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래더] 트위터는 @Rather_0613 (舊 새벽의덕후)

[뷔민국/랩민] 지민의 역사 

 

 

W.새벽의덕후

 

 


<Ep. 끝나지 않을 우리의 역사 上>

 



내 연애사가 그렇다. 언제나 박지민을 사랑하는 상태에서 누군가를 만났다. 그래서 당연히, 상대방을 향한 애정 같은 게 있을 리가 없었다. 연애는 그냥 재밌어서 했다. 지민이와 해볼 것들을 미리 연습한다는 생각으로 누군갈 만났고, 관계를 지속해 나갔다.

 

그랬기에 이별의 아픔이라는 게 있을 리가 없었다. 누군갈 만나고, 누군가의 일방적인 애정을 받다가 헤어지고, 그 사람이 돌아오겠다고 매달리는 그 일련의 과정들을 그저 흥미롭게 관전했다. 차여도 그만, 차도 그만인 연애들이었다. 늘 미련은 내가 아니라 저쪽에서 있었으니까.

 

그래서 난 애탈 필요가 없었고, 애쓸 필요가 없었다. 편하게 굴었고, 하고 싶은 대로 했다. 수 년, 혹은 그 이상을 이렇게 굴어왔던 내가 드디어 사랑하는 사람과 연애를 시작했다고 해서 변할 리가 없었다.

 

 

― …전화기가 꺼져있어….

 

 

“도대체 전화는 왜 안 받아. 지민아.”

 

 

내가 지민이를 사랑하는 건 태어났을 때부터 각인된 진리 같은 거지만, 그건 그거고 내 연애습관은 연애습관이었다. 습관은 자연스레 배어나왔고 지민이에게도 예외는 없었다. 그런 내 행동이 상처가 된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전 애인들을 만나는 것도, 인스타로 연락을 하던 것도 끝내 지민이가 화를 내고, 회유하고, 어르고 달래고 나서야 관뒀다. 모든 사건의 마지막엔 지민이가 바라는 대로 했기 때문에 다 괜찮은 줄 알았다. 내가 지민이를 떠나지 못하는 것처럼 그 애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안일하게 생각했다.

 

‘애정의 온도’ 혹은 ‘애정의 무게’와 같은 말들이 있다. 그게 연인 사이에서 얼마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지, 수많은 연애를 해놓고도 여태 모르고 있었다. 지민이가 존재하지 않던 연애사에서 나는 차가웠고 가벼웠다. 지민이가 존재하는 연애에선 뜨거우며 묵직하다. 전처럼 제멋대로 굴어왔지만, 그래서 지민이에게 상처를 주고 있었지만 이상하게 나 역시 상처받고 있었다. 어딘지 모르게 변하는 그 애를 보면서 이상함을 느꼈다.


 

어떻게 보면 지민이는 부처급으로 수양한 예수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이런 나를 언제나 용서해주었고, 봐줬다. 지민이가 갖고 있는 애정의 온도나 무게가 어느 정도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감히 예상하자면 20년 넘게 품어온, 내가 가진 것보다는 가벼울 감정이었다. 그럼에도 지민이는 늘 나를 봐줬다. 그래서 다시 안일해졌는지도 모른다. 계속 그렇게 굴어도 박지민은 언제나 내 것일 거라고.

 

 

“대체 왜 안 와.”

 

 

벌써 새벽 2시 15분이 넘어가는데 지민이가 집에 오질 않고 있었다. 요새 계속 이런 식이었다. 연락두절에 잦은 외박, 시큰둥한 반응까지. 시곗바늘 소리에 맞춰서 엄지손톱을 톡톡 뜯어내고 있었다. 아까 11시쯤 얼큰하게 취한 목소리가 내가 접한 지민이의 마지막 소식이었다. 돌겠는 건, 그 취한 목소리가 박지민의 것이 아니라는 거였고 그 옆에서 ‘지민아 괜찮아?’하는 다정한 목소리도 들렸다는 거다.

 

전정국 목소리는 아니었다. 아까도 몇 번이나 같이 있는 게 아니냐고 전화를 걸었는데 한 열다섯 번쯤 걸었을 때였나, ‘진짜 짜증나게 하지 말고 자요. 좀.’ 이라고 잔뜩 신경질을 부린 전정국은 내 번호를 수신 거부해 놨다.

 

 

“개자식.”

 

 

전정국이 날 수신 거부하기 전에 지민이의 거취에 대해 물었을 때 과모임 같은 건 없다고 했다. 전정국 말고도 내가 알고 있는 지민이의 지인 및 친구들에게 전부 연락을 돌렸지만 그들 곁엔 없었다.

 

아까 12시가 지났을 때부턴 현관문을 노려보며 신발장 앞에 서서 지민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머니들은 해외로 장기 여행을 떠나셨기에 집은 오롯이 우리 둘이 쓰고 있었다. 이런 황금 같은 기간에 박지민이 방황하고 있었다. 벌써 일주일째.

 

 

“안에, 안에 계세요?”

 

 

손톱을 뜯어낸 손가락에서 핏기가 좀 비출 무렵 현관에서 기척이 들렸다. 목소리의 주인은 지민이가 아니었지만 일단 문부터 열었다. 현관문 앞에 서 있던 사람이 갑자기 열린 문에 어이쿠, 하는 소리를 내며 걸음을 뒤로 물리고 있었다. 당신 뭐야, 라고 시비를 걸려던 찰나에 서있는 사람 얼굴 옆으로 머리통 하나가 보였다. 까만콩 같이 작고 동그란 익숙한 정수리가.

 

 

“박지민?”

“아. 네. 다행이다. 여기가 맞았네.”

“이리 주세요. 제가.”

“아니에요. 제가 할게요. 지민이 방이 어디에요?”

“제가 해도 되니까. 좀.”

“그러면 깰 거 같은데. 그냥 제가 할게요. 불 켜져 있는 저 방 맞죠? 실례 좀 하겠습니다.”

 

 

문 앞에 있던 사람은 처음 본 나에게 다정하게 웃어주더니 자연스럽게 집 안으로 들어왔다. 확 무단침입으로 신고해버릴까 하다가 참았다. 그 사람 등에 매달려 주둥이를 쭉 내밀고 잘도 자고 있는 지민이가 예뻐서 참을 수밖에 없었다.

 

눈치도 빠른 이 사람은 나와 지민이의 방으로 휘적휘적 걸어가더니 자기 등에 매달린 예쁜 애를 조심스럽게 침대에 눕혔다. 뭐라 잠꼬대를 하며 몸을 뒤척이는 지민이를 다독이더니 이불까지 덮어줬다. 지금 이거 무슨 상황인데.

 

 

“근데 누구세요.”

“인사가 늦었네요. 김남준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김남준이 누군데 박지민을 등에 매달고 와서는 나와 지민이의 스위트 하우스-명의는 우리 모모님-에 거침없이 들어온 거냐고. 사나운 말이 혀를 씹어댔지만 참았다. 근데 이 김남준 씨는 키가 왜 이렇게 커. 얼굴은 왜 저렇게 작으며 팔다리 간지는 뭔데. 뭐 이렇게 모델 간지가 작살나는데.

 

아, 박지민 진짜. 박지민 같은 예쁜이를 사귄다는 건 이런 위험부담을 떠안는 일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니까 늘 주위에 이 사람처럼 보통 이상은 넘는, 그런 존재들이 넘실거린다는 거다.

 

지민이는 자기가 예쁘다는 건 좀 아는 거 같은데 그 예쁨 때문에 인기가 많다는 건 전혀 모르고 있다. 그 눈치 없음에 의지하고 있었는데, 그것과는 관계없이 나는 늘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다. 박지민 주위를 알짱거리는 존나 멋진 시발놈들을 처단하기 위하여.

 

물론 그 시발놈 중 1번은 단연 전정국이다.

 

 

“성함 말고, 지민이와의 관계가 궁금한데요.”

“아. 선배예요. 과 선배.”

“못 들어봤는데.”

 

 

내가 눈을 매섭게 뜨며 김남준 씨를 올려다-시발-봤다. 처음 본 낯설지만 잘생긴 나 같은 사람이 이렇게 노려보면 기분이 상할 만도 한데, 지민이를 업고 다니다가 지민이의 부처급으로 수양한 예수의 성품을 흡수했는지 아주 자비로운 미소를 지으며 날 바라봤다. 뭐야. 뭐가 이렇게 자비로운데. 존나 부처세요? 근데 부처를 닮은 자애로운 미소를 갖고 있는 사람이 날 향해 뱉는 말은 그다지 자애로운 게 아니었다.

 

 

“지민이에 대해서 모든 걸 알고 있다고 자신하는 거 같네요.”

“네?”

“지민이가 굳이 말하지 않으면 모를 수도 있죠. 한 집에 산다고 해도.”

 

 

여전히 웃는 얼굴이었지만 어쩐지 더 이상 자비로워 보이진 않았다. 그래 부처 닮기가 어디 쉽나. 자세히 보니까 생김새도 부처랑 달라. 완전 달라. 키도 크고, 팔다리도 길쭉하고, 얼굴도 작고. 날렵하게 잘생긴 이 사람한테 지고 싶지 않아서 은근슬쩍 발꿈치를 들썩거리며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리고 굳이 뽐내지 않으려 했던 사실을 알렸다.

 

 

“저랑 지민이는 단순히 한 집에 살고 있는 사이가 아니거든요.”

 

 

이쯤 되면 알아들었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팔짱도 딱 끼고 -절대 팔 길이를 의식한 건 아니다-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근데 내 앞의 김남준 씨는 좀처럼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더 여유롭게 입꼬리를 올렸다. 뭐지 이거 약간 데자뷰 같아. 그 누구야. 지민이 알바하던 곳 점장이라던. 민…매끈? 미끌? 뭐 그런 느낌이었는데. 아무튼 그 사람 생각나네.

 

 

“저도 지민이랑 단순히 학교 선후배 사이가 아니라서요.”

“뭐라고요?”

“오늘은 늦었으니까 이만 가보겠습니다. 이 시간까지 남의 집에 있는 건 실례 같네요.”

 

 

점잖게 고개를 숙여 인사한 김남준 씨는 성큼성큼 걸어 집을 빠져나갔다. 나는 멍하니 닫힌 문만 보고 있었다. 방금 내가 뭘 들은 거지. 단순한 학교 선후배 사이가 아니야? 하 진짜. 박지민은 도대체 어떤 생명체길래 세상 모든 선후배들을 다 홀리냐고. 물론 동갑내기 친구까지.

 

…그럴 만하지. 박지민이 좀 예뻐?

 

 

“으우으으. 선배애….”

 

 

뒤에서 들려오는 지민이 목소리에 빠르게 몸을 돌렸다. 그리고 한숨을 내뱉었다.

 

 

“진짜. 내 속도 모르고.”

“서언배애…. 한잔 더 해애….”

“이러고 다니니까 저런 잘생긴 선배가 업고 다니지. 주정부리는 것까지 예쁠 필요는 없잖아.”

 

 

방 안으로 들어가 침대에 걸터앉았다. 웅얼거리는 지민이의 입술을 손가락으로 톡, 건드렸다. 얘 입술은 좀 이슬방울 같은 매력이 있어서 괜히 건드려보고 싶다. 만지면 뭔가가 팡 터질 것만 같았다. 내가 입술을 만지자 기대했던 뭔가가 터지진 않았고 대신 지민이가 입술을 조금 움찔거렸다. 미간을 찌푸리고 입술을 오물거린 후에 다시 색색거리며 잠들었다.

 

 

“꿈에선 나랑 좀 놀자. 깨고 나서도 놀아주고. 응? 잘 자 지민아.”

 

 

 

_

눈을 떴다. 늘 졸음이 가득 붙은 눈을 뜨면 지민이가 보였다. 그런데 지금은 보이질 않았다. 어제 새벽에 들어와 놓고 부지런하게 아침 수업에 나간 모양이었다. 비어있는 시야를 바라보다가 다시 눈을 감았다.

 

안 좋은 습관은 나만 가진 게 아니었다. 지민이에게도 안 좋은 습관이 있었다. 무슨 일이 생기면, 고민이 생기면 일단 속에다 꼭 감춰뒀다. 그리고 해결이 될 때까지, 아니면 도저히 참을 수 없을 때까지 입 밖에 꺼내지 않았다. 단순히 고민뿐 아니라 숱한 말들 전부 입 안에 담아놓고 있었다. 이 습관은 함께 지내는 상대의 속을 터지게 하기 딱 좋았다.

 

 

“진짜…. 박지민.”

 

 

오늘 하루도 박지민 때문에 바싹바싹 마를 게 빤히 보였다. 이제 곧 졸업을 앞둔 나는 학교에 나갈 일이 거의 없었다. 물론 아예 안 나가도 되는 건 아니었다. 오늘도 졸업공연 준비가 있었는데 카톡창에다 못 나간다고 보내버렸다. 천장을 보고 누워서 눈 위를 팔로 덮어버렸다. 자꾸 깊은 숨이 쉬어졌다.

 

 

“…나도 모르겠다.”

 

 

눈 위에 얹은 팔을 치우고 하얀 천장을 멍하니 바라봤다. 그러고 가만히 있다가 몸을 일으켰다. 대충 세수나 하고 모자를 눌러 쓴 다음 집을 나섰다. 대낮부터 술이 당겼다.

 

 

 

_

 

“뭐야. 왜 그러고 있어요.”

“누구, 아 전정국. 말 걸지 마.”

“대낮부터 꼴사납게. 얼마 마시기나 했어요? 뭐야. 두 잔은 마셨어요?”

“가라.”

“딱 보아하니 지민이 때문이네.”

 

 

편의점에서 큰맘 먹고 소주 한 병을 샀다. 원체 술을 못하는지라 소주 반 병 먹으면 대차게 마셨다고 했는데. 오늘은 이 한 병을 다 먹고 죽어보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반갑지 않은 사람이 나타났다. 대체 이럴 때 왜 얘가 나타나.

 

학교를 가던 길인지, 갔다 오는 길인지는 모르겠지만 등에는 백팩을 매고 꽤 멀끔한 상태의 전정국을 보다보니 머리도 감지 않고 모자를 눌러 쓴 내 상태가 더 초라하게 느껴졌다. 아 짜증나. 게다가 저 얼굴로 지민이 이름까지 불렀어. 그것도 ‘지민이’라고. 저 건방진 자식.

 

기분이 나빠져서 비록 머리는 안 감았어도 세수는 한 뚜렷하고 잘생긴 이목구비로 노려봤는데, 샹. 전정국이 존나 잘생긴 얼굴로 방어함. 아 공격 실패했고. 입 안에 남아있는 술은 쓰고. 나는 알코올 쓰레기고. 여러모로 좆같네. 술을 다시 따르려다가 입안에 쓴맛이 돌아서 슬쩍 고개를 젓고 안주로 산 바나나킥을 집어 물던 때였다.

 

 

“요새 자주 붙어 다니는 선배 하나 있던데.”

 

 

전정국이 내뱉은 말에 우물거리던 입이 멈췄다. 입 안에서 바나나킥이 사르르 녹으면서 술의 쓴맛을 좀 달래줬다.

 

 

“알아?”

“그 선배 때문 맞구나. 알죠. 요새 지민이가 그 선배랑 다니기만 하면 주위에서 잘 어울린다고 난리가 아주.”

 

 

전정국은 무슨 생각인지 과장되는 손짓을 해가며 내 앞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다리를 턱, 하니 꼬고 팔 하나를 의자에 걸어둔 채 다른 손으로 내 바나나킥을 탐냈다. 그 자연스럽고 뻔뻔한 태도에 그저 바라보고만 있으니 전정국이 오만하게 웃었다.

 

 

“놀리냐? 니가 뭔데.”

“뭐긴요. 박지민 첫사랑이지.”

“야. 이 씨발.”

“와. 욕 잘하는 거 봐. 녹음해서 지민이 들려줘도 돼요?”

“되겠냐.”

“됐어요. 뭐 지민이가 모르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말하면서 전정국은 다시 바나나킥을 집어 먹었다. 저 바나나킥 괴도 같으니. 내 귀한 안주를 몇 개째 처먹는 거야. 여유롭게 과자를 우물거리는 전정국을 보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얘는 존나 이길 수가 없다.

 

고등학교 때부터 그랬다. 잔머리도 나보다 좋았고, 인정하기 싫지만 시발 잘생겼고-물론 나보다 잘생겼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힘도 시발 천하장사 소시지만 먹고 자란 애처럼 존나 세고, 키고 크고, 아마 거기도 클 거고 -지민이 취향은 내가 잘 안다. 지민이가 나와의 섹스를 좋아하는 거 보면 답 나온다- 제일 중요하게는 박지민의 첫사랑이라서 얘를 이겨먹을 수가 없다.

 

우리 예쁜 지민이는 하다하다 첫사랑까지 참 예쁘게 했지. 응. 그걸 내가 망쳤었고. 아, 또 그날 생각나네. 술이나 처먹어야지. 코가 삐뚤어지게 마시고 삐뚤어진 코 술잔에 박고 죽어야지.

 

 

“근데 그러고 있어도 되나. 지민이 오늘도 그 선배랑 약속 있던 거 같던데.”

“너 아군이냐 적군이냐.”

“아군은 아니지 않을까요. 그래도 내가 박지민 첫사랑인데. 무려.”

“야. 너 그 첫사랑 소리 좀.”

 

 

그렇게 말하며 술을 입에 털어 넣었다. 아무리 해도 이놈의 술은 도저히 달아지지가 않는다. 술이 달아지면 어른이 된 거라던데. 아직도 술이 쓴 걸 보니 난 어른이 덜 됐나보다. 그래서 그랬나. 그래서 지민이는 이런 철없고 유치한 나보다 키도 크고 훨씬 어른스러운 그 김남준 씨한테 흔들리는 걸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더 슬퍼졌다. 안주를 먹지도 않고 다시 잔을 채웠고 곧장 들이켰다. 연달아 마셔도 썼다. 바나나킥을 집으며 전정국을 쳐다보니 눈빛으로 동정을 표하고 있었다.

 

 

“뭐. 아군이 아니라고 적군이라는 건 아니죠.”

“뭐래.”

“솔직히 나 그쪽 하나만으로 충분히 벅차거든요? 근데 그 선배까지 엮이면 제가 감당하기 너무 힘들어져서요.”

“뭘 감당하는데.”

“뭐긴요. 박지민이지. 내가 은근하게 박지민 빼오려고 노력하는 거 알면서 모르는 척하시네.”

 

 

전정국이 다시 바나나킥을 집어 먹었다. 이 새끼가. 그래 안다. 알지. 같은 과라는 이유로 맨날 붙어 다니고 같이 셀카 찍어서 카톡이니 인스타니 페북이니 온갖 데에 프로필 사진으로 해두고. 내가 졸업 준비로 바쁜 틈을 타서 지민이 곁에서 깔짝대는 걸 모를 리가 없었다.

 

왜냐면 박지민 주위를 알짱대는 존나 잘난 시발놈들을 처리하는 게 내 주된 업무였으니까. 처단해야 할 시발놈들 중 최우선순위는 단연 전정국이었으니까. 근데 아는 척하기 싫었다. 신경 썼다는 걸 알리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바나나킥을 집는 전정국의 손등을 쳐내며 말했다.

 

 

“몰랐는데. 그리고 작작 처먹어. 내가 산 거야. 먹을 거면 돈 내. 한 개에 오백 원.”

 

 

내 말에 전정국이 당황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주머니에서 오백 원을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놨고 바나나킥을 다시 집었다. 얘는 진짜 뭐냐. 어쨌든 뭐, 이렇게 나오면 할 말은 없지. 바나나킥 봉다리만 멍하니 보고 있는 나 대신 전정국이 신나게 자기 얘기를 떠벌거렸다.

 

 

“알았을 걸요. 암튼 그쪽은 지민이랑 이십 년 넘게 같이 살았으니까 질리기도 쉬울 거 아니에요. 그럼 나한테 돌아올 거고. 그래서 옆에서 나 잊지 않게 얼굴이나 비추면서 기다리고 있는 건데 뉴 페이스의 등장은 좀 그렇죠. 또 지민이가 은근히 새로운 자극을 좋아하기도 하고.”

 

 

조언인지 조롱일지 모를 전정국의 말이 자꾸 귀를 때렸다. 시발 뭐야. 그 누구야. 요새 랩 잘한다는 걔. 그 팔월인가 어거스인가 하는, 암튼 걔냐. 아주 귀에 쌔리는 랩을 하듯 말 하네 이 새끼.

 

현란한 혀를 자랑하는 전정국을 노려보다가 술병에서 손을 뗐다. 벌써 취기가 쭉 오르는 게, 좀만 더 마시면 곧바로 취할 거 같았다. 그랬다간 이 새끼 앞에서 어떤 추태를 부리게 될지 몰랐다. 그래서 괜히 바나나킥이나 주워 먹었다.

 

 

“암튼. 그러니까 긴장 바짝 하고 대비하라고요. 그쪽이 그 선배를 막아줘야 내가 다시 그쪽이랑 경쟁하지.”

“내가 왜. 왜 처리해.”

“이미 하려고 했잖아요. 다 아는데 뭘. 하지 말래도 할 거면서. 암튼 수고해요. 그 선배에 대해 정보 필요하면 물어는 봐요. 아, 대신 정보 한 줄당 오천 원.”

“야! 너 이씨.”

“그럼 갑니다.”

 

 

마지막 남은 바나나킥 하나를 집으며 입에 쏙 집어넣은 전정국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더니 내 어깨를 툭툭 쳤다. 얘 설마 지금 바나나킥 가루 내 어깨에 털어낸 거야? 와. 인간성 진짜 알만 하네. 그렇게 내 뒤쪽으로 사라지는 전정국을 슬쩍 봤다가 의자에 쓰러지듯 몸을 뉘였다.

 

 

“우리 지민이가 진짜 왜 그러지….”

 

 

한숨을 내쉬며 술병을 잡았다. 전정국도 없는데 추태 좀 부리게 되면 어때.

 

 

 

_

 

“아씨. 내가 왜.”

“…정국아?”

“아. 형. 나와 있었네요.”

 

 

평소 같으면 나 올 때까지 문 앞을 서성이다가 내가 들어오면 똥마려운 개마냥 내 주위를 쫓아다녔을 김태형이 집에 없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나타날 기미가 보이지 않아서 집에서 나왔다. 달라진 내 태도에 김태형이 불안해 한다는 것쯤은 알고도 남았다. 그렇게 티를 내는데 모를 수가 있나. 그간 보였던 김태형의 태도를 돌이켜 생각하며 고개를 내젓고 있었는데 저쪽에서 묵직한 인기척이 들렸다.

 

목소리가 정국이 같아서 불러봤는데 딱 맞췄다. 첫사랑이 무섭긴 무섭네. 그렇게 생각하며 웃는데 뭔가 이상했다. 애가 원래 덩치가 좀 크긴 했지만 저 정도로 거대하진 않았는데 어둠 속에서 조금씩 드러나는 실루엣은 헐크에 견줄 만했다. 도대체 저게 뭔가 싶어서 유심히 보니 점차 형체가 드러났다. 가늘게 뜨고 있던 눈이 커졌다.

 

 

“정국아. 지금 니 뒤에 그거. 그거 혹시.”

“맞아요. 형의 현 애인 지금 형의 전 애인 등에 업혀 있는 거 맞아요.”

“…너희 둘이 사귀기로 했니?”

 

 

정국이의 지나치게 자세하고 구체적인 상황 설명에 어색하게 웃었다. 그리고 가만히 두 사람을 번갈아 보다가 아무 생각 없이 던진 질문에 정국이가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렸다. 얘와 알고 지내게 된 이후로 처음 보는 경멸스러운 표정이었다. 그래. 그 정도로 싫었구나.

 

 

“아 진짜. 그런 끔찍한 소리 좀 하지 마요. 토할 거 같으니까. 근데 이 형이랑 헤어졌어요?”

“어? 아니. 왜?”

“그냥. 우리 둘이 사귀냐고 묻길래. 난 또 이 형 싱글된 줄 알고 잠깐 동안 싱글벙글했네요. 아 근데 왜 이렇게 무거워. 이 사람 바닥에 눕히면 안 되죠?”

“돼. 그냥 버리고 가. 여기 마침 쓰레기 버리는 자리야.”

“…둘 사이에 무슨 일 있어요?”

 

 

내려놓겠다는 말과는 달리 김태형을 다시 고쳐 업는 정국이를 보면서 의미 없는 미소만 지었다. 그리고 정국이 뒤에 달린 김태형도 쳐다봤다. 쟬 보고 있으면 괜히 눈물이 찼다. 울컥했다. 짜증 나. 김태형. 괜히 먼 곳을 바라봤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냥. 그런 게 있어.”

“그러면요. 지민이 형.”

“응.”

“나 이 형 내려놓고 형 업고 가도 돼요?”

 

 

어깨 한 쪽을 옆으로 기울여놓고 그 맑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어오는 정국이를 가만히 보다가 웃어버렸다. 묻는 말도 귀여웠고, 얼굴도 잘생겼다. 정국이를 참 많이 사랑했던 시절의 감정도 얼핏 되살아나는 거 같았다. 내 감정도 이런데. 김태형이랑 몸도 섞고 마음도 섞은 나도 얘를 보면 이러는데. 정국이도 날 보면 이렇겠지. 게다가 얘는 그 오랜 기간 동안 내 생각만 해왔는데.

 

가만히 웃고 있는 나를 쳐다보던 정국이가 몸을 바로 세우고 다시 김태형을 고쳐 업더니 자기도 웃었다.

 

 

“웃어요. 그게 조금 더 예뻐요. 언제나 예쁜데, 웃는 게 조금 더 보기 좋아요.”

“정국아.”

“일단. 일단 이 사람 좀 내려놓고 얘기해요. 허리 부러질 거 같아.”

“어어. 그러면 안 되지. 들어가자.”

 

 

대문을 열고 정국이를 안으로 들였다. 꽤 오랫동안 김태형을 업고 왔는지 현관에서 신발을 벗는 정국이의 다리가 조금 떨렸다. 힘도 좋은 애가 저러는 걸 보니 안쓰럽기도 했다. 정국이는 바닥에다가 김태형을 집어 던지듯 눕혀놓고 몸을 쭉 폈다. 허리를 꽉 붙잡고 몸을 이리저리 돌렸다.

 

내가 다 미안해서 냉장고를 뒤져 주스를 꺼내줬다. 정국이도 내 쪽으로 다가와서 주스를 따른 컵을 받았다. 잠시 포개지듯 닿은 손에 우리 둘의 시선이 함께 갔다. 내가 먼저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주스를 식탁 위에 올려놓고 고개를 돌려 정국이를 봤다. 주스를 마신 줄 알았는데 여전히 손에 잔을 들기만 한 채 날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

 

 

“정국아?”

 

 

날 향해 몇 걸음 걸어오는 정국이 탓에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고, 가까이 있던 식탁에 부딪혀 걸음을 멈췄다. 그런 나보다도 몇 걸음 더 걸어온 정국이는 나를 끌어안듯 손을 뻗더니 내 뒤쪽 식탁에 한 모금도 마시지 않은 잔을 올려놨다. 시선은 여전히 나를 향해 있었다. 비어버린 손이 이번엔 내 쪽으로 다가왔다.

 

 

“아, 진짜. 너무 욕심난다.”

“응?”

“너무하잖아요. 현 애인이랑은 무슨 일이 있어도 단단히 있는 거 같고. 그 싸운 애인은 저 바닥에서 세상모르게 골아 떨어져 있고. 내 첫사랑은 내 눈앞에 있고.”

“정국아.”

“저 지금 이대로 뭐든 확 받아버리고 싶은데, 진짜 기를 쓰고 참는 거예요.”

 

 

정국이의 손은 내 어느 곳에도 닿지 않고 허공에 멈춰 있었다. 나는 그 손을 한 번 쳐다봤다가 다시 정국이를 쳐다봤다.

 

 

“싸웠어도, 무슨 일이 생겨서 마음이 상했어도. 그래도 형 아직 저 사람 좋아하잖아요. 미워도 사랑하니까 뭐 그런 건가. 아무튼 형 놀랄까봐. 그래서 형이랑 더 멀어지게 될까봐 참는 거예요. 나.”

 

 

얼굴로 올 것 같았던 손이 내 어깨 위로 떨어졌다. 그리고 오래 지나지 않아 어깨에서도 멀어졌다. 난 그 어떤 대꾸도 하지 않은 채 정국이를 보고만 있었다. 정국이도 날 가만히 바라봤다.

 

 

“형처럼. 형이 저 사람한테 그러는 것처럼 나도 그래요. 여전히, 계속 형 좋아해요.”

“국아.”

“솔직히 노력해보긴 했거든요? 내 차례, 두 번은 안 올 거 같아서. 형 놓아보려고 해봤는데 잘 안 되더라구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웃으면서 태연하게 말했다. 그 말이 담고 있는 무게가, 고통이 어느 정도인지 나는 함부로 판단하지 않기로 했다. 그저 정국이가 웃어주는 것처럼, 나도 정국이를 향해 웃어주기로 했다. 여전히 예쁘고, 여전히 잘생긴 얼굴이었다.

 

 

“아, 그래도. 참아보긴 하는데 너무 어렵네요. 형 앞에 두고 그냥 돌아서는 거.”

“미안해.”

“형이 뭐가 미안해요. 아. 뭐 그렇게 예쁜 게 죄라면 죄긴 하겠네. 그렇게 예쁜 건 많이 반성해요. 도대체 몇 사람을 홀리는 거야. 정신 못 차리게.”

“어?”

“알아요. 남준 선배랑 형이 요새 하는 거. 형이 뭘 하든 다 좋은데. 적당히 해요. 형은 아무렇지 않아도 다른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은 게 아니니까.”

 

 

내가 무슨 말이냐고 되묻기도 전에 정국이가 집을 빠져나갔다. 나가기 전에 시원시원하게 손을 뻗어 흔들어주긴 했지만, 그뿐이었다. 정국이가 나간 문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문이 닫히자마자 고개를 돌렸다. 바닥에 널브러진 김태형을 쳐다봤다.

 

 

“우으, 짐나아. 지민이이….”

“짜증 나. 김태형.”

 

 

바닥에 달라붙어 몸을 꼼지락대는 김태형을 보면서 나는 입술을 물었다. 모로 누워 몸을 웅크리고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태도로 옆자리를 향해 손을 뻗는 행동을 보면서 아주 조금 울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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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새벽의덕후 입니다.

갑작스럽게 지민의 역사를 열연재하죠? 허허 제가 이렇습니다.

사실 더 중요한 내용은 다음 편에 담겨있는데 아직 안 썼어요. 못 썼어요...


다 쓰면 들고 오려고 했는데 그러다간 10년이 지나고 강산이 뒤집힌 후에야 올 거 같아서이렇게 올려둡니다. 


글을 올려놨으니 조급한 마음에 다음 편을 서둘러 쓰겠죠...(?)



지민이와 태형이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어떤 감정의 동요가 생긴 건지! 

자세한 내용은 다음 편에 있지롱요!



그리고! 여러분. 제목에서 느끼졌을지 모르겠지만 

이건 지민의 역사의 마지막 에피소드입니다.


하나씩 하나씩 오래 붙잡고 있던 시리즈를 놓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지민의 역사도 기간으로만 따지면 1년이나 지난 글이네요. 

한 번 이야기를 시작하다보니 끝이 없어질 거 같아 사담은 이만 할게요!


뭐..후기든 사담이든 하(下)편이 나오는 날 하기로 해요!


찾아주시고 읽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