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래더] 트위터는 @Rather_0613 (舊 새벽의덕후)

[국민/랩홉] 길 위에서 전해지는

 

 

W.새벽의덕후

 

 

제5장. 외곬

 

 

 

29(完).

 

 

 

 

눈을 떴다. 눈이 떠졌다. 내세라는 것이 있다고 믿어본 적은 없었다. 그 내세라는 곳에 와버린 것일까. 윤기는 뜬 눈으로 그런 생각을 했다. 내세에선 죄 많은 이를 불구덩이에 던진다는데. 자신은 죄가 많은 사람이었으니 곧 불구덩이로 들어가게 되겠구나,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런데 몸의 느낌이 죽은 느낌이 아니었다. 죽어본 적도 없으면서 그 느낌을 어찌 알겠냐마는 이것은 생생하게 살아있는 느낌이었다.

 

목가가 뻐근했다. 욱신거리며 고통을 주는 목을 부여잡으려다가 제 손에 무언가 둘러져 있다는 것을 느꼈다. 목으로 가져가던 손을 조금 더 들어 올려 눈앞에 두었다. 흰 천이 둘둘 감겨있었다. 손 옆으로 보이는 천장이 낯익은 것이었다. 애꿎은 손을 쥐면서 윤기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설마, 이곳은. 윤기가 낯익은 방을 둘러보던 와중에 방문이 열렸다. 방문으로 들어오는 사람을 보고 윤기는 제 눈을 크게 떴다. 늘 그랬듯 키가 큰, 여철이었다.

 

 

“아, 으으….”

 

 

살아있는 스승님이 반가워 그를 부르려 목구멍에 힘을 주어봤는데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천이 둘러진 손을 목으로 가져다 대는 걸 가만히 바라보며 여철이 그 곁에 앉았다.

 

 

“말을 할 수 없다는구나.”

 

 

오랜만에 듣는 말투로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말은 퍽 잔인한 것이었다. 그의 말에 윤기의 눈에 눈물이 잔뜩 고였다. 눈물을 참아내고자 제 입술을 세게 물었다. 물린 입술이 아릿하게 아파오자 윤기는 다시 한 번 확신할 수 있었다. 살아있었다. 차라리 죽어버리기나 할 것이지 결국 다시 살아났고, 대신 목소리를 잃었다. 그간 제가 알고 있는 것을 너무 떠벌리고 다닌 것에 대한 형벌일까 싶었다.

 

꾸역꾸역 참아냈지만 끝내 윤기의 눈에선 눈물이 흐르고 말았다. 눈물이 한 번 흐르자 그 뒤를 따라 몰아치듯 울음이 쏟아졌다. 결국 윤기는 제 두 손으로 얼굴을 덮어두고 그 안에서 울었다. 살아서 다행인 것인지, 아니면 다시 애써서 죽고 싶은 것인지 제 속을 저도 몰랐다. 그저 서글펐다.

 

 

“울 거라. 실컷 울 거라. 그래도 삶이라는 건 또 모르는 것 아니냐. 내가 이렇게 멀쩡히 네 앞에 온 것처럼. 너는 그 옛날 그때마냥 다시 이곳에 누워있던 것처럼. 모든 것은 돌아갈 것이고 돌아올 것이다. 괜찮을 거다. 윤기야.”

 

 

그 말을 하면서 제 품 안으로 윤기를 끌어안아 다독였다. 말을 할 수 없어 엉엉 소리를 내지 못하고 꺽꺽하며 숨넘어가는 소리만 내는 윤기가 안쓰러웠다. 참 오래도록 누워있었다. 제 목을 끊어놓고 다시 생을 이어 붙이느라 돌아오는 시간이 오래 걸렸던 거 같았다. 오랜만에 한양에 돌아온 여철은 윤기의 모습을 보고 한동안 말을 잃었었다.

 

 

“갈 곳이 없었으면 이리라도 올 것이지. 내내 어딜 떠돈 것이냐.”

 

 

너의 새 시작은 여기였으면서. 어느 곳을 찾아 그렇게 방황한 것이야.

 

여철의 큰 손이 윤기의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저 스스로에게 언제나 가혹한 녀석이었다. 그러지 않아도 될 것을 이 녀석은 늘 자신을 저 벼랑 끝에 매달아 놓았다. 그만한 죄를 지은 것도 아니었거늘. 그새 더 마른 등을 천천히 쓸어주었다.

 

변방을 제자들과 떠돌았고, 그들과 흩어졌다. 그러면서 이곳저곳 다시 꼼꼼하게 살피느라 한양으로 오는 길이 늦어졌다. 제자들과 흩어지고 홀로되니 윤기 생각이 많이도 났다. 그 십여 년간 홀로 잘만 다니던 조선 땅인데 제 옆에서 퉁명한 소리를 하며 웃던 녀석이 사라지니 퍽 쓸쓸했다. 혼자 걷는 길이 어색하게까지 느껴졌다.

 

반갑고 떠들썩한 재회를 기대하며 다시 만난 녀석은 전과 같은 모양새가 아니었다. 안쓰러운 아이였다. 긴 시간을 함께 지내면서도 늘 제 속을 한 번 시원하게 털어놓은 적이 없었다. 때로 짐짓 심각한 표정만 지어 보일 뿐, 저 스스로를 정리한 후에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지어 보이던 녀석이었다.

 

이렇게 목소리까지 잃을 건 없었을 텐데. 소리라도 낼 줄 알아야 이제라도 터놓는 법을 배울 것인데. 여철은 괜히 시큰해져 오는 제 코를 두툼한 손으로 대충 문질렀다. 처음 봤을 때나, 지금이나 이 자리에서 자신을 속상하게 하는 녀석이었다. 두툼한 손은 윤기의 등을 연신 다독이고 있었다.

 

 

“괜찮다. 다 괜찮다. 윤기야. 다 괜찮아질 것이다.”

 

 

여철의 커다란 품에서 제대로 소리도 내지 못하고 울던 윤기가 얼핏 진정하는 듯했다. 조금 잦아든 울음소리를 가만히 듣던 여철은 몸을 움직여 문 앞에 두었던 것을 가지고 왔다. 여전히 풀이 죽어 고개를 숙이고 있는 윤기를 쳐다보며 그 둥그렇게 말린 어깨를 두드렸다. 윤기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이거, 민이. 지민이 그 녀석이 두고 갔다.”

 

 

여철의 말에 윤기의 눈이 크게 뜨였다. 다시 살아서 그 이름을 듣게 될 줄 몰랐다. 윤기는 제 스승을 한 번, 스승의 손을 한 번 쳐다봤다. 스승의 손에는 웬 옷가지와 신발이 놓여 있었다.

 

 

“다시 보니 반갑다며 녀석이 제 이름을 전부 알려주더라. 박지민이라고. 이름을 알려줄 수 있게 해줘서 고맙다며 웃는데 거, 엄청 기쁘더구나. 참, 이걸 주면서 떠난다고 했다.”

 

 

윤기는 어느새 제 손으로 넘겨받은 것을 어색하게 쥐고 있다가 여철의 마지막 말에 고개를 빠르게 들어 올렸다.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는 윤기가 여철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눈빛만으로도 재촉하는 게 느껴져서 여철은 잠시 웃은 뒤에 말을 이었다.

 

 

“어디로 가는지는 나에게도 알려주지 않았다. 그저 한양을 떠나겠다고만 했어. 네가 깨어나면 꼭 전해달라고 당부했다. 민이에게 네가 왜 이렇게 됐는지 물었는데 대답해주지 않더구나. 다 이유가 있었을 거라고. 그런 말만 남겼다.”

 

 

윤기는 제 손에 들린 것을 세게 쥐었다. 덩달아 이도 꽉 깨물었다. 울음을 참아보려 했는데 그 미련한 녀석의 말투가 자꾸 생각나서 울지 않을 수 없었다. 새 옷과 새 신발을 건네준 의미가 무엇인지 선물을 건넨 이가 말해주지 않아서 분명하게 알 수는 없었다. 그러나 윤기는 제 손에 들린 새 옷가지와 신발만으로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여철은 소리죽여 우는 윤기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지민이 한 마지막 말까지 전해주기로 했다.

 

 

“자기는 괜찮다고 하더라.”

 

 

그 말까지 전해 들은 윤기는 몸을 앞으로 숙이며 울었다. 고개를 깊이 묻은 탓에 손에 들린 새 옷가지에 얼굴이 닿았다. 옷에서 나는 은은한 냄새가 꼭 지민에게서 나던 것과 비슷해서 더 서러웠다. 윤기는 이 와중에도 원망으로 제 마음을 풀어내고 있었다. 어째서 괜찮냐고, 대체 왜 괜찮다는 말을 해서 자신을 괜찮지 않게 만드느냐고 따지고 있었다. 왜 떠나버렸느냐고. 저에게 찾아와 욕이라도 퍼붓든가, 아니면 제 앞에 무릎을 꿇리든가 할 것이지 속절없이 가버릴 게 다 뭐냐고 외쳤다. 목소리를 잃어버려 그 원망과 분풀이는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그저 꺽꺽 넘어가는 소리만 잔뜩이었다.

 

윤기가 있는 방에는 언제부터 입고 다녔는지 모르는 오래된 옷이 걸려 있었다. 아마 방 밖에는 수년간 신어온 낡은 신도 놓여 있을 거였다. 이제 새 옷과 새 신을 받았으니 그것들은 전부 버려질 일만 남았다. 여철은 그 주위를 둘러보다가 윤기가 울음을 그치기를 기다렸다. 제 것이니 스스로 버리는 게 맞는 거라고 생각하면서.

 

 

 

**

 

한양을 떠난 지 꽤 시간이 되었다. 어느 길로 가고 있는지는 몰랐지만, 두 사람 모두 밟아가는 길을 꼼꼼하게 살폈다. 옆에 선 나무, 들에 핀 꽃. 어느 것 하나 놓치지 않고 세심하게 돌아보고 기억했다. 오늘은 운 좋게 잠자리를 구했다. 평소엔 아무 들에나 누워 잤고, 바위에 기대 쉬기도 했다. 오랜 걸음 끝에 한 마을에 다다랐고, 방도 구했다. 배까지 든든하게 채운 두 사람은 마루에 앉아서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지민아.”

“응.”

“네 아버지는 북인이셨대.”

“어?”

 

 

느닷없이 뜬구름 잡는 소리를 하는 태형을 지민이 쳐다봤다. 등이 닿은 벽에 기대고 있던 지민은 마루 기둥에 어깨와 머리를 기대둔 태형을 가만히 보고 있었다. 그 오랜 길을 거닐며 싫은 소리 한 번 안 해준 고마운 사람이었다. 두런두런 옛이야기도 많이 하고, 떨어져 지내던 시절의 얘기도 많이 했지만 그 이야기들 속엔 늘 중요한 게 빠져있었다. 두 사람 모두 일부러 피하는 것이기도 했고, 구태여 꺼내지 않는 것이기도 했다. 그런데 갑자기 태형이 제 아비 얘기를 꺼냈다. 이젠 얼굴의 생김마저도 흐릿하고 아득한, 제 아버지 이야기를.

 

 

“나도 당파니 하는 건 잘 몰라. 그런데 그때. 임금이 바뀌고 세상이 뒤집히던 날. 북인이라고 일컬어지는 사람은, 그리고 그 사람의 가족은 모두가 몰살당했대.”

“그게 무슨 말이야?”

“세상을 뒤엎고 원하는 대로 꾸리려면, 방해물을 제거해야 한다고 하더라. 내가 아주 존경하는 분이, 말씀해주셨어.”

“태형아.”

 

 

그런 말을 하는 태형은 꽤 편안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지민은 제 무릎을 모아 끌어안았다. 밤바람이 너무 차갑지 않게 불었다. 한양을 떠나올 때는 꽤 시린 겨울이어서 몸이 다 무거워 보일 정도로 껴입었는데, 이젠 그럴 필요가 없었다. 조금은 가벼운 차림을 하고 밤공기를 맞이해도 괜찮았다.

 

 

“북인이라고 불리던 사람들 중엔, 그리고 그 사람의 가족들 중엔 살아남은 이가 없다고 하는데. 꼭 그렇지도 않은 거 같아.”

“태형아, 나는.”

“지민아. 그때는 당쟁이었고, 그 전엔 전쟁이었어. 무수한 희생들이 있었고. 그 틈에서 누구나 후회할 짓을 했을 거야.”

 

 

나 역시 그날 형의 말만 듣고 집에만 갇혀 있던 걸, 지금까지도 후회하고 있으니까.

 

태형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지민을 바라봤다. 보고 있는데도, 늘 붙어 지내는데도 그리운 사람이었다. 분명 제 곁에 있는데 저 멀리 있는 것만 같았다. 그 그리운 이를 향해 태형은 웃어 보였다.

 

 

“그 사람도. 그랬어. 살아난 다음부터는 내내, 후회하고 괴로워했어.”

 

 

제 곁에 있으면서 자꾸 저 먼 곳에 있을 거라면, 차라리 그곳으로 다시 돌아가도 괜찮다고 다독이기 위해 뱉은 말이었다. 태형의 말을 들은 지민의 표정이 퍽 복잡해 보였다. 그 얼굴을 보고 있는데 입 안이 썼다. 아무래도 이따 지민이 잠들고 나면 술이라도 마셔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얘기를 왜 해주는 거야?”

“그냥. 그런 일도, 저런 일도 있었다고. 아, 날씨 좋네. 바람도 불고.”

 

 

태형은 참 서툴렀다. 서툰 만큼 선했다. 지민은 그런 태형을 좋아했다. 들끓는 연심은 아니었지만 태형을 많이 좋아했다. 선했고, 순했고, 순수했다. 처음 봤을 때부터 태형은 그 모습 그대로였다. 지민은 어색하게 시선을 돌리며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제 동무를 가만히 바라봤다.

 

 

“바람이 너무 좋아서. 바람 좀 쐬고 올게. 먼저 자.”

 

 

이 대청엔 쉼 없이 바람이 부는데. 어딜 가서 바람을 쐬겠다는 건지 몰랐지만 그저 고개만 끄덕여 주었다. 비어버린 대청에 앉아, 부는 바람을 맞으며 태형이 해준 이야기를 곱씹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태형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제 동무가 그 이야기들을 왜 꺼냈는지 모르지 않았다.

 

손에 둘둘 감겼던 흰 천과, 저를 한껏 끌어안고 엉엉 울던 모습이 떠올랐다. 제 도련님 모습을 떠올리니 오래전 부모의 모습도 떠올랐다. 말을 하지 못해 잘 지내라는 말 한마디 건네지 못했던 어머니와, 그런 어머니 대신 다정한 말과 미소를 지어주던 아버지. 도련님의 모습보다는 조금 더 아득한 그 장면을 떠올렸다.

 

눈을 감았다. 그저 바람을 느끼기로 했다. 이렇게나 바람이 잘 부는데. 제 동무는 어디서, 어떤 바람을 쐬고 있는 걸까.

 

 

 

_

 

지민은 밤을 꼬박 지새웠다. 밖이 어스름한 푸른빛을 띠었다. 지민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채 풀지 않은 짐을 챙겨 들었다. 곤히 자고 있는 태형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고마워. 정말 고마워 태형아. 금방, 또 보자. 우리.”

 

 

잠든 이를 향해 그렇게 말하고 지민은 방을 나섰다. 문이 닫히는 소리까지 듣고, 누워있던 태형이 제 입술을 물었다. 아까부터 흘리고 있던 눈물이 이젠 울음소리까지 매달고 터졌다. 이불을 움켜쥐고 몸을 웅크렸다. 최대한 소리를 죽여 울던 태형은 몸을 일으켜 맨발로 방을 나섰다.

 

 

“지민아, 지민아.”

 

 

보내주기 위해서 그 말들을 해놓고, 나는 너를 보내기 싫었나 보다.

 

태형은 어느 방향으로 고개를 돌려도 보이지 않는 지민을 한참 찾았다. 어디론가 가고 있을 지민을 향해 손을 뻗고 싶었지만, 어느 방향으로 갔는지 찾을 수 없어서 의미 없이 손만 달싹였다. 그 수많은 생 내내 그랬다. 지민에게 뻗을 수 있던 건 무엇이었을까. 마음 한 줄기 제대로 뻗어보지 못했다.

 

 

“지민아.”

 

 

제아무리 손을 뻗어본다 한들, 지민이 잡힐 리 없었다. 붙잡았다고 한들, 꼭꼭 틀어막은 손에서 어떤 틈을 찾고, 흘러내렸겠지. 태형이 할 수 있는 건 그저 텅 비어버린 손만 쥐는 일뿐이었다. 바람이 차가웠다. 어제까지 지민과 함께 맞던 바람에는 약간의 봄기운이 섞여 있는 듯, 포근하고 따스했던 거 같은데. 밤새 바람이 많이 달라져 있었다. 차가웠다. 바람이 이곳저곳을 파고들었다. 텅 빈 곳까지 훑고 지나가는 터에 가슴께가 시려 왔다.

 

봄꽃보다도 해사했던 미소가, 꽃이 터지는 모양 같았던 손이, 봄처럼 다정했던 목소리가 그리웠다. 태형은 세게 주먹을 쥐었다. 주먹 안으로 미련처럼 붙잡고 있는 것이 겨울의 끝인지, 봄의 시작인지 몰랐다. 무엇을 붙잡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텅 비어버린 손에 뭐라도 쥐어보겠다고 기를 쓰고 있었다.

 

 

지민은 이제 괜찮을 것이다. 그 오랜 시간 고민하고 괴로워한 끝에, 결국 다시 그 사람을 찾아갔으니까. 아마 찾아간 그곳에선 머뭇대던 그 마음들이 드디어 맞닿을 테니까. 끝내 두 사람은 괜찮아질 거였다. 어디 채 닿지 못한 태형의 마음만 그 자리에 한참 남아있었다. 이 찬바람을 많이 맞다 보면, 언젠가는 이 끓는 마음도 식고 메마르겠지. 그때쯤이면 괜찮아지리라. 태형은 옷으로 제 얼굴을 닦아내며, 시린 가슴을 홀로 위로하려 들었다. 입에는 자꾸 이름 하나가 맴돌았다.

 

 

“지민아.”

 

 

나는 벌써, 네가 그리운가 보다.

 

제가 자리를 비켜줘 놓고, 버릇처럼 양보를 해놓고 태형은 다시금 후회하고 있었다. 제가 가진 걸 다 주고, 지민에게 양보하는 게 태형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행여 지민을 잃을까, 뭐 하나 바라본 적이 없었다. 지민에게 아무것도 받지 않아도 태형은 행복했다. 춘옥에게 치이고, 언제나 어른스러운 형의 뒤에 숨어 있던 자신을 밖으로 이끌어 주고 온전하게 바라봐 준 것은 지민이 유일했다.

 

만일 자신이 스스로에게 더 당차고 자신감 있는 사람이었다면 어땠을까. 양보하는 법도 잘 모르고, 그래서 지민을 꽉 붙잡고 놓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도련님보다 먼저 지민과 정을 나눌 수 있었을까.

 

 

“지민아.”

 

 

태형은 다시금 지민을 불렀다. 한참 울던 얼굴에 옅게 웃음이 걸려 있었다.

 

지민아. 널 만난 내 모든 세월에 미련은 있지만, 후회는 없어. 널 만났다는 것 하나만으로 내 생은 충분히 아름다웠어. 너로 인해 나는 아름다울 수 있었어. 나에게 고맙다고 했지. 아니, 내가 더 고마워. 네 말대로 우리 곧 보자. 얼른 다시 보자.

 

 

_

지민이 내딛는 걸음 앞에는 참 많은 길이 있었다. 태형과 다니면서 느끼기도 했지만, 세상엔 별별 길이 다 있었다. 그런데 우습게도 지민에게는 단 한 갈래의 길밖에 없는 것 같았다. 어느 길로 걸어도, 결국 다시 한 곳으로 향했다.

 

잊으려고 애써 봐도 잊히지 않았다. 되려 생각하지 않으려 할수록 많은 것들이 떠올랐다. 마지막으로 느꼈던, 흰 천이 둘둘 감긴 그 손의 감촉이 자꾸만 느껴졌다. 볼에서도, 손에서도 지워지지 않는 그 감촉을 그리며 지민은 많은 생각을 했다.

 

그 손이 뭐라고, 예전이나 지금이나 그 손만 떠올리고 있었다. 그때 정국에게 잡히지 못해서 청군에게 붙잡혔고, 그 거칠고 엉망인 길을 한없이 걸어야 했다. 저 혼자만 힘든 길을 걷는다고 생각해서 많이도 서글퍼했다. 한양에 돌아오고 그립던 이를 보고 나서야 알았다. 제 손을 잡지 않았던 그 사람은 스스로를 붙잡아 가둬두고, 날 잡지 않았던 손으로 날카로운 조각 위를 다녔었다고. 어떤 사람이 지나간 길이 더 고통스럽겠냐고 이리저리 재보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땐 누구 하나 아프지 않았던 사람이 없는데.

 

 

“도련님.”

 

 

지민은 눈으로 익혀둔 길을 걸으며 이따금 제 도련님을 불렀다. 그런다고 어디서 나타나진 않겠지만, 부름만으로 가까워지는 느낌이었다. 태형의 말을 몇 번이고 곱씹었다. 제 부모가 죽은 건 온전히 정국의 탓이 아니었다. 정국이 아니더라도 그 집 대감은 제 부모를 죽였을 거였다. 어쩌면, 그때 정국이 자신을 원하지 않았더라면 제 부모와 함께 그 자리에서 죽었으리라. 그렇게 따지고 보면, 정국은 이미 지민을 살렸던 건지도 모른다.

 

지민은 이제 하고 싶은 대로 하기로 했다. 애써봤자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때 그 전쟁을 겪었던 사람들 중, 누가 떳떳하게 정국을 비난할 수 있을까. 당장 자신부터 그랬다. 청나라 사람에게 겁탈을 당해놓고도 천막 밖의 사람들은 먹지 못하는 고기를 뜯으며 만족했었다. 나는 굶지 않을 수 있다는 것에 안위를 느끼며 다행으로 여겼었다.

 

누구나, 어떤 상황에 놓였을 때 마냥 옳은 길로만 가지 못한다. 상황이 급박하고 처절할수록 더더욱 그렇다. 제가 하고픈 대로, 그 순간 느껴진 느낌대로 행동한다. 지민은 지금 그러기로 했다.

 

 

지민의 걸음은 익숙한 자리에 닿았다. 길 위에 바람이 불었다.

 

 

 

_

지민도, 태형도 없는 한양은 고요했다. 정국에겐 유독 그랬다. 윤기도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정국은 그의 과거로부터 오롯이 혼자가 되었다. 이젠 자주 뒷산에 올랐다. 높은 곳에서 익숙한 동네를 바라보며 그 옛날을 되짚었다. 처음 만났던 골목, 뛰어다녔던 거리, 입을 맞췄던 공간들. 가만히 선 채로 정국은 그저 그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바람이 불었다. 뒤에서 불어오는 바람의 향이 낯익다고 느꼈다. 그리움이 가슴을 간지럽혔다. 그래서 불어오는 바람을 마주 보기로 했다. 몸을 돌려세웠다. 돌아선 자리엔 오래된 그리움이 있었다. 정국은 제 앞에 선 그리움을 넋을 놓고 바라봤다.

 

 

“오랜만이에요. 도련님.”

 

 

수많은 시간 동안 정국을 괴롭힌 그 말이, 다시 정국에게 되돌아왔다. 하나로 난 길을 그대로 돌아온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금 닿은 그 말이 너무 반가워서, 이번엔 곧바로 말을 꺼냈다.

 

 

“나, 도련님 같은 거 아니야.”

 

 

그 말에 지민은 바람보다도 더 따스하게 웃었다.

 

 

“오랜만이야. 정국아.”

 

 

바람이 반가운 소리를 데리고 왔다. 그제야 정국도 활짝 웃었다. 길옆으로 잔뜩 피어있는 이름 모를 들꽃들이 부스스 흔들렸다.

 

 

“기다리느라 힘들었지.”

 

 

다정한 목소리에, 그 반가운 말투에 눈앞이 흐릿해졌다. 꾸역꾸역 눈물을 삼키면서 정국은 다시 한 번 웃었다.

 

 

“아니.”

“정말?”

“응. 단 한 번도. 널 기다리는 게 힘든 적은 없었어.”

 

 

지민이 웃었다. 예전에도, 지금도 지민은 예뻤다. 이젠 생사를 알 수 없는 한 대감 댁 둘째 딸보다도 예쁜 건 당연했고, 들길 위에서 흐드러지게 흩날리는 꽃보다 눈에 띄는 건 여전했다.

 

 

“하나도 변한 게 없네.”

“정국이는 그새 더 자란 거 같네.”

“전에도, 너보다는 컸어.”

“맞아. 그랬지.”

 

 

아직까지 서로를 끌어안을 용기는 없어서 마냥 서 있는 두 사람이 안쓰러웠는지 곁을 지나다니는 바람이 서로의 체온을 바삐 옮겨다 주었다. 두 사람 사이를 휘감는 바람은 자꾸만 그 길 위를 맴돌았다. 떠나지 못하는 것인지, 떠나지 않는 것인지, 아니면 이미 한참 떠났다가 돌아온 것인지 몰랐다. 다만 그 바쁜 바람이 퍽 다정하게 느껴지기는 했다.

 

 

 

 

<길 위에서 전해지는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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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번외 편이 있을 거 같아요!

후기와 번외 편으로 늦지 않게 찾아뵙겠습니다.



그동안 참 서툰 길을 함께 다녀주셔서 정말 감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