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래더] 트위터는 @Rather_0613 (舊 새벽의덕후)

[슈짐] 태양이 지는 바다

 

 

 

W.래더

 


3. 

 

 

지민은 파라오에게 별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윤기가 다른 일이라도 있었냐고 물으며 글로라도 써주길 바랐지만, 그저 웃으며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헝클어진 그의 머리카락을 정돈해주었다. 머리칼을 쓸어 넘겨주며 말끔한 얼굴을 쳐다봤다. 앞머리가 가리고 있던 반듯한 이마가 드러났다.

 

 

“응? 이것은 못 보던 것인데. 무엇이냐.”

 

 

대꾸를 들을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늘 이렇게 질문을 했다. 지민의 이마에 있는 하얀 자국을 매만졌다. 상처 같기도 하고, 얼룩 같기도 했다. 희미하긴 했지만 이마 가운데에 있어 눈에 띄었다.

 

지민은 그저 웃으며 자국에 손을 가져다 댔다. 대답을 바라지는 않았기에 자국을 좀 더 바라보다 시선을 떨어뜨려 눈을 맞췄다.

 

 

“상처? 혹 아팠더냐?”

 

 

그에 지민이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웃으며 여전히 이마에 닿아있는 윤기의 손을 끌어내렸다.

 

질문은 그만두었지만 대신 한 가지 결심을 했다. 지민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기로 작정했다.

 

 

 

파라오의 결심을 들은 호석의 매서운 호령이 있었지만 고집을 꺾지 않았다. 업무는 모두 침실에서 보기로 했다. 지민도 만류하는 눈치였지만 모른 척했다.

 

날이 갈수록 지민은 쇠약해졌다. 점점 두려워졌다. 분명히 처음 봤을 때보다 약해졌다. 많이 울어서 그런 탓이라 여겼지만 그게 아니었다.

 

 

“의사들도 모른다고 하고 주술로도 치료할 수 없다는 게 말이 돼?”

 

 

전문가란 전문가는 다 불렀지만 고개만 내저었다. 윤기가 신의 혈통을 무가치하게 느낀 건 두 번째였다. 지독한 가뭄이 들었을 때와 지금.

 

사랑하는 이의 병명도 알 수 없고 낫게 해줄 수도 없는데 이런 존재가 무슨 신의 혈통이란 말인가. 세상에서 가장 무력한 존재일 뿐이었다.

 

 

몇 명의 의사와 주술사들을 들이고 쫓아냈는지. 한 번 약해지기 시작한 지민의 기운은 걷잡을 수 없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지민이 시름시름 앓아가도 나라의 물은 마르지 않았다. 오로지 윤기의 바다만이 말라갔다.

 

 

 

“파라오. 주술사가 도착했습니다.”

“…들여라.”

 

 

새로운 주술사가 침실로 들어왔다. 주술사란 놈들은 모조리 음침한 분위기를 내고 싶어 하는지 이상한 천이나 거죽을 둘러쓰고 있었다. 지금 들어온 자도 마찬가지였다. 윤기는 그를 향해 아주 잠깐 눈길을 건네고 다시 지민을 바라봤다.

 

 

어깨에 기대 편안히 눈을 감고 있는 모습이 윤기를 더 두렵게 만들었다. 행여 숨이 끊겼을까 코에 손을 가져다 댄 게 여러 차례였다.

 

 

“놓아주십시오.”

 

 

대뜸 저쪽에서 들린 말에 고개를 돌렸다. 지민 역시 무력하게 떨궈둔 고개를 들었다. 간만의 움직임에 윤기가 지민을 신경 썼다. 주술사를 바라보는 표정이 묘했다.

 

 

“무슨 말이냐.”

 

 

이상하게 불안한 마음에 지민의 어깨에 팔을 둘러 안았다. 주술사는 말을 하면서 그들 곁으로 조금씩 가까이 다가왔다.

 

 

“놓아주어야 삽니다.”

“어떤 맥락도 없이 말하는구나.”

“살리고 싶으신 게 아닙니까. 살리기 위해서는 놓아야 합니다!”

“놓아주라니. 무엇을 놓으라는 말이냐.”

 

“이제 그 애를 죽이는 것은 그만둬!”

 

 

대뜸 품에 칼을 꺼내든 주술사는 파라오를 향해 달려들었다. 예리한 칼끝이 파라오의 얼굴 가까이 왔을 무렵 병사들이 그를 제압했다.

 

주술사가 악을 쓰며 덤벼들자마자 지민을 제 뒤로 숨겼다. 병사들에게 붙잡히고도 주술사는 여전히 난동을 부렸다. 결박당한 채로 버둥거리는 탓에 쓰고 있던 우중충한 빛깔의 천이 살짝 흘렀고 가려져있던 얼굴이 조금 드러났다.

 

까맣고 맑은 눈동자를 마주했다. 분노와 슬픔으로 얼룩진 표정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어찌하여.”

 

 

그대는 눈물을 흘리고 나의 바다는 숨을 죽이는 것인가.

 

 

“송구합니다.”

“내보내라.”

 

 

주술사로부터 칼을 뺏어 든 병사가 파라오를 향해 고개를 숙인 후 그를 잡아당겼다. 끝끝내 저항을 포기하지 않은 주술사가 다시 악을 썼다.

 

 

“박지민을 그만 죽여!”

 

“…멈춰라.”

 

 

파라오의 말에 병사들이 멈춰 섰다. 주술사가 거친 숨을 내쉬는 소리가 침실에 가득했다. 지민은 제 입을 틀어막았다.

 

윤기는 단 한 번도 지민의 이름을 타인에게 말한 적이 없었다. 호석만이 이따금 이름 부르는 소리를 들었을 테지만 그 정보를 어디다 흘릴 사람이 아니었다. 또한 이름이 흘러나갈 수 있다 하더라도 성까지 알 수는 없었다. 그건 오롯이 윤기와 지민만 아는 정보였다.

 

파라오의 눈이 매섭게 번뜩였다.

 

 

“천을 완전히 거둬라.”

 

 

낮은 목소리의 명령에 병사들이 빠르게 움직였다. 때가 탄 것인지 애초에 어두운색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우중충한 빛깔의 천이 벗겨졌다.

 

천이 벗겨지자 눈이 시린 물빛의 머리칼을 가진 사람이 나타났다.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눈앞의 사내는 지민과 같은 곳에서 왔다.

 

그는 거칠게 반항하며 고개를 들었다. 파라오가 있는 방향을 노려봤다. 언제부터였는지 지민은 울고 있었다.

 

 

“누구냐.”

“박지민. 너 기어코!”

“누구냐고 물었어!”

 

 

 

파라오가 소리치자 병사들이 그를 꿇어앉혔다. 강력한 힘에 굴복한 사내는 아직도 분노에 쌓인 숨을 뱉으며 그르렁댔다. 다시금 윤기와 지민이 있는 쪽으로 고개를 들었다.

 

 

“전정국.”

“뭐?”

“이름이 궁금한 거 아니었어? 아니면 다른 게 궁금해?”

 

 

감히 파라오에게 무례하게 말하고 쏘아봤다. 그의 노기는 좀처럼 사그라질 줄 몰랐다. 그러나 아까처럼 달려들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윤기는 병사들을 향해 손짓했다.

 

결박에서 풀려 자유로워진 정국은 저릿한 팔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눈빛만큼은 여전히 매서웠지만 예상대로 함부로 덤비지는 않았다.

 

 

“누구냐.”

 

 

파라오의 반복되는 질문에 정국이 헛웃음을 쳤다. 강제로 꿇려졌던 무릎을 펴 바닥에 대충 앉았다. 지민과 같은 색의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궁금하지. 우리가 누군지.”

“말하라. 지금 말하지 않으면 더 큰 고통에서 절규하며 말하게 할 테니.”

 

 

그 말에 두려워하기는커녕 바닥을 내려다보며 다시 웃음소리를 냈다. 한참을 웃던 정국이 고개를 천천히 들어올렸다. 삐딱하게 올라오는 얼굴에는 자조 섞인 미소가 있었다.

 

 

“우리는. 나랑 지민이는 본디 바다의 자식이야.”

“뭐?”

“바다에서 태어나 마땅히 그곳에서 살아가는 존재들이지. 태양신의 아들로 태어나 강렬한 태양을 품고 사는 당신처럼.”

 

 

윤기는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지민은 더없이 괴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런 존재를 억지로 육지로 끌고 와서는 태양의 기운 받이를 시키고 있으니. 이게 바로 살인이지. 안 그래?”

“헛소리하지 마. 내가 그따위 맹랑한 소리를 믿을 거 같으냐.”

“아무리 느리게 데워지고 서서히 식는 바다라 하더라도 어느 순간은 끓기 마련이야. 바다가 끓는다면 바다가 품은 모든 생물은 그대로 떼죽음을 당하게 되고. 바다를 훔쳐왔으면 그 정도는 알았어야지.”

 

 

정국은 파라오의 무지를 비난했다. 윤기는 제 입술을 씹었다.

 

지민이 아픈 이유에 대해 아무 생각을 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아주 조금은 서로의 기운이 상충해서 벌어지는 문제일 수도 있을 거라고 예상했다. 그러지 않길 바랐을 뿐이다.

 

만에 하나 기운이 상충하는 탓에 벌어지는 일이라 하더라도 지민을 돌려보낼 생각은 없었다. 자신의 바다를 매우 사랑했지만 그는 파라오였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를 돌려보낸다면 이 나라에도, 자신에게도 죽음이 깃들 거였다. 겨우 생명이 살아 숨 쉬는 이곳을 다시 파멸로 몰 수 없었다. 이기적인 것을 알았다. 그러나 모두를 위한 일이라고 합리화했다.

 

반드시 낫게 해주겠다고 다짐했다. 내 곁에서 생생하게 살아갈 방법을 찾아내겠다고 끊임없이 되뇌었다.

 

 

 

“그래서 데리러 왔어. 지민이를.”

 

 

파라오의 침묵을 들으며 정국이 몸을 일으켰다. 병사들은 긴장하며 그에게 다가갔지만 윤기는 그 행동을 저지시켰다.

 

천천히 숨을 고른 그는 표독스러운 기운이 조금 누그러진 목소리로 간청했다.

 

 

“지민이를 돌려줘.”

“그럴 수는 없어.”

 

 

무표정한 파라오가 딱 잘라내는 거절을 들은 정국은 제 눈을 천천히 감았다. 고통스러운 표정이었다. 옆의 지민도 같은 표정이었다.

 

윤기는 아직까지 자신이 모르는 그 무언가가 있다고 느꼈다.

 

 

“우리는, 인어야.”

 

 

그리고 바로 저 말이 자신이 모르던 ‘그 무언가’라고 확신했다.

 

 

 

“우리 인어들은 바다에서 아주 오랜 세월을 살아갈 수 있는 존재야. 인간에게 있어선 영생에 가까운 삶을 사는데도 이따금 인간이 되길 바라는 인어들이 있어.”

“나더러 그 말을 믿으라고….”

“인어는 인간이 되기 위해 가장 소중한 걸 잃어.”

 

 

허무맹랑한 소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 말을 멈추게 할 수는 없었다. 멈춘다고 한들 정국이 그만둘 거 같지도 않았다. 윤기는 저도 모르게 그에게 물었다.

 

 

“…혹시 지민이가 말을 못 하는 이유가 그 때문이냐.”

 

 

파라오의 물음에 정국은 대답 대신 다른 말을 되물었다.

 

 

“지민이의 노랫소리가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알아?”

 

 

 

이런 상황에서 질투를 느낀다는 것 자체가 미친놈인 줄은 알지만 정국의 그 물음에 치졸한 투기심이 일었다. 자신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소리였다. 입술이 절로 뒤틀렸다.

 

 

“네가 잃은 것은 무엇이냐.”

 

 

까만 눈동자가 그에게 닿았다. 윤기는 그 눈을 피하지 않고 그대로 받았다. 만일 이렇게 만나지 않았다면 꽤 아름답게 반짝이는 눈이라고 여겼으리라.

 

 

“이 눈은 아무것도 담을 수 없어.”

 

 

소름이 끼치는 기분은 오랜만에 느꼈다. 보이지도 않으면서 칼을 들고 자신에게 달려들었다. 뜬금없는 말로 파라오가 목소리를 내게 유도하고 위치를 파악했다.

 

정국의 말에 지민이 몸을 일으켰다. 윤기는 그를 잡을 수 없었다. 위태로운 걸음으로 그를 향해 다가가는 모습을 지켜볼 뿐이었다.

 

앞이 보이지 않는다던 정국은 지민을 바로 알아챘다. 자신의 얼굴을 쓰다듬고 눈가를 매만지는 손길을 가만히 느꼈다. 아주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지민을 품에 안았다.

 

 

“기어코 이 짓을 했어.”

 

 

그리운 얼굴을 볼 수 없는 정국이나 속에서 치미는 감상을 말할 수 없는 지민이나 처연했다. 윤기는 지금 겪고 있는 비현실적인 장면에 무엇을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난 지민이를 찾기 위해 인간으로 변했어.”

 

 

정국의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지민이 다른 사람을 끌어안고 있는데 가슴이 시렸다.

 

 

“지민이는 당신을 위해서 인간으로 변했고.”

 

 

그 말을 듣고서는 꼭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영생에 가까운 삶을 사는 인어가 유한한 인간의 생을 취하면, 그 삶은 인간의 것보다도 훨씬 짧아져. 네 옆의 박지민이 보여주듯이.”

 

 

더는 아무 말도 듣고 싶지 않았다. 어느새 시뻘게진 눈을 한 채로 침실 중앙을 쳐다봤다. 아직도 사이좋게 붙어서 그리움을 달래는 두 사람이 보였다. 감정이 뒤섞였다.

 

이토록 온갖 감정을 느끼며 단 한 톨도 숨길 수가 없으니 어찌 신의 혈통이라 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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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이 괜찮으신가 모르겠어요!

사실 너무 길게 쓰면 지루해질 거 같아서

굉장히 속도감 있도록 쓴 글이랍니다.


사실 글이 좀....잘 안 써지는 거 같아서 속상해요ㅠㅠ

올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도 했지만

다른 글들처럼 너무 오래 기다리지 않게 하기 위해

써서 올려봅니다!


4편 혹은 5편으로 <태양이 지는 바다(저는 태바다라 부는..ㅎㅎ)>는 완결이 납니다!

곧 또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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