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래더] 트위터는 @Rather_0613 (舊 새벽의덕후)

[국민/랩홉] 길 위에서 전해지는

 

 

 

W.새벽의덕후

 

 

 

번외. 샛길

 

 

下.

 

 

“아 왜요!”

“왜냐니요. 저희는 그것들이 필요 없습니다.”

“아니, 잘 생각해보시오. 필요할 텐데요?”

“이미 거래를 하고 있는 상단이 있습니다.”

 

 

석진은 책상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입으로만 대꾸하고 있었다. 보통은 사람과 눈을 맞춰가며 대화하는 석진이었지만, 이 사람과는 도무지 그럴 수가 없었다. 벌써 보름이 훌쩍 넘어가도록 매일 석진의 집무실 문턱을 넘어오는 자였다. 언제나, 석진의 상단에도 차고 넘치고, 다른 상단과 오래 거래한 품목들로 가득 찬 수레를 자랑스럽게 보였다. 그러고는 자신의 상단과 거래를 트자며 매번 조르고 있었다.

 

규모가 큰 가빈과 거래를 트고 싶어 하는 상인들은 많았다. 기본적인 물품만 대더라도 그에 따른 대금과 수익이 어마어마했으니 석진도 상인들의 그 정도 욕심은 그러려니, 이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종종 가빈으로 무턱대고 찾아와 거래를 요청하는 수많은 상인을 어르고 달래 돌려보내곤 했다.

 

보통은 석진의 다정하고 친절한 설명에 설득당해 곧장 돌아갔다. 헌데 이 사람만은 그러질 않고 있었다. 몇 번이고 거절했음에도 수차례 찾아왔다. 하다 하다 이제는 고작 파 열 단을 가지고 와서 거래를 하자고 떼썼다. 가빈과 거래를 하려면 파 열 단이 아니라 열 수레를 가지고 와도 부족했다. 이곳에서 쓰이는 식재료가 얼마인 줄 알고.

 

 

“네? 아, 석진님! 제발요!”

 

 

자신의 물건이 훨씬 좋을 거라며 앞에서 방방 뛰는 사람을 필사적으로 외면했다. 그러나 사람은 외면할 수 있어도 소리는 외면할 수 없었다. 귀를 댕댕하고 울리는 그 목소리에 머리가 지끈거리며 아파왔다. 저 이를 어떻게 해야 좋을지 뾰족한 수가 도통 떠오르질 않았다. 들고 있던 붓을 내려놓고 울리는 머리를 만졌다. 그러자 석진의 앞에서 양손에 파를 들고 흔들던 이가 부산스럽게 움직이더니 석진 가까이로 다가왔다. 파 냄새가 찌릿하게 코를 타고 들어왔다.

 

 

“괜찮으십니까? 어디 아프신 겁니까?”

“별일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그러니 그만 가시지요.”

“잠시, 잠시만요. 머리가 아프신 거라면 또 기가 막히게 드는 약재가 있는데. 거래하시겠습니까?”

“약재는 가빈의 약방에도 많이 있습니다.”

 

 

눈을 감고 지끈대는 머리를 주무르며 내뱉은 석진의 말에, 잡동사니가 잔뜩 든 함을 뒤지고 있던 사람이 동작을 멈추었다. 갑자기 조용해진 방 안의 분위기에 석진이 감고 있던 눈을 뜨고 고개를 들어 올렸다. 석진의 눈 가득 들어온 건, 울상을 지은 채 파 끝을 만지작거리는 사람이었다. 이를 어쩐다. 저 표정이 저 사람의 무기 같았다. 늘 떼쓰기의 끄트머리에는 저런 표정을 했고, 석진이 더 독하게 거절할 수 없게 만들었다. 저 표정 때문에 석진이 사들인 말도 안 되는 물건들이 석진 뒤로 자리한 방에 가득했다. 앞에 선 이의 표정을 본 석진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면 두고 가세,”

“너무하십니다.”

“네?”

“어쩜 그렇게! 매정하실 수 있습니까?”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저 그 고운 얼굴을 몇 번 더 보고자! 다정한 목소리를 좀 들어보고자 찾아오는 이 사람의 마음을 왜 몰라주시는 겝니까!”

“네?”

“밉습니다! 석진님 미워요! 제 마음도 몰라주시고! 미워요!”

 

 

입을 쭉 빼 밀고 잔뜩 투정을 부리던 사람이 제 짐을 쿵쾅대며 정리했다. 그러더니 제 몸뚱이보다도 훨씬 큰 함을 잘도 지고 석진의 집무실을 거칠게 빠져나갔다. 방금 무슨 일이 벌어진 건가 싶어 멍하니 있던 석진이 다시금 아릿해져 오는 머리를 붙잡았다. 아득해지는 것 같았던 성난 발소리가 곧이어 되돌아왔다.

 

 

“그, 그렇다고 내일부터 찾아오지 않을 거라는 건 아닙니다!”

“예?”

“그러니까 내, 내일은 비장의 무기를 들고 찾아올 겁니다!”

 

 

가까워진 발소리의 주인은 문 너머로 그 말을 홀랑 뱉어놓고 다시 멀어졌다. 자박대며 사라지는 발소리가 퍽 깜찍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제 귀를 통한 말이 무엇인지 잠자코 되뇌던 석진의 얼굴 가득 웃음이 피었다. 귀여웠다. 아무래도 뒤에 자리한 방에서 더는 휴식을 취할 수 없을 거 같았다. 다시 만날 내일이 약간은 기대되기도 했다.

 

 

 

_

“이, 이게 도대체….”

“비장의 무기를 가져온다고 했지요?”

“객께서 말한 비장의 무기가 대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저입니다!”

 

 

석진은 얼이 빠져 있었다. 손을 번쩍 들고 입꼬리를 주욱 당겨 시원스레 웃는 사람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이 사람은 그동안 누가 보아도 상인이다 싶은 차림새로 다녔었다. 대충 묶어서 두른 두건에 많이 상한 흰색 옷을 입고 짚신을 신고 다녔다. 그랬던 이가 언뜻 봐도 때깔 좋은 고급 비단옷을 걸치고, 번쩍거리는 장신구가 가득 달린 관모를 쓴 채 나타났다. 게다가 이 사람의 뒤로 족히 열댓 명은 되어 보이는 사람들이 서 있었다. 하도 달라진 채 나타난 모습에 석진은 저를 향해 반갑게 인사하는 이가 누구인지 한참을 쳐다봐야 했다.

 

 

“무슨 말씀이신지….”

“거래를 하고 싶어 왔습니다.”

“그것이라면 이미 전부터 수차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가빈은,”

“가빈 말고. 그대의 상단과 거래를 하고 싶습니다.”

“예?”

 

 

가빈에 제집 상단이 관여하고 있는 것은 한양에서 모르는 이가 없다고 하지만, 이 사람이 그 빤한 사실을 이야기하는데 뭔가 기분이 이상했다. 온몸을 타고 흐르는 느낌이 엄청난 걸 맞이하려고 준비하는 것만 같았다. 전에는 좀 방정맞고 가벼운 목소리였는데, 지금은 꽤 진지하고 무거운 말투를 쓰고 있었다.

 

 

“소개가 늦었습니다. 저는 청나라와 조선, 왜 사이에서 중개무역을 하는 사람입니다. 제가 알기로 석진님의 상단은 청나라와만 교역하는 걸로 아는데.”

“그렇습니다만….”

“저와 함께 손을 잡고 왜와도 교역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저의 상단도 크긴 하지만, 삼국을 오가며 교역하기에는 좀 버겁습니다.”

“…안에서 이야기 나누시겠습니까?”

“드디어! 좋습니다. 그러도록 합시다. 진작 이럴 것을.”

 

 

사내는 호탕하게 웃으며 석진이 안내한 대로 방 안으로 들어섰다. 석진은 근처에 있던 하인에게 마실 것을 부탁했고, 이어 태형을 불러와달라는 말도 덧붙였다. 사내를 따라 온 이들 중 몇 명만이 그를 따라 안으로 들어섰다. 석진은 자리로 사내를 안내했고, 사내는 뭐가 그렇게 좋은지 한껏 웃은 채로 석진을 따랐다. 마주 앉은 두 사람은 잠시 침묵했고, 곧이어 다과상이 들어왔다.

 

 

“이곳에 온 지가 꽤 되었는데, 이런 대접은 처음입니다.”

“거래 품목이 바뀌었기 때문이겠지요.”

“어떻게, 이번에 제가 들고 온 건 좀 괜찮습니까?”

“두고 보아야겠지요. 헌데 저희 상단과 그 일을 하고자 하는 이유가 있으십니까?”

 

 

석진의 물음에 사내는 바로 대꾸하지 않고 천천히 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 올렸다. 느긋하게 차를 음미하더니 웃으며 잔을 내려놨다. 석진은 재촉하지 않은 채 그저 그를 기다렸다. 사내는 잔을 잡고 있던 손을 뻗어 앞에 있는 석진의 손을 붙잡았다. 느닷없는 그의 행동에 석진이 눈만 멀뚱거렸다.

 

 

“그대가 좋습니다.”

“예? 그게 무슨.”

“보자마자 반했나 봅니다. 사실 저와 사업을 함께 할 상단을 줄곧 찾아다니고 있었습니다. 조선에서 유명하다는 온갖 상단을 다 만나보려고! 했는데, 그대를 보고 다른 곳을 가길 포기했습니다.”

“왜요?”

“당신이 좋았으니까요.”

 

 

갑작스레 저를 향해 오는 애정에 석진은 그저 당황할 뿐이었다. 이런 방식의 애정은 처음 받아보는 것이었다. 이런 걸 애정이라 하는 게 맞는지도 헷갈렸다. 혹시 약간은 정신을 놓은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다. 그런 석진의 속을 알기라도 했는지 사내가 씩 하고 웃었다. 전부터 느낀 거지만 웃는 입매가 사람 속을 다 시원하게 만들 정도로 호탕했다.

 

 

“상단에 관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물어보고, 요구하세요. 저를 신뢰할 수 있을 때까지 모든 것에 협조하겠습니다.”

“일단은 알겠습니다. 헌데 우리 상단과 어떤 것을 함께하고 싶으신 겁니까?”

 

 

석진의 질문에 사내가 눈빛을 바꿨다. 열렬한 애정을 보내던 것과는 또 다른 눈빛이었다. 사내는 석진의 손을 잡기 위해 앞으로 숙여놨던 몸을 바로 세웠다. 그 바람에 제 손에서 빠져나간 석진의 손이 아쉬운지 눈길로는 계속 놓은 손을 쳐다봤다. 분위기가 이상했다.

 

석진은 제 손에 달라붙은 그 끈질긴 시선이 민망했다. 그렇다고 그 눈빛을 의식해 손을 다른 곳으로 내려놓기도 어려웠다. 뻘쭘한 시간이 자꾸 흘렀다. 그러던 중에 집무실 밖에서 기척이 들렸다. 태형이었다. 언제나 반가운 제 동생이었지만 지금처럼 반가울 수가 없었다.

 

 

“이게 무슨, 다 누구야?”

“아, 태형아. 잘 왔어.”

“호오. 저분은 누구십니까?”

“제 동생이자 저와 함께 상단과 가빈을 관리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 말에 사내는 제 턱을 쓸며 묘하게 웃었다. 석진은 태형에게 옆에 앉으라 손짓했고 대충 몇 가지 중요한 내용을 알려주었다. 그 틈에 사내도 제가 데려온 몇 사람과 무어라 귓말을 했다. 태형은 이런 자리가 낯설었다. 제 형을 따라 가빈의 관리를 많은 부분 담당했고, 상단도 관리하고 있었지만 이런 자리에 나서본 적은 처음이었다. 사내는 제 두 손을 깍지 낀 채 책상 위에 올려놨고 그 위로 제 얼굴을 얹었다. 얼굴 만면엔 여전히 여유로운 웃음이 한가득이었다.

 

 

“상단에서 관리에 애를 먹고 있는 집이 하나 있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걸 어찌.”

“뭐, 이만한 정보력도 없이 상단을 운영하진 않았겠지요.”

 

 

사내가 얼굴을 받치고 있던 깍지를 풀고 어깨를 으쓱거리며 약간은 거만하게 손을 움직였다. 그러더니 팔짱을 끼고는 몸을 의자에 편히 기댔다. 좀처럼 가만히 있지 못하는 거 같았다. 반면 석진과 태형은 곧게 앉은 그대로 사내의 말을 곱씹을 뿐이었다. 두 사람 모두 사내가 어떤 집을 이야기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의논코자 하는 게 무엇입니까?”

“여각을 함께 운영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여각을요?”

 

 

석진보다도 태형의 물음이 빨랐다. 가만히 앉아 있다가 사내의 말을 듣고 책상을 짚은 채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엉덩이도 의자에서 조금 떨어졌다. 그런 태형을 웃으며 바라본 사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각이라면 보통 포구에서 배를 이용하는 사람들을 위해 있는 것인데, 포구도 아니라 그저 한양 안쪽에 있는 그 집에서 무슨 여각을 하자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석진의 심정도 마찬가지였다. 어떤 생각을 하는지 도통 알 수 없었다.

 

 

“왜 그런 눈들을 하고 계시는지 잘 압니다. 포구에나 있는 것을 어찌 동네 한복판에 만들려나 싶으신 게지요.”

“잘 알고 계시네요.”

“본디 여각이 존재하는 이유는 그 장소를 오가는 이들이 편히 쉬라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제가 직접 알아본 바에 따르면, 그 집의 위치가 한양에서 아주 좋은 자리라고 하던데.”

“맞습니다.”

 

 

당연했다. 조선 최고의 권력가, 전우흥이 착실히 넓히고 살뜰히 가꾼 그 집이 어느 곳 하나 빠지는 구석이 있을 리가 없었다. 다만 전쟁으로 인한 상처가 여실하다는 것이 유일한 문제였다. 정국은 춘옥에게 제집의 문서까지 건넸다. 목숨값치고 과하다며 춘옥은 거절했지만 정국은 고집스러웠다. 결국 집문서를 받아 둔 춘옥은 따로 석진에게 일러두었다. 그 집은 정국의 것이라고. 우리는 그저 이 문서를 보관해주고 집을 관리해줄 뿐이라고.

 

석진은 제 할머니의 말씀이 옳다고 생각했다. 그건 정국의 집이었다. 그저 할머님의 말씀처럼 폐허가 된 그 집을 관리하는 게 제 역할이었다. 그래서 늘 손 봐야지, 손 봐야지 한 집이었는데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도통 감이 잡히지 않아 차일피일 미루고만 있었다. 그러기를 벌써 수년째인데, 이런 때에 이 사람이 해온 제안은 상당히 매력적일 수밖에 없었다.

 

 

“단순히 여행객을 상대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조선에 당도하는 사신단과 사신단을 따라온 사람들을 상대로 하는 것입니다. 어차피 나라의 기관에서 담당하기엔 한계가 있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지만….”

“그대들의 상단도 그렇지만, 단순히 청나라 상인들하고만 거래를 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외교적인 문제는 제 쪽에서 해결할 수 있습니다. 이 나라의 조정에도 친하게 지내는 자가 꽤 있어서.”

 

 

석진은 사내의 말을 가만히 곱씹었다. 비용적인 부분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석진의 상단에도 충분히 자금이 있었으며, 이 사람의 상단에서도 자금을 댈 것이었다. 폐허가 된 집을 그럴싸한 여각으로 보수하기에는 충분했다. 정국의 집은 전쟁 이전부터 한양에서 가장 유명한 곳이었다. 크기도 크기지만 구조며, 자재며 어느 것 하나 허튼 것이 없었다. 잘만 보수한다면 전만큼의 위용을 회복할 수도 있을 거였다.

 

이 사내는 주로 사신단에 섞여 무역을 하던 사람이라 그런지 사신단만을 대상으로 삼고 있었다. 그러나 석진의 머릿속에는 다른 생각도 스쳤다. 한양은 조선 팔도에서 사람이 가장 많이 몰리는 곳이다. 거쳐 가는 이도 많고, 들러보는 이도 많다. 과거를 보러 오는 이도 많았고, 구태여 한 번쯤 와보는 사람들도 많다. 그런 사람들을 대상으로 삼아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나쁜 제안은 아닌 것 같습니다.”

“당연하죠. 제가 석진님께 어떻게 나쁜 제안을 합니까.”

“집은 살펴보셨습니까.”

“아, 어두울 때 본 것이라. 허면 말 나온 김에 보도록 하죠.”

 

 

사내의 말에 석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일으킬 때였다. 사내가 다급하게 석진의 팔을 잡아 앉혔다. 그러더니 시원스레 웃으며 석진의 팔을 매만졌다. 그 손길이 당화스러워 석진은 제 다른 손으로 사내의 팔을 때렸다. 아야, 하며 제 손을 치운 사내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석진은 제 목을 몇 번 가다듬으며 손으로 부채질을 하고 있었다.

 

시린 날이 지나갔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그만큼 더운 날씨는 아닌데. 제 형이 왜 그러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태형은 지금 제 눈앞에서 벌어지는 상황이 무엇인지 좀처럼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여전히 여유롭게 웃고 있는 사내는 석진이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는 것을 확인하고는 태형을 바라봤다.

 

 

“그대가 저희 쪽 사람과 다녀와 주시겠습니까.”

“네? 뭐, 그럴 수야 있지만.”

“그렇다면 그래 주세요. 저는 석진님과의 다과를 조금 더 즐기고 싶어서.”

 

 

능글맞게 하는 소리에 태형이 소리 내서 웃어버리고 말았다. 석진을 바라보는 사내의 눈빛에 뭔가를 이해한 기분이었다. 그간 참 뻣뻣하게 살아온 제 형의 삶에 유들유들한 사람이 붙었다. 어쩐 일인지 이번에는 사람을 대할 때 딱딱하게 꾸미지 않고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형의 모습이 새로우면서도 반가웠다. 태형은 자리에서 일어섰고, 상단 쪽 사람 한 명도 태형 가까이 다가왔다. 태형은 여전히 웃은 채로 두 사람을 바라봤다.

 

 

“그럼 즐거운 시간 보내세요.”

“태형아 그런 게 아니라.”

“감사해요. 태형님. 잘 보내겠습니다.”

 

 

여유로이 손까지 흔들어주는 사내에게 고개 숙여 인사한 태형은 밖으로 나섰다. 얼굴이 붉어진 채로 당황하는 형의 얼굴이 자꾸 생각났다. 제 형도 좀 솔직하고 편하게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걸음을 뗐다. 그런 태형의 뒤로 다른 사내가 따라붙었다. 태형은 어색하게 그를 향해 인사를 건넸다. 태형보다는 약간 큰, 단정하게 생긴 사내가 얼굴을 붉히며 웃었다. 태형은 고개를 살짝 갸웃거렸다. 날이 더운데 저만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인지 의아해하며 걸음을 옮겼다.

 

 

 

*

 

하늘도 푸르렀고, 날씨도 선선하니 좋았다. 여철과 윤기는 어떤 의무도, 책임도 없이 그저 편한 마음으로 팔도를 유랑하고 있었다. 길을 다니다 근처에서 나온 시원한 물소리에 이끌리듯 걸으니 맑은 계곡이 있었다. 계곡을 찾은 두 사람은 말없이 눈을 마주쳤고, 자연스레 계곡 근처 바위에 엉덩이를 붙였다.

 

여철은 가만히 앉아 흐르는 계곡물을 쳐다봤고, 윤기는 평평한 바위에 자리를 잡고 서책에 무언가 쓰고 있었다. 유람한 것들을 꼼꼼하게 기록하는 중이었다. 여철은 고개만 살짝 틀어 윤기를 바라봤다. 전보다 어딘지 모르게 밝아 보였다. 정리를 끝낸 것인지 서책을 풀어놓은 짐 안에 다시 잘 챙겨 넣는 걸 본 여철이 짓궂게 웃었다. 그러고는 긴 팔을 밑으로 뻗어 윤기를 향해 물을 뿌렸다.

 

 

“안 돼!”

 

 

느닷없이 날아온 물방울에 윤기가 짐 위로 몸을 숙이며 저도 모르게 소리를 냈다. 윤기는 여철을 흘겼고, 여철 역시 윤기를 묘한 눈으로 쳐다봤다.

 

 

“내가 네 놈 그럴 줄 알았다.”

 

 

낮게 깔려오는 여철의 목소리에 윤기가 다른 쪽으로 다급하게 눈을 돌렸다. 여철은 바위 위에서 몸을 움직여 윤기 가까이 다가갔다. 윤기는 곁눈질로만 흘긋댔다.

 

 

“너. 말할 수 있는 게지?”

 

 

여철의 말에 윤기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애먼 곳을 바라보는 뻣뻣한 얼굴을 보던 여철은 바위에서 내려와 계곡으로 들어갔다. 발목 위까지 아릿하게 찬 기운이 돌았다. 등줄기까지 시원해지는 기분에 살짝 몸을 떨고는 곧장 물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그러고는 바위 위를 향해 가차 없이 물을 뿌렸다. 난데없는 물장구에 윤기가 자신과 여철의 짐 보따리를 대충 싸매서 멀리 치워버리고 두 팔로 제 몸을 막았다. 여철은 웃으며 물장구를 멈추지 않았다. 팔을 허우적거리며 그만두라는 표시를 하는 윤기를 보며 여철은 더욱 세차게 물을 뿌렸다.

 

 

“그만하라고 말해 보거라. 그럼 내 그만두지.”

 

 

얼굴 가득 흐르는 물을 푸우, 푸우 하며 떨치고, 손으로 얼굴을 닦아내도 날아드는 물은 도무지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미 옷은 전부 축축하게 젖어버렸다. 저 어르신은 저 나이 먹고도 기운이 사그라질 줄 몰랐다. 평생을 기운 넘치는 장사로 살 팔자인 거 같았다. 지칠 법도 한데 쉼 없이 물을 뿌렸다. 결국 헛손질만 계속하던 윤기가 으아, 하는 탄성을 내질렀다.

 

 

“그만두십시오!”

 

 

그 외마디 외침에 여철의 행동이 뚝, 끊겼다. 물장구를 치느라 저도 흠뻑 젖어있던 여철은 윤기의 목소리에 잠시 멍하게 굳었던 표정을 풀었다. 그러나 곧 계곡의 물줄기만큼이나 시원하게 웃었고, 바위 위의 윤기를 잡아당겼다. 으악, 하는 소리를 내지르는 윤기의 목소리가 듣기 좋았다. 대책 없이 이끌린 윤기는 곧장 물 안으로 처박혔다. 차가운 계곡물이 정신을 번쩍 들게 만들었다.

 

 

“정말 이러실 겁니까!”

“너야말로 이러기냐. 소리를 낼 줄 알면서 감쪽같이 속여? 에라이 야박한 놈아.”

 

 

계곡에 주저앉아 원망스러운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는 윤기를 보던 여철은 뒷짐을 지고 선 채로 발로 물을 뿌렸다. 다시금 으악, 하는 윤기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철도 시원스레 소리 내며 호탕하게 웃었다.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그랬겠지.”

“말을 많이 하면 아프기도 하고.”

“당연히 그렇겠지.”

 

 

윤기가 젖은 머리를 털어내며 몸을 정리하더니 그대로 몸을 앞으로 숙여 여철의 다리를 잡아당겼다. 그 재빠른 행동에 여철도 계곡물에 풍덩, 빠지고 말았다. 윤기가 물을 찰박찰박 때려대며 웃었다.

 

 

“스승님이 말이 좀 많으십니까. 제 목이 피곤할까 그랬습니다.”

“뭐라? 이 괘씸한 놈 같으니.”

 

 

여철은 곧장 윤기 위로 엎어졌고 물을 연달아 뿌렸다. 사내 둘이 엎치락뒤치락하며 계곡에서 놀이를 즐겨댔다. 다행히 해는 높이 떠 있었고, 날은 따뜻했다.

 

 

 

*

“너희 뭐하냐?”

“어? 왔어?”

 

 

태형은 작게 고개를 저으며 저를 향해 웃으며 인사해주는 두 사람에게로 다가갔다. 찰박거리는 물소리가 점점 크게 들렸다. 커다란 함지박을 두고 그 안에 물을 길어놓고 발로 야무지게 이불을 밟으며 빨래를 하고 있었다.

 

 

“빨래를 할 거면 개울로 갈 것이지 왜 여기서 이러고 있어.”

“개울물은 너무 시려서 안 돼. 우리 지민이 발 시리단 말이야.”

“도, 도련님.”

“어어, 또 그렇게 부른다. 다시, 다시 불러줘.”

“…정국아.”

 

 

정국의 팔에 딱 붙어서 발을 움직이던 지민이 얼굴을 벌겋게 붉혔다. 태형은 눈꼴이 다 시렸다. 이제라고 지민을 완전히 떠나보낸 건 아니지만, 차분하게 정리하고 있었다. 잘 지내는 두 사람을 보며 속이 아픈 날도 여럿이었지만 그래도 잘 버티고 있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이런 꼴은 도저히 참아줄 수가 없었다.

 

 

“나 여기 있거든? 입맞춤은 좀 나중에 해!”

“아, 거기 있었지? 미안. 우리 지민이밖에 안 보여서.”

 

 

그 말에 두 사람이 딱 붙여놨던 얼굴을 떼어냈다. 정국은 웃었고, 지민은 다시금 얼굴을 붉혔으며, 태형은 꽉 막혀오는 제 속을 팡팡 두드렸다. 어쩐지 묘하게 정국은 자신에게 복수를 하고 있는 거 같았다. 지민을 데리고 한양 밖을 떠돈 자신을 은근하게 투기하고 있었다. 바보 같은 박지민은 영 모르겠지만, 지민을 두고 들끓는 연심을 가졌던 두 사람은 느끼고 있었다. 완전히 서로를 의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어떻게 해도 태형이 지는 싸움이었다. 작게 한숨을 푹, 내쉰 태형은 다시금 두 사람에게 말을 건넸다.

 

 

“이렇게 꾸물대서 언제 일을 마치려고 해. 내일이 문 여는 날인 거 잊었어?”

“알고 있어. 우리 엄청 열심히 하고 있는데.”

“더 열심히 하라고 더! 자꾸 그러면 우리 형님께 이른다?”

“미안해 태형아. 얼른 할게. 정국아 얼른 마무리하고 널어두자.”

“알겠어. 내가 마무리할게. 잠시만.”

“어어, 국아!”

 

 

정국이 대뜸 지민을 안아 들었고 함지박 밖으로 빠져나갔다. 맨발로 마당을 거닐어 마루에 지민을 앉혀두고 옆에 준비해 둔 천으로 젖은 지민의 발을 닦아줬다. 하지 말라며 정국을 밀어냈지만 제가 당해낼 수 있는 덩치가 아니었다. 지민은 그저 단단한 정국의 어깨를 잡고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그런 두 사람을 보며 태형이 제 속을 두드렸다. 제게 남은 감정은 감정이고, 주어진 일은 일이었다. 공과 사를 구분하고자 부단히도 애썼지만, 공과 사 어느 방면도 빼놓지 않고 태형을 복장 터지게 하는 행태를 볼수록 머리가 지끈거리며 아파왔다.

 

지난번 형과 웬 사내가 이야기를 나눴던 일이 잘 진행되었고, 곧장 여각 사업을 시작했다. 두 거대한 상단이 만나니 커다란 집을 수리하는 데도 별 무리가 없었다. 태형은 깔끔하게 바뀐 집을 잠시 둘러봤다. 이전보다 훨씬 더 보기 좋았다. 예전엔 묘하게 흐르는 위압감 같은 게 있었는데, 지금은 편안하고 다정한 느낌이 들었다. 벌써부터 한양 안팎으로 이 여각에 대한 말이 나돌았다. 공사가 끝나기 전부터 구경을 오는 사람들도 많았다.

 

 

“정말 그렇게 꾸물거릴래?”

 

 

헌데, 그렇게 세간의 주목을 받고 있는 여각의 개업일이 내일인데 주인이라는 놈들이 이렇게 미적대고 있었다. 태형의 윽박지름에도 별 반응 없이, 두 사람은 다정하고 여유롭게 눈맞춤이나 하고 있었다. 그래, 어느 정도 이해는 한다. 좋겠지. 좋은 건 알겠는데, 일은 일이었다. 어마어마한 자금이 들어간 이 일은 분명 성공할 거지만, 더욱 잘 되어야 했다. 그 생각마저 들자 머리가 더욱 아찔했다. 저 행복에 빠진 두 사람에게 이 여각을 맡겨도 되는 건가 싶었다.

 

 

“그럼 너도 돕던가.”

“뭐?”

“바쁘다며. 온 김에 도와. 거기, 매번 따라오시는 분도 함께 도와요.”

“야. 이 분은!”

“전 괜찮습니다. 돕겠습니다. 그저 할 일 없이 있는 게 더 힘듭니다.”

 

 

뭐라고 따지려던 태형의 어깨를 다정하게 잡으며 사내가 옆에 섰다. 단정하게 잘생긴 이 사람은 함께 협업하는 상단의 사람이었다. 처음 이 집을 시찰한 것도 이 사람과 함께 했었다. 주로 사무적인 일을 석진과 상단의 주인이 했다면, 돌아다니는 일은 태형과 이 사람이 했다. 태형은 괜찮다고 말리려 했지만 사내는 벌써 제 바짓단을 걷어 올리고는 함지박에 발을 담그고 있었다.

 

 

“아니 저기!”

“물이 좀 찬데, 저걸 써도 되겠습니까?”

“아 그거. 우리 지민이 쓰라고 데워둔 거긴 한데. 조금만 쓰세요.”

“정국아.”

“알겠어. 안 그럴게. 우리 지민이가 많이 써도 된대요.”

 

 

말마다 우리 지민이, 우리 지민이. 태형은 정국의 둥그런 뒤통수를 흘겼다. 나중에 꼭 저 뒤통수를 세게 때리고 말 거라는 다짐을 참 오랫동안 해 왔다. 그러다 저쪽에서 사내가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틀었다. 함지박에 올라선 사람이 웃으며 손을 내밀고 있었다.

 

 

“들어오세요. 이제 물이 따뜻합니다.”

“아, 안 하셔도 됩니다. 제가 하면 돼요.”

“어찌 이런 일을 홀로 시킵니까. 그럼 저기서 동무와 함께 쉬시겠어요? 저 혼자 해도 됩니다.”

“아닙니다! 가겠습니다. 야. 너희도 저기다 물 받아서 얼른 해. 대체 이불 빨래만 며칠을 하는 거야?”

“우리 지민이한테 막 시키고 그러지 마!”

“정국아. 그러지 마. 같이 해야 얼른 끝나지.”

 

 

가끔 보면 그 힘들었던 시간들이 있긴 했던 건지 싶을 때가 있었다. 늘 그늘진 얼굴에 종종 팔을 긋던 모습은 완전히 사라지고 없었다. 예전에 보던 그 고집쟁이 도련님으로 돌아간 거 같았다. 그때처럼 꽤 못되고 영악해졌다 건 아니다. 뭐랄까, 천진함을 찾았달까. 더없이 기뻐 보였고 밝아 보였다. 그저 떼어놓고 보면 참 보기 좋은 얼굴이었지만, 꼭 그 얼굴 옆엔 지민이 붙어있어 태형은 늘 뒤집히는 속을 달래야 했다. 아마 완전히 잊을 순 없을 거다. 조금 나아지기나 할 뿐.

 

 

“차갑지 않으세요?”

“네. 괜찮습니다. 따뜻합니다.”

 

 

함지박 안으로 발을 담그는 태형에게 사내가 조용히 물어왔다. 발을 감아오는 따스한 느낌에 태형이 기분 좋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 얼굴을 가만히 보던 사내가 태형의 얼굴 가까이 제 얼굴을 숙여왔다.

 

 

“저 두 분이 좀 얄궂은 듯하여, 따뜻한 물을 많이 퍼 담았습니다.”

 

 

꽤 장난기 섞인 목소리에 태형이 큭큭대며 웃었다. 그러다 머리통으로 앞에 선 사내를 밀어버렸고, 넘어지려 하는 것을 급하게 끌어 붙잡았다. 하도 놀라 가슴께가 다 벌렁거렸다.

 

 

“괜찮으십니까?”

“예. 전 괜찮습니다.”

“거기 두 사람도 그러고 붙어있지 말고 빨리해. 누구한테 꾸물거린다는 건지 모르겠네.”

“하, 하고 있거든?”

“태형이 너 안 하고 있는 거 다 봤는데.”

“지민이 너까지! 이러기야?“

 

 

마당이 웃음소리로 가득 찼다. 아무래도 오늘 하루 종일 이곳에서 두 사람을 도와 일을 해야 할 거 같았다. 전 같으면 좀 쓸쓸하다고 여겼을 거 같지만, 그래도 이젠 제 편을 들어주는 이가 한 사람은 있었다. 그것만으로 태형은 충분히 위로를 느꼈다. 발을 감아오는 물도, 주위를 둘러싼 공기도 다 따스했다.

 

 

 

_

계곡에서 한참을 뒹굴던 두 사람은 다 지쳐서야 헉헉대며 물 밖으로 빠져나왔다. 그리고 곧장 넓은 바위 위에 몸을 뉘였다. 몇 가지 옷은 벗어 근처에 널어두었다. 날이 좋아 금방 마를 것 같았다. 마르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옷이 마르지 않는다면 여기서 밤을 보내고 내일 다시 떠나면 되었다. 급할 건 없었다.

 

 

“헌데 넌 언제까지 날 스승님이라 부를 것이냐.”

“스승님이 아니면 무어라 합니까.”

“거, 뭐 스승을 사부라고도 부르고, 사부의 부자가 뭐더라. 거 있지 않으냐.”

 

 

애먼 콧잔등만 괴롭히는 여철을 흘긋 본 윤기가 활짝 웃었다. 어떤 말을 바라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여철이 언젠지 모를 때부터 은근하게 티를 내오고 있었다. 윤기는 웃으며 여철을 보다가 눈이 마주치자 표정을 굳히곤 고개를 저었다. 영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장난을 치다 다시금 웃어버렸다. 그런 윤기의 얼굴을 본 여철도 그저 웃어버리고 말았다. 언젠가 저 녀석이 그렇게 불러줄 날이 오겠지. 여철은 바위 위로 발라당 누워버렸다. 해가 조금씩 지고 있었지만 여전히 따듯했다.

 

 

“한양, 안 갈 테냐?”

“예?”

“많이 바뀌었는데. 널 기다리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지 않으냐.”

 

 

느닷없는 여철의 말에 윤기가 멍하니 먼 곳을 바라봤다. 한양을 떠올리는 윤기의 표정이 전만큼 무겁지 않았다. 해가 지는 하늘에는 구름 몇 점이 떠다녔다. 푸르기도, 붉기도 한 그 하늘을 가만히 바라고만 있는 윤기를 향해 여철이 말을 꺼냈다.

 

 

“누구는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보고 참 깨끗하다 하지만, 뭐 구름 몇 점 더 있다고 저 하늘이 더러운 것이겠느냐. 저리 푸르른 건 구름이 있건 없건 매한가지인데.”

 

 

여철의 말처럼 구름이 떠 있는 하늘도 충분히 푸르고 맑았다. 윤기는 그 하늘을 계속 눈에 담았다.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옷은 거의 말라가고 있었다.

 

 

“갈 테냐?”

 

 

다시금 물어오는 여철의 말에 하늘을 올려다보던 윤기가 고개를 틀어 제 스승을 바라봤다. 말간 윤기의 얼굴이 석양과 잘 어울렸다. 윤기는 스승을 향해 함빡 웃어 보였다. 그러고는 고개를 저었다.

 

 

“다른 세상을, 좀 더 보고 싶습니다.”

“…그래.”

“한양은, 그 후에 생각하려 합니다.”

 

 

윤기의 말에 여철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윤기는 창창한 나이였다. 그런 윤기를 따라다니느라 가끔은 버거울 정도였다. 이 세상의 좋은 모습, 아름다운 모습 잘 구경하다 보면 많은 것이 바뀌었음을 알게 될 거였다. 그런 후에 다시 한양에 간다면, 새로이 좋은 사람들과 함께할 수 있을 것이다. 충분히 그럴 가치가 있는 녀석이니까.

 

길 위에 참 많은 꽃들이 피어있는 게 이제야 눈에 들어왔다. 윤기는 고개를 천천히 돌려가며 주위에 핀 꽃들을 바라봤다. 저 꽃을 무어라 부르는지, 그 씨는 어디서 날아왔는지 알 수 없었다. 온전하게 성한 꽃도 있었지만, 어디에 뜯긴 건지 꽃잎이 모자라거나 상한 꽃들도 있었다. 그러나 많이 상했다 할지언정, 저 꽃을 보고 꽃이 아니라고 할 사람은 없었다. 잎 하나가 떨어지고, 남은 잎도 상처 난 꽃을 가만히 바라보며 윤기는 웃었다. 결국, 너도 꽃이다. 아주 아름다운.

 

 

 

<길 위에서 전해지는 번외 샛길. 끝>

 

샛길까지 함께 거닐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