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래더] 트위터는 @Rather_0613 (舊 새벽의덕후)

[슈짐] 태양이 지는 바다

 

 

 

W.래더



2.

 

 

 

파라오가 돌아왔다. 출처를 알 수 없는 존재를 데리고. 왕의 귀환을 지켜보던 백성들은 고개만 갸웃거릴 뿐이었다.

 

정체가 불분명한 이를 향한 소문도 금세 돌았다. 이 세상의 구원을 가져다줄 신의 매개자라거나, 파라오를 파멸시킬 저주라고 했다. 소문은 온갖 갈래로 찢어져 이상하게 엮였다.

 

 

 

“아무도 이 안에 들이지 마라.”

“예.”

 

 

커다란 문이 닫히는 걸 끝까지 보고 나서야 몸을 움직였다. 파라오는 온몸을 천으로 감싸놓은 지민을 제 침대로 데려가 앉혔다. 손을 뻗어 그 천을 거둬냈다. 태양 빛 아래에서 본 지민의 머리칼은 더욱 반짝이고 아름답게 빛났다.

 

 

다시 보게 된 그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긴장감이 돌았다. 그는 마치 바다를 사람으로 빚어 놓은 듯한 생김새를 갖고 있었다. 파도의 색을 입혀놓은 것 같기도 했다. 고요한 지중해를 닮아 말도 하지 못했다.

 

 

눈앞의 존재에 대해서는 오로지 이름만을 알 뿐인데 너무나도 분명했다. 지민은 나의 바다다.

 

 

 

*

파라오의 명으로 지중해 마을을 수색했던 병사가 돌아왔다.

 

 

“말해보라.”

“마을 사람 그 누구도 박지민이라는 이름을 알지 못했습니다. 또한, 언제 어디서부터 마을에 있던 존재인지도 몰랐습니다.”

“…알겠다.”

 

 

병사를 밖으로 물린 윤기는 제 옆에 앉은 지민을 바라봤다. 그의 물빛 머리카락에 손을 가져갔다. 지민은 파라오의 손길을 거절하지 않았다. 눈을 감고 제 머리카락을 훑는 것을 가만 느낄 뿐이었다.

 

윤기는 얼굴로 손을 옮겼다. 부드럽지만 차가운 살결이 손바닥에 닿았다.

 

 

 

“대체 정체가 뭐야. 박지민.”

 

 

대답을 들을 수 없음을 알면서도 물었다. 지민은 그저 웃기만 했다.

 

 

 

파라오가 자신의 바다를 찾자마자 나라의 가뭄이 멎었다. 거짓말처럼 나라에 물이 돌았다. 만사를 포기했던 백성들이 몸을 일으켜 땅을 일구기 시작했다. 나라에서도 적극적으로 지원책을 펼쳤다. 죽음의 냄새만 나던 나라에서 생명이 살아 숨 쉬는 소리가 났다.

 

 

 

궐의 가장 높은 꼭대기에 올랐다. 사방으로 드넓은 이집트가 펼쳐져 있었다. 손에는 이제 없으면 허전한 지민의 손을 단단히 쥐고 있었다.

 

 

“보여? 푸른 이 나라가? 지민아. 네가 이룬 거야.”

 

 

이집트를 한눈에 담은 지민의 표정이 경탄으로 가득 차 있었다. 장관이었다. 생명이 살아 숨 쉬는 이집트는 무엇보다 아름다웠다. 넋을 잃고 그 풍경을 바라봤다.

 

윤기는 뒤에 선 채로 그를 안았다. 어깨 위에 얼굴을 얹고 숨을 들이켰다. 지민에게선 바다 냄새가 났다. 그게 꼭 자신의 안식처가 되어주는 거 같았다.

 

그를 더 깊이 끌어안았다. 자신의 팔 위로 지민의 손이 얹혔다.

 

 

“고마워.”

 

 

그 말에 대답이라도 하듯 작은 손이 윤기를 다독였다.

 

 

 

*

“뭐? 나더러 그걸 믿으라는 거야?”

“하오나. 파라오의 처소에서 나온 가장 믿을만한 정보인지라.”

“소문 아니고?”

 

 

태형의 서슬 퍼런 눈매에 심복이 고개를 깊이 숙였다. 그 까만 머리통을 보다가 눈을 거둬버렸다. 길쭉한 모양의 의자에 몸을 눕혔다. 방금 들은 이야기를 되뇌었다.

 

태양의 기운을 잡아먹는 존재. 지금의 파라오에겐 꼭 필요했고 태형에겐 무엇보다 쓸모없었다.

 

파라오가 환궁하고부터 나라 꼴이 이상해졌다. 물이 돌았다. 이건 물길을 어디서 대온 게 아니었다. 말라 있던 물이 다시 샘솟아나기 시작한 것이다.

 

정말 기회라고 생각했다. 이번에도 분명 허탕을 칠 파라오를 위로해주며 친절하게 칼을 꽂아 줄 생각이었는데. 빼앗긴 기회를 생각하니 입술이 뒤틀렸다.

 

 

“진짜든 아니든 얼굴은 한 번 봐야겠다.”

 

 

전례 없이 대단한 파라오의 기운을 잡아먹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궁금했다. 도대체 무엇이기에 그게 가능한 것인지도 궁금했다.

 

파라오가 한 시도 떼어놓지 않는다고 했지만 분명 그의 곁을 비워야만 하는 시간이 생길 것이다. 요즘처럼 나라가 다시 살아나는 시기에는 할 일도 많을 터였다. 그 틈에 아주 잠깐 존재만 확인하고자 했다.

 

 

 

*

 

 

“아마 오늘은 어제보다도 오래 자리를 비워야 할 거 같구나.”

 

 

미안함 가득한 목소리에 지민이 웃으며 그의 손을 다독여줬다. 나가야 한다는 신하들의 부름이 몇 번이나 있었음에도 줄곧 지민의 손을 매만지며 같은 말만 반복했다. 이제는 정말 나가야 했다. 앉아있던 지민이 서 있는 윤기를 올려다보며 그의 팔을 뒤로 밀었다.

 

 

“야속하구나.”

 

 

뒤로 밀어낸 손길이 무색하게 윤기는 전보다 지민에게 더 가까이 섰다. 난처한 표정으로 웃는 얼굴을 내려다보며 손을 가져갔다. 차가운 온도가 불안한 마음을 식혀주었다. 그래서 그의 곁을 떠날 수가 없었다. 지민이 곁에 없으면 초조했다.

 

그의 머리칼에 손을 넣고 품으로 당겼다. 지민도 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천천히 다독여주다가도 힘을 줘서 품에서 빠져나왔다.

 

 

“어디 가면 안 된다. 꼭 여기 있어야 해.”

“파라오께서는 여기 계시면 안 되실 텐데요.”

 

 

다정하게 웃어주며 고개를 끄덕이는 지민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는데 듣고 싶지 않은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니 문가에서 호석이 화난 얼굴을 하고 서 있었다.

 

 

“단단히 혼나게 생겼구나.”

 

 

딱 지민에게만 들릴 작은 목소리였다. 그에 심각한 상황에서 지민 혼자만 웃음이 터졌다. 전보다도 활짝 웃는 얼굴에 윤기가 잠깐 넋을 놓았다.

 

 

“이러니 파라오의 방에 꼭꼭 숨겨도 소문이 다 새어나가는 것 아닙니까.”

“무슨 소문.”

“파라오의 방에 아주 대단한 게 있다는 소문 말입니다! 이만 나가시지요.”

“조, 조금만. 너는 도대체 나를 무엇으로 보기에 이토록 무례한 것이냐.”

“파라오로 봅니다. 말 좀 들으십시오!”

 

 

끝내 호석에게 붙잡혀 끌려나가는 우스꽝스러운 모양새를 하고 말았다. 잡은 손안에서 빠져나가는 지민의 손에 자꾸 초조함이 일었다.

 

파라오가 되고 처음으로 안정을 찾았다. 나라뿐 아니라 자신에게도 온 안정이었다. 불안과 죄책감이 누그러졌다. 물이 돌고 곡식이 싹트고 생명이 움트는 나라를 보며 처음으로 마음이란 것을 놓았다.

 

신탁을 믿어본 적이 없거늘 지민으로 인해 믿게 되었다. 그래서 더 불안했다. 지민이 사라져버리기라도 한다면 다시 그 끔찍한 세상을 살아야할지도 모른다. 답도 없던 메마른 영토가 또 찾아온다면 그땐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지민이를 데려가면.”

“안 됩니다.”

“말을 다 끝내지도 않았다.”

“그러니 더 안 됩니다. 도대체 왜 이러십니까. 저 존재가 궐에 들어오고 드디어 나라가 구색을 갖추기 시작했습니다. 파라오의 역할은 이전보다 더 중요해졌고요. 왜 그걸 모르십니까.”

“안다. 다 안다. 알기에 이러는 것이다.”

“안다면 그러시면 안 됩니다. 정무에 집중토록 하세요.”

 

 

호석의 매서운 간언을 들으면서도 자꾸 뒤를 돌아봤다. 마음이 불안했다. 오늘은 처리해야 할 일이 더 많았다. 조바심이 나자 몸에서 열이 올랐다. 이럴 때 지민의 품이 딱인데. 끝내 처소의 문이 보이지 않게 되어서도 돌아간 고개를 쉽게 바로 세울 수 없었다.

 

 

 

한차례 폭풍이라도 지나간 듯한 방 안에서 가만히 앉아있던 지민은 여전히 웃는 얼굴로 문을 쳐다봤다. 윤기가 없을 때의 일과는 같았다. 이렇게 앉아서, 혹은 서서 문을 쳐다봤다.

 

급한 마음으로 서둘러 오느라 온몸이 뜨거운 그를 안아주는 시간만을 기다렸다. 오늘은 오래 걸린다는 말을 들었지만 평소와 같았다.

 

 

그런데 닫힌 지 얼마 안 된 문이 다시금 열렸다. 앉아있던 몸을 벌떡 일으킨 지민이 문가로 몇 걸음 다가섰다. 그러나 곧 걸음을 뒤로 물렸다. 낯선 사람이 들어왔다.

 

 

“소문이 아니었네.”

 

 

파라오의 방에 거침없이 발을 들인 태형이 흥미로운 시선으로 방 안의 존재를 쳐다봤다. 희한한 머리색이 꼭 물 같았다. 그를 보자마자 바로 알 수 있었다.

 

네가 태양의 바다로구나.

 

 

“태양만큼이나 숨길 수 없는 기운이 있을 줄은 몰랐는데.”

 

 

큰 보폭으로 걸어 들어온 태형은 어느새 지민의 코앞에 다가섰다. 낯선 향, 낯선 체온이었다. 숨결이 오갈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천천히 그를 살폈다.

 

지민은 잔뜩 긴장한 채로 시선을 떨궜다. 종종 문가를 쳐다보긴 했으나 이 남자를 따라 들어온 건장한 체격의 사내들이 문 앞을 버티고 있었다. 온몸으로 알 수 있었다. 위험한 사람이었다. 깨닫자마자 몸이 떨려왔다.

 

 

태형은 눈에 보일 정도로 떨고 있는 모습을 쳐다봤다. 이따금 저와 마주치는 겁먹은 눈동자가 아름다웠다. 두려움에 깨무는 손톱 끝도 눈에 들어왔다. 이런 기분을 표현하는 단어를 알고 있었다. 자신은 지금 눈앞의 존재에게 완전히 매료되었다.

 

 

“재미있구나.”

 

 

어두운 목소리였다. 가까이 들린 그 음성에 몸이 놀랐다. 태형은 지민의 어깨를 붙잡았다. 살결이 차가웠다. 그를 향해 더욱더 가까이 다가갔다. 귀 옆까지 얼굴을 기울였다. 태형이 움직일 때마다 흠칫 놀라고 움츠러드는 그 여린 몸이 자신을 즐겁게 만들어줬다.

 

 

“또 보길 바라마. 바다야.”

 

 

다시금 지민을 빤히 바라본 태형이 묘한 웃음을 지으며 몸을 돌렸다. 그와 건장한 사내들까지 모조리 나가고 나서야 바닥에 주저앉았다. 이토록 위협적인 기분은 처음이었다.

 

한껏 겁에 질렸던 긴장이 풀리자마자 눈물이 흘렀다. 뜨거운 태양의 품이 절실했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파라오의 궁을 빠져나온 태형에게 그의 심복이 조심스레 물었다.

 

 

“어째서 죽이지 않으셨습니까? 죽인다면 나라가 다시 뜻대로 망가질 텐데요.”

 

 

질문에도 걸음을 멈추지 않던 태형이 잠깐의 침묵을 깨고 대꾸했다. 슬쩍 돌아보는 눈매에 웃음이 걸려있었다. 파라오가 자리를 비운 사이 왕좌에 앉았던 그때의 표정과 같았다.

 

 

“그러기 싫었다.”

“예? 어째서.”

“파라오가 되고 나서 저 녀석도 함께 얻어낼 것이야.”

“무엇인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그게 무슨 상관이냐. 갖고 싶은 것은 손에 쥐면 그만인 것을.”

 

 

감히 태양의 혈통만이 차지할 수 있는 왕좌를 취하겠다는 것도 무모한 일인데 태형은 저렇게 장난스러웠다. 어린 애의 것을 빼앗는 것처럼 손쉽게 여기는 듯했다.

 

 

“그리고 너무 쉽지 않으냐.”

“무엇이 말입니까?”

“저 녀석을 죽여 버리면 누가 죽인 것인지 너무 뻔한 게 돼. 그런 것은 재미없다.”

 

 

권력을 빼앗기고 가치 있는 것들을 잃은 뒤에 최고의 권력만을 좇았다. 오랜 시간 지루한 눈치싸움만을 했다. 그랬는데 아주 오랜만에 재밌는 일이 생겼다.

 

그 차가운 체온을 다시 한번 느끼고 싶었다. 태형은 아까의 감촉을 떠올리며 미소 지었다. 다시 보길 바란다고 했던 그 말이 염원으로 끝나지 않길 바랐다. 그렇게 되지 않게 만들 생각이다.

 

 

 

*

조급한 걸음이 파라오의 체면도 잊게 했다. 주위의 만류 탓에 마냥 뛸 수는 없는데 그렇다고 여유롭게 걸을 수도 없었다. 품위를 지키느라 꼿꼿하게 펴진 상체는 고상함을 유지했고 급한 성미를 대변하는 하체는 우스꽝스럽게 움직였다. 괴상한 모습이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지민아!”

 

 

하인들이 문을 열기도 전에 손으로 직접 문을 열었다. 곧장 기다렸다는 듯 품 안에 찬 기운이 돌았다. 열이 훅 끼쳤던 성질이 가라앉았다. 깊은 숨을 내쉬며 자신의 바다를 품에 가뒀다.

 

지민은 평소보다도 더 세게 팔을 둘렀다. 오래 떨어져 있어 그리움의 크기도 커진 거 같았다. 여유를 찾은 윤기가 웃으며 품에서 지민을 떼어냈다.

 

그러려고 했다. 그러나 어린 응석받이처럼 고개를 저으며 지민이 품으로 더 파고들었다. 어딘가 불안해 보였다. 여린 등을 다독여주며 그가 바라는 대로 조금 더 안아주었다.

 

 

“많이 보고 싶었구나?”

 

 

지민이 고개를 끄덕이자 어깨에 날렵한 턱이 닿았다. 간지러운 느낌에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다시 품에 달라붙은 응석받이를 떼어냈다. 이번엔 파라오의 뜻을 좀 따라주었다.

 

윤기는 자신을 쳐다보는 얼굴을 보자마자 웃는 낯빛을 거뒀다. 지민이 울고 있었다.

 

 

“왜….”

 

 

묻자마자 툭 하고 떨어지는 눈물에 가슴이 시렸다. 차가운 바다를 너무 오래 안은 탓일까. 손을 뻗어 눈물을 닦아냈다. 지민은 곧장 윤기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해서 그런 거야? 미안하다. 내가 미안해.”

 

 

이번엔 어깨에서 세차게 젓는 고갯짓이 느껴졌다. 하도 세게 저어서 어디 하나 상하지 않을까 걱정스러웠다. 천천히 그를 어루만지며 품에서 다시금 떨어뜨렸다.

 

울먹이는 눈빛에 저도 모르게 눈썹을 찌푸렸다. 우는 모습을 보이기 싫은 듯 옆으로 돌리는 얼굴을 잡았다. 이토록 차가운 바다를 쥐고 있는데 속에서 무언가 끓었다.

 

눈물 가득한 얼굴을 바라보다가 그대로 입을 맞췄다. 지민은 제 눈을 꼭 감았다. 감은 눈 사이로 눈물이 비집고 나와 흘렀다.

 

 

이 순간 분명하게 느꼈다. 정해진 운명인 것처럼 서로를 사랑했다. 처음부터 그렇게 짜 맞춰진 인연인 듯, 열렬히 사랑했다. 서로가 아니면 안 됐다. 이건 진리와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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