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래더] 트위터는 @Rather_0613 (舊 새벽의덕후)

[슈짐] 태양이 지는 바다

 

 

W.래더



4.


 

 

윤기는 이집트 중심부 출신이 아니었다. 그의 아버지가 이집트에서 태어나고 얼마간 자라긴 했으나 대부분 생을 지중해에서 보냈기 때문이다. 선대 파라오에게는 형제가 많았다. 강하고 잘난 형제들에 치여 후계 순위는 양손을 쫙 펴도 세는 게 불가능한 정도였다. 구태여 이집트에 있을 필요가 없었다. 가장 어리고 약했던 윤기의 아버지는 그마저 있는 태양의 기운을 죽여야 한다는 이유로 형제들에 의해 지중해로 보내졌다. 그렇게 살다 역사 속에 스러질 왕자였다.

 

이집트의 중심부는 조용한 날이 없었다. 강한 태양의 기운이 서로 부딪히며 열기를 뿜어냈다. 궐에 있던 왕자들은 자신이 가장 강한 파라오의 재목임을 의심치 않았다. 자신의 적이라 여겨지면 살육을 일삼았다. 파라오의 자리를 향한 치열함은 시간이 지날수록 극에 달했고 타오를 듯한 뜨거운 경쟁 속에서 온전한 정신을 가진 자는 드물었다.

 

결국 이집트 중심부에 남아있던 모든 왕자가 죽었다. 서로를 향해 겨눈 칼끝은 어디서 시작되고 어디서 끝을 맺는지 알 수 없을 만큼 뒤엉켜있었다. 모두가 모두를 죽였다. 텅 비어버린 궐은 그때부터 형제들의 권력 싸움에 지중해로 떠밀려간 마지막 왕자를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그가 이집트의 유일한 희망이었다.

 

 

 

그때의 윤기는 아주 어린 꼬마에 불과했다. 누가 말해주고 일러주지 않으면 태양신의 혈통이라고는 생각조차 못 할 정도로 희고 작은 체구를 가지고 있었다. 그 탓에 지중해의 빛에 그을리고 파도에 단련된 듬직한 또래들과 좀처럼 어울리지 못했다. 관계를 진전시켜 보고자 노력했으나 저쪽에서 의지가 없었다. 윤기를 우스워할 뿐이었다. 노력이 무력해진 순간 윤기는 혼자가 되길 택했다. 너른 바다의 모래사장 어느 구석을 찾아 고요하게 시간을 보냈다.

 

지중해의 아이들은 윤기를 우스워하면서도 꼭 쫓아다녔다. 윤기의 고요한 시간을 훼방 놓고 괴롭히길 좋아했다. 드넓은 지중해는 그 애들의 손바닥 안에 있었기에 윤기가 갈만한 곳을 신통하게도 잘 알아냈다. 그래서 윤기는 그들이 찾지 못할 정도로 깊숙하고 인적이 드문 공간을 찾아다녔다.

 

그곳에서 그를 처음 만났다.

 

 

? 당신.”

 

 

윤기보다도 한참 큰 어른이었다. 제 아버지와 비슷할까, 아니 그보다는 조금 어릴까. 그와 마주하자마자 달라붙은 시선을 뗄 수 없었다. 그는 지중해에 오래 담가놓은 듯한 바다 빛의 머리색을 갖고 있었다. 처음엔 젖어있는 상체를 보며 물놀이를 하다 길을 잃은 사람이라고 짐작했다. 시선을 조금 내렸다. 배꼽 아래부터 바닷물 안쪽까지 태양 빛을 받아 무언가 반짝거렸다. 두 다리가 있어야 할 자리에는 대신 찬란한 비늘이 촘촘하게 짜여 형체를 이루고 있었다. 꼭 물고기의 꼬리지느러미처럼. 알 수 있었다. 그가 소문으로만 무성한 인어라는걸.

 

윤기와 눈을 마주친 그는 당황한 듯 보였다. 시선이 닿았을 땐 잠시 행동을 멈췄다. 자신을 꼼꼼하게 살펴보는 눈길을 느끼고는 몸을 움직여 바위 뒤쪽으로 숨었다. 놀란 거 같았으나 도망치진 않았다. 그도 윤기를 가만히 살피고 있었다. 바위 위쪽으로 얼굴이 빼꼼 나왔다가 들어갔고, 아래쪽으로 꼬리가 이따금 팔딱거렸다. 그 작은 움직임을 보며 윤기는 아주 오랜만에 활짝 웃었다.

 

 

혹시 길을 잃은 거니?”

 

 

목소리가 바위를 넘어왔다. 가끔 튀어 오르는 꼬리를 쳐다보던 시선을 올렸다. 끝이 살짝 처진 눈꼬리에서 걱정스러움이 느껴졌다.

 

 

아니.”

그런데 어쩌다 여길 온 거야?”

뭔갈 찾던 중이었어.”

길이 아니라 다른 걸 잃어버렸구나. 그래서 찾아냈니?”

찾은 거 같기도 하고, 찾을 필요가 없는 거 같기도 해.”

 

 

? 하는 소리를 내며 이번엔 바위 옆쪽으로 얼굴을 뺐다. 오밀조밀한 이목구비가 꼭 바다 위를 일렁거리는 물빛과 닮았다. 정말 꼭 바다 같은 사람이네. 윤기는 그렇게 생각했다.

 

 

길을 잃은 게 아니라니까 다행이다.”

 

 

물빛을 닮은 얼굴이 해사하게 웃었다. 자리를 떠나려는 듯 그가 몸을 돌리려는 순간 윤기는 모래에 박혀있던 발바닥을 뗐다.

 

 

잠깐만!”

 

 

다급한 소리가 튀어나왔다. 이대로 그를 보낸다면 영영 볼 수 없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단 한 치의 의심도 들지 않는 분명한 느낌이었다. 첫걸음을 뗀 윤기는 조바심을 내며 그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다. 배꼽까지 바닷물에 담그고 있던 그가 윤기를 쳐다봤다. 그 눈빛이 윤기를 당황하게 했다. 그래서 괜한 말을 물었다.

 

 

, 당신은. 그러니까. 왜 여기 있었어?”

 

 

붙잡긴 했는데 어떻게 더 붙들고 있어야 하는지 그 방법을 몰랐기에 나온 질문이었다. 고작 몇 살 정도가 된 나이에 제대로 된 친구 한 명 사귀어 보지 못한 윤기였다. 누군가와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 몰랐다. 속에 있는 말을 전달하는 데에도 서툴렀다.

 

자기 손가락을 꼼질 거리면서도 눈길은 떼지 않는 윤기를 그는 부드러운 미소로 바라봐주었다. 그가 윤기를 향해 조금 움직였다. 바다가 약간 일렁였다.

 

 

여긴 내가 쉬는 곳이라서. 고요하게 바람을 느낄 수 있는 곳이라서 보통 이곳에 있어.”

.”

인간의 발길이 좀처럼 닿질 않는 곳인데 네가 나타나서 놀랐어.”

민윤기야!”

?”

그러니까, 내 이름이. 너 아니고, 윤기라고.”

 

 

이렇게 하는 게 맞는 걸까. 아주 오랜만에 머릿속이 복잡했다. 예전에 친구를 사귀려고 무작정 들이댔을 때 자신의 이름을 알려줬던 거 같은데 거기까지 이르는 과정이 도무지 생각이 안 났다. 그래서 대뜸 질러버렸다. 윤기의 느닷없음에 그가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지민이야. 박지민.”

지민. 이름 예쁘다.”

네 이름도 예뻐. .”

 

 

 

처음으로 친구가 생겼다. 윤기보다도 훨씬 큰 어른이었고, 몸의 형체도 달랐지만 그런 것들은 다 상관없었다. 보고만 있어도 즐거웠고 대화를 나누면 행복했다. 함께 있는 모든 시간이 평화로웠다. 지민은 늘 윤, 하고 불러주었다. 그렇게 불리는 게 좋았다. 지민의 목소리가 참 다정했다. 이름을 불러줄 때의 따뜻한 온도가 마음에 들었다.

 

가끔 살랑거리는 바람 소리에 맞춰 노래를 흥얼거려줬는데 윤기는 그 노래를 가장 좋아했다. 가만히 노래를 듣고 있으면 평화로웠다. 늘 윤기를 청승맞게 만들었던 지중해가 포근하게 느껴졌다.

 

 

 

*

싫어요! 아버지만 가면 되잖아요! 저는 안 갈 거예요!”

안 된다. 왜 떼를 부리는 것이야. 윤기야. 가야 한다.”

그런 게 어딨어요! 싫어요. 진짜 싫단 말이에요. 전 여기가 좋아요. 아버지. 제발요. ?”

윤기야! 내 말 분명히 듣거라. 원래 우리가 살아야 할 곳은 여기가 아니야. 이제야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뿐이란다.”

아니에요. 아니라고요!”

 

 

아버지가 파라오가 되었다고 했다. 그래서 지중해를 떠나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윤기는 이해할 수 없었다. 파라오가 무엇인지도 몰랐고 왜 그 때문에 이곳을 떠나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떠나야 한다는 말에 지민이 떠올랐다.

 

아버지의 말을 도저히 수긍할 수가 없었다. 원래 살아야 할 곳은 어디이며 제자리는 또 무엇이란 말인가. 윤기가 갈 곳은 한 곳뿐이었다. 살고 싶은 곳도 그곳이었다. 작은 몸이 커다란 어른들 사이를 잽싸게 빠져나갔다. 집을 나서면서 속도를 더 높였다. 지민이 있을 그곳으로 향했다. 어느 시간에도 윤기가 오면 만날 수 있도록 지민은 늘 거기 있었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조급하게 달렸다. 지금처럼 지민이 보고 싶은 순간이 또 있었을까.

 

 

지민아!”

! 늦은 시간인데 어떻게 왔어? 위험하잖아.”

지민아.”

. 무슨 일이야. 왜 울어? 왜 그래.”

나는 정말 가기 싫어. 가고 싶지 않아. ? 나 지민과 여기 있을래.”

 

 

윤기는 자신의 온 얼굴이 눈물로 뒤덮였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 지민을 보자마자 눈물은 참지도 못할 만큼 터져 나왔다. 윤기가 바다에 오기 전, 지민은 태양이 바다 너머로 숨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태양의 뜨거움은 사라지고 차가운 기운이 주위를 감싸는 그 시간을 맞이하는 중이었다. 지민이 가장 좋아하는 순간이었다.

 

저 멀리서 다급하게 달려오는 윤기의 발소리를 듣고서 기뻐했다.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풍경을 윤기에게도 보여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울고 있었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지민과 함께 있던 윤기는 늘 웃고 있었고, 아니면 편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우는 얼굴은 처음이었다.

 

지민은 자신도 모르게 바다 밖으로 나갈 뻔했다. 위험한 행동이었다. 인어는 몸 일부를 꼭 바다 안에 담가놓아야 했다. 물 밖에선 몸이 금세 말랐다. 그 말은 곧 저리도 서럽게 우느라 얼굴까지 벌게진 윤기를 품에 안아서 달래줄 수가 없다는 의미였다. 가슴이 시렸다. 이전까지는 참 좋아하던 이 시간의 차가움이 괴롭게 다가왔다. 지민의 얼굴이 안타까움으로 일그러졌다.

 

 

지민아.”

 

 

윤기가 지민이 있는 곳 가까이 다가왔다. 걷는 길마다 윤기가 떨어뜨리는 눈물이 모래사장 위에 박혔다. 지민도 제 몸을 조금씩 움직였다. 최대한 윤기의 가까이 다가서고 싶었다. 어리고 작은 윤기가 바다에 몸을 잘못 담갔다가 병이 나지 않을까 걱정스러웠다.

 

 

.”

지민아. 나는 여기가 좋아. 이제는 여기가 너무 좋은데.”

 

 

윤기가 자신의 팔을 쭉 뻗었다. 지민은 그를 향해 몸을 숙였다. 처음으로 그를 안았다. 차가운 바닷물 안에서 서늘한 바람 맞기를 좋아하던 지민에게 최초로 닿은 뜨거움이었다. 안은 품으로 가득 퍼지는 따뜻함이 낯설었다. 바다에서 맞는 태양 빛과는 전혀 달랐다. 이 기운이 자신을 전부 말려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놓고 싶지 않았다. 그의 작은 몸을 다독였다.

 

낯섦을 느낀 건 윤기도 마찬가지였다. 언제나 윤기에게 따뜻함과 포근함을 안겨주던 지민의 몸은 더없이 차가웠다. 그런데 그 차가움이 위로가 되었다. 우느라 달아오른 얼굴도 식었다. 분한 마음에 벌렁거리던 가슴도 차분해졌다. 윤기는 지민을 쳐다봤다.

 

 

. 지민이 좋아.”

나도 윤이 좋아.”

그래서 가기 싫어.”

.”

우리 아버지가 파라오래. 그래서 여길 떠나야 한대. 나는, 나는 가기 싫어. 지민과 함께 있고 싶어.”

 

 

지민은 자신의 품속 윤기를 향해 웃어주었다. 뛰어오느라 헝클어진 머리카락도 조심스럽게 정돈해주었다. 그러면서 드러난 이마에 입을 맞췄다. 윤기는 머릿속에 잔뜩 퍼지는 찬 기운에 눈을 질끈 감았다. 지민의 입술이 떨어지자 감은 눈을 떴다.

 

 

 

지민아.”

.”

만일 내가 떠나게 되더라도 꼭 다시 올게.”

그래.”

그러니까 기다려줘.”

 

 

말을 마친 윤기가 지민의 얼굴을 붙잡았다. 그리고 그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지민은 마치 불에 닿은 거 같다고 생각했다. 곧이어 윤기가 입술을 뗐다. 좀 더 정확하게는 윤기의 입술이 떨어져 나갔다. 지민의 품 안에서 윤기가 맥없이 기운을 잃은 탓이었다. 잠든 것처럼 편안한 그의 얼굴 위에 물방울이 닿는 걸 보고서야 지민은 자기가 울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차가운 인어의 체온이 인간의 머리에 닿으면 그의 기억을 일부분 지운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입을 맞췄다. 윤기보다도 훨씬 오래 살아온 지민은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았다. 윤기는 가야 했다. 떼를 쓰는 어린아이의 투정을 전부 받아줄 수 없었다. 물론 그렇게 하고 싶기는 했다.

 

이때의 둘은 몰랐다. 태양신의 아들인 윤기의 체온과 바다의 아이인 지민의 체온이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 그래서 지민은 윤기의 모든 기억을 얼려버렸음을 몰랐고, 윤기는 자신의 입술이 닿은 지민의 이마에 화상처럼 데인 흔적을 남기게 되었음을 몰랐다.

 

 

기다릴게. .”

 

 

지민은 윤기를 품에 안은 채 해안을 따라 움직였다. 평소 윤기가 오던 방향으로 나아가다가 인적이 느껴지는 곳에 윤기를 뉘었다. 품에서 윤기를 떼자마자 몸에 한기가 돌았다. 평생 찬 바다에 몸을 담그고 살았는데도 이 차가움이 낯설었다. 아쉬운 마음에 한참 윤기를 들여다보다가 몸을 틀었다. 윤기를 찾는 인기척이 가까워져 왔다.

 

 

 

*

 

사람들이 어린 윤기를 들어 옮겼다. 이후 윤기는 다시 바다를 찾지 않았다. 그럼에도 지민은 매일 밤바다에서 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홧홧하게 타올랐던 이마의 데인 자국이 흐릿해질 때까지 윤기는 돌아오지 않았다.

 

 

아직도 여기 있어?”

정국아.”

그 꼬마는 안 와. 그러니까 나랑 같이 돌아가자. ? 박지민.”

올 거야. 그러니까 나는 여기 있어야 해. 혹시 윤이 왔는데 내가 없어서 그냥 가버리면 안 되잖아.”

너는 그 꼬마가 떠나고 여태 여기서 기다렸는데, 그 녀석은 널 조금도 못 기다려? 그 정도밖에 안 되는 애를 대체 왜 기다리는 건데.”

 

 

정국의 날 선 말에 지민은 대꾸하지 않았다. 정국의 얼굴이 불쾌함으로 뒤덮였다. 언제나 인간을 좋아했던 지민과 다르게 정국은 그들을 싫어했다. 인어를 구경거리로 삼으며 때때로 인어들을 포획해 잔인한 짓을 일삼는 인간들을 좋아해야 할 이유를 도무지 찾을 수 없었다. 좋아하는 대신 극도로 증오했다. 그리고 최근 지민의 일로 더욱 인간을 혐오하게 되었다.

 

지민은 한 번 인간에게 정을 주면 도저히 거둘 줄을 몰랐다. 지민의 그런 성미를 정국은 늘 싫어했다. 지난날 인간에게 속아 죽을 위기를 겪었음에도 또다시 인간과 친하게 지내는 모습이 답답하기만 했다. 인간을 알기 전까지 지민은 넓은 바다를 자유롭게 유영하던 존재였다. 이따금 자신에게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를 불러주고 푸른 바다와 차가운 바람을 즐겼다. 그랬던 지민이 지금은 고작 꼬마 인간 하나만을 내내 기다렸다. 꼴사나웠다.

 

 

다신 안 온다고. 인간이라는 게 다 그렇잖아. 너도 잘 알면서 대체 왜.”

아냐. 윤은 달라.”

다르긴 뭐가 달라. 인간들 다 이기적이고 잔인한 족속들이야. 그 꼬마도 너한테 상처 줬잖아. 어른이든 어린애든 구분 짓지 않고 다른 존재에게 상처나 주고 다니는 것들이라고, 그것들.”

아니야.”

그럼 이마에 난 상처는 뭔데.”

 

 

매서운 정국의 말투에 지민은 머쓱한 얼굴로 이마를 매만졌다. 이게 상처구나. 지민은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말을 머릿속으로 되뇌었다. 엄청 아픈 건 아니었는데. 윤의 작은 입술이 닿았을 때는 기쁘기도 했는데. 난생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었어. 그런데 왜 상처가 났지. 이게 상처가 맞을까.

 

 

칼로 도려낸다고 다 상처가 아니야. 인간들은 눈에 띄지 않는 방식으로도 상처를 잘 내는 것들이야.”

정국아.”

그 꼬마라고 다를 거 같아?”

 

 

말을 뱉으면서도 알았다. 지금 자기가 하는 게 꼭 인간과 같다고. 무기 하나 들지 않고서 지민에게 상처를 주고 있었다. 그러나 그만둘 수 없었다. 지민이 얼마나 여린 속을 가지고 있는 줄 알면서도 그랬다. 포기하도록 만들어야 했다. 이러다 정말 지민이 제 곁에서 사라질 거 같았다. 지민은 정국에게 매일, 매시간 날 선 말을 듣고 상처를 받으면서도 바다에서 꼬마를 지켰다. 정국은 그런 지민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아마 지민과 같은 이유 때문이었을 거다.

 

 

분명히 다시 돌아올 거라는 굳센 믿음이 흐려질 정도로 시간이 흘렀다. 그때가 되어서야 지민은 깨달았다. , 윤기는 나를 잊었구나. 다시는 나에게 와주지 않는구나. 그렇다면.

 

 

내가 윤기에게 가야지.”

?”

내가 갈래. 윤이 오지 못하는 이유가 있을 수도 있잖아.”

박지민 너 정말!”

 

 

나중이 되어서 정국이 가장 후회한 일은 이때 지민에게 화를 내며 돌아선 거였다. 오랜 시간 바보처럼 기다린 것으로 모자라 그를 찾아 나서겠다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지민의 말을 듣고 분노했다. 분했다. 어떻게 저만큼이나 사람이 멍청할 수 있는지. 그래서 돌아섰다. 멋대로 하라는 심정으로 그의 곁을 떠났다. 그래서는 안 되는 거였는데.

 

 

정국이 떠나고 난 후 지민은 과거에 소문으로만 들었던 주술을 찾아다녔다. 어느 때에 어느 인어가 인간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어떤 재료가 필요하고, 어떤 과정을 거치며, 어떤 조건을 갖춰야 하는지 꽤 세세하게 들었는데 아주 오래된 일이라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하나하나 찾아다녔다. 소문의 조각들을 좇았다. 끝내 어설픈 의식 하나를 알아냈다.

 

 

무엇이든 줄 테니 윤기와 같은 인간이 되게 해주세요.”

 

 

이토록 절실한 적이 있었을까. 두 손을 모으고 두 눈을 꼭 감았다. 처음 윤기를 만났을 때부터 헤어지기 전까지 모든 순간을 되짚었다. 보고 싶어. 윤기가 너무 그리워. 그 간절한 마음이 두 다리를 만들어주었다. 정말 윤기와 같은 인간이 되었다. 생긴 두 다리를 몇 번이고 매만졌다. 기쁨에 벅차 눈물이 났다. 그러면서 알았다. 인간이 된 대신 목소리를 잃었다는 것을. 울음소리 하나, 환희의 비명 하나 지르지 못하는 인간이 되었다는 것을.

 

지민은 다리를 얻어놓고도 바다를 떠나지 못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윤기를 찾아야 할지 몰랐다. 잃어버린 목소리로 누군가에게 물을 수도 없었다. 그래서 바다만 배회했다. 혹시 윤기가 와줄지도 모른다는 멍청한 미련은 인간이 되어서도 남았다. 그 질긴 미련이 만들어 낸 믿음은 끝내 결실을 맞았다.

 

 

 

가자. 바다야.”

 

 

지민은 자신의 팔을 붙잡아 끄는 윤기를 바라봤다. 보고 싶었어, . 이 한 마디를 해주지 못한 게 인간이 된 후 느낀 유일한 후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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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래더입니다. 

4편이 너무 늦었죠!ㅠㅠ 정말 죄송합니다.

사실 진짜 변명이긴 한데 이 편에 해당되는 내용을 올린 줄 알았어요.

써놓은 지는 꽤 됐는데 몇 번 검토하면서 올렸다고 착각을(..) 했었나 봐요.

정말 죄송합니다.

아마 다음 편이 마지막이 될 거 같아요.

원래도 짧게 빠르게 쓰려고 했던 글인데 너무 길어져서 머쓱하고 죄송할 따름입니다.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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