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래더] 트위터는 @Rather_0613 (舊 새벽의덕후)

[국민/랩홉] 길 위에서 전해지는

 

 

 

W.새벽의덕후

 

 

 

번외. 샛길

 

 

上.

 

 

“뭐하는 게냐? 이리 와서 술 따르지 않고.”

“저희는 기예를 선보이기 위해 온 것입니다.”

“됐다. 그깟 춤 따위. 그딴 건 집어치우고 어서 이리와 술이나 따르거라.”

“죄송합니다. 이제 저희 가빈에서는 기생들이 따로이 술시중을 들지 않습니다.”

“뭐어라? 아니 이년아. 내가 가빈에 왜 왔겠느냐. 기생들 끼고 술시중 받자고 온 건데 건방지게 뭐어? 술시중을 들지 않아?”

 

 

기예만 선보이고 나서려던 기생은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더 이상 술시중을 들지 말라는 나비의 명이 있었고, 그 명을 시행한 지 벌써 열흘째였다. 그리고 그때마다 번번이, 이렇게 곤란한 상황에 처해야했다.

 

맨 앞자리에 서 있던 애란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제 뒤로 가빈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린 기생들도 있었다. 대충 보아도 어린 티가 나는 아이들인데, 이 아이들을 옆에 끼고 추잡스럽게 놀 생각을 하는 저 양반 나리가 끔찍했다. 그러나 대놓고 싫은 티를 낼 수는 없었다. 속으론 금수니, 파렴치니 온갖 욕찌기를 하고 있었지만 겉모습만은 최대한 다정하게 정돈하여 공손한 자세로 섰다.

 

 

“가빈에서 새로 시행하는 일입니다. 명을 따르지 않으면 저희는 쫓겨납니다. 양해 부탁드리어요.”

“허, 웃기는 소리를 하는구나. 지금 네가 눈치를 봐야 할 건 다른 게 아니라 나다. 나! 내가 여기에 쏟아부은 돈이 얼마고, 앞으로 쓸 돈이 얼마인데.”

“송구합니다. 허나 저희가 가빈의 명을 멋대로 어길 수는 없는 처지라….”

“시끄럽다! 당장 내 옆에 와서 앉거라! 나비는 무섭지도 않다더냐? 이런 식으로 굴었다간 금세 망할 텐데? 어디 기생들 따위가 고고한 척이더냐. 가빈이다, 나비다 그리 불러주니 퍽 대단하다 느끼고 있는가 보구나. 오냐, 내 오늘 네년들이 어떤 위치인지 분명히 알려주마.”

 

 

애란은 고개를 슬쩍 돌려 인상을 찌푸렸다. 하나같이 다 같은 말만 했다. 나랏일을 한다는 조정에서는 수염 덥수룩한 이들이 모여 이런 말들만 궁리하는가, 생각하게 할 정도였다. 제 호통에도 기생들이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자, 소리치던 사내는 제 몸을 벌떡 일으키더니 가장 끄트머리에 있던 어린 기생의 머리채를 잡았다. 애란이 미처 어쩔 틈도 없이 대뜸 달려든 것이다.

 

 

“뭐하시는 겁니까! 이거 놓으세요!”

“닥쳐라! 어디서 감히 기생년 주제에 소리를 질러! 네들이 어떤 존재인 줄 아느냐? 내가 이렇게 해도 상관없는 종자들이다. 이깟 천한 것들 주제에! 감히 뭐가 어째? 헛소리들 말고 다들 이렇게 머리 처박고 술이나 따르란 말이야!”

“놓으세요!”

“어디 그 더러운 몸뚱이로 감히 누구에게 손을 대는 것이야!”

 

 

잔뜩 흥분한 사내가 어린 기생의 머리채를 잡고 흔들었고, 옆에 달라붙은 다른 기생들을 험상궂게 떼어냈다. 함께 온 다른 사내들은 그저 허허, 하며 방관만 할 뿐이었다. 저러다 이쪽에서 기를 누그러뜨리면 당장에 옆에 끼고 앉아 험악하게 대할 게 뻔했다. 애란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잠시 부여잡았다가 사내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머리채를 잡힌 채 눈물만 뚝뚝 흘리고 있는 아이를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었다. 그런 애란의 낌새를 알았는지 사내가 손을 높이 쳐들고 애란을 때리려 들었다. 머리 위로 보인 널찍한 손바닥에 아찔함을 느끼며 눈을 질끈 감았을 때였다.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지금 뭐 하는 겁니까!”

“너는 뭐, 으아악.”

“이리, 다들 이리 내 뒤로 오거라.”

 

 

열린 문으로 호석이 들어섰고, 호석의 뒤를 따라 들어온 남준이 넓은 보폭으로 금세 사내에게 닿았다. 그러곤 사내의 손을 잡아 비틀어버렸다. 애란은 울음을 터뜨리며 바닥에 주저앉은 아이를 붙잡아 일으키고는 문가로 향했다. 남준은 다들 문 뒤로 비켜난 걸 보고서야 사내의 손을 놓아주었다. 어찌나 세게 쥐고 있었는지 잠시 피가 돌지 않았던 손에 급작스럽게 피가 몰려 저릿할 지경이었다. 사내는 분을 못 이긴 눈을 하고 호석을 노려봤다. 심정 같아서는 아까 했듯 머리채라도 쥐고 흔들고 싶지만 옆에 선 커다란 사내 때문에 그저 험한 눈길만 보낼 뿐이었다.

 

 

“네놈이 감히, 감히 나에게 이딴 짓을 하고도 무사할 것 같으냐!”

“그러는 나리께서는 이런 짓을 하시고도 무사하실 것 같습니까?”

“뭐라? 건방진 새끼가!”

“나가세요! 가빈은 이렇게 격 떨어지는 객은 받지 않습니다! 이곳은 기예를 선보이는 곳이지 몸을 팔고 술을 파는 곳이 아닙니다!”

“네가 정말 미친 게로구나 감히!”

“시끄럽다! 네가 감히 이 아이들을 업신여기고 조롱하였느냐! 기예를 우습게보고 기생을 천박하게 취급했더냐! 그따위 저열한 행태를 하고 네놈이 배운 양반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당장 가빈에서 꺼지거라! 기예 보는 눈 하나 없는 너 같은 놈들에겐 기예를 보이지 않을 것이다!”

 

 

호석의 말에 분을 삭이지 못하고 달려들려던 사내는 곧장 남준에게 제지당했다. 곧이어 그의 무리들 모두가 가빈의 하인들에게 떠밀려 밖으로 쫓겨났다. 호석은 놀라 울먹이는 아이들을 다독이며 처소로 돌려보냈다. 아직도 열이 난 머리가 후끈거렸다. 기예를 감상할 줄도 모르는 것들 때문에 매일이 소란이었다.

 

이건 호석이 다시금 마음을 다잡으면서 시작한 일이었다. 더는 가빈의 아이들이 저처럼 모욕당하고 끔찍한 일을 당하지 않기를 바랐다. 또한 한동안 자신이 잊고 지냈던 그 기예를, 예악을 아끼고 소중하게 여기고 싶었다. 석진과 태형을 찾아가 오래도록 상의했다. 다정하고 경청할 줄 아는 두 사람은 호석의 말을 성실히 들어주었다. 호석은 더 이상 가빈에서 술시중을 들지 않겠다고 했다. 가빈은 술을 파는 주막이 아니라, 기예를 선보이는 마당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술과 음식은 기예를 선보이는 자리에서 부가적으로 제공되는 것이지 절대 주가 될 수 없다고 했다.

 

석진과 태형은 맞는 말이라며 긍정해주었다. 호석은 가빈을 새로이 바꿔나가고 있었다. 불과 열흘 정도의 시간이었지만 그 사이 분위기가 많이 바뀌어있었다. 매일같이 저런 몰상식한 자들이 소란을 일으켰지만, 제법 점잔을 빼는 이들이 우아한 척하며 바뀐 가빈에 녹아들려고 하고 있었다. 아직 호석이 바라는 가빈을 만들기 위해선 한참 남았지만 그래도 눈에 보이는 변화에 만족하고 있었다. 다만 이런 일을 상대하는 건 여전히 기분 나쁘고, 피로했다.

 

아직도 열이 식지 않아 거칠게 숨을 내쉬는 호석의 곁으로 남준이 다가왔고, 다정하게 어깨를 감싸주었다. 호석은 아무렇지 않게 그 단단한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분명 아까까진 기분이 아주 나빴는데, 남준의 손길이 닿자마자 금세 안정을 찾았다. 쿵덕거리며 뛰는 소리가 듣기 좋았다.

 

 

“내일 가빈 열기 전에, 바람이나 쐬러 갈래?”

“어디로?”

“그냥, 근처 아무데나. 좀 걷자.”

“응. 그러자.”

 

 

이제 남준과 함께하기만 한다면, 어디든 상관없었다. 남준이 이끌고 갈 그곳이 불구덩이라 해도 괜찮았다. 물론 남준이 그런 곳을 자신을 데려갈 리 만무했지만.

 

 

_

아무 말 없이 걸었다. 호석은 지금 이 순간이 매우 만족스러웠다. 남준과 같은 이불을 덮고 잠들었고, 같은 곳에서 눈을 떴고, 함께 아침을 맞이했다. 외출을 위한 준비도 함께하고 어디든 나란히 걸었다. 아무렇지 않게 손을 붙잡을 수 있는 것도 좋았다. 무엇이든 남준과 많은 것을 공유하는 지금이 행복했다. 호석을 가만히 바라보며 걷던 남준이 말을 꺼냈다.

 

 

“기분, 많이 상했어?”

“조금. 어제까진 그랬는데 이제 괜찮아.”

“정말?”

“응. 너랑 이렇게 손잡고 나란히 걷고, 옆엔 꽃도 많고. 지금은 기분 좋아.”

“다행이다.”

“준아. 잠깐만, 잠깐만 여기 멈춰서 봐.”

“응? 왜, 어디 가?”

 

 

깍지 낀 손을 앞뒤로 흔들며 걷던 호석이 대뜸 손을 놓았다. 괜히 그 허전한 손을 쥐었다 펴면서 남준은 호석의 뒷모습을 쳐다봤다. 당황한 탓에 몇 걸음 움직여 호석을 따라가기도 했다. 호석은 길옆으로 뛰어갔다. 느닷없이 꽃무더기 속으로 들어가더니 길게 줄기를 뻗은 꽃 하나에 다가가 섰다. 그리곤 제 몸을 숙여 꽃 옆에 제 얼굴을 기대 두었다. 싱그럽게 웃으며 남준을 바라보던 호석은 약간 상기된 표정으로 물었다.

 

 

“준아. 나 찾아봐.”

“응? 무슨 말이야?”

“나 찾아보라니까!”

“거기. 거기 있잖아.”

 

 

쌀쌀하다고 느껴질 만큼 재미없는 남준의 대답에 한껏 상기되었던 호석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흥미를 잃었는지 숙였던 몸을 일으킨 호석은 괜히 제 옷을 탈탈 털어내며 꽃무더기 틈에서 빠져나왔다. 장난에 장단 좀 맞춰주면 어때서. 많이 변했다고는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재미없기는 매한가지인 남준이 야속하게 느껴졌다. 괜히 툴툴대며 멀뚱히 서 있는 남준을 비껴가는데 순식간에 붙들렸다. 단단한 팔이 호석의 배와 허리를 감아왔다.

 

 

“뭐, 뭐해.”

“쟤들 말고, 내 옆에 붙어 있어.”

“어?”

“꽃들이 다 죽었다. 너무 아름다운 걸 만나서 그런가. 기가 다 죽었네.”

 

 

귓가로 들어오는 남준의 말에 호석이 고개를 틀었다. 고개를 돌리자마자 본 목덜미도, 시선을 옮기며 쳐다본 귀도, 얼굴도 다 붉었다. 호석의 시선을 느낀 것인지 남준이 흘긋대며 시선을 이리저리 돌렸다가 곧장 뻥 뚫린 정면만을 바라보고 괜히 제 코를 긁었다. 헛기침을 두어 번 하더니 이내 제 몸을 호석이 선 방향으로 돌렸다. 그리고는 다시금 호석의 허리를 붙잡고 걸었다. 단단하게 밀어오는 힘에 호석은 떠밀리듯 걸었다. 멍한 표정을 짓고서 남준의 말을 내내 곱씹었고, 곧 그 의미를 깨닫고는 함빡 웃었다. 그 얼굴은 꽃무더기로 들어갈 때보다도 더 상기되어 있었고, 더 싱그러웠다.

 

 

“질투했어?”

“네?”

“맞지? 질투. 내가 너 두고 꽃들 틈으로 가서 시샘이 난 거지?”

“아니, 그건. 그러니까.”

“아까 한 말, 정말이야? 내가 아름다워? 꽃들보다도 더?”

“그, 시간이 많이 늦었습니다. 서둘러 돌아가야 할 것 같습니다.”

“준아. 대답해 봐. 응? 다시 한번 더 말해 봐. 왜 답을 못해? 부끄러운,”

 

 

물음을 던질 때마다 붉어지는 남준의 얼굴이 보기 좋아서 자꾸 쫑알쫑알 말을 꺼냈다. 아예 곁에 찰싹 붙어서 물음을 건네던 중이었는데, 더는 그럴 수 없었다. 걸음을 멈춘 남준이 입을 맞춰왔다. 말캉하게 닿아오는 입술에 놀라 동그랗게 떴던 눈을 슬쩍 감았다. 깊지 않게, 길지 않게 닿아있던 입술이 떨어졌다. 아까까진 남준의 얼굴이 붉었는데, 잠깐의 입맞춤으로 그 붉은빛이 옮겨온 듯 호석의 얼굴이 다 화끈거렸다. 남준은 손을 들어 올려 호석의 얼굴을 감쌌다. 열이 올라 따듯했다.

 

 

“머리 울려. 그만 물어봐.”

“그래서. 답은 안 해줄 거야? 어떠,”

“저 꽃들보다도, 지는 석양보다도, 떠오르는 일출보다도 네가 더 아름다워.”

“남준아.”

“이렇게 아름다운 네가 평생 내 곁에만 있었으면 좋겠어. 호석아.”

 

 

그 말에 호석의 가슴이 한껏 일렁거렸다. 바람이 불어왔다. 바람이 머리카락을 간질였고, 간지러움은 온몸으로 뻗어갔다. 이제는 어렵지 않게 제 이름을 불러주는 남준의 목소리가 좋았다. 입맞춤 후에는 늘 다정하게 입술과 볼을 쓸어주는 그 손길이 좋았다. 벅찼다. 이렇게 좋은데 우리는 그 오랜 시간 무엇을 하던 것일까. 허튼 길로만 빠져 괜한 걸음만 낭비했던 것 같았다.

 

호석은 제 앞에 다정한 웃음을 지으며 서 있는 남준을 바라봤다. 좋았다. 그를 사랑했다. 여전히 붉은 얼굴로 예쁘게 웃고 있던 호석은 남준이 늘 하던 것처럼 그의 얼굴을 잡았다. 그리곤 깨금발을 한 채 곧장 입을 맞췄다. 호석은 남준의 목덜미를 감았고, 남준은 호석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바람은 여전히 불었지만, 딱 달라붙은 두 사람 사이를 파고들진 못했다. 아까보다는 길고, 깊은 입맞춤이 길 위에 멈춰서 있었다.

 

 

 

*

태형은 앞만 보고 걸었다. 이 길을 지민과 함께 나섰을 때는 느긋하게 걸었고, 사방팔방을 다 쳐다보며 다녔다. 한양 밖으로 이렇게 멀리 나온 건 처음이었다. 한양 밖은 이렇구나, 생각하며 아직도 전쟁의 흔적이 역력한 주위를 둘렀다. 가장 눈에 많이 담았던 건 지민이었다. 지민은 몇 번이고 딛는 이 길에서 가장 눈이 가면서도, 가장 전쟁의 흔적을 많이 묻히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자꾸 눈이 갈 대상이 없어서, 딛는 길 주위가 더는 새롭지 않아서 정면만을 응시했다.

 

조금은 더 솔직해지자면, 두려웠다. 행여나 이 길 어딘가에 지민과 정국이 다정스레 붙어있는 걸 보게 될까 무서웠다. 그렇게 살라고 보낸 거긴 하지만 아직은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혹시나 너무 밝은 낮에 다정을 되찾고 살가운 두 사람을 보게 될까 일부러 날이 으슥해질 때를 골라 걸었다.

 

그렇게 지루한 길을 지나 익숙한 곳에 닿았다. 돌아오기 싫었던 자신도 이렇게나 쉽게, 빠르게 다시 한양으로 돌아왔는데, 지민이는 어땠을까. 매 순간 달음박질을 하지 않았을까. 태형은 여전히 잊히질 않는 지민의 생각을 하다가 웃었다. 바보 같았다.

 

어둠이 가득한 길을 헤매지 않고 곧장 걸었다. 그러다 이 동네에서 가장 으리으리하고, 가장 번듯한 집 앞에서 잠깐 멈춰 섰다. 제집 대문을 한참 바라보다가 태형은 다급하게 집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안쪽 깊이 자리한 사랑채로 갈수록 집안의 고요를 깨뜨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너무 낯설었지만, 어쩌면 익숙하기도 한 그 목소리가 물에 젖어 한껏 축축해져 있었다.

 

 

“이제, 이제 저는 어떡해야 합니까. 할머니. 왜, 왜 제게 그러셨어요. 대체 왜….”

 

 

어둠 속에서 홀로 환하게 빛나고 있는 방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문 앞에서부터 진득하니 달라 붙어있던 긴장감이 좀처럼 사그라질 줄 몰랐다. 열려있는 방문 너머로 제 형이 보였다. 무릎을 꿇어앉은 채로 바닥에 머리를 대고 잔뜩 웅크리고 있었다. 언제나 참 넓다고 느꼈던 등인데, 그 너른 등이 어쩐 일인지 참 작아 보였다.

 

낯설었다. 참 낯설기도 했다. 제 형이 작아 보이는 것도 낯설었지만 무엇보다 낯선 건 울고 있는 모습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도 우는 걸 보지 못했다. 물론 태형이 보지 못했다고 석진이 울지 않은 건 아니었겠지만, 어쨌든 그만큼 석진이 우는 모습은 참 낯선 것이었다. 태형은 상복을 입고 서럽게 우는 형을 바라봤다. 그제야 제가 맡고 있는 게 향냄새라는 걸 깨달았다.

 

 

“저는, 저는 두렵습니다. 할머니. 전 한 번도, 정말 어른이었던 적이 없어요. 그런 적 없는데…. 저는 이제 저는….”

 

 

입 안으로 이를 꽉 물었는지 꾸역꾸역 뱉는 소리가 듣는 이의 마음을 아프게 짓눌렀다. 석진의 말에 태형도 제 큰 눈 가득 물기를 머금었다. 그제야 제 형이 그동안 무엇을 짊어지고 살았는지 아주 조금, 짐작이 갔다.

 

태형이 기억하는 그 순간부터 석진은 늘 어른스러웠다. 주위의 평판도 늘 그랬다. 철이 일찍 들었구나, 대견하구나, 참 어른스럽네. 그런 말을 들을 때도 석진은 고작 열 살 남짓한 소년이었다. 자신도 마냥 어리광부리고 싶을 나이에 석진은 많은 것을 끌어안았다. 아버지가 다른, 출신도 모르는 씨 다른 동생을 참 따스하게도 안아줬었다. 가장 큰 어른이었던 할머니의 기대에도 순응했고, 그에 맞게 행동했다. 늘 어른이어야 했던 석진은 한 번도 타인의 앞에서 울지 않았다. 그 무거운 것들을 짊어지고서도 한 번도 힘들다 투정하지 않았다.

 

태형은 늘 어린아이처럼 굴었는데 석진은 아주 어릴 적에도 어른처럼 행동했다. 그랬던 제 형이 저렇게 아이처럼 울고 있었다. 투정을 부리고, 한껏 서러워하며 그렇게 울고 있었다. 태형은 얼굴 위를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고 방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곧장 줄곧 보고 있던 제 형의 등을 감싸 안았다. 울고 있던 석진이 놀라 몸을 들어 올렸다.

 

 

“나, 돌아왔어.”

“태형, 태형아….”

 

 

퍽 오랜만에 눈앞에 나타난 제 동생을 보고, 석진은 서둘러 눈물을 닦았다. 뻑뻑한 상복이 눈물에 절은 얼굴을 더 따끔거리게 만들었다. 석진은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다정하게 웃어 보이려고 했다. 그런데 슬픔으로 얼룩진 얼굴이 좀처럼 말을 듣질 않았다. 석진은 스스로 볼 수는 없어도 지금 제 표정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울지 충분히 짐작했다. 태형은 그런 형의 얼굴을 보는 게 싫었다. 다시 어른스러운 척하려는 그 모습에 죄책감마저 들었다.

 

 

“울어. 더, 울어도 돼.”

“아니야. 아니야, 태형아. 나는, 나는….”

“나 이제 왔어. 아주 온 거야. 그러니까 형. 좀 덜어놔도 돼. 나도 이제 어른이야.”

 

 

급히 눈물을 닦아내던 손이 무색하게도, 석진의 눈에는 다시금 눈물이 차올랐다. 눈물이 무거워 눈을 감았고, 서둘러 눈물이 떨어졌다. 태형은 그런 제 형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제 품에 안았다. 형은 언제, 누구에게 안겨봤을까. 자신은 형에게 업혀도 보았고, 지민에게 안겨도 보았는데. 제 형은 대체 언제, 어떤 이의 품에서 천진하게 굴어봤을까.

 

 

“태형아. 할머니께서, 할머님이…. 돌아가셨어.”

“알아. 알아, 형.”

“나는, 나는 이제 이 상단을…. 상단의 식구들을 어찌 해야….”

“힘들면 쉬어도 돼. 조금 물러나도 돼. 나한테 떠넘겨도 괜찮아.”

 

 

태형이 밟고 왔던 것보다도 날은 더 어두워져 있었다. 그것보다도 더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두 사람은 함께 울었다. 그러다 어둠이 걷히고 시커먼 게 새하얗게 변할 때까지 두 사람은 울다가, 미소 짓다가, 옛이야기를 하다가를 반복했다. 그러면서 태형은 제가 짊어지고 온 짐을 벗어 두었고, 석진도 아주 오랜만에 제 짐을 내려놓았다.

 

 

_

“아, 할머님께서 남기신 게 있어.”

“나한테?”

“응. 널 많이 찾으셨어.”

 

 

다 울었는지 두 사람은 나란히 벽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누구랄 것도 없이 두 사람 모두 표정이 편안했다. 어스름하게 아침이 밝아오고 있었고, 두 사람도 여유롭게 아침을 맞이하고 있을 때였다. 갑작스레 석진이 몸을 일으키더니 서랍장을 뒤졌다. 태형은 그런 제 형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인사 한 번 하지 않고 홀연히 떠나버린 제가 뭐라고, 할머님은 저를 찾으셨을까. 많은 생각이 들었다. 그런 태형의 앞에 석진이 서찰 하나를 내밀었다.

 

 

“너에게 꼭 전해주라고. 몇 번이고 당부하셨어.”

“이게, 뭔데?”

“천천히 읽어 봐. 나는 나가볼게. 오늘까지 장례를 치르기로 해서. 객들을 모시러 갈 테니까 너는 천천히 짐 풀어.”

“금방 갈게.”

 

 

태형의 말에 몸을 일으키던 석진이 웃으며 제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태형은 밖으로 향하는 형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제 손에 들린 서찰로 눈을 돌렸다. 서찰을 붙잡고 있는 손에서부터 저릿하게 긴장감이 몰려왔다. 태형은 서찰을 감싸고 있는 종이를 천천히 뜯어내고 서찰을 열었다. 꽤 정갈하게 쓰인 글자가 눈에 담겼다.

 

 

‘태형아. 내가 너를 태형이라고 불러준 적이 있던가. 나이가 먹어서 옛 기억을 까먹은 것인지, 없는 기억을 되짚는 것인지 알 수가 없구나. 태형아. 누군가 후회는 늦된 거라고 했었는데 그게 꼭 지금의 나와 같구나. 네 이름을 꼭 불러주려고 했는데 그땐 이미 네가 떠나고 없더구나. 너무 늦어버린 거 같아 미안하다. 차라리 네가 나를 할머니라고 부르는 것을 말리지나 말 것을. 부르는 말도, 불린 말도 전부 후회스럽구나.’

 

 

거기까지 읽은 태형은 잠깐 눈에서 서찰을 떼어냈다. 형과 밤새 흘리느라 다 써버린 줄 알았던 눈물이 다시금 얼굴을 뒤덮었다.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데, 춘옥으로부터 제 이름을 불린 것 같았다. 귓가에 제가 알던 춘옥의 목소리로, ‘태형아’하는 말이 만들어졌다. 잠시 서찰에서 멀리 눈을 떨어뜨리고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느리게 다시 서찰을 눈에 담았다.

 

 

‘들었겠지만, 넌 참 네 어미, 그러니까 정애를 많이 닮았다. 애정만 주고 키웠던 정애가 속절없이 떠나게 되고서부터, 난 너를 참 미워했다. 정애를 그렇게 보내버린 게 네 탓 같아서. 두렵기도 했다. 그렇게 남은 네가 참으로 정애 같아서. 이 할미가 널 참 많이도 미워했지. 정애에겐 한 번도 내보지 못했던 화를 너에겐 참 많이도 냈었다. 정애는 그토록 사랑했으면서, 너에겐 미움만을 주었구나. 정말 미안하다. 너에게도, 정애에게도, 그 누구에게도 나는 참 모자란 사람이었어. 참 많이도 아름다웠던 너희를 제대로 키우지 못했다. 끝내 어떤 형태로든 너희를 내 곁에서 떠나보내고 말았구나. 태형아. 남은 생 동안 이 사람을 많이 미워하고 원망해도 괜찮다. 평생 용서하지 않아도 괜찮다. 그리고 이젠 나를 할머니라 불러도 괜찮단다. 이 할미가 미워했던 것의 몇 곱절은 더 사랑받고 살 거라. 편하게 살 거라. 이 못난 사람은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거 같구나. 널 다시 보게 되면 참 좋으련만. 이 서찰을 직접 주게 되면 좋겠지만, 그건 이 죄 많은 늙은이의 과한 욕심이겠지. 태형아. 내 손주. 이 할미의 둘째 손주. 태형아.’

 

 

서찰은 붙잡은 손이 덜덜 떨렸다. 자꾸 손에 힘이 들어가서 종이 귀퉁이가 구겨졌다. 태형은 이 서찰이 망가지는 게 싫었다. 그래서 떨리는 손으로 서찰을 바닥에 내려놨다. 바닥 한 곳에 서찰은 고이 모셔두고, 태형은 무릎을 모아 얼굴을 묻었다. 한 번도 할머니를 미워하거나 원망하지 않았다. 그저 언제나 사랑받고 싶었을 뿐이었다. 눈길 한 번이나마 받아보고 싶었고, 인사 한 번이나마 건네 보고 싶었다. 밉지 않다고, 원망하지 않는다고. 그래서 용서할 것이 없다고 그 말들을 해주고 싶었는데, 제 할머니의 말처럼 늦어버렸다. 늦은 건, 할머니가 아니라 자신이었다.

 

 

“할머님, 할머니….”

 

 

아주 어릴 적 이후론 불러보지 못했던 그 말을 원 없이 불러보았다. 행여 아직 이 집을 떠돌고 계신다면 둘째 손주의 인사라도 듣고 가시라고. 언제나 이렇게 불러드리고 싶었다고. 부디 그곳에선 궂은일 마시고 편히 쉬시라고. 어머님을 만나게 된다면 언제나처럼 사랑만 주시라고. 다시 만날 그 날까지 잘 지내시라고.

 

 

“할머니….”

 

 

태형은 슬피 울었다. 석진이 미처 닫지 않았던 문 안으로 바람이 들어왔다. 태형을 휘감는 바람이 차갑지 않았다. 엎드린 태형의 등 위로 자꾸만 바람이 다정하게 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