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래더] 트위터는 @Rather_0613 (舊 새벽의덕후)

[슈짐] 버진 로드

 

 

W.새벽의덕후

 

 

 

시간을 되돌려 너를 처음 사랑하게 된 그 순간으로 갈 수만 있다면 반드시 그때로 돌아가 절대 너를 사랑하지 않을 것이다. 너 같은 사람은 절대 만나지 않을 것이다. 너와 했던, 그토록 달콤하고 강렬했던 사랑이 얼마나 처절하고 아팠는지를 지금의 나는 너무도 잘 알기에.

 

 

 

*

 

핸드폰 잠금 화면을 가만히 두지 않았다. 껐다 켰다를 반복하며 화면에 뜨는 시간을 쳐다봤다. 불안한 마음에 입술을 씹으며 횡단보도를 쳐다봤다. 불이 초록 불로 바뀌자마자 두 다리에 힘을 바짝 주고 달렸다. 시간이 촉박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숨이 혀끝까지 차올라 목이 당겼지만 달리기를 멈출 수 없었다. 시간에 비해 페이가 너무 괜찮은 일이었다. 원래하기로 했던 사람이 갑자기 못하게 되어 대타로 뛰어드는 탓에 해당 장소까지 갈 시간이 촉박하다는 것만 제외하면, 정말 좋은 일자리였다.

 

머지않아 문자로 안내받았던 그 상호가 보였다. 정면을 향해 내달리던 몸을 급하게 틀어 건물의 무거운 문을 밀고 들어갔다. 많은 사람들, 분주하게 움직이는 직원들. 그리고 곧 악보 뭉텅이를 들고 뛰어들어오는 나를 붙잡고 ‘민윤기 씨?’하고 물어오는 사람까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예. 접니다.”

“얼른 오세요. 곡은 치실 줄 아시죠?”

“물론입니다. 경험도 많구요.”

“서둘러요. 곧 식이 시작되니까.”

 

 

턱까지 차오른 숨을 겨우겨우 고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옷매무새를 다시 점검하면서 직원의 독촉에 서둘러 걸음을 재촉했다. 직원을 따라 안으로 들어서니 이미 자리에서 식을 기다리고 있는 하객들이 많았다. 대충 훑어봐도 꽤 큰 규모의 결혼식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의미 없이 하객석을 둘러보고 직원을 뒤따라 피아노로 다가갔다.

 

피아노 의자에 앉아 악보를 정돈해서 펴두고 숨을 골랐다. 이 결혼식의 주인이 누구인지 몰랐다. 관심도 없었다. 여기서 기계처럼 행진곡을 연주하고 돈을 받는 게 내 관심사의 전부였다.

 

 

“곧 식이 시작되오니 아직 식장 밖에 계신 하객분들께서는 식장 안으로 들어와 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번 안내드립니다. 곧, 신랑….”

 

“민윤기 씨?”

“네?”

“아 아니에요. 준비 다 되셨구나. 잘 부탁드려요.”

“네. 알겠습니다.”

 

 

식이 시작한다는 안내와 함께 신랑 신부의 이름이 호명되는 순간이었다. 조금 진정된 기분으로 멍하니 안내방송을 듣고 있는데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놀라 고개를 돌렸다. 여전히 정신없어 보이는 직원은 나와 피아노를 번갈아 확인하더니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를 떴다. 나도 깊이 숨을 내쉬고 건반 위에 손을 올렸다. 사회자와 눈이 잠시 마주쳤고 초면인 그와 어색하게 눈짓을 주고받았다.

 

 

“자, 그럼 신랑 입장하겠습니다. 신랑 당차게 입장!”

 

 

사회자의 호쾌한 목청을 신호로 건반 위에 올린 손가락을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뻔한 멜로디, 뻔한 음정이 내 손가락 움직임을 통해 장내에 울려 퍼졌다. 직원에게 말했던 것처럼 이미 수없이 연주해 본 곡이었다. 할 줄 아는 게 피아노 치는 것 말고는 딱히 없던 내가, 같잖은 음악가 자존심 따위를 버리고 생업에 뛰어들면서 해왔던 게 바로 이 결혼식장 연주 일이었다.

 

아는 연주자가 있으면 그에게 맡기기도 했지만, 식장이나 대행사를 통해 연주자를 구하기도 했다. 어지간한 데는 써먹지 못했던 내 학벌과 경력이 그래도 이 시장에서만큼은 잘 팔렸다. 처음 이 일을 시작했을 때는 결혼 당사자들을 축하하고 축복하며 정성스레 건반을 쳤었다. 연주에는 연주자의 감정이 들어가야 완성되는 거라고, 언제나 고집스럽게 지키던 철학 같은 거였다.

 

그 철학은 내 배를 곪게 했고, 나를 불행하게 만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아무런 감정 없이 감미로운 결혼행진곡을 칠 수 있었다. 건조하게 건반을 두드려도 소리는 아름답게 났다. 사람들의 이목은 모두 신랑 신부에게 있었다. 결혼행진곡 위로 우레와 같은 박수도 얹어졌다. 연주에 연주자의 감정이 들어 있는지 없는지 감상하는 사람은 없었다.

 

연주가 끝나갈 즈음 고개를 들어 입장하는 신랑을 쳐다봤다. 버릇 같은 거였다. 이만큼 연주했으면 신랑이 앞쪽에 도착해 있었다. 신랑은 어떤 사람일까, 어떤 표정을 지을까, 내 연주를 밟고 끝에 닿은 사람은 지금 기분이 어떨까. 하나의 의식처럼 연주의 끄트머리에서 그런 것들을 확인하곤 했다. 버릇대로 고개를 들어 올려 신랑을 확인하자마자, 연주가 다 끝나갈 때가 되어서야 고개를 들어 올리는 내 버릇에 감사를 느꼈다.

 

 

“야. 신랑이 아주 훤칠하죠? 신랑 박지민 군의 거침없는 입장 보셨습니다. 자, 이번엔 우리 신부님! 신부님의 박력 있는 입장이 있겠습니다. 신부 입장!”

 

 

내가 연주한 결혼 행진곡에 맞춰, 길마다 꽃이 놓인 하얀 버진 로드를 걸어 끝에 닿은 사람은 바로 너였다.

 

 

 

**

 

“박지민!”

“윤기 형!”

“뭐야. 왜 나와 있어. 춥게.”

“형 보고 싶어서. 이러면 조금 더 빨리 볼 수 있잖아.”

 

 

꽝꽝 언 얼굴 때문에 웃는 모습이 부자연스러웠지만, 그마저 예뻤다. 좋았다. 많이 사랑했다. 그땐 그렇게 생각했다. 우리의 이러한 사랑만 있다면 찢어질 듯한 가난마저도 버텨낼 수 있다고. 날 향해 양손을 번쩍 들고 시린 겨울 골목 안에서 방방 뛰는 너를 보며 나는 행복을 느꼈다. 우리의 사랑은 결코 가난하지 않았지만, 가난 속에서 사랑하긴 했다.

 

 

“이거 봐. 얼굴 다 얼었네. 집에서 장판이라도 좀 틀어 놓지.”

“에이. 뭘 그래, 벌써부터. 별로 안 추워. 그리고 형을 이렇게 안고 있으면 엄청 따듯한데 뭘.”

“못 산다 내가. 얼른 들어가자. 너 감기 걸리겠다.”

 

 

가난이 문을 열고 들어오면 사랑이 창문을 열고 도망간다는, 누가 했는지 모를 말 따위는 가슴에 깊게 새기지도 않았다. 가난에 안겨 시작한 사랑이었기에, 이럴 줄 알고 사랑했기에 우리는 이겨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우리는 누가 했는지 모를 그 말에 굴복하고 말았다. 헤어졌다. 빌어먹을 가난 때문에.

 

 

“나 알지?”

“…안녕하세요. 어머님.”

 

 

안녕하시냐는 말도, 어머님이라는 말도 다 당치 않다는 걸 잘 알았다. 우리 집 앞에 서 있던 너의 어머니를 보고 나는 끝을 직감했다. 네가 아늑한 너의 집을 떠나 나와 함께 생활한 지 칠 년 째 되던 해였다.

 

 

“많이 참았어. 알지? 지민이 걔가 지금 그러고 있을 애가 아니야. 그건 그쪽이 더 잘 알잖아.”

“어머님. 저희는 지금 충분합니다.”

“충분? 충분해? 이따위 것들이 집으로 날아오는데도 니들이 충분해?”

 

 

화를 억누를 생각이 없었던 듯, 작은 것 하나에 지민이 어머님은 목청을 높였다. 그녀가 자신의 손에 꽉 쥐고 있던 걸 내 앞에 세게 내려놨다. 각종 공과금이 밀렸다는 경고장이었다. 나는 입술을 씹었다. 내가 했던 충분하다는 말은 우리의 사랑을 의미하는 거였다. 그것 말고 우리는 많은 게 부족했다.

 

 

“고등학교 때 과외선생 시킨다고 널 집에 들인 내가 죄인이지. 미친년이야. 쓸데없이 서울대를 나와서는. 숱한 서울대생들 중에서도 지민이가 공부에만 집중하라고 일부러 남자 선생을 고른 건데. 내 아들이 남자랑 눈 맞을 수 있는지는 몰랐지.”

 

 

앞에서 날아오는 사나운 말에 대답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저 고개를 숙이고 다 헤진 내 바지만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앞에 앉은 지민이 어머님이 스스로 끌어올린 화를 식히지 못하고 울긋불긋한 얼굴로 물을 들이켜는 게 얼핏 보였다. 반쯤 비어버린 물잔이 거칠게 테이블 위에 닿았다.

 

 

“지민이 걔. 아직 앞길 창창해. 네 그 개집만도 못한 반지하 집에서, 그러고 보니 네 집도 아니긴 하지. 그따위 곳에서 변변찮은 알바나 막노동하면서 밑바닥에서 구를 애 아니야. 보내. 지민이. 안 보내도 내가 데려갈 거긴 한데. 불쌍해서 이 정도 기회라도 주는 거야. 네가 정리해서 보내.”

 

 

두 허벅지 위에 올려놨던 손을 세게 말아 쥐었다. 평소 같으면 싫다고 얘기하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그녀가 말한 개집만도 못한 그 집으로 돌아가 지민이를 부둥켜안았을 거였다. 그런데 그럴 수 없었다. 지민이가 아팠다. 몸에도 맞지 않는 공장 일을 하다가 골병이 났다. 그 애를 병원에 데려갈 수 없었다. 병원비는커녕, 그녀가 보여준 것처럼 당장 공과금에 낼 돈도 없었다.

 

 

“대답해. 이 빌어먹을 새끼야.”

 

 

끝내 고상한 그녀의 입에서 험한 말이 나왔다. 빌어먹을 새끼. 나와 참 어울리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지독한 가난의 끝에서 나는 결국 빌어먹게 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했다. 온몸 가득 줬던 힘을 풀고 숨을 골랐다. 그리고 그녀를 쳐다봤다. 노기가 잔뜩 서린 눈빛이 시렸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너를 향한 내 충분한 사랑만으로 내가 해줄 수 있는 거라고는 이런 것뿐이었다.

 

 

그 길로 그녀의 전화번호를 넘겨받고 집으로 돌아갔다. 아픈 지민이는 집에 있었다. 다친 지 꽤 오래되어서 지민이가 집에서만 지내게 된 것도 좀 된 일이었다. 집 안에선 지민이 몸에 붙어있는 파스 때문에 알싸한 냄새가 났다. 그 애가 산 게 아니라 일터에서 다른 직원에게 얻어온 파스였다. 지민이는 파스 하나도 아깝다고 제 돈 주고 산 적이 없었다.

 

원래 지민이에게서는 항상 좋은 향기가 났다. 향수를 쓰는지, 고급 바디 워시나 바디 로션을 쓰는지는 몰랐다. 그러나 언제나 맡기 좋은 향이 났다. 그에 반해 나에게서는 싸구려 비누 냄새가 났다. 그래서 항상 지민이 옆에 앉아있던 나는, 그 애가 나에게 다가올 때마다 급히 옷깃을 여미곤 했다.

 

그랬던 너에게서는 지금, 오래된 파스 냄새가 났다.

 

 

“지민아.”

“늦었네.”

“…얘기 좀 할래?”

 

 

어두컴컴한 집이자 방에 들어서면서 나는 더듬더듬 스위치를 찾았다. 딸깍거리는 소리는 났는데 불이 켜지질 않았다. 나는 당황했고 몇 번이고 스위치를 눌렀다. 그러나 불은 켜지지 않았다. 그제야 나는 지민이의 어머니가 내 앞에 내려놓은 경고장이 떠올랐다. 멀지 않은 곳에서 네 한숨 소리가 들렸다.

 

 

“그래. 말 잘 꺼냈네. 하자, 얘기. …형. 방세 아직도 안 냈어? 형만 믿으라며. 내가 몸이 이 꼴이 되는 바람에 도움 못 돼서 미안하다니까 괜찮다며. 근데 왜 석 달이나 밀렸어? 매일 집주인이 찾아와서 문 두드리고 악을 쓰는데 돌아버릴 것 같아. 나.”

“지민아.”

“내 말 안 끝났어! 들어. 제발. 나. 몸 이 꼴 되고 이 집에 계속 누워있으면서 형 오기 전까지 저 문밖에서 남들이 하는 소리만 들어. 그게 욕이든, 회유든 결국 돈 돈 돈! 그놈의 돈 소리만 듣는다고. 난 종일 숨소리 하나 못 내고 듣기만 해. 그러니까 이젠 형이 좀 들어!”

 

 

네가 이렇게 길게 얘기한 건 오랜만이었다. 한창 서로 좋을 때에는 쉴 틈 없이 이야기를 나눴었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우리 사이엔 말수가 많이 줄어들었다. 간단한 이야기만 했다. 이야기가 길어지고 깊어질수록 하고 싶지 않은 주제가 불쑥불쑥 튀어나오곤 했다. 그 주제는 우리 사이를 불편하게 만들었고, 분위기를 어색하게 이끌었다. 그게 싫었던 우리는 암묵적으로 말수를 줄여나갔다.

 

 

“형. 나는 진짜, 괜찮을 줄 알았어. 아니 괜찮았어. 가난해도. 집에서 생전 처음으로 곰팡이 냄새를 맡아도. 화장실에서 역한 하수구 냄새가 나도 다 괜찮았어. 형을 사랑하니까. 정말 많이 사랑하니까. 근데 이젠 좀 힘들어. 진짜, 힘들어.”

 

 

나는 여전히 스위치 위에 손을 얹은 채 어둠 속에서 서 있었다. 너는 누워있는지, 앉아있는지 빛 하나 들어오지 않는 지하라 어둠에 익숙해져도 네가 어떻게 있는지를 알 수 없었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네 표정이 어떨지 볼 수 없으니까. 이제부터 내가 하는 말에 네가 어떤 표정을 지어도 나는 모를 테니까.

 

 

“돌아가 지민아.”

“뭐?”

“집으로, 돌아가. 이제. 이 정도면 오래 방황했어. 가.”

“형. 무슨 말이야 그게.”

“그렇게 지쳤으면 가. 여기 이러고 살면 우리가 행복해질 줄 알았는데. 그냥 널 가둬놓은 것밖에 안 된 거였어. 그만하자. 이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네가 일어난 거 같았다. 고요 속에서 진동하는 네 숨소리가 들렸다. 우는 것 같기도 했다. 보는 것 이외의 모든 감각으로 느껴지는 너를 모른 척하기로 했다. 안 들리고, 안 느껴진다고 여겼다. 내 옆으로 네가 지나갔고,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가난인 내가 문을 열고 들어오자, 내 사랑인 네가 문을 열고 나갔다. 옛말엔 틀린 게 하나도 없었다. 나는 핸드폰을 꺼냈다.

 

 

“…늦게 죄송합니다. 혹시 멀리 가셨어요? 지민이 지금 밖으로 나갔어요. 아마 근처 공원에 있을 겁니다. 데려가세요. 여기 있는 짐은, 예. 다 버리겠습니다.”

 

 

너를 알게 되고 십 년이 다 되는 시간이었다. 강산도 변한다는 그 시간이 흘렀고 우리 관계도 변했다. 마음 같아선 널 떠나보낸 이 집에서 떠나고 싶었지만 내 뜻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네 흔적이 잔뜩 남은 그 집에서 나는 가난과 함께 살았다.

 

 

 

**

 

“신랑 신부 맞절!”

 

 

너는 건강해 보였다. 더 이상 파스 냄새는 나지 않는 거 같았다. 신부도 아름다웠다. 너와 어울리는 순한 인상에 다정한 미소를 갖고 있었다. 백색의 드레스를 입은 신부를 보며 웃는 네가 행복해 보였다. 그래서 나도 웃었다.

 

내 마지막 기억 속 너는 울고 있었다. 아주 서럽게 울며, 소리치고 화를 냈다. 분명 우리가 행복했던 시간은 길었는데, 나에게 남아있는 네 얼굴은 그렇게 고통스러운 것밖에 없었다. 널 보내길 잘했다고 우는 네 얼굴을 떠올리며 수없이 생각했었다.

 

아주 오랜만에 웃는 네 얼굴을 봤다. 그리고 너도 날 봤다.

 

 

 

**

 

 

“형….”

“박지민? 너 왜 여기에 있어. 너. 술 마셨어?”

“형. 열쇠가 없어서. 그래서 집에 못 들어가. 열쇠가. 열쇠…..”

“…집에 가야지, 왜 여길 와.”

 

 

낡은 문의 문고리를 붙잡고, 그 문 위에 머리를 박고 비틀대던 지민이가 기대둔 머리만 들어서 나를 쳐다봤다. 울고 있었다. 아랫입술을 꾹 깨문 채 소리를 삼키며 울고 있었다. 나는 지민이의 눈물을 닦아줄 수도, 비틀대는 몸을 붙잡아 바로 세워줄 수도 없었다. 언제나 그랬다. 내가 지민이에게 해줄 수 있는 건 없었다. 가만히 날 쳐다보던 지민이는 자기 손으로 눈을 닦았고, 스스로 몸을 바르게 세웠다. 여전히 약간 비틀거리긴 했다.

 

 

“난, 나랑은 이제 정말 안 돼?”

“지민아.”

“형은, 나 없어도 돼? 응? 윤기 형. 정말 괜찮아?”

“많이 취했다.”

 

 

어렵게 어렵게 지민이에게 손을 댔다. 이 어두운 반지하에서 꺼내기 위해 지민이의 팔을 잡아끌었다. 지민이는 매몰차게 내 손을 뿌리쳤다. 그래놓고 다시 내 손을 찾아 잡았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그저 오랜만인 그 손을 가만히 바라봤다.

 

 

“나는, 나는 형. 아직도 어딜 갔다가 집으로 돌아가려고 하면 꼭 지하철이나 버스를 잘못 타. 여기 오는 거. 그거 타, 나. 누가 나한테 어느 가게에 무슨 음식이 맛있다고 하면, 그러면 머릿속으로 카드 잔액 확인하면서 형이랑 가야지, 우리 윤기 형이랑 꼭 가야지 그래. 근데 형은. 형은 왜.”

 

 

이젠 양손으로 내 한 손을 꾹 쥐는 이 애를 보며, 내 손바닥 위에 눈물을 떨어뜨리는 지민이를 바라보며 숨을 참았다. 오랜만의 그 애에게선 다시 좋은 향기가 나고 있었다. 비록 술냄새에 섞여 있긴 했지만, 맡기 좋은 것도 여전했다. 반면에 하루 종일 밖을 전전하던 나에게선 싸구려 비누 냄새도 나지 않았다.

 

내 손바닥 위를 적시던 지민이는 나를 올려다봤다. 눈물로 번들거리는 얼굴이 날 쳐다봤다. 그 눈빛은 꽤 다부졌다.

 

 

“나, 돈 없어.”

“지민아.”

“형은? 형은 어떤데. 나 택시 태워 보낼 돈, 있어?”

 

 

날 바라보던 눈에서 다시금 눈물이 흘렀다. 날 선 말을 나한테 해놓고 기어이 자기가 울었다. 상처는 혼자 다 받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지민이가 한 물음에 대답할 수 없었다. 이곳에서 지민이의 집까지 택시를 태워 보내려면 꽤 큰돈이 필요했다. 지금 내 지갑엔 만 원짜리 한 장과, 천 원짜리 몇 장, 그리고 주머니에서 짤그락대는 동전 몇 개가 전부였다.

 

이런 처지 때문에 지민이를 보냈던 건데, 이런 처지라 지민이를 보낼 수가 없었다. 붙잡히지 않은 맨손을 꽉 쥐었다.

 

 

“들어갈래. 문 열어줘.”

“…어머님께 연락드릴게.”

“형 진짜.”

“가. 지민아.”

“그때도 형이었지? 우리 엄마한테 연락해서 나 데려가게 한 거. 형이었지?”

 

 

눈꼬리 옆으로 눈물을 주룩주룩 흘려대는 지민이를 바라보다가 내 손을 붙잡은 두 손을 떼어냈다. 잠시 비어버린 제 빈손을 쳐다보던 지민이는 급하게 날 쳐다봤고, 붙잡았다. 이번엔 지민이에게 손을 대지 않았다.

 

 

“연락 넣어 놓을게. 이번에 돌아가고 나면, 앞으론 다시 오지 마. 네가 말한 것처럼 나 너한테 줄 택시비 없어. 내가 이래. 아무것도 없어.”

“그러니까 형. 윤기 형. 나랑 다시, 같이.”

“근데 지민아. 너는 있잖아. 너는 많이 가졌잖아. 넉넉한 집도 있고, 부모님도 계시고. 지금 네 카드엔 잔액도 많이 있을 거잖아. 지민아. 우리는 달라. 많이 달라. 어떻게 살아도 언젠가 돌아가 기댈 곳이 있는 너와 이대로 쓰러져도 그 누구도 상관하지 않을 나는 섞일 수가 없어.”

“민윤기.”

 

 

어느새 눈물이 멎은 눈으로 날 원망스럽게 바라보며 젖은 얼굴을 닦아내는 너를 보면서 나는 시작한 거짓말을, 말도 안 되는 말을 마저 하기로 결심했다. 너는 더 이상 이런 곳에 있으면 안 됐다. 어울리지 않았다. 이런 누추한 공간과, 더 보잘것없는 나와.

 

 

“그런 너 보면서 나 많이 괴로웠어. 내가 왜 네 어머님께 연락했겠어. 너를 위한 거 아니야. 나를 위해서였어. 나랑 다른 너 볼 때마다 점점 치지고 열등감도 들었어.”

“그만해. 듣기 싫어.”

“그러니까 가줘, 지민아. 더는 내 인생에 엮이지 말아줘. 날 더 이상 비참하게 만들지 말아 주라.”

 

 

그렇게 너는 다시 나를 떠났다.

 

 

 

사랑하기에는 조금 가난한 것이 낫고

사랑하기에는 오늘이 다 가기 전이 낫다.

 

 

지하철 스크린도어에 달라붙어 있는 문구를 보고 나는 헛웃음을 쳤다. 가난. 그놈의 가난은 저 문구처럼 나에게 달라붙어 좀처럼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불편한 스크린도어를 피해 다른 곳으로 돌렸던 눈을 다시금 스크린도어에 붙였다. 삐딱한 입꼬리가 얼굴 위에 딱딱하게 굳어 움직이지 않았다.

 

 

“염병하네.”

 

 

나는 지나치게 가난했기에 사랑하기에 좋지 않았나 보다. 나의 오늘은 순간을 살아가기에 바빠서 사랑하는 데 쓰이지 못했나 보다. 그래서 너를 잃었다.

 

멀리서부터 지하철이 세차게 들어왔다. 바람이 불었다. 나는 여전히 너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러나 난 널 다시 만날 수 없었다. 그러면 안 됐다. 너의 행복을 위하여.

 

 

*

 

그럼에도 널 다시 보고 싶다는 바람은 언제나 일었고, 그 바람은 거침없이 불어 오늘에 닿았다. 나는 이렇게 너를 다시 만났다. 말쑥하게 차려입은, 결혼식의 주인공이 된 너를 봤다. 내 가난함이 깔아둔 결혼행진곡 위를 너는 걸었다. 건강해 보였고, 편안해 보였다. 그 모습에 나는 다행을 느꼈다. 언제나 네가 아프지 않기를 바랐다.

 

내 곁에 네가 떠오르면 언제나, 지금처럼 바람이 분다.

 

 

“자. 사진 찍겠습니다. 하객분들은 모여주세요.”

 

 

결혼식이 어느새 끝났다. 종종 너와 눈이 마주쳤던 것도 같았다. 그럼에도 너는 의연하게 결혼식에 임했고, 나는 때맞춰 피아노를 연주했다. 너도, 나도 이 순간을 망가뜨리지 않았다. 나는 악보를 잘 정리해서 식장을 빠져나갔다. 직원이 건네준 돈 봉투도 받았다. 직원이 사라지고 잠시 뒤를 돌아봤을 때, 너는 네 손님들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하필 그 순간 네가 나를 보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성급하게 자리를 떠났다. 한산한 공간에서 긴장이 풀려버린 나는 손에 들린 악보를 쏟아버렸다. 악착같이 붙들고 있던 돈 봉투는 손에 꽉 쥐어져 있었다. 봉투는 주머니에 잘 챙겨 넣고 악보를 주우려고 몸을 숙였다.

 

 

“으이구, 이 칠칠아.”

 

 

익숙한 소리에 뒤를 돌아봤다. 돌아본 자리에 너는 없었다. 당연했다. 이건 언제나 날 따라다니는 너의 흔적이었다. 네 환청이었다. 하루에 서너 개의 일을 하고 돌아와 피곤에 절어 양말을 제멋대로 휙 하고 집어던지면 네 목소리를 들었다.

 

‘빨래하기 힘들게 이렇게 벗어두지 말랬지. 이거 못 보고 빨면 때도 잘 안 지워진다고. 어휴, 못 살아 정말.’

 

너와 함께 살 때는, 삶이 너무 힘들어서 그 잔소리가 그렇게도 듣기 싫었었다. 귀를 막고 이불을 뒤집어쓰고 모른 척, 안 들리는 척 그렇게 굴다가 잠에 들곤 했다. 그런데 이제는 그 잔소리가 너무 듣고 싶어서 거짓된 환청을 듣고 있었다. 여태 괜찮았던 감정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고작 종종 듣던 그 환청 하나 들었다고 내 감정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악보를 대충 움켜쥐고 화장실로 뛰어들었다. 아무 칸에나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그고 품에 악보를 안았다. 그리고 울었다.

 

 

이제 다시는 내 곁에 지민이가 있을 수 없다.

 

 

“지민아…. 지민아. 지민아. 박지민…. 사랑해.”

 

 

변기와 문 사이 공간에 웅크렸다. 품에 있던 낡은 악보가 젖었다. 쏟아지는 눈물을 닦아내다가 다시금 악보를 바닥에 흘렸다. 그걸 주워보겠다고 몸을 숙였다. 앞으로 엎어진 몸에선 더 많은 울음이 나왔다. 악보가 손안에서 구겨졌다. 울음 사이로 숨이 제대로 나오지 못해서 헐떡거리는 소리가 났다. 지민이를 부르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여기서도 난, 지민이를 향해 내어 보일 게 없었다.

 

 

 

**

 

온갖 축하와 들뜬 웃음이 지민을 향하고 있었다. 지민의 한쪽 팔에는 상냥하고 친절한 신부의 가녀린 팔이 끼여 있었다. 집으로 강제로 돌아가서 멋대로 보내진 유학이었다. 이민과 다를 게 없었다. 온 가족이 지민을 품에 끼고 해외로 떠났다. 모든 연락망을 끊었고 바꿔버렸다. 그곳에서 유학 생활을 마치고 돌아와 한국에서 만난 여자였다. 선 자리를 통해서였다.

 

지민은 서늘한 공원에서 어머니 손에 강제로 이끌려 돌아가던 그 순간부터 모든 의욕을 버렸다. 술에 취해 윤기의 집 앞으로 찾아간 날 모든 희망도 버렸다. 그 이후 부모님이 바라는 대로 살기로 했다. 자신은 더 행복해질 수 없으니 부모님이 행복해질 수 있도록 살기로 했다. 그게 지민이 사는 동안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웨딩카에 탑승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지민은 그의 친구와 신부에게 양해를 구해 차를 세웠다.

 

 

“무슨 일이에요?”

“두고 나온 게 생각나서.”

“그럼 얼른 돌아가야죠.”

“금방 다녀올게요. 얼마 안 걸리니까 갔다 올게요.”

 

 

고개를 끄덕이는 신부에게 미소를 지어주고 지민은 곧장 결혼식장으로 달렸다. 하객들이 다 빠져나간 비어있는 식장을 이리저리 둘러봤다. 그리고 구석에 있는 화장실에서 울음소리를 들었다.

 

 

“박지민…. 사랑해.”

 

 

화장실 근처 벽에 기대선 채로 지민은 반반한 대리석 바닥을 쳐다봤다. 종잇장 여러 개가 바닥에 흩날리고 있었다.

 

 

“으이구, 저 칠칠이.”

 

 

얼굴이 축축했다. 지민은 제 얼굴을 만졌다. 울고 있었다. 화장실 안의 윤기의 울음은 좀처럼 그칠 줄을 몰랐다. 지민은 우는 얼굴로 걸음을 옮겨 종이를 주워들었다. 결혼행진곡. 그 종이를 꽉 쥐었다가 제 손을 밑으로 떨궜다. 헛웃음이 터졌다. 그때 화장실에서 윤기가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지민은 저도 모르게 몸을 숨겼다.

 

윤기가 어디론가 사라졌다. 지민도 걸음을 옮겼다. 식장 안, 버진 로드의 시작점에서 가만히 서 있는 그리운 사람을 찾았다.

 

 

“…윤기 형.”

 

 

벌건 눈이 지민을 마주했다. 급하게 얼굴을 닦아내긴 했지만 울음기마저 지워낼 순 없었다. 윤기는 어색하게 웃었다.

 

 

“형. 왜, 그렇게 나 보내. 왜 아무것도 안 해.”

“행복해 보여서.”

“민윤기.”

“지민아. 난 이제 너 같은 사람 안 만날 거야.”

“…뭐?”

“그러니까 너도, 나 같은 사람 생각하지 말고 꼭 행복해.”

 

 

 

 

시간을 되돌려 너를 처음 사랑하게 된 그 순간으로 갈 수만 있다면 반드시 그때로 돌아가 절대 너를 사랑하지 않을 것이다. 너 같은 사람은 절대 만나지 않을 것이다. 너와 했던, 그토록 달콤하고 강렬했던 사랑이 얼마나 처절하고 아팠는지를 지금의 나는 너무도 잘 알기에.

 

나는 필사적으로 너를 피할 것이고, 너를 절대 사랑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그런 기적이 너에게도 생긴다면 너 역시 나처럼 해주기를. 꼭 나를 피하고 절대 마주치지 말기를. 나처럼 너무 아픈 사랑 말고, 아주 예뻐서 떠올리면 웃음만 나오는 그런 사랑을 하기를. 그래서 내내, 네가 행복하기를.

 

 

나는 아직 기적을 마주하지 못했고, 그래서 이 자리에서 너에게 이렇게밖에 작별을 말하지 못한다. 안녕, 내 영원의 사랑.

 

 

**

 

지민이 웨딩카 문을 열고 들어왔다. 핸드폰으로 일정을 확인하던 여자는 반가운 얼굴로 지민을 쳐다봤다. 지민의 양손엔 들린 게 없었다.

 

 

“두고 나온 거는요?”

“못 찾았어요.”

“좀 더 찾아보지 그랬어요. 아직 시간 여유 있는데.”

“아니요. 아마 못 찾을 거 같아요. 평생.”

 

 

 

***

 

하얀색 버진 로드 위에 지민과 윤기가 서 있었다. 텅 빈 하객석과 텅 빈 공간을 둘러보면서 팔짱을 낀 두 사람은 같은 곳을 보며 웃고 있었다.

 

 

“형. 우리도 이런 데서 결혼할 수 있을까?”

“있지 그럼.”

“우리 엄마도, 아빠도, 친구들도 초대해서 이 하객석 꽉꽉 채울 수 있을까?”

“그럼. 당연하지.”

“형. 걱정 마. 형 쪽 하객석도 내가 꽉 채워 놓을게.”

“어떻게?”

“음, 내 사랑으로?”

 

 

행복한 웃음소리가 비어있는 식장을 울렸다. 버진 로드를 밟고 선 두 사람은 마주 보고 입을 맞췄다. 두 사람의 옆에는 각각 커다란 짐 가방이 있었다. 많은 것을 버리고 떠나왔지만, 새롭게 출발한다고 느끼고 있었다. 비록 지금은 가진 것도 없고 그 누구에게도 지지받지 못하지만 언젠가 다시 이 자리에 서게 될 때는 많은 게 달라져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윤기의 품에 안겨 있던 지민은 몸을 살짝 떼고 윤기를 바라보며 말했다.

 

 

“형. 형이 피부가 더 하야니까 수트는 블랙으로 입어. 하얀 수트는 내가 입을래.”

“웨딩드레스 입지 그래? 잘 어울릴 거 같은데.”

“뭐? 허, 그건 다리도 예쁘신 민윤기 님이 입으시지 그러세요?”

“에이. 나보단 엉덩이가 예쁜 박지민 씨가 입는 게 나을 거 같은데.”

“야!”

“뭐.”

“그럼 다 입자! 수트도 입고! 드레스도 입고! 아주 난리를 치자!”

“좋네, 그거.”

 

 

투닥거리다가도 배시시 웃으며 서로를 끌어안았다. 비록 지금은 시작점에 가만히 서 있을 뿐이지만, 언젠가 수많은 사람들의 축하와 환호를 받으며 이 버진 로드의 끝에 나란히 서기를 꿈꿨다. 하얀색 꽃길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머릿속으로 꿈꾸는 그것이 이뤄지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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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의 단편이네요! <주간슈짐>에서 해보고 싶었던 주제가 있었는데

안타깝게 시간을 놓쳐 참여하지 못했었어요.


그런데! 상반기 결산이라는 반가운 기회가 생겨 참여도 할 겸, 오랜만에 단편도 써볼 겸 해서 이렇게 글을 데려왔답니다!


주제는 <너 같은 사람 안 만나>랍니다. 주제와 어울리는 거 같나요?

꽤 울적한 글인데 그래도 잘 읽어주셨길 바랍니다!


비가 오네요. 이 비가 그치면 다시 뜨거워진다고 하는데 비도, 더위도 모두 조심하세요.

찾아주시고,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덧) 중간에 인용된 시는 이병률 시인의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 에서 인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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