으로 가고 있었다. 저 멀리 가는 선생님을 보고 나서야 슬금슬금 다시 움직여서 음악실로 들어갔고 선생님이 앉아있던 책상 위에 음료수를 올려놨었다. 그리고 그 음료수를 지금 선생님이 손으로 잡아 들었다. 와, 선생님은 피아노를 쳐서 그런가 손도 크시네. 내가 음료수병을 쥐었을 때를 떠올리면서 내 손바닥을 펴들었다. 어, 저렇게 쥐셨으니까. 음 이 정도는 되려나. 혼자 손을 움직이다가 다시 고개를 들어서 선생님을 쳐다봤다. 아, 여기 본 거 같아. 어떡해. 수업 안 듣는 애로 아시겠다.

 

 

“쌤! 이상형 있어요?”

“갑자기 그게 무슨 뜬금없는 소리야.”

“아, 쌔앰. 알려 주세요!”

 

 

으씨, 쟤는 왜 맨날 선생님을 귀찮게 만드는 거야. 매 수업시간마다 교생 선생님이랑 대화를 하곤 하는 애를 살짝 흘겼다. 뭐, 물론 나도 궁금하긴 했지만 왜 매번 쟤만 저렇게 질문을 하고 선생님의 시선을 독차지하냐고. 나는 인사도 제대로 못 건네는데. 괜한 답답함에 입 안 가득 바람을 넣었다가 힘없이 빼냈다. 씨, 나도 선생님이랑 얘기하고 싶다.

 

 

“너네는 교생 쌤들이 오면 좋지? 매번 이렇게 수업 시간에 놀려고.”

“네에.”

“얼씨고, 대답은 잘한다.”

“그래서 쌤 이상형은 뭔데요?”

“그냥, 내 마음에 들면 다 좋지 뭐.”

 

 

선생님의 싱거운 대답에 애들이 투정부리는 소리를 냈지만 선생님은 시끄럽다며 애들을 조용히 시켰다. 언제나 궁금하던 거였는데 막상 선생님의 이상형을 듣고 나니까 마음이 더 복잡해졌다. 쉬운 듯하지만 저게 가장 어려운 거 아닌가. 물론 이렇다저렇다 하는 구체적인 이상형이 없는 건 다행이었지만, 그렇다고 선생님의 마음에 드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니니까. 어쩐지 더 심란해지는 마음에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수업이 시작되었고 오늘은 음악 선생님 대신 교생 선생님이 수업을 하기로 했다. 선생님 목소리가 너무 좋아서 집중은 절로 되었다. 물론, 내용이 들어온다기보다는 그냥 계속 듣고 있기 좋은 거였다. 아, 그러면 집중이 안 되는 건가. 아무튼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

“야, 그 얘기 들었어?”

“무슨 얘기?”

“우리 학교 온 교생 선생님들 이번 주가 마지막이래.”

“헐, 뭐야. 오늘 목요일이잖아.”

“그러니까. 이제 얼마 안 남았다.”

 

 

학교가 끝나고 야자를 하기 전에 친구들끼리 모여서 아무 얘기나 하고 있는데 대뜸 나를 향해 그렇게 말한 친구 때문에 모든 사고회로가 정지되어 버렸다. 벌써? 왜? 나는 아무것도 못했는데. 친구들의 말은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당장 내일이면 선생님을 보는 게 마지막이었다. 내 이름도 모르실 텐데. 난 이제 어쩌지. 결국 그 날 야자 시간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집에 돌아가서 밤새 울었다. 내 마음을 어떻게 말해야 할지도, 또 어떻게 선생님을 보내야 할지도 아무것도 정하지 못했다.

 

 


“쌤, 진짜 가세요?”

“그럼 가지 안 가냐.”

“쌤은 서운하지도 않으세요?”

“뭐가 서운해. 어차피 나는 실습생인데.”

“너무해요. 우리는 완전 서운한데.”

“맞아요. 쌤 이렇게 가시는 게 어딨어요.”

 

 

차마 그 무리 사이로 끼어들 수 없었다. 밤새 엉엉 울면서도 정한 게 아무것도 없었다. 나도 저 무리 안에 섞여서 가지 않으면 안 되냐고, 나중에라도 볼 수 없는 거냐고 물어보고 싶은데. 여전히 인기가 많았던 선생님 주위에는 애들이 바글바글했다. 저 사이에 끼어서 몇 마디라도 던지면 될 텐데 그럴 용기도 나지 않았다. 그렇게 선생님은 떠났다. 아주 짧은 시간 동안 선생님을 참 많이도 좋아했었다. 행여 어디 발령받은 곳이 있을까 인터넷을 뒤져보기도 했지만 선생님의 흔적은 쉽게 찾을 수 없었다.


그렇게 짧았던 첫사랑이 떠났다. 그러나 내 사랑이 떠난 것은 아니었다. 고등학교도 졸업을 하고, 대학에 입학도 했고, 군대에 입대도 제대도 다 했음에도 나는 줄곧 선생님을 그리워했다. 누굴 새로 만나는 것도 어려웠다. 만나더라도 오래가지 못했다. 늘 마음 구석에 선생님이 걸려 있었다.


 

 

“오늘 안 잊었지?”

“어. 아, 근데 꼭 가야 하나.”

“야, 우리 같은 사망년은 그냥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게 답이야.”

 

 

제대하고 돌아오니 마음이 많이 급했다. 정신없이 2학년을 보냈고 어느새 3학년도 한 학기가 다 지나가 있었다. 그제야 발등에 불이 떨어진 느낌이었다. 뭔가 뒤처진 느낌이라 공모전도 많이 찾아다녔고 인턴도 수십 군데 찔러 넣었다. 생각보다 잘 풀리지 않는 일들에 답답해하고 있을 때 강연 마니아인 친구 녀석이 괜찮은 강연 자리가 있다고 했다. 딱히 남의 말 듣는 걸 좋아하진 않았지만 그날따라 많이 답답했다. 그래 밑져야 본전이랬는데. 그냥 가서 좋은 얘기 있음 듣다 오지 뭐. 그렇게 생각했다.

 

 

“근데 강연자가 누군데?”

“어, 이름은 기억이 안 난다. 근데 음악 프로듀서 같은 거 하는 사람이래.”

“그렇구나.”

“광고 쪽에서도 꽤 유명하다고 하니까 들어봐서 나쁠 건 없을 거 같아.”

 

 


하도 부지런을 떠는 친구 덕에 강연장 아주 앞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사람이 오기는 하는 건가. 아직 썰렁한 강연장 분위기에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친구는 촌스럽게 제발 그러지 말라고 했지만 영 못 미더웠다. 다행히 조금의 시간이 지나자 사람들이 조금씩 차기 시작했다. 여긴 뭐 설명서 같은 것도 없냐. 괜히 어색해져서 가방에 챙겨놓고 다니던 수첩을 꺼내 들었다. 뭐, 쓸만한 게 있겠지. 자리도 완전 코앞인데 잘 듣는 척해야 좋아하겠지. 그렇게 강연을 기다리고 있었고 곧이어 강연을 시작한다는 사회자의 말이 들렸다. 보통은 큰 스크린에 피피티를 띄워놓곤 하던데 여긴 그렇지 않았다.

 

 

“아, 잘 들리시나요.”

“네.”

 

 

느닷없이 들려온 목소리가, 순간 굉장히 그리워하던 목소리랑 닮아있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그럴 리가 없잖아. 속으로 몇 번을 되풀이했지만 ‘음악 프로듀서’라는 직업도 자꾸 걸렸다. 아, 왜 갑자기 생각나고 그러냐. 오늘 강연에 집중하긴 글렀네. 그런 생각을 하며 펜대를 의미 없이 굴렸다. 저런 목소리를 가진 사람이 또 있구나. 강연자는 무대에 나오지 않은 채 목소리만 냈다. 꽤 특이한 사람이네.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곧이어 음악이 흘러나왔다. 머릿속엔 이미 내 첫사랑 교생 선생님으로 가득해 있었다. 그러다 문득, 음악이 익숙하다고 느꼈다. 이거 어디서 들어 봤는데. 작은 책상에다가 멋대로 굴리던 펜을 붙잡고 멍하니 있었다. 곧 노래를 배경음악 삼아 강연자가 무대 위로 올라왔다.

 

 

“안녕하세요. 음악 프로듀서 민윤기라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새로 온 음악 교생 민윤기라고 합니다.’

 

“말도 안 돼.”

“어? 뭐라고?”

 

 

이건 기적이라고 생각했다. 내 눈앞에 내 오랜 짝사랑이 크게 달라진 것 없는 모습으로 서 있었다. 나는 멍청한 표정을 하고 삐뚤게 뒀던 몸을 바로 세웠다. 아주 오래 쌓아둔 감정이라고 생각했는데 선생님을 보자마자 열여덟 살 그때로 순식간에 돌아갔다. 내가 혼잣말처럼 뱉은 말에 같이 온 친구가 말을 걸었지만 대꾸할 정신이 없었다. 어떡해. 만났어. 선생님을. 눈앞에 펼쳐진 상황을 믿을 수 없었다. 그때 먼 곳만 보고 있던 선생님의 눈이 내 쪽으로 와 닿았다. 알아보실까. 나 모르시겠지. 난 그냥 학생이었을 뿐인걸. 뭐라 말하던 선생님의 말이 잠시 멈췄다. 선생님의 시선은 여전히 내 쪽을 향해 있었다. 어, 어떡해. 잠시 눈이 마주친 채로 가만히 있었다. 강연장 안은 고요했다. 곧이어 선생님이 미소를 보였고 시선도 돌아갔다. 못 알아본 거겠지.

 

 

“방금 나온 노래를 어떻게 느끼셨어요? 아, 오. 생각보다 많은 반응이 나오네요. 이건 제가 대학생 때 만든 노랜데. 제목은 어, 초대라고 지었어요. 여러분이 아는 그 가수의 노래는 아니고. 이 노래를 듣고 누군가 찾아왔음 좋겠다, 싶어서 만든 거였어요. 즉흥적으로 만든 건데. 뭐, 실패했죠. 여러분이 말한 것처럼 노래가 달콤하긴 한데 유혹적이진 않았나 봐요.”

 

 

강연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가끔 선생님의 시선이 이쪽으로 와 닿은 것 같았지만 뭐, 강연장이 꽤 크기도 했고 선생님의 시선은 여기저기 다녔으니까. 마냥 날 알아보았다고 확신할 수도 없었다. 사실 날 알아본다는 것 자체가 또 다른 기적이었다. 소심한 박지민을 알아볼 리가 없잖아. 강연이 진행될수록 뭔가 주눅 드는 기분이었다.

 

 

“아, 헐. 망했다.”

“어? 왜?”

“나 요번에 팀플 자료 주기로 했는데. 야, 진짜 미안한데 나 먼저 갈게.”

“어?”

“강연 잘 듣고 학교에서 보자.”

 

 

강연이 한창 진행 중이었는데 친구가 갑자기 자리를 떠났다. 이렇게 앞자리에 앉아있으면서 몸을 웅크리고 가면 안 보일 거라 생각했는지 녀석은 한껏 웅크려서 강연장을 빠져나갔다. 선생님의 목소리는 여전히 듣기 좋았지만 여전히 집중되는 목소리는 아니었다. 자꾸 메마르는 입술을 혀로 적셔가면서 자리를 지켰다. 강연은 유쾌하게 끝맺어졌고 사람들은 빠르게 강연장을 빠져나갔다. 나는 그 자리에 남아있었다. 미련 같은 거였다. 선생님도 무대 뒤로 사라졌고, 사람들도 죄다 빠져나갔다. 난, 결국 아무것도. 또다시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바보 같아.”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려버렸다. 바보 박지민. 멍청한 박지민. 여태 선생님만 그리워했으면서 기적처럼 온 기회를 또 놓쳐버렸어. 몸을 바닥에 처박을 기세로 고개를 숙였다. 다리도 동동 굴렀다. 아, 망했어. 다 망했어.

 

 

“아직 안 갔네?”

 

 

한참 자책하고 있는데 갑자기 들린 목소리에 당황했고 그대로 굳어버렸다. 어, 설마. 설마. 그럴 리가 없잖아. 여전히 몸을 웅크린 채로 멈춰있었다. 고개를 들면 어떤 장면이 나타날지 무서웠다. 박지민은 또다시 주저하고 있었다.

 

 

“나 안 보고 싶었어? 그래서 그러는 거야? 나, 갈까?”

“…아니요.”

 

 

혹시나 진짜 가버릴까 두려워서 선생님의 말이 끝나자마자 고개를 번쩍 들었다. 진짜, 선생님이었다. 선생님이 앞에 서 있었다. 마치 환상같은 장면을 바라보면서 멍하니 눈만 끔벅거렸다. 입안이 바짝바짝 말랐다. 이 와중에 심장은 또 엄청 세게 뛰었다. 두려웠지만 도망치고 싶진 않았다. 그러나 도무지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보고 싶었어.”

“네…. 에? 저를요? 절 아세요?”

 

 

내 말에 선생님이 예쁘게 웃었다. 아, 선생님은 여전히 예쁘게 웃었다. 저 웃음을 보니 또 생각이 났다. 애들이 저 얼굴을 ‘귀한 얼굴’이라고 불렀다. 선생님은 대체로 저렇게 활짝 웃질 않았다. 아주 가끔 저렇게 활짝 웃어줬는데 그게 또 되게 멋있어서 애들이 엄청 좋아했다. 물론 나도 그 엄청 좋아한 애들 중 한 명이었다. 그런데 그토록 귀한 얼굴을 단독으로 보고 있었다. 그것도 ‘보고 싶었다.’ 라는 믿을 수 없는 말과 함께.

 

 

“이젠, 십 대 아니지?”

“네? 그거야, 당연하죠.”

“그럼 나 죄책감 없이 너 붙잡아도 되겠네.”

“예?”

 

 


십 대는 아니라고 했지만 여전히 보여지는 얼굴이 그때 그대로였다. 약간 아쉬운 건 그때 귀엽게 얼굴 가득 통통했던 볼살이 많이 사라졌다는 점 정도랄까. 볼살은 많이 빠졌지만 그래도 여전히 어린 티가 나고 귀여운 얼굴인 건 여전했다. 이 둔한 녀석은 여전히 바보 같았다. 자신을 아냐는 그 질문이 얼마나 바보 같았는지 얘는 모르겠지.


무대에 올라서자마자 솔직히, 진짜 마이크에 대고 ‘박지민?’하고 소리칠 뻔했다. 처음 등장 음악으로 깔아 둔 노래도 음악실에서 피아노를 쳐달라던 애들의 성화를 거절하려 하다가 기대 가득했던 이 애의 눈을 보고 즉흥적으로 쳤던 곡이었는데. 내 등장 음악으로 깔아 둔 노래의 끝에서 그 주인공을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몇 번이고 시선을 줬는데도 알아채지 못하고 여전히 긴장한 눈동자가 약간 반가웠다. 


늘 눈에 잘 보이지도 않는 구석 자리에 앉아서 통통한 얼굴 가득 수줍은 미소를 짓고 있던 그 애. 매번 뒤에 숨긴 손을 꼼지락대면서 단 한 번도 나한테 직접 선물을 못 내밀었던 그 애. 언제나 수업 시작 전 남몰래 교탁 위에 선물을 올려 뒀지만 구석에서 혼자 좌불안석이라 티가 많이 나던 그 애. 실습 마지막 날 내 주위로 둥그렇게 모여든 애들보다 한참 멀리 떨어져서 통통한 얼굴이 퉁퉁하게 부어있던 그 애. 지민이.

 

 


**

“아, 괜찮아?”

“네, 네? 네. 어, 어. 안, 안녕하세요.”

 

 

냅다 도망가는 그 애의 뒷짐 진 손에 늘 내 책상에 올려져 있던 음료수가 들려 있었다. 우렁각시마냥 음료수를 조공하고 도망치는 녀석이 저 녀석일 거라고 대충 예상은 했다. 어찌나 치밀하지 못한지 지금도 제대로 숨지 못해서 벽 옆으로 팔이 약간 삐져나와 있었다. 귀엽네. 언제나 구석에서 눈만 말똥말똥 뜬 채 나를 쳐다보던 그 얼굴이 떠올라서 웃어버렸다. 아, 저기로 가야 하는데. 안 되겠다. 돌아가야겠네. 서툴긴 해도 기껏 숨은 녀석이 안쓰러워서 가야 하는 길 반대편으로 몸을 돌렸다.

 

 

_

“쌤! 이상형 있어요?”

 

 

언젠가 한 번은 이 질문을 받을 거라고 생각했다. 생각보다 늦게 나온 질문이라고 느껴지기도 했다. 교실 가득한 개구진 표정들을 쭉 돌려봤다. 다들 흥미진진한 얼굴이었는데 그 얼굴들 사이에서 혼자 긴장 가득한 얼굴이 보였다. 어이구, 저 바보. 저렇게 티를 내면서. 이미 학교 선생님들 사이에서도 소문이 파다했다. ‘지민이가 선생님을 엄청 좋아하나 봐요.’ ‘어머 나도 봤어. 가끔 넋 놓고 윤기 씨 보던데.’ ‘걔가 순하고 되게 착해요. 학교생활도 잘하고.’ 같이 교생 실습을 하는 사람들도, 또 학교에 계시던 선생님들도 나를 보면 한마디씩 건넸다. 


전에 한 번은 지민이랑 같은 반 친구가 나한테 대신 뭘 건네주기도 했다. 제 친구 박지민이 나를 엄청 좋아하는데 이걸 몇 날 며칠 동안 주물럭거리기만 한다면서. 학생이 건네준 건 그냥 작은 그림이었다. 날 그린 것 같은 그림. 교실 구석에서 긴장한 얼굴을 보니 내 지갑에 꽂혀있는 그 그림이 떠올랐다. 원래 내 이상형은 꽤 구체적이었다. 친구들이 넌 그래서 연애를 못 하는 거라며 한 소리씩 꼭 할 정도로 빡빡한 이상형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어쩐지 지금은 그런 것들이 다 상관없었다.

 

 

“그냥, 내 마음에 들면 다 좋지 뭐.”

 

 

이 말을 하면서 쳐다본 사람이 너였다는 걸, 고개를 숙이고 있던 너는 모르겠지. 지민이는 늘 눈에 보였고, 자꾸 신경 쓰이는 그런 애였다. 날 좋아한다는 소문이 돌아서가 아니라 그 전부터 그냥 자꾸 보였다. 의도치 않게 교직 이수를 받게 되어서 교생 실습까지 나온 거였다. 뭐 해보니까 꽤 재밌긴 했지만 누군가와 꾸준히 교류해야 한다는 점은 끌리지 않았다. 실습을 거의 마무리 한 지금도 임용고시를 볼 생각은 없었지만 그래도 교생 실습 나온 게 후회되진 않았다. 


서툴고 쪼끄만 녀석을 보는 게 재밌어서 생각보다 실습 기간은 빨리 지나갔고 나는 학교로 돌아가서 졸업을 했다. 예전에 사고로 큰 수술을 받은 적이 있어서 군대는 가지 않아도 괜찮았다. 정신없이 학교생활을 하면서 졸업을 하고, 하고 싶던 음악을 하고 살면서 연애 같은 건 딱히 하지 않았다. 행여 누군가의 호의를 받게 되더라도 자꾸 그 조그만 녀석이 눈앞에서 방방 뛰어다녔다. 가기 전에 제대로 인사라도 해 볼걸. 그런 후회를 매달고 여태 지냈는데. 늘 눈앞을 돌아다니던 그 녀석이 정말 내 눈앞에 있었다. 뭐, 더 이상 무엇이든 참을 이유가 없었다.

 

 

 

“좋아해. 지민아.”

“에? 예? 저, 저를요?”

“어. 되게 오래 좋아했는데.”

“…말도 안 돼.”

“이제 넌 나 안 좋아해?”

“네? 아뇨, 저 어, 저 선생님 좋아하는데…. 저도 되게 오래, 어 그러니까….”

“연애하자. 우리.”

 

 

선생님의 말에 뭔가 가슴 가득 벅차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꿈같았다. 언제나 바라기만 했고 꿈꾸기만 했던 상황이 바로 지금 펼쳐지고 있었다. 길었던 짝사랑이 마침표를 찍는 순간이었다. 선생님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행여나 선생님이 무르기라도 할까 봐 엄청 세게, 열심히 흔들었다. 그렇게 고갯짓을 하니까 선생님이 웃으면서 내 얼굴을 손으로 잡아줬다. 여전히 그 예쁜 웃음으로 나를 바라봐줬고 내 이마에 입을 맞췄다. 미쳤어. 나 선생님이랑 뽀뽀했어. 아, 어떡해. 이마가 확 뜨거워지는 느낌이었고 선생님이 날 쳐다보는 게 너무 잘 느껴져서 손으로 얼굴을 가려버렸다. 그런 나를 그대로 선생님이 안아줬다. 두 손이 여전히 얼굴에 있어서 이대로 선생님한테 묶여버린 것 같았다. 어, 근데 잠깐만. 이제 넌 나 안 좋아해? 이제? 방금 선생님이 그렇게 말했지? 날 끌어안은 선생님을 살짝 밀어내고 선생님을 쳐다봤다. 선생님의 얼굴은 여전히 예쁘게 웃는 채였다.

 

 

“선생님.”

“응?”

“내가 선생님 좋아하는 거 어떻게 알았어요?”

“…학교에서 그거 몰랐던 사람 없었을걸?”

“아, 망했어….”

 

 

선생님의 뻔뻔한 목소리와 웃음에 결국 다시 손으로 얼굴을 가렸고 그대로 선생님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쪽팔려. 어떻게 알았지. 난 진짜 나 혼자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좋아했다고 생각했는데. 자꾸 되새길수록 더 부끄러워서 선생님의 품 안에서 어흑, 하는 소리를 내며 작게 몸부림쳤다. 날 안고 있는 선생님의 웃음소리가 들렸고 내 등을 다독여주는 다정한 손길도 느껴졌다. 에씨, 몰라. 남들 다 실패한다는 첫사랑에 성공했으니까 된 거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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