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래더] 트위터는 @Rather_0613 (舊 새벽의덕후)

[뷔민국/랩민] 지민의 역사

 

 

 

W.새벽의덕후

 

 

 

<Ep. 끝나지 않을 우리의 역사 中>

 

 

 

일은 그렇게 시작됐다. 피로감에 휩싸여 개강 주를 살아가던 어느 날. 교정에서 참 반가운 사람을 만났다.

 

 

“박지민?”

“어? 남준 선배?”

“야. 너 진짜 오랜만이다. 잘 지냈어?”

“저야 잘 지냈죠. 선배는요? 제대하신 거예요? 벌써?”

“응. 시간 참 빠르지?”

 

 

웃으면서 악수를 청하는 이 사람은 나보다 한 학번 위 선배인 김남준 선배였다. 입학하자마자 정신없던 학교생활, 과 생활에서 나의 구원자 같았던 사람. 엠티에서는 술을 좀 덜 마시게 도와주고, 강의 과제나 퀴즈 족보 같은 것도 슬쩍슬쩍 챙겨줬던 선배였다.

 

처음엔 선배가 그 학년 과대여서 어려웠었고, 그 이후로 좀 친해지려고 할 즈음엔 선배가 입대하게 돼서 안타깝게도 편하게 말을 놓는 사이는 되지 못했다. 그래서 나중에 다시 만나게 되면 어색할 줄 알았는데, 그저 반갑기만 했다.

 

 

“그러네요. 벌써 그럴 때가 됐구나.”

“그니까. 근데 너는 하나도 안 변했다. 여전히 작고 깜찍하네.”

“선배! 으씨. 선배도 여전하시네요. 그렇게 점잖은 표정으로 사람 놀리고 시비 거는 거.”

“귀여워서 그러지. 오랜만에 본 우리 후배님이 여전히 귀여워서.”

“놀리지 말라고 했죠!”

“안 했는데.”

“선배 진짜!”

“농담이야. 농담. 밥 먹었어? 안 먹었음 먹으러 가자.”

 

 

내 주위에서 잠시 떨어져 있다가 다시 만나게 된 사람들은 왜 이렇게 하나같이 잘생겨져서 돌아오는 걸까. 전에 어떤 선배는 제대하고 봤을 때 살이 더 쪄서 나왔던데. 남준 선배는 더 남자다워지고 잘생겨진 거 같았다.

 

짧은 머리카락을 감추려고 하는 건지 검은 볼캡 모자를 쓰고 있었는데, 작은 얼굴 때문에 모자가 기가 막히게 잘 어울렸다. 군대 가기 전에도 과에서 옷 잘 입고 패션 센스 좋기로 소문난 형이었는데, 그 센스는 제대하고도 여전했다. 군대에서 패션잡지만 정독했나. 동그랗고 얇은 검은 테 안경을 쓰고 있었는데 그것도 잘 어울렸다. 아, 진짜 잘생겼다.

 

 

 

 

“뭘 그렇게 자꾸 봐. 부끄럽게.”

“선배 잘생겨서요.”

“컥, 야. 크흠. 너는 무슨 그런 말을 갑자기.”

 

 

식당에 들어가 앉아서 메뉴를 고르는 와중에도 나는 선배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런 내가 웃겼는지 날 흘끗 쳐다보며 질문했던 선배가 물을 마시다가 조금 뿜어버렸다. 테이블에 놓여있던 휴지를 뽑아 테이블과 선배의 손을 닦아주면서도 나는 시선을 떼지 않고 있었다.

 

 

“깐 달걀처럼 매끈매끈하게, 되게 잘생겼어요.”

“칭찬 맞냐?”

“맞죠. 진짜 엄청난 칭찬인데.”

“너도 잘생겼어.”

“알죠. 저도.”

 

 

내 말에 선배가 입을 가리면서 웃었다. 신입생 때도 느꼈던 거지만 이 선배는 웃는 게 진짜 귀엽다. 입매가 시원하게 호선을 그리며 웃었고, 웃으면 볼에 보조개도 예쁘게 생겼다. 가끔 입을 가리고 웃기도 했다. 이모티콘 모양으로 눈을 찡그리고 웃으면서 손으로 입을 가렸는데, 그때 입을 막은 손이 곧게 잘 뻗은 게 엄청 잘생겼다.

 

내가 이 선배에 대해 왜 이렇게 상세하게 알고 있냐면, 좀 좋아했거든. 이 선배를. 다정하고 친절하고 잘생겼고. 대학교에 오자마자 캠퍼스에 대한 로망과 낭만에 딱 맞는 선배를 만나서 엄청 설레었었다. 나한테 잘해주는 거 보고 혹시 나와 같은 정체성을 갖고 있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같은 학번 여자 동기와 1년째 커플이었다는 걸 듣고 마음을 천천히 정리했다. 그래 원래 잘생기고 괜찮은 남자는 내 남자가 아니랬어, 라고 전정국과 헤어지고 김태형과 사귀기 전까지 늘 생각했었다.

 

아무튼 그래서 나 혼자 심적으로 굉장히 가까우면서도 설레고 좋은 느낌으로 기억되던 사람이라 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 진짜 엄청 기뻤다.

 

 

그렇게 늦은 점심을 먹고, 서로 남은 수업도 없어서 같이 오랜만에 술도 마시러 가고 이런저런 이야기도 나누고 그랬다. 학교 앞 술집이라 오가는 아는 얼굴들도 많아서 같이 모여 있다가, 헤어졌다가를 반복했다.

 

여러 번 자리를 옮겼고 그러다보니 어느새 선배와 나 둘이서 조용한 술집에서 잔을 나누고 있었다. 언제나 어른스럽고 이상하게 의지가 되던 사람이라 그런지 술이 좀 들어가자 나도 모르게 한탄을 하고 있었다.

 

 

“제가요. 사귀는 애가 있는데요.”

“어? 사귀는 사람이 있다고?”

“네에. 근데 진짜. 하. 너무 힘들어요.”

“뭐가?”

“걔가 엄청 좋은데요. 최근에 몇 번 저를 좀 힘들게 했거든요. 제가 원하는 대로 결말이 나긴 했는데. 그럼 뭐해요. 이미 상처 받을 건 다 받았는데. 나는 다 힘들었는데. 걔는 조금만 힘들고.”

 

 

한탄하다보니 내 처지가 서러워졌다. 앞에 놓인 술잔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술이 시원한 게 자꾸 당겼다. 입맛을 다시며 잔을 만졌고, 선배를 쳐다봤다. 선배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내 잔을 채워줬다.

 

 

“근데 왜 안 헤어져? 널 그렇게 힘들게 하는데.”

 

 

선배의 말에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술잔을 다시 입에 가져갔다. 목까지 뒤로 확 젖혀 삼켜낸 후에 잔을 테이블에 소리 나게 올려놨다. 그리고 내 머리통도 테이블 위에 올려뒀다. 왜 안 헤어지냐고? 나도 모른다. 그냥 못 헤어지겠으니까, 그러니까 사귀고 있는 거다. 힘들긴 한데 헤어질 이유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근데 그렇다고 힘들지 않은 건 아니고.

 

김태형을 볼 때마다 자꾸 속상하고 괴로워서 집에도 잘 안 들어가고 그랬다. 괜히 친구들 만나고, 밖으로 나돌고. 생각 정리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김태형과 무언가 대화할 자신이 없었다. 그 애 얼굴을 보고 미운 소리 할 자신도 없고.

 

 

“좋아서요. 걔가. 그냥 좋아만 하는 줄 알았더니. 꽤 사랑하는 거 같기도 하고.”

 

 

어떻게 생각해도 결론은 이거 하나뿐이다. 이게 아니라면 내가 이렇게 김태형을 참아줄 이유가 없다.

 

 

“진짜 바보 같죠. 저.”

 

 

고개만 들어 올려서 턱을 테이블 위에 기대고 술기운에 잘 떠지지 않는 눈을 한 채 웃어버렸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숙였다. 목이 아팠다. 테이블에 이마를 대고 있는데 뒤통수에 다정한 손길이 올라왔다.

 

 

“아니. 바보 같지 않아. 나는, 오히려 부럽네.”

 

 

그 손길이 좋아서 눈을 감은 채 가만히 있었다. 뭐라고 선배가 묻는 질문에 대꾸 몇 번 하다가 그대로 잠들어버렸다.

 

다음 날 집에서 눈을 뜨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숙취에 울리는 머리에서 지난 날 일이 떠올랐고 어떤 이야기를 얼마나 했는지 제대로 생각나지 않아서 불안했다. 스치듯 지나간 기억 속에서 커밍아웃을 한 거 같기도 하고. 아니. 했다. 커밍아웃.

 

 

‘…김태형….’

‘여자친구 이름이 태형이야?’

‘…남자친구! …거시기도 크다! …….’

 

 

드문드문 어떤 기억들이 얽혀서 떠올랐다. 옆에서 자고 있는 김태형 때문에 큰 소리를 낼 수 없어서 입을 안으로 말아 물고 머리통을 쥔 채 끙, 하는 소리를 냈다. 도대체 술 취해서 무슨 소리를 지껄인 거야.

 

 

“미친. 박지민 진짜 개쓰레기….”

 

 

감당 못할 정도로 술을 마셨고 게다가 노멀인 사람한테 대뜸 커밍아웃까지 해버렸다. 요새 내가 제정신이 아니긴 하구나. 그간 수많은 힘든 시간들이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앞뒤 없이 군적은 없는데. 침대에서 몸을 잔뜩 웅크리고 벽에 머리를 찧었다. 죽자. 이대로 죽으면 될 거야.

 

그렇게 절대 죽지 않을 정도의 세기로 벽에 머리를 박고 있을 때 핸드폰 알람이 울렸다. 역시 숙취가 좋긴 좋네. 알람보다 일찍 깨는 얼리버드의 삶을 선물해주고. 남들보다 일찍 죽고 싶은 얼리다잉의 삶도 선사해주고. 썅.

 

알람을 끄기 위해 빠르게 핸드폰을 잡았고 아예 해제를 시켜버렸다. 그러고 화면을 살피는데 남준 선배에게서 카톡이 와있었다. 떨리는 마음으로 천천히 상태바만 내려 카톡을 확인한 나는 그대로 머리를 쥐어뜯어야 했다.

 

 

 

[이따 학교에서 잠깐 얘기 좀 하자.]

 

 

 

*

 

최대한 피하려고 했다. 어떻게든 피해보려고 했는데 같이 듣는 수업이 있었다. 강의실에서 멍하니 앉아있는데 누가 옆에 와서 앉았고 내 책상을 톡톡 두드렸다. 놀라 돌아본 자리에는 남준 선배가 있었다. 복학한 선배가 나와 같은 학년이라는 걸 까먹고 있었다. 멍청한 박지민.

 

선배는 한껏 당황한 나를 보며 웃었고, ‘이따 점심 같이 먹자.’하는 말과 함께 어깨를 다독여줬다. 지금은 이렇게 웃지만 이 강의가 끝나면 선배가 나를 어디론가 데려가 경멸스러운 표정으로 ‘이 더러운 게이 새끼! 호모 새끼!’ 하며 욕을 하지 않을까 걱정되기도 했다.

 

 

수많은 시간들이 있었다. 동성애자로 살아오면서 최대한 내 정체성을 숨겼지만 자의로, 타의로 드러냈을 때 수많은 반응을 맞이해야 했다. 대체로 많은 반응들이 부정적이었다. 세상이 많이 바뀌었다고 하지만 내가 겪었던 세상은 아직 멀어도 한참 멀었었다. 수없이 상처받았고 힘들었다. 세상에서 상처받고 집으로 들어왔을 때 보여지는 풍경은 마치 환상 속 세상 같았다. 나니아 연대기에서처럼 옷장 속으로 들어가 새로운 세계와 마주했을 때의 기분을 나는 매일 느꼈다.

 

그랬기에 선배의 다정한 미소도 지금은 불안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온갖 가정들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고, 그 가정된 상황들마다 대처할 방법을 마련하다보니 짧은 오티가 끝나 있었다.

 

 

“가자. 지민아. 속 안 좋지? 해장국 먹을래?”

“네, 네? 아니 저는 뭐.”

“그 속으로 까르보나라는 좀 그렇지 않을까.”

 

 

오. 와. 방금 까르보나라 얘기 듣자마자 쏠렸어. 진짜 목구멍부터 위장까지 까르보나라 크림이 달라붙어서 휘모리장단을 치는 느낌이었다. 와.

 

 

“해장국으로 해요.”

 

 

커밍아웃이고 나발이고 지금 내 위장이 겟아웃 될 지경이니까 얼른 속을 좀 풀어야할 거 같았다. 갑자기 쓰려오는 속을 붙잡으며 말하는 날 보며 선배는 웃었다. 그리곤 날 붙잡고 강의실을 빠져나갔다.

 

학교 앞 해장국 집까지 가는 내내 선배와 어색할 줄 알았는데 그런 게 전혀 없었다. 예전처럼 선배가 장난을 걸면 나는 노려보며 빽빽대고, 그러다 속이 다시 쓰려오면 배를 움켜잡고 그런 날 선배가 토닥이고. 정신없이 걷다보니 해장국 집엔 금세 다다랐다. 각자 메뉴를 시키고 앉아서도 여전히 투닥대는 탓에 나는 잠깐 동안 내가 선배를 왜 피해 다녔는지 잊었다.

 

 

뜨끈한 해장국이 상 위에 올라오고, 그릇에 내용물이 반쯤 사라졌을 때가 되어서야 내가 왜 선배와 점심을 먹고 있는지 기억해낼 수 있었다.

 

 

“어제 일. 기억 나?”

“컥, 네?”

 

 

이 사람이. 해장을 시켜주고 위장에 탈을 낼 셈인가. 이건 무슨 신종 약 주고 병 주고야. 켁켁대며 목에 걸린 콩나물을 어떻게든 빼내고 있으니 눈앞에 물잔이 다가왔다. 순간 여기 호그와트인 줄. 물컵 날아다니는 줄.

 

 

“잘생긴 남자친구랑은 화해했어?”

“크헉. 예?”

 

 

아니 진짜! 도대체 이 선배 왜 이러는 거야. 뭘 줬으면 준 걸 잘 받아먹고 소화도 시키고 소화 잘 되면 트림까지 하는 걸 보고 충격을 주든가 해야지. 해장국 내밀었다가 어제일 상기시키고, 물 내밀었다가 김태형을 들먹이는 건 뭔데 대체.

 

근데. 선배가 김태형 잘생긴 거 어떻게 아세요?

 

 

“어제 너 업고 집까지 데려갔다가 봤어. 너랑 같이 사는 네 남친.”

“예? 아니. 큼. 그거 어떻게.”

“너 업고 있는 나 노려보는 게 지나가는 백구가 봐도 박지민 애인이구나, 하겠던데 뭐.”

“아. 걔가 좀 그런 게 있죠.”

 

 

다시 목을 가다듬으면서 물을 마셨고 선배 눈치를 흘긋대며 봤다. 반응이 조금 애매했다. 경멸도 아니었고, 어쭙잖은 위로를 하지도 않았고, 쓸데없는 말을 붙이지도 않았다. 괜히 해장국 국물을 떠먹으며 무슨 말을 더 꺼내야할지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화해했어?”

“아, 아니요.”

“하긴 화해할 틈이 없기도 했겠다.”

 

 

선배의 반응에 내 머릿속은 물음표로 가득 차고 있었다. 적어도 ‘너 진짜 게이야?’ 라든가, ‘정말 남자 좋아해?’하는 질문은 올 줄 알았는데 그런 남들 다 하는 물음이 한 번도 오지 않았다. 그냥 일상적인 대화와 다를 게 없었다. 후배의 연애 고민을 들어주는 선배의 흔한 대화였다.

 

입술 사이로 나와 있는 콩나물을 오물오물 씹어 먹으며 선배를 바라봤다. 선배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해장국 그릇을 숟가락으로 헤집고 있었다. 그제야 이게 내 커밍아웃에 대한 선배의 반응이라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나도 모르게 입가에 슬쩍 미소가 얹어졌다. 참 언제 봐도 멋있는 사람이었다. 그 어떤 것 없이 아무렇지 않게 넘어가는 거.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지만 커밍아웃에 있어서는 참 나오기 힘든 반응이었다.

 

 

그 후로는 좀 더 일상적인 대화를 했다. 그 대화들 속에서도 구태여 나의 커밍아웃에 대해 덧붙이거나 얹는 말은 없었다. 그렇게 해장국을 싹싹 비운 우리는 카페로 향했다. 해장국을 선배가 사줘서 음료는 내가 쏘기로 했다. 됐다고 말리는 선배를 되레 말리며 자리에 앉혀두고 음료 두 잔을 아무지게 받아 챙겨서 자리에 앉았다.

 

 

“진짜 고집은. 이게 얼마나 민망한 줄 아냐. 후배한테 얻어먹는 거.”

“선배한테 계속 얻어먹는 후배도 민망하기는 마찬가지거든요. 어차피 똑같이 가난한 대학생인데. 어떻게 일방적이기만 해요.”

 

 

내 타박에 선배가 보조개를 보이며 웃었다. 그런 선배를 보며 따라 웃었고 마치 청춘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그러고 꼴같잖게 있던 우리 둘은 현실을 느끼고는 얌전히 음료를 빨아마셨다. 선배는 아이스 카페라떼를 마셨는데 왠지 모르게 엄청 어울렸다. 커피가 잘 어울린달까. 어른 같은 느낌이긴 했다. 김태형은 뭔가 초코라떼 느낌인데. 유치뽕짝한 그런 느낌.

 

 

 

“왜 한숨을 쉬어.”

“에? 저 한숨 쉬었어요?”

“어. 엄청 큰 소리로. 그렇게 아까웠어? 나한테 커피 사주는 게?”

“아니. 아니에요. 진짜 아니에요. 그냥 뭐.”

“남친 생각했어?”

 

 

손사래를 쳐가며 부정하다가 선배의 물음에 흔들던 손을 내려놓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김태형 생각을 했더니 나도 모르게 한숨이 쉬어지는 경지에까지 이르렀다니. 얘에 대한 고민이 깊긴 하구나 싶었다. 다시 한번 한숨을 뱉으며 앞에 놓인 음료수를 빨아들였다.

 

 

“진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빨대를 빙빙 돌리며 뱉은 내 말에 선배는 아무 말이 없었다. 유리잔에서 뱅글뱅글 돌아가는 얼음을 바라보다가 고요함에 민망해져서 고개를 들었다. 남준 선배가 날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괜히 멋쩍어져서 무슨 말이라도 하려는데 나보다 먼저 선배가 말을 꺼냈다.

 

 

“지민아.”

“네?”

 

 

아니 선배님. 그렇게 갑자기 그윽하게 제 이름을 부르시면 좀 그래요. 제 입꼬리가 빙그레요. 저도 모르게 웃게 된다구요.

 

 

“그럼 나랑 할래?”

“예? 뭐를요?”

 

 

웃던 표정을 가지런히 정리하고 청순하게 되물었다. 만일 내가 김태형과 사귀지 않고 있었다면, 뭔지 모르겠지만 좋아 보이니 고개를 끄덕였을 것만 같은 질문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김태형과 사귀는 상태의 나는 긍정을 하면 안 될 것 같아서 그저 고개를 갸웃거리기만 했다. 고개를 젓기는 싫었다.

 

아, 근데 뭔가 좀 아쉽네. 내 짝사랑 선배랑 섹스 함 하는 건가 싶었는데, 하는 내 음흉한 마음의 소리를 조석 작가가 꾸짖기라도 하는 것처럼 앞에 앉은 선배의 말이 들렸다. 물론 그 말도 ‘섹스’만큼이나 당황스러운 거긴 했다.

 

 

“연애.”

“네에?”

 

 

이 선배가 불륜에 취미가 있으셨나. 아니면 뭐 게이랑 함 사귀어보고 싶으신 겁니까! 이런! 내가 남준 선배 멋진 어른이라고 속으로 몇 번이나 치켜세웠는데! 거의 뭐 김태형 거시기랑 전정국 거시기 세웠던 거만큼이나 세워줬던 거 같은데! 그쪽이 이러면 안 되지 이 사람아!

 

 

“하는 척.”

 

 

그대. 반전 있는 남자군요.

 

 

눈을 번뜩거리며 속으로 뱉었던 숭한 말들을 잘 다독여 넣어두고 다시 얌전하게 굴었다. 선배는 그런 내 표정 변화가 어떤 의미인지 알기라도 하는 듯이 턱을 괴고서 가만히 웃을 뿐이었다.

 

 

“연애하는 척이요?”

“말이 그렇다는 거고. 그냥 우리 둘 사이에 뭔가가 있는 거 같은 느낌만 내자는 거야.”

“네? 왜요?”

“그렇게 생기긴 했지만 생각보다도 더 순둥하네.”

 

 

선배의 말이 정확히 뭘 의미하는 건지 몰라서 자꾸 되묻기나 하자 답답했는지 선배는 음료를 쭉 빨았다. 그리고는 내 쪽으로 몸을 더 기울여 왔다.

 

 

“네 남친이 너 속 썩인다며. 너도 걔 속을 좀 썩여줘야지.”

“네?”

“그냥 기분 풀릴 정도만 괴롭혀주자는 거야. 그때 얘기 들어보니까. 네 남친 인기 많아서 여기저기서 달라붙는 애들 많다며. 그거 때문에 힘들고. 그러니까 너도 해보라는 거지.”

“아.”

 

 

선배의 깔끔한 설명에 머리에 전구가 켜진 느낌이었다. 이렇게 속으로 끙끙 앓고 김태형을 피해봤자 어떤 답이 나올 거 같진 않았다. 딱히 답이 있는 문제도 아니었고. 김태형과 사귀면서 겪은 여러 가지 일들로 나는 심신이 지쳐있었고, 조금 서러운 상태였다. 그 마음을 좀 풀 수만 있으면 어딘가 나아지지 않을까. 선배의 제안이 자꾸 마음속에서 설득력을 만들어냈다.

 

 

“저야 진짜 좋은 기회긴 한데. 선배는 왜 이걸 해주세요?”

“…어, 그게.”

 

 

김태형 걔가 내 속을 썩인 게 얼만데. 이 정도 골탕은 먹어도 된다고 생각이 들었고 선배의 제안을 받아보기로 했다. 다만 궁금했다. 선배 같은 사람이 왜 나에게 이런 걸 해주는지. 단순히 게이에 대한 호기심 때문은 아닌 거 같았다. 호기심이라기보다는 호의에 가까웠다. 그러니까 남준 선배가 왜 나에게 호의를 베푸느냐는 거지.

 

내 질문에 당황한 듯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던 선배는 갑자기 내 뒤쪽 어딘가를 가만히 응시했다. 그리고는 턱짓으로 살짝 어딘가를 가리켰다.

 

 

“쟤.”

“네?”

“맨날 너랑 다니면 뒤에서 음산하게 노려보는 쟤. 쟤 좀 부탁하자.”

 

 

선배의 말에 뒤를 돌아봤다. 쟤가 누군데. 라는 생각을 하며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가 그대로 기절할 뻔했다.

 

 

“전정국?”

“쟤 이름이 전정국이야?”

“쟤 언제부터 저기 있었어요?”

“…너 되게 둔하다. 우리 강의실에서부터 쭉 쟤랑 같이 있었는데.”

“네?”

 

 

말도 안 돼. 전정국이랑 하루 종일 같이 있었는데 그걸 몰랐다고? 충격적인 사실에 진짜로 숨이 넘어갈 것 같았다. 아니 근데 전정국 쟤는 왜 저러고 있는 걸까.

 

정국이는 카페에 있는 커다란 나무장식 뒤의 테이블에 앉아서 매미마냥 나무에 달라붙어서 우리 쪽을 음산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내가 돌아보자 스윽하고 나무 뒤로 숨는데, 다 보여. 정국아. 너 덩치가 되게 커. 네가 숨은 그 나무를 몸에 심어도 될 만큼 덩치가 산만하단다, 얘야.

 

 

“와. 소름 돋는다.”

“몰랐어? 너랑 다니면 매번 쟤가 뒤에서 저러고 따라다녔어.”

“저 정말 처음 알았어요. 우와. 아무튼 쟤는 왜요?”

“나 영어회화 동아리 하잖아. 거기 쟤 좀 영입하자. 우리 동아리가 죽기 직전인데. 저런 젊고 잘생기고 보기 좋은 애 하나 있으면 살아날 거 같아. 게다가 쟤 유학파라며. 딱이야.”

 

 

일리 있었다. 선배는 경영학과 소모임으로 있는 영어회화 동아리에 꽤 오래 몸담고 있었다. 아마 다음 동아리 회장으로 내정되어 있다고 들은 거 같은데. 아무튼 영어회화 동아리는 역사가 길었고, 그만큼 인기가 시들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상하게 과에서 퇴물 느낌을 주는 동아리라서 아무도 들려고 하지 않았다.

 

근데 뭐 정국이처럼 잘생기고 외국까지 다녀온 애가 동아리원이 되면 적어도 정국이를 마음에 품은 새내기들은 좀 들어가겠지. 동아리라는 게 신입유치가 가장 중요한 문제니까.

 

 

“좋아요. 정국이 영입은 제가 맡도록 하죠.”

“난 네 남친 속 썩이는 일에 일조하도록 할게.”

 

 

남준 선배는 크고 잘생긴 손을 내밀었고 테이블 위에 떠있는 손을 맞잡았다. 그렇게 카페에서 천상의 계약을 하게 됐다. 김태형 너도 어디 속 좀 썩어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