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래더] 트위터는 @Rather_0613 (舊 새벽의덕후)

[슈짐] Take me to the sky

 

 

W.새벽의덕후

 

 

 

5.

 

곧장 의사를 불렀다. 꽤 많은 사람들이 병실을 오갔다. 윤기는 지민의 어머니에게도 전화를 걸었다. 어디에 있는 것인지 받질 않아서 문자를 남겨뒀다. 지민이가 깨어났다고. 몇 가지 검사를 마친 지민은 다행히 큰 이상이 없다고 했다. 사람들이 빠져나간 병실로 윤기가 들어갔다. 지민은 가만히 누워서 윤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얼굴을 보고 있는데 다시금 눈물이 찼다. 대체, 왜 자꾸 울리는 건지. 울고 싶지 않았는데 다 터진 얼굴을 하고 구름 위와는 다른 얼굴로 웃는 지민을 보고 있으면 자꾸 울음이 났다.

 

 

“아저씨.”

“지민, 지민아.”

 

 

겨우 끄집어낸 말은 고작 그리웠던 사람의 이름을 부르는 것뿐이었다. 다른 말을 할 수 없었다. 윤기는 울었다. 지민 가까이 다가가면서 울었고, 깨어난 지민을 바라보면서 울었다. 서럽게 울었다. 아픈 몸 위에 엎어졌다. 다친 손이 윤기의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그 손이 거친 게 덥수룩한 머리로도 느껴져서 윤기는 울음을 그칠 수 없었다.

 

 

“이게, 이게 다 뭐야. 대체.”

 

 

울음에 섞어서 내뱉은 말을 들었으면서도 지민은 대꾸가 없었다. 윤기가 흐느끼는 소리만 병실에 가득했다. 지민을 만나면, 다시 웃을 줄 알았다. 반갑다고 손을 붙잡고, 잘 왔다고 어깨를 다독여 주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울었다. 서럽도록 반가웠다. 깨어난 지민은 하늘 위에서와는 한참 달랐다. 행여 구름 위와 다른 스스로를 보고 또다시 달아나버릴까 두려웠다. 지민 위에 엎어져서 지민을 세게 끌어안았다. 이젠 어디로든 보내지 않을 작정이었다.

 

 

“아저씨 엄청 울보네.”

 

 

구름 위에서 또랑또랑하던 목소리는 어디로 갔는지, 다 갈라져 쇳소리가 나는 목으로 지민은 말했다. 하나부터 열까지 구름 위에서와 똑같은 구석이라곤 없는 지민인데, 이렇게나 다른데. 그마저도 사무치게 반가웠다. 이미 전부터 알고 있기라도 한 듯, 이런 지민이 익숙했다. 까만 머리칼도, 마른 볼도 지민이 구름 위에서 망설일 동안 하도 지켜봐서 그런지 이젠 금발의 지민보다도 이 얼굴이 더 익숙했다.

 

 

“아저씨.”

“응. 지민아.”

“나 봐주라. 거기서보단 못생겼겠지만. 그래도 봐주라.”

“안 못생겼어.”

 

 

윤기는 얼굴 가득 묻은 눈물을 닦아내며 지민 위에 엎어놓은 제 몸을 일으켰다. 지민은 손을 뻗어 윤기의 얼굴에 가져다 댔다.

 

 

“아저씨가 보고 싶었어.”

“그랬어?”

“응. 아저씨가 나 놀리던 것도 생각나고. 아저씨랑 이런저런 얘기했던 것도 자꾸 생각나고.”

“그래서 오기로 한 거야?”

“응. 평생을 혼자였는데. 현실에서나, 현실이고 싶었던 곳에서나. 난 언제나 혼자였는데. 잠깐 누군가와 함께 지냈다고, 혼자인 게 낯설어지더라고.”

“잘했어. 정말 잘했어, 지민아.”

“기다린다는 아저씨의 말이 자꾸 생각났어.”

 

 

지민이 제 엄지로 윤기의 볼을 쓸었다. 거친 손이었지만 윤기는 구름보다도 포근하게 느꼈다. 제 볼에 닿은 손도 붙잡고, 마주 보고 있는 얼굴에도 제 손을 가져다 댔다. 지민이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지민의 얼굴에 가벼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기다리는 건, 정말 힘든 거니까. 아저씨 힘들까 봐. 그래서 왔어.”

“고마워. 와줘서. 돌아와 줘서. 정말 고마워 지민아.”

 

 

윤기의 말에 지민이 조금 더 환하게 웃었다. 웃느라 감긴 눈이 반가워서 다시금 울컥해버렸다. 천천히 눈을 뜬 지민이 메마른 입술을 혀로 잠깐 축였다.

 

 

“그거. 내 이름 불러주는 목소리. 그게 너무 듣고 싶었어. 그래서 왔어.”

 

 

참 끔찍한 현실일 텐데. 그런데도 돌아와 준 게 너무 감사해서 윤기는 몇 번이고 고맙다고 말했다. 고작 이름 불러주는 게 다 뭐라고. 그깟 이름쯤이야 지민이 깨어나기 전부터 수차례 불렀고, 앞으로도 몇 번이고 불러줄 수 있었다. 다신 오고 싶지 않았을 그 현실에, 자신을 위해 와줬다는 게 그 말이 너무 고마웠다. 그래서 윤기는 살아있는 땅 위의 지민을 보면서 수차례 되뇌었다. 다시 돌아온 너의 삶에 끔찍한 현실은 단 한 조각도 남겨놓지 않겠다고. 새로이 만들어 내지도 않겠다고. 한참 서로를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고요를 깬 건 윤기였다.

 

 

“나랑 같이 살자.”

“어?”

“나랑 지내자. 앞으로.”

“와아. 진짜 갑작스럽네.”

 

 

지민은 긴장이 가득한 채 자꾸 입술을 축이는 윤기를 가만히 쳐다봤다. 그러다 웃었다. 웃는 지민의 얼굴을 보면서, 윤기는 많이 다르다고 생각했던 구름 위에서의 지민을 떠올렸다. 구름꽃 피듯 웃는 얼굴은 구름 위에서나, 땅 위에서나 다를 게 없었다. 웃느라 얼굴을 움직인 탓에 상처가 땅겼는지 지민이 웃는 채로 인상을 살짝 썼다. 그런 지민을 보며 윤기도 함께 인상을 썼다. 그리고 여전한 긴장감에 다시금 혀를 내밀었다. 행여 구름 위에서 한참을 지낸 자신이 지겨워졌다고, 이젠 같이 지내는 거 질렸다고 할까 봐 무서웠다. 자신은 지민을 보내고 싶지 않은데, 지민이 자신을 떠나고 싶을까 봐 두려웠다.

 

 

“근데. 이거 프러포즈야?”

“응?”

“같이 살자는 말을 하면서 왜 아무것도 없어. 뭐라도 주면서 꼬셔야지.”

 

 

목소리는 조금 더 탁하긴 했지만, 뽀로통하게 타박하는 말투는 윤기가 알던 그대로였다. 그 말투에 불안하던 마음이 가라앉았다. 그제야 윤기도 굳었던 얼굴을 풀고 웃었다.

 

 

“나 돈 많아. 많더라.”

“에? 내가 그렇게 속물인 줄 알아?”

“좋아해.”

“그거야 당연한, 에? 뭐?”

“좋아해. 지민아.”

 

 

윤기가 건넨 장난에 다시 장난으로 되받으려던 지민이 웃고 있던 눈을 동그랗게 떴다. 깜박이는 그 얼굴은 많이 보던 거였다. 윤기는 잠자코 익숙한 얼굴을 감상했다. 누군가를 참 오랜만에 좋아했다. 그간 누군가를 좋아할 새도 없었다. 내일을 짊어진 채로 오늘을 살아야 했다. 하고 싶지 않은 것을 하며 매일을 살던 윤기에게 애정에 대한 여유 같은 건 없었다.

 

그래서 한참 만에 깨달았다. 좋아하고 있었다. 구름 위에 있었을 때, 지민이 만들어 준 까만 밤하늘을 보면서 카메라를 떠올렸었다. 머릿속으로 그려본 카메라 프레임 안에는 별이 가득 박힌 밤하늘을 배경으로 선 지민이 있었다. 그 애를 담고 싶었다.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었다. 웃는 얼굴을 자꾸 보고 싶었고, 괜히 퉁퉁 부은 얼굴이 보고 싶어 괴롭히기도 했었다. 그래놓고 지민이 울어버리기라도 하면 속이 시렸다. 현실에서 눈을 뜨고 나서야 분명하게 깨달았다. 좋아하는구나, 지민이를. 아니. 사랑하나보다. 그 애를.

 

 

“그러니까. 나랑 같이 살아줘. 응?”

“…아저씨.”

 

 

윤기의 애타는 목소리에 지민이 낮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자기를 부르는 말에 윤기가 지민 가까이 몸을 숙였다. 가까이 다가온 윤기를 빤히 보더니 지민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낮게 깔린 한숨이 죄다 윤기의 가슴으로 모인 듯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거절당하나 싶었다.

 

 

“아저씨.”

“응. 지민아.”

“아저씨, 진짜….”

“어?”

“아, 진짜. 진짜 무드 없네. 그런 말을 내가 환자복 입은 상태에서 하는 게 어딨어. 나 되게 오랜만에 깬 거라 씻지도 못했는데. 머리도 다 떡졌을 거 아니야. 이게 뭐야. 나 살면서 고백 처음 받아본 건데.”

 

 

느닷없이 쏟아지는 목소리에 윤기가 잠시 멍하니 있었다. 그리고 곧 지민이 한 말의 의미를 깨닫고 안도감 섞인 웃음을 환하게 지었다. 퉁명하게 투정하는 목소리가 참 듣기 좋았다. 윤기는 지민의 손을 붙잡았다. 전보다는 상처가 좀 아문 손을 가만히 바라보며 매만지다가 그 손에 입을 맞췄다. 윤기를 지켜보던 지민이 민망함에 어쩔 줄 몰라 했다. 그 바쁜 눈동자와 얼굴이 귀여워서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지민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윤기가 말했다.

 

 

“예뻐. 지금도. 충분히 예뻐. 그리고 또 할게, 고백. 퇴원하기 전까지 매일 해줄게. 퇴원하고 멋진 옷 입으면 또 해줄게. 잠들기 전에 듣고 싶다고 하면, 그렇게 해줄게. 자고 일어나자마자 듣고 싶다고 하면, 그렇게 해줄게. 몇 번이고 고백해줄게. 지민아.”

“아저씨….”

“좋아해. 지민아.”

 

 

윤기는 지민의 둥근 이마에 입을 맞췄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서 지민에게 스킨십 진도가 너무 빨랐던 거 아니냐며, 선수가 따로 없었다는 타박을 듣기도 했지만 당장의 두 사람은 달콤하게 이 순간을 보냈다. 꽤 길게 이마에 입술을 맞추고 있던 윤기가 천천히 입을 뗐다. 눈을 감고 있던 지민도 천천히 눈을 떴다. 어딘가 어색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나, 그래도 돼?”

“뭐가?”

“아저씨 애정 받으면서. 아저씨랑 그렇게 살아도 돼?”

“당연하지.”

 

 

머리를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윤기를 보면서도 지민이 어딘가 낯설어하는 거 같았다. 불안해하는 거 같았다. 윤기는 다시금 지민과 눈을 맞추고 다정하게 웃어주었다.

 

 

“넌, 그럴 자격이 충분한 사람이야.”

 

 

그 말에 지민이 환하게 웃었다. 웃는 눈에 눈물이 매달렸다. 윤기는 그 얼굴을 붙잡고 눈물을 닦아 주었다. 그때 병실 문이 열렸다. 윤기가 큰 손으로 얼굴을 가득 붙잡고 있던 탓에 지민은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듣지 못한 거 같았다. 윤기는 지민의 얼굴을 잡은 채로 문가로 눈을 돌렸다. 잔뜩 긴장한 채 병실로 들어서는 지민의 어머니가 보였다. 윤기는 문가를 향해 미소를 지은 후 다시 지민을 바라봤다. 지민이 고개를 돌려 윤기가 바라본 곳을 보고자 했지만 윤기가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지민이 궁금함 가득한 눈으로 윤기를 쳐다봤다.

 

 

“너 그렇게 살아도 되냐고, 묻고 싶으면 물어 봐봐.”

“무슨 말이야?”

“많이 닮았더라.”

 

 

그 말까지 한 윤기가 손을 풀었다. 지민이 멀뚱하니 윤기를 쳐다봤다. 윤기는 지민에게서 눈을 떼 침대 가까이 다가온 지민의 어머니를 바라봤다. 움직이는 지민을 보면서 울고 있었다. 입가에 주름진 손이 붙어 있었다. 지민도 윤기를 따라 시선을 옮겼다. 가만히 자신을 바라보는 젖은 눈을 쳐다봤다. 꽤 오랜 시간 말이 없었다. 윤기는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지민은 걸음을 옮기는 윤기를 바라봤다가, 다시 고개를 돌려 제 옆에 서 있는 사람을 쳐다봤다. 오래 바라보고, 몇 번을 지켜봤다. 아주 한참 만에 지민이 입을 열었다.

 

 

“엄마? 엄마예요?”

“지민아…. 지민아.”

“정말, 정말 내 엄마예요? 진짜? 나 낳아준, 그 엄마예요?”

“엄마, 엄마야. 지민아. 엄마야.”

 

 

그 말에 두툼한 입술이 잔뜩 짓눌렸다. 지민이 제 이로 입술을 괴롭히고 있었다.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도 거친 손으로 눈물을 계속 닦아냈다. 시선은 줄곧 제 어머니를 향한 채였다.

 

 

“엄마. 엄마…. 이렇, 이렇게 생겼었구나. 내 엄마.”

“미안해. 엄마가, 엄마가 그렇게 가버려서 미안해…. 지민아.”

“이렇게 생긴 줄 몰라서…. 그래서 못 그리워했어요. 엄마가 어떻게 생겼는지 몰라서. 그리워할 수가 없었어.”

“미안해. 엄마가 정말 미안해.”

 

 

아주, 아주 오랜만에 지민이 엄마의 품에 안겼다. 엄마 냄새는 이렇구나, 엄마의 살결은 이렇구나, 엄마의 목소리는 이렇구나. 그리고 엄마는 정말 나를 그리워해 줬구나. 지민은 수많은 감정을 느끼느라 바빴다. 낯설었다. 엄마를 보고, 듣고, 만지고 있으면서도 낯설었다. 그런 만큼 반가웠다. 다시 본 엄마를 놓치고 싶지 않아서 엄마의 옷을 힘껏 쥐었다. 엄마의 옷은, 이런 느낌이구나.

 

 

“미안해요, 엄마. 많이… 보고 싶어 하지 못해서. 보고 싶었는데. 뭘 보고 싶어 해야 하는지 몰라서…. 그래서….”

“아니야. 아니야, 지민아. 이 엄마가 미안해. 엄마는, 엄마는 정말 많이 보고 싶었어. 우리 아들 어릴 때도 예쁘고 잘 생겼었는데. 엄마가 보고 싶어 하던 그 얼굴보다 훨씬 더 멋있어졌네.”

 

 

잠시 서로를 마주 본 두 사람은 다시금 서로를 품에 안았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윤기가 문을 닫고 밖으로 향했다. 주책없이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리운 사람도 제대로 그리지 못했던 지민의 삶이 안타까웠다. 그래도 이제 만났으니 앞으론 맘껏 그려보고, 눈으로 직접 보고, 손으로 만져보기를. 수많은 시간 아끼지 않고 잔뜩 느끼기를 바랐다.

 

 

 

**

 

“지민아….”

“가. 나도 용기 내서 왔잖아. 아저씨도 용기 내서 가.”

“지민아, 나는.”

“아저씨 여기까지 올 용기 냈잖아. 한 번 해봤으니까. 또 할 수 있어.”

 

 

이 땅 위에서도 지민은 자신을 다독여주고 있었다. 저보다 한참 어리면서 다 큰 어른처럼 윤기를 응원했다. 아직 상처가 다 빠지지 않은 얼굴로 잘도 웃어주는 지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하고 싶은 거. 해야지.”

 

 

그렇게 말해주는 게 고마워서 멍든 이마에 제 머리를 가볍게 가져다 댔다. 지민의 손도 꼭 잡고 있었다. 잠시 눈을 감은 채 지민의 곁에서 호흡하던 윤기가 몸을 일으켰다. 굳이 말을 붙이지 않고 지민의 손을 내려놨고 몸을 틀어 걸었다. 문을 나서기 전에 슬쩍 돌아보니 이쪽을 바라보고 있던 지민이 제 손을 살짝 들어 흔들어주었다. 미소로 대답한 뒤에 문을 나섰다. 구름 평원보다 한참 딱딱한 바닥을 딛으려니 발걸음이 영 무거웠다. 단단하게 닫는 발걸음이 낯설어 몇 번을 멈추려고 하다가도 다시 걸었다. 지민의 얼굴이, 목소리가, 윤기가 걸어나가도록 도와줬다.

 

그 걸음으로 윤기는 집에 닿았고 문을 열었다. 부모님은 집에 들어선 윤기를 보며 반갑게 인사했다. 늘 어딜 다니는지는 몰랐지만, 그래도 멀쩡히 잘 돌아다니는 아들이 반가웠다. 혹시나 하는 기대도 하고 있었다. 다시 제 아들이 하늘로 비행기를 날릴 수 있지 않을까.

 

 

“사진을 찍고 싶어요.”

“응?”

 

 

부모는 둘 다 의문형을 썼다. 현관에서 신발을 막 벗어 집 안에 들어서자마자 윤기는 대뜸 그렇게 이야기했다. 십여 년 전에 했어야 할 이야기를 이제야 하려니 마음이 급했다. 너무 늦은 고백이었다.

 

 

“사진사가 되고 싶어요.”

“너 갑자기 그게 무슨 말,”

“갑자기가 아니에요. 쭉 그랬어요. 형이 교통사고 나기 전부터. 아주 오래.”

“윤기야.”

“허락 구하는 거 아니고, 통보하는 거예요. 이제 조종사 같은 거 안 해요. 이런 몸으로 무리기도 하고. 그러니까, 그렇게 알아두셨으면 해서요.”

 

 

부모는 멍하니 입만 벌리고 있었다. 윤기는 그 말만 하고 다시 신발을 신었다. 이럴 거면 신발을 신은 채 신발장에서 얘기해도 됐겠다고 생각했다. 이런 자신을 지켜봤다면, 지민이 멋있다고 해줬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웃었다.

 

윤기는 가장 먼저 장비 가게로 향했다. 가게에서 장비를 이리저리 둘러보면서 가장 좋은 장비를 집어 들었다. 고된 알바를 해서 처음으로 겨우 샀던 중고 장비는 가져다 댈 수도 없을 만큼 좋을 것들이었다. 매정 직원은 가격을 말했고, 윤기는 카드를 내밀었다. 몇 개월 할부로 해드릴까요, 하는 말에 일시불로 해달라고 했다. 신용 카드가 아니라 체크카드였다. 그냥 번 돈을 모아 놓은. 직원은 당황한 듯했으나 곧 기계에 시원하게 카드를 긁었다. 처음으로 써 본 큰 금액이었다. 휴대폰에 바로 알람이 울렸다. 큰 금액이 빠져나갔는데 잔액은 그보다 훨씬 많이 남아있었다. 제 꿈을 사고도 한참 남을 만큼 돈을 벌어놨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

 

 

“별거 아니네.”

“예?”

“아니에요. 수고하세요.”

“아, 네.”

 

 

꿈을 이루는 게 별것도 아니면서 그 수십 년 동안 자신을 괴롭혔다는 게 우스웠다. 윤기는 두 손 가득 무겁게 장비를 챙겨 들고서 가게를 나섰다. 몇 개의 장비는 집으로 보내달라고 말을 해 놨다. 윤기는 가게 밖에 주차해 놓은 제 차에 장비들을 실었다. 자랑하고 싶었다. 그 많은 돈으로 하고 싶은 걸 했다고. 하고 싶은 걸 하라며 제 등을 떠밀던 그 애에게 어서 자랑하고 싶었다. 근데 그 전에 들러야 할 곳이 있었다. 윤기는 시동을 켜 두고 휴대폰을 들었다. 통화음이 조금 이어졌고 상대가 전화를 받았다.

 

 

“네. 저 지금 출발합니다. 나오시면 될 거 같아요.”

 

 

간단하게 전화를 마친 윤기는 차를 출발시켰다. 윤기의 마음만큼이나 가볍게 차가 움직였다.

 

 

 

_

 

“기다리셨어요?”

“기다리긴 했죠. 꽤, 오래.”

 

 

낮은 웃음소리를 섞어 말하는 목소리가 우아했다. 윤기는 제 짝으로 부모가 점쳐 두었던 그 사람을 만나러 왔다. 여전히 다정한 사람이었고 좋은 사람이었다. 제가 혼수상태로 있는 동안 다른 좋은 혼처가 들어왔을 텐데도, 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건강해 보이시네요.”

“네. 다행히.”

“하실 말씀이라는 게….”

“우리, 결혼하지 말아요.”

“네?”

“저랑 결혼하고 싶으신 거 아니잖아요.”

“그렇지만….”

“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과 결혼하시고, 없으시다면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사세요.”

“윤기 씨.”

“제가 좋아하는 사람이 저한테 가르쳐 준 거거든요. 전 이제부터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살 생각이에요. 더 이상 조종사도 못 해요. 많이 다쳐서. 꽤 괜찮은 짝 아니니까. 저 떠나셔도 됩니다.”

 

 

윤기의 말에 맞은편의 여자는 잠시 말이 없었다. 오랜만에 만난 정혼자가 느닷없이 이별을 고하면서 이상한 말들을 쏟아냈다. 윤기는 가고 싶은 곳이 있어 마음이 조급했지만 그래도 앞에 앉은 이를 기다리기로 했다. 그는 이 말을 듣기 위해 오랜 시간 동안 윤기를 기다렸으니까. 깜빡거리며 천천히 생각하는 얼굴이 예뻤다. 예쁜 얼굴이었다. 생각을 다 마쳤는지 꽤 큰 눈이 윤기에게 닿았다. 얼굴에 걸린 미소를 보니 예감이 나쁘지 않았다.

 

 

“좋은 말이네요.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살라는 말.”

 

 

그 다정한 미소에 윤기도 덩달아 미소 지었다. 그간 두 사람 사이에는 알게 모르게 뻣뻣한 기운이 있었는데 지금 두 사람 사이엔 그런 게 없었다. 꽤 오래 알고 지냈는데 오늘만큼 편하게 서로를 바라본 적이 없는 거 같았다. 잠시 고개를 끄덕거린 후 다시금 말을 이었다.

 

 

“가고 싶은 곳이 생겼네요. 고마워요. 그리고 잘 지내세요. 좋은 분이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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