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래더] 트위터는 @Rather_0613 (舊 새벽의덕후)

[국민/랩홉] 길 위에서 전해지는

 

 

W.새벽의덕후

 

 

 

제5장. 외곬

 

 

 

27.

 

 

정국이 걸음을 하나씩 뗄 때마다 주위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개 중 몇 개는 경악의 비명을 지르는 것도 있었다. 행랑채 근처에서 정국은 그야말로 흠씬 두들겨 맞았다. 몇 번 저항을 해보기도 하고, 아무나 붙들고 때리기도 해봤지만 수적인 열세는 어쩔 수가 없었다. 생전 처음 몽둥이로 얻어맞고 발길질을 당했다. 갑자기 나타났던 사람들은 정국이 좀처럼 몸을 못 움직일 때가 되어서야 홀연히 사라졌다.

 

마당에 엎어져 있던 정국은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몸을 기어코 움직였다. 바닥 위에 피를 뱉어내고 다 부서진 것만 같은 몸을 일으켰다. 처음 몇 번은 걸음을 뗄 수 없어 기어가는 듯 마당을 걸어야 했다. 여기저기 터지고 찢겨서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지만, 그나마 다행스러운 건 두 다리나 두 팔이 부러지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다만 걸을 때마다 상처 때문에 끔찍한 고통이 밀려올 뿐이었다.

 

제 느린 걸음이 답답했다. 정국은 윤기가 어디로 갔을지 알 것 같았다. 그는 어차피 이 동네를 잘 몰랐다. 강산이 훌쩍 변하고도 남을 시간동안 이 동네도 많이 변했다. 늘 제집과 심부름 때문에 오가던 몇 개의 장소 말고는 윤기가 알만한 곳은 없었다. 물론 제집이나, 그 장소들이나 전쟁이 끝나고 전부 망가져 버려 사람들이 잘 쓰지 않고 있었다. 윤기가 그나마 몸 붙이고 살던 이 집이 아니라면, 갈 만한 곳은 뻔했다. 지민이 있는 곳으로 갔으리라. 정국은 디딜 때마다 찢기는 것 같은 두 다리를 애써 재촉했다. 다시 지민을 잃을 수 없었다.

 

 

 

_

“태형아!”

“무슨 일이십니까. 형님.”

“어서, 어서 가봐야 한다.”

“예? 어딜….”

 

 

태형은 나름 제 집무실이라고 마련해 둔 장소에서 업무를 보고 있었다. 서둘러 일을 끝내야 지민에게 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평소에는 차분하기 그지없던 제 형이 기척도 없이 문부터 세차게 열고 들어와 막무가내로 태형을 잡아끌고 있었다. 영문도 모른 채 태형은 석진에게 끌려가고 있었다. 석진이 표정이 좋지 않았다. 그 얼굴에 태형도 등줄기에 소름이 돋는 거 같았다.

 

 

“무슨, 대체 무슨 일입니까.”

“…할머니께서 쓰러지셨대.”

“예? 이러고,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않습니까. 어서, 어서요.”

 

 

이번에는 태형이 석진을 붙잡아 끌었다. 늘 굳셌던 석진에게도 춘옥의 일은 충격이 컸던 모양이었다. 태형은 제 형의 팔을 세게 붙잡았다. 어릴 때도 이렇게 나란히 달리기 한 번 한 적이 없는 거 같은데, 이런 이유로 한 번도 못 해본 것을 하고 있었다. 코끝이 시큰했다. 큰일이 아니길 바라며 태형이 두 다리에 더 힘을 주었다.

 

 

갑자기 춘옥이 쓰러지는 바람에 가빈의 한 방에서 난 소식을 전하러 온 하인은 헛걸음을 해야 했다. 아직 사람이 그렇게 드나들지 않을 시간이라 한적해야 할 기방이 시끄러웠다. 해질녘부터 채워진 방 하나가 초장부터 소란스럽더니 이것저것 깨지는 소리와 시끄러운 고성이 안에서부터 새어나왔다. 낌새가 이상하여 문을 슬쩍 열었는데 때마침 웬 사내 하나가 다른 사내를 바닥으로 집어 던졌다. 상 위로 엎어진 사내는 맥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놀란 하인이 문을 조금 더 열고 방을 쳐다보는데 쓰러진 사내의 낯이 익었다. 이 가빈의 작은 주인이 제 동무라며 늘 끼고 지냈던 사람 같았다. 하여 서둘러 석진과 태형을 찾았는데, 하필 두 사람 다 없었다.

 

주로 이 집무 공간에서 시중을 드는 하인들로부터 상단의 마님이 쓰러졌다는 소식을 듣고는 좌절했다. 사달이 나도 크게 난 거 같은데 이들이 없으면 어째야하는지 몰랐다. 하인은 안절부절못하고 마당을 이리저리 거닐다가 다른 쪽으로 달렸다.

 

 

 

_

윤기는 굳은 채로 서 있다가 문가에서 난 기척에 정신을 차렸다. 누군가 문 앞을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그 기척에는 오래 마음을 쓰지 않고 미동 없이 누워있는 지민을 향해 발을 옮기려고 막 걸음을 뗐다. 그때, 살짝 열려있던 방문이 활짝 열리며 누군가 뛰어 들어왔다.

 

 

“지민아!”

 

 

참 뒤늦기도 하다. 윤기는 그렇게 생각했다. 방문을 거칠게 열고 들어온 정국이 곧장 지민에게 달려갔다. 윤기가 돈으로 매수한 자들이 제 할 일들을 잘하긴 했는지, 정국의 꼴이 엉망이었다. 저 도련님이 저런 모습인 적이 있었나. 저렇게 전부 헝클어지고 망가진 꼴을 보자고 이 일을 벌였는데, 윤기의 마음은 좀처럼 통쾌해지지 않았다. 윤기의 시선은 그저 정국이 끌어안은 지민에게로 닿아있을 뿐이었다.

 

정국은 지민을 안아 들고, 그립던 그 얼굴을 매만졌다. 늦어서 미안하다고, 너무 미안하다고 말이라도 해야 하는데 지민의 상태를 보니 그 말조차 나오지 않았다. 남들이 보면 우습다고 할지도 몰랐다. 제 꼴도 온통 상처투성이에 엉망인데, 저보다는 그래도 멀끔한 모습의 지민을 보며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지민의 여기저기를 쓰다듬던 제 손에 시뻘건 피가 묻어나왔다. 그제야 정국은 주위를 둘러봤다. 적지 않은 양의 피가 바닥에 묻어 있었다.

 

정국은 온갖 데에 퍼져있는 핏자국을 바라보며 눈물을 터뜨렸다. 이대로 지민을 잃게 될 거 같았다. 다시금 지민을 지켜내지 못하고, 그 손 한 번 잡아보지 못하고 잃을 것만 같았다. 그럴 수는 없었다. 다시 그렇게 둘 수는 없었다. 피 묻은 손을 더러운 제 옷에 어떻게든 닦아내고, 그 손으로 지민의 손을 붙잡았다. 참 오래도 걸렸다. 다시 잡는 데.

 

 

“지민아. 안 된다. 죽으면, 죽으면 안 돼.”

 

 

그 절절한 광경을 한참 내려다보던 윤기의 얼굴이 조금씩 차분해졌다. 잠시나마 지민을 걱정했던 제 모습이 우스웠다. 저렇게나 서럽게 걱정해주는 이가 있는데, 아무것도 없는 자신이 누굴 걱정한 건지 어이가 없었다. 그렇게 감정이 차가워지자 눈앞에 보이는 상황도 삐딱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정국이 저럴 자격이나 있는 걸까. 그 골목에서부터 모든 일을 엉망으로 꼬아놓은 게 누군데. 전쟁 통에 저 혼자 살겠다고 내뺐던 이가 누군데. 정작 저렇게 쓰러져있는 저 녀석을 구해 여기까지 데려온 건, 누군데.

 

방 안의 윤기는 보지도 않은 채, 정국은 지민을 매만지는 데 여념이 없었다. 이대로는 안 된다. 다치는 것도, 죽는 것도 자신이어야 했다. 평생의 죄는 자신이 지은 건데 벌은 전부 이 녀석이 받고 있는 거 같았다. 정국은 지민의 몸을 뉘여 놓고 작은 손을 매만졌다.

 

안 된다. 안 된다, 지민아. 미안해. 지민아.

 

 

“…도련님.”

“지민아, 지민아!”

“도련님….”

 

 

잠시 눈을 뜬 지민이 정국을 바라봤다. 정국이 붙들고 있던 손에도 힘이 들어갔다. 지민은 제 손을 붙잡은 감촉이 너무 오랜만이라 낯설었다. 그러나 그 낯섦마저 반가워 옅게 웃었다. 눈앞의 도련님이 정말 제 도련님이 맞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환영이래도 상관없었다. 다만 눈앞에 보인 환영이 엉망인 꼴인 것은 조금 마음이 아팠다. 이왕이면 멀쩡하고 말끔한 모습을 보고 싶은데. 그래도 어찌 되었든 보았고, 다시 잡았으니 이젠 정말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도련님을 몇 번 부른 지민이 다시 눈을 감았다. 정국이 다급해졌다. 지민의 얼굴을 건드리며 그 이름을 불렀다.

 

 

“참 양심도 없네.”

 

 

윤기의 목소리에 정국이 입을 꾹 닫았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자신에게 양심 따위는 없었다. 저 따위가, 감히 지민에게 이러면 안 된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그렇다고 이 녀석을 이대로 둘 수는 없었다. 자신을 이 꼴로 만든 윤기가 그다지 밉지는 않았다. 윤기는 제 몸종으로 있을 때, 이보다도 더 많이 맞았고 자주 맞았다. 그런 윤기가 제 아팠던 삶을 되갚는 거라고 생각하니 그 행동이 그렇게 밉지 않았다. 그러나 지민을 이렇게 만든 건 끔찍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지민에겐 죄가 없었다. 지민이 이렇게 되어야 할 이유는 없었다.

 

정국은 지민을 조심히 내려두고 아쉬운 손길로 그 작은 손을 한 번 꽉 잡았다. 그리고 몸을 돌려 윤기를 쳐다봤다. 참 반가운 사람이었는데. 제집에서 함께 지내던 사람 중, 전쟁 후에도 멀쩡히 살아있는 두 사람 중 한 명이었는데. 이렇게, 이런 모습으로 마주하게 될 줄 다시 만났을 땐 몰랐다. 정국은 몸을 일으켰다. 여전히 상처가 잔뜩 달린 몸이라 몸 하나 일으키는 게 영 쉽지 않았다. 그 행동을 가만히 바라보며 윤기는 시선을 움직였다. 꽤 시간이 걸리고 나서야 정국이 몸을 곧게 펴고 섰다. 정국은 일어서자마자 윤기를 쳐다봤다.

 

 

“그땐, 그땐 미안했어.”

“뭐?”

“나도 어렸고, 부모님도 좋은 사람들은 아니었어. 나 때문에 형이 그렇게 쫓겨난 줄 한참 뒤에야 알았어. 근데 난 그때. 지민이, 이 애가 있었고. 내가 행복했으니까, 형도 행복할 거라고 생각했어. 미안해. 이기적이었어, 내가.”

“네가 뭔데. 전정국 네가 뭔데!”

 

 

네가 뭔데 나에게 사과를 해.

 

윤기는 제 주먹을 다시금 꽉 쥐었다. 이런 상황은 예상하지 못했다. 정국은 윤기가 흠씬 얻어맞았던 수많은 날들 중 단 한 번도 미안하다, 제 탓이다 하며 사과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무엇에 대해 사과를 하고 있는 건지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잘 지내지 그랬어. 내가 잘 지내는 게 고까웠으면, 우리 집이 그럼에도 잘사는 게 기분 나빴으면 보란 듯이 잘살아 보지 그랬어.”

“지금 나 놀려? 조롱해? 얻어맞아 쫓겨난 천민새끼가 잘 살면 얼마나 더 잘사는데! 천민새끼가 잘 사는 게 뭔 줄, 너 같은 양반 나리가 알기나 해? 양반집 노비로 일이나 하며 누울 자리, 먹을 음식 있는 게. 그게 잘사는 거야. 그런데 뭐? 잘살아 보지 그랬어?”

“…형 천민이었던 적 없어. 우리 어머니가 나빴지. 그걸 숨겼으니까.”

“그게 무슨 말이야. 전정국 대체! 날 얼마나 우습게 보는 거야, 넌!”

 

 

정국의 목소리에 윤기는 점점 이성을 잃어갔다. 천민이었던 적이 없다는 건 말이 안 됐다. 언제나 천민이었다. 언제나 그 집 노비였고, 정국의 몸종이었다. 정국이 다시금 저를 놀리는 거라고. 사과는 위선이었고 이게 정국의 본모습일 거라고 윤기는 멋대로 생각했다.

 

그러나 앞에 선 정국은 태연했다. 뒤집힌 집을 정리하다가 발견했다. 어머니의 안채 서랍장 깊숙이 숨겨져 있던 호패를. 어느 경로를 따라 만들어 둔 건지는 모르겠지만 ‘민윤기’ 석 자가 쓰여 있는 호패가 분명했다. 정국은 언젠가 마주칠 윤기에게 주겠다고 품에 끼고 있던 그 호패를 꺼내 바닥에 던졌다. 둔한 소리가 울리는 바닥 위로 윤기의 시선이 닿았다. 제 이름이 맞았다. 그러나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었다. 말을 잃은 윤기 대신 정국이 입을 열었다.

 

 

“형을 속이고 얽매 놓았던 집에서 나가게 되었으면. 더 잘 살았어야지. 네깟 것들 다 우습다고 비웃으면서 살았어야지. 우리 집 나가 놓고, 왜 내내 우리 집에 매여 있었는데. 왜 기어코 그 끔찍했던 자리로 돌아오고자 했던 건데 형은!”

 

 

윤기는 대뜸 저에게 소리치는 정국을 이해할 수 없었다. 대체 정국이 뭔데 자신에게 소리를 지르는 것인지, 무슨 말을 지껄이고 있는 것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윤기는 그저 각인된 것처럼 당연하게 여겼던 제 자리를 찾고 싶었을 뿐이었다. 속박되지 않고, 구애받지 않는 것은 윤기에게 방조나 다름없었다.

 

 

“…없었으면서.”

“뭐?”

“없었으면서! 단 한 번도 나에게 알려준 적 없었잖아! 어떻게 사는 게 잘사는 건지, 내가 어떤 사람인지! 누구도, 나한테 알려준 적 없어 놓고! 이제 와서 뭐? 천민이 아니야? 잘 살았어야지? 그 말이 기만인 걸 몰라?”

“…미안해. 그래. 그건 정말 미안해. 그때 그 집에 있던 모든 사람이 잘못한 거야. 형한테 잘못한 거야. 그러니까 이제 이런 짓은 그만두고, 이제부터라도 잘 살아.”

 

 

윤기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한 정국이 다시금 지민에게로 다가갔다. 자신도 상처투성이인 몸을 하고 피가 묻은 지민의 손을 잡고 지민의 몸을 끌어안았다. 우스웠다. 이제 와서. 이제 와서 알려주면 뭐가 달라지는데. 이미 이십 수년의 제 삶은 진창이었고, 겉도 속도 제대로인 게 하나도 없었다. 지금도, 어떻게 사는 게 잘사는 건지 알려주는 이가 없으면서. 뭘 어쩌라고 세상 모두가 자신을 방조하는 건지. 윤기는 입술을 물었다. 저리도 견고하고 확신에 차 있는 정국과 지민이 미웠다. 그런 윤기의 눈에 바닥을 구르는 술병이 보였다. 윤기의 곧은 손이 술병으로 향했다.

 

 

 

_

 

“난리, 난리가 났습니다요!”

 

 

호석과 남준 앞으로 가빈의 하인 하나가 급박하게 뛰어왔다. 호석은 갑작스러운 소리에 놀란 눈을 했고 남준은 무의식적으로 호석의 앞을 막아섰다. 난리, 무서운 말이었다. 호석의 귓가에 고작 한 해가 지난 그 날의 소리가 다시 살아나는 것 같았다. 꼭 저런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튀어 올랐었다. 사람들이 악다구니를 쓰며 마당을 뛰어다녔었다. 끔찍한 기억이 되살아나는 거 같아 호석은 제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잔뜩 긴장한 호석과 남준 앞으로 세차게 달려온 이가 헉헉거리며 숨을 고르다가 침을 한 번 꼴깍 삼키더니 대뜸 남준을 붙잡았다.

 

 

“그, 그때 그. 남준님의 손님이라 하셨던. 그분이 위험합니다. 웬 사내가 그분을 이리저리 치면서 방을 난장판으로! 이러실 게 아니라 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하인의 말을 채 듣기도 전에 남준이 제 발을 몇 걸음 떼었다. 그러다 아차 싶어진 남준이 몸을 돌려 제 주인을 바라봤다. 호석의 얼굴이 남준의 눈 가득 들어왔다. 호석은 아무렇지 않은 척해보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남준이 저를 뒤에 두고 앞으로 걸었다. 자신을 지키고자 한 것이 아니라 그 작은 녀석을 지키기 위해 걸음을 뗐다. 그 한 발짝이 호석을 걷어찬 발길질이라도 되는 것처럼 아팠다. 남준을 붙잡을 수 있을까, 잠시 생각해봤지만 그 물음은 부정의 대답을 끌고 왔다. 이미 저 앞으로 쏠려있는 남준의 몸을 제 옆에 바짝 붙여 세워둘 수 없었다.

 

 

“가.”

“주인님.”

“가. 가빈에 난리가 난 것이잖아. 가. 가서, 처리해.”

 

 

호석의 말에 남준이 고개를 숙이고는 곧장 앞을 향해 내달렸다. 하인은 이미 저만치 앞서서 남준이 가야 할 길을 일러주고 있었다. 내달리면서 남준은 생각했다. 금세 돌아오겠노라고. 그저 제 목숨을 구해주었다는 그 녀석의 목숨만 구해주고 돌아오겠노라고. 그런 말을 차마 제 주인을 향해 뱉지는 못하고 남준은 서둘렀다.

 

내달리는 뒷모습을 보고 있던 호석은 부릅뜨고 있던 제 눈을 감았다. 참아냈던 눈물이 둥근 볼을 타고 흘렀다. 그럼에도 더 나올 눈물을 막느라 호석의 가느다란 손이 허옇게 질렸다. 이를 악물어보기도 하고 입술을 세게 물어보기도 했지만 그 어느 틈을 비집고 새어나오는 눈물을 어쩔 수가 없었다. 남준의 흔적이 느껴지지 않았다. 꽉 막혀있던 목구멍에 틈을 내서 비어있는 마당에 목소리를 꺼내놓았다.

 

 

“가지 마라, 남준아.”

 

 

겨우 말을 뱉어내자 기다렸다는 듯 울음이 쏟아졌다. 울음을 터트리는 입술을 꽉 물고 핏기가 사라진 손을 다시 움켜쥐며 호석은 제 방으로 뛰어들어갔다. 가빈의 나비가 마당에 서서 울고 있을 수 없었다.

 

방으로 들어서고 나서도 행여 방 밖의 누군가 들을까 서러운 가슴만 내려치며 꺽꺽거리는 소리로 울었다. 그 갑갑함에 주저앉은 호석이 바닥 위로 쓰러지듯 엎드렸다. 아무렇게나 뻗은 팔을 끌어 제 얼굴을 묻은 채 울음을 쏟아냈다. 가슴을 내려치던 손으로 제 가슴께를 쥐었다. 아팠다. 가지 말아 달라는 그 말을 하는 게 싫었다. 그 말을 뱉어야만 하는 게 싫었다. 가지 말아 달라고 말해도 가버릴 것 같아서 두려웠다. 방금뿐 아니라 내내 그랬다. 그 작은 녀석이 보인 뒤로 남준은 그랬다. 붙잡고 싶은 그 타는 마음을 남준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불안함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언제나 제 곁에 있을 것이라 믿었던 남준이었다. 제 것을 자처했고, 제 것이 되어주었고, 그 어떤 일이 있어도 제 곁에 있어주었다. 그런 남준이 가버렸다. 방금 전의 그 공허한 마당처럼 모든 게 빠져나간 기분이었다. 그전부터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참 많이, 그 무뚝뚝한 제 호위무사를 참 많이도 사랑하고 있었다. 제 모든 것이었다. 남준은. 불꽃놀이가 있던 그 날 좋아한다고 말하지 말고 사랑한다고 해볼 것을 그랬나.

 

그런 생각을 울음에 섞어 내다가도 곧 울음 가득한 얼굴을 내저었다. 저따위가 그럴 수 없었다. 번지르르한 가빈의 나비라는 명패를 달고 있었지만, 실상 온통 더러운 꼴인 자신이었다. 그런 자신의 곁이라도, 남준은 있어 줄 것 같았는데. 그 작은 녀석을 향해 달려갔다. 엉망인 자신을 빈 마당에 세워두고 그렇게 가버렸다. 그런 남준을 잡을 수도, 놓을 수도 없어서 호석은 서러운 울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_

방 안은 하인이 호들갑을 떨었던 것처럼 엉망이었다. 방 안으로 들어선 남준은 술병을 들고 누군가를 향해 내리치려는 윤기를 보았다. 그런 그를 몸으로 밀어냈다. 술병이 찢어지는 소리를 내면서 깨졌다. 그 옆으로 윤기가 나자빠졌다. 윤기는 저를 밀쳐낸 사람을 보더니 웃었다. 거 봐, 이런 상황에 닥치니까 넌 결국 네 주인이라던 그분을 버렸잖아. 네가 그분을 사랑했을 리가 없지. 사랑 같은 게 있을 리가 없지. 윤기는 넘어진 채로 낄낄댔다. 우스웠다. 제가 만든 이 모든 상황이.

 

 

“민윤기!”

 

 

남준의 시선이 윤기에게 닿았다가 방 안의 다른 쪽으로 옮겨갔다. 그곳에는 무슨 일을 당한 건지 눈을 감고 있는 지민이 보였다. 바닥에서 버둥거리는 윤기를 한 번 보고 남준은 지민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다른 사내가 지민을 위에서 감싸 안은 채 웅크리고 있었다. 지민을 감싸 안은 사내의 몸도 상처로 엉망이었다. 남준은 저를 올려다보는 놀란 눈을 향해 물었다.

 

 

“괜찮은 것입니까.”

“살아, 살아 있습니다. 지민이는, 살아 있습니다.”

 

“대체, 대체 왜! 왜 나한테만!”

 

 

지민의 상태를 확인하자마자 뒤에서 윤기의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아무거나 손에 집어 들고 이쪽으로 내달리는 윤기가 보였다. 차마 그에게 칼을 쓸 수 없었다. 남준에게 있어서 윤기는 형제 같은 거였다. 가족의 존재도 모르고, 당연지사 그들의 생사조차 모르는 남준에게 한동안 함께 지냈던 윤기는 형제와도 같았다. 멀리 떨어져 있어도 문득 잘 지내나 궁금했고, 어디에 있든 잘 지내길 바랐던 사람이었다. 쌀쌀맞다고 느껴질 때는 있었지만 냉담한 사람은 아니었는데 그런 윤기가 어째서 이렇게 악다구니를 쓰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랬기에 이렇게 난장판을 만든 윤기를 향해 칼을 빼 들 수 없었다. 맨몸으로 윤기에게 달려들었다. 정신을 놓고 이리저리 술병을 휘두르는 윤기를 쉽게 붙잡을 수 없었다. 겨우 손에 붙들린 술병만 빼앗아 방 밖으로 던져버렸다. 그러자 이번에는 맨주먹을 쥐고 남준을 향해 달려들다. 결국 남준도 윤기를 향해 무력을 쓸 수밖에 없었다. 그가 자꾸 지민에게 달려들었다. 여전히 지민은 다른 사내가 제 품으로 지키고 있었다. 남준에게 얻어맞은 윤기가 한쪽 벽에 부딪혔고 그대로 주저앉았다. 그런 윤기에게서 눈을 돌려 끌어안고 있는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남준의 시선이 그들에게 닿자 윤기가 코웃음을 쳤다.

 

 

“이거 엄청 웃긴 상황이네.”

“민윤기.”

“야. 그거 알아? 그 옛날에 골목에서. 너 그렇게 짓밟은 새끼 말이야. 그 새끼가 저 새끼야. 저 새끼.”

 

 

윤기의 비아냥대는 말투에 남준이 인상을 썼다. 지민과 사내를 향해 돌려놓은 고개가 쉽게 돌아오지 않았다. 비틀거리던 윤기가 몸을 일으켜 남준을 향해 걸어왔다. 그리고 제 손을 남준에 어깨에 올린 채 제 몸을 지탱했다. 정신 놓고 비틀대는 탓에 술이라도 한 줄 알았지만, 가까이 선 윤기에게선 지독한 술 냄새 같은 건 풍기지 않았다. 남준은 가만히 윤기가 말하는 사람들을 바라봤다. 지민을 끌어안은 사내도 퍽 놀란 시선으로 남준을 바라보고 있었다.

 

 

“참, 세상일 꼴사납다. 저리도 절절하게 부둥켜안은 두 사람이. 하나는 널 죽이려고 했던 사람, 하나는 널 그 죽음에서 구했던 사람이야. 우습지? 한 사람의 인생을 제멋대로 쥐었다 폈다 해놓고 저들끼리는 저러고 있다. 남준아. 저것 좀 봐.”

 

 

윤기가 잔뜩 흔들리는 몸으로 남준의 어깨를 툭툭 쳤다. 남준은 가만히 그들을 보고 있었다. 기절한 듯 눈을 감고 있는 지민과, 그를 감싸 안고 자신들을 올려다보는 사내. 사내는 그 옛날에 그 골목에서 저를 짓밟은 사람이라고 했다. 다시 과거가 남준의 눈앞에 나타났다. 제 앞에 서 있는 윤기는 낄낄대는 소리를 내며 웃고 있었다.

 

 

“네가 나한테 주먹질을 할 게 아니야. 쟤. 쟤라니까. 널 죽이려고 했던.”

“상관없어.”

“뭐?”

 

 

낄낄대던 소리가 멎었다. 윤기의 얼굴이 험상궂게 굳어졌다. 그러나 여전히 입꼬리 하나는 올라간 채였다. 남준의 말을 믿지 않는 것 같았다. 남준은 아예 그들에게서 시선을 떼 윤기를 바라봤다.

 

 

“과거는 상관없어. 더 이상.”

“그게 어떻게 상관이 없어. 너의 주인 될 사람이, 사실은 기생이 아니라 저 천인일 수 있었다니까? 널 지켜준 사람이 저 애라고. 그래서 네가 지켜야겠다고 마음먹은 사람이 그 기생이 아니라 저, 저 천인 놈이었을 수도 있다고. 아, 어차피 천인인 건 똑같나.”

 

 

윤기의 마지막 말이 뱉어지자마자 남준의 주먹이 윤기의 얼굴에 꽂혔다. 퍽 세게 맞은 탓에 윤기의 몸이 어지러운 바닥에 나뒹굴었다. 남준의 표정은 매섭게 변해 있었다. 윤기는 맞은 얼굴을 손으로 쓸면서 넋 나간 사람처럼 웃었다. 남준의 주먹은 여전히 세게 쥐어진 채 떨리고 있었다.

 

 

“그분을. 욕하지 마.”

“욕? 욕한 적 없어. 있는 사실만을 얘기했을 뿐이지. 기생이 천인이 아니고 뭐야.”

“민윤기 너 진짜.”

 

 

결국 남준이 성난 걸음으로 윤기를 향해 걸었고 바닥에 널브러진 그의 멱살을 쥐었다. 윤기는 여전히 넋 나간 듯 웃으며 낄낄대고 있었다. 남준이 윤기를 향해 주먹을 높이 쳐들었다가 몇 번 거친 숨을 내쉰 후에 그 손을 옆으로 내려버렸다. 그리고 윤기를 바닥에 아무렇게나 던져두었다. 잠시 윤기를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살짝만 돌려 뒤를 돌아보고는 지민을 끌어안고 있는 사내에게 말했다.

 

 

“가십시오. 지금.”

“저, 저기.”

“빨리! 그 사람을 데리고, 여기서 나가세요.”

 

 

남준의 단호한 말에 정국은 지민을 안아 들고 방 밖으로 나섰다. 방 밖에 둘러선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지민을 등에 업은 채로 걸음을 뗐다. 지민을 살리는 게 우선이었다. 다급한 마음에 제 상처투성이 몸이 아픈지 느껴지지도 않았다. 걸음은 자꾸 앞으로 가길 재촉하는데 자꾸 고개가 뒤를 향했다.

 

그때의 그 골목에서의 거지라고 했다. 저 자가. 자신의 오만방자함으로 죽은 줄 알았던 그 사람이 살아있다고 했다. 과거는 사무치게 죄스러웠고, 현재는 너무나 감사해서 자꾸 어지러운 방 쪽으로 고개가 돌아갔다. 정국은 남은 생 동안 갚아야 할 것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과거에 제가 목숨을 앗아가려고 했던 사람은 자신을 도와주었다. 오늘날 정국이 제 목숨보다도 중요했던 지민을 구해주었다. 이 일을 어떻게 갚아야 할지 아직은 모르겠으나 꼭, 반드시 갚겠다고 수없이 되뇌며 정국은 걸음을 재촉했다.

 

방 안에 있던 남준은 윤기에게 했던 말처럼 전부 상관이 없었다. 누가 자신을 죽이려고 했고, 죽지 않게 해줬고, 살려주었는지. 상관없었다. 자신은 지금 살아있었다. 그것은, 그 일들은 정말 과거였다. 가만히 선 채로 바닥에서 제대로 몸을 일으키지도 못하는 윤기를 내려다봤다.

 

 

“과거 일은 이제 그만 잊어. 매달고 있어 봤자 좋은 것이 아니라면. 그게, 형에게도 도움이 될 거야.”

 

 

그 예전, 어떤 날처럼 저 자신을 ‘형’이라 불러주는 남준이 우스워 돌아서는 뒷모습에 대고 윤기는 웃었다. 방만큼이나 머리가 어지러웠다.

 

 

 

_

엎드려 운 시간이 얼마나 되었을까. 호석은 몸을 벌떡 일으키고는 엉금엉금 기어 서랍을 향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예전에 남준이 갖고만 있어 달라며 건네준 단도를 꺼내 들었다. 되먹지 못한 손님들이 많으니 혹시라도 자신이 보이지 않으면,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일 자신이 보이지 않으면 위협이라도 하라며 준 것이었다. 이걸 들고 위협을 하고 있으면 아주 빠르게 자신이 나타나겠다고 으레 그 무뚝뚝한 말투로 건네주고는 뒤돌아섰었다. 그렇게 말하고 돌아선 제 호위무사의 목덜미가 시뻘게서 몰래 웃기도 했었다. 남준다운 선물이었다.

 

늘 지니고 다니며 쓰라고 준 물건이었지만, 남준이 준 선물이었기에 닳을까 아까워 서랍 밖으로 꺼내지도 않고 있었다. 이따금 눈으로만 봤을 뿐이었는데. 그것을 이렇게 꺼냈다. 남준은 그 애를, 그 지민이라는 아이를 좋아하는 것 같았다. 자신처럼 엉망인 사람의 옆에 얽매이는 것보다야 그런 예쁜 아이의 곁에 있는 게 더 좋겠지. 그렇다면, 그런 거라면 자신은 더 이상 존재의 의미가 없었다. 남준을 향해 가라고 했다. 가라고 했던 자신의 말에 남준은 돌아오겠단 말을 남겨주지 않았다. 가버린 것이다.

 

떠난 이에게 미련을 둘 필요가 없었는데 자꾸 미련이 새어나왔다. 그걸 베어내려면 이 칼이 필요했다. 단단한 칼집을 벗겨서 던져버렸다. 제 스스로 번쩍이며 빛나는 것이 꼭 남준의 눈빛 같았다. 그 날카로움과 찬란하게 빛나는 것이 남준과 닮아있었다. 그래서 다시 멎었던 울음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왜, 이런 순간에도 너는 눈앞에 생생하게 그려지는 것이야.

 

 

“보고 싶어. 너무 보고 싶어. 널 보고 싶어. 남준아.”

 

 

서러운 소리를 내며 호석은 손에 쥔 칼을 가슴께로 가져다 댔다. 자꾸 미련을 만들어내는 곳을 베어내야만 했다. 칼은 호석만큼이나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_

윤기를 내버려 둔 채 남준은 다시 내달렸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다고 느꼈다. 그간 속에서 사무치던 것들이 무엇인지 남준은 이제 분명하게 알았다. 그동안 수차례 목구멍까지 치밀고 올라왔던 것이지만, 제 신분 때문에 그리고 제가 멋대로 그어놓은 선 때문에 밖으로 쏟아내지 못한 것들을 이제는 뱉어내고 싶었다. 얼마나 약한 사람인지 잘 알면서 기어코 그 사람을 홀로 두고 와 버렸다. 붙잡지도 않고 대번에 가라는 말을 쉬이 뱉는 제 주인에게 주제넘게 저항 같은 걸 한 셈이었다.

 

자신은 이곳에 뛰어오면서도 지민이 괜찮기보다 호석이 기다려주길 바라며 뛰었다. 지금도 지민의 다친 몸보다 미어지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봤던 호석이 더 걱정스러웠다. 그동안 지민에게 답지 않게 신경 썼던 것은 맞다. 주제넘은 참견도 많이 했고, 술자리까지 함께했다. 아마 그 이유는 과거에 대한 기억 때문일지도 몰랐다. 민윤기가 멋대로 지껄였던 말을 흘려듣지 못한 탓에 자꾸 지민을 걸고넘어졌던 것인지도 몰랐다.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이가 호석이 아니라는 말에 아주 잠깐 마음이 흔들렸었다. 자신을 지켜주었으니, 자신도 지키겠다며 먹었던 마음이었다. 그 마음이 흔들리자 자꾸 마음의 주인에 대해 골몰하기 시작했다. 지민이 제 잃어버린 주인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기도 했다. 그래서 괜한 녀석을 더 신경 썼고 살폈다. 그 행동들은 그 지난날에 대한 기억 때문일 수도 있고 잊고 있던 보은일 수도 있다. 그런데 이제 그런 것들은 다 상관없었다. 단 한 사람만. 한 사람만 보고 싶었다.

 

내가 금방 갈 테니, 제발. 제발.

 

뜀박질이 빨라지는 만큼 가슴께가 쿵쾅대며 요란스레 뛰었다. 단순히 뜀박질 때문이 아니라는 걸 남준은 잘 알았다. 언제나 제 주인을 떠올리면 이랬다. 제 주인이 곁에 있으면 이랬다. 알고도 모른 척, 평정심이니 뭐니 하는 말을 곱씹으며 그리 살았다. 헌데 더는 안 될 거 같았다. 더는 참고 싶지 않았다.

 

 

 

 

“주인, 호석아!”

 

 

저를 부르는 소리에 호석이 고개를 들었다. 계속 눈앞에서 아른거리던 남준이 제대로 보였다. 이번엔 목소리도 들려오고 아른거리던 형체가 퍽 선명하게 보였다. 매번 보여주던 무뚝뚝한 표정이 아니라 많이 놀라고 걱정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진짜 같아. 신기해. 남준이가 내 이름을 불러준 적이 있던가. 저런 표정을 지어준 적이 있던가. 한 번도 없었던 것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일까. 남준의 환영을 가만히 보고 있던 호석이 그 환영을 향해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위태롭게 흔들리던 단도를 높게 쳐들었다. 그대로 제 가슴을 향해 밀어 넣으려던 순간 추락하던 단도가 멈췄다. 손목이 뜨거웠다.

 

 

“너, 너 진짜.”

“남준이, 준이야? 너야?”

 

 

울먹이는 제 주인의 목소리가 들리지도 않는지 남준의 손은 호석의 손에 들린 단도를 빼앗는 일 먼저 했다. 호석은 단도가 사라져 허전한 제 손을 채우려 제 앞에 있는 환영을 향해 손을 뻗었다. 분명하게 하고 싶었고, 확신하고 싶었다. 진짜 남준이 맞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남준에게 잡힌 제 손이 뜨거워졌고 남준의 입에서 나오는 거친 숨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진짜, 남준이었다.

 

더듬거리던 손으로 남준의 얼굴을 쓰다듬은 호석이 제 손을 밑으로 떨어뜨렸다. 눈이 마주쳤다. 기껏 남준과 눈을 마주쳤는데 자꾸 눈물이 차오르는 바람에 남준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항상 뒤에 서 있었고, 앞에 설 때에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처럼 얼굴을 제대로 볼 기회가 없었는데, 또 이런 기회는 영영 없을 수도 있는데. 호석은 몇 번이고 눈물을 닦아내었다. 그럼에도 모진 눈물은 원망스럽게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눈물이, 눈물이 멈추질 않아. 그래서 널 볼 수가 없어. 준아.”

 

 

서럽게도 울며 꾸역꾸역 말하는 제 주인을 가만히 바라보던 남준은 제 몸을 호석 가까이 가져갔다.

 

 

“주인께 무례함을 용서하십시오.”

 

 

호석의 귀에 남준의 목소리가 잔상처럼 떠돌고 있는데, 그 음성이 아직 사라지지도 않았는데 남준의 입술이 호석의 입술에 닿았다. 어떤 갈증이라도 해소하려는 듯 남준의 입술은 호석의 입술을 빨아들였다. 눈물을 잔뜩 매단 눈이 커졌고, 몸은 그대로 굳었다. 그러나 곧 힘없이 놓여있던 호석의 손이 남준의 목덜미를 세게 끌어안았다. 그리고 호석 자신도 미칠 듯이 느껴오던 그 갈증을 해소하려 들었다.

 

늘 많은 말을 걸어두기만 했던 혀끝이 얽혔다. 볼 때마다 숨이 탁 막히고 가슴이 뛰는 탓에 제대로 바라보지도 못했던 얼굴을 붙잡았다. 남준은 차마 손 한 번 제대로 대지 못했던 호석의 허리를 팔로 감아 몸쪽으로 당겼다. 그 무엇 하나도 지나갈 수 없게 완전히 몸을 붙인 채로 계속 서로를 찾았다. 더 깊은 곳을 갈망했다. 더더욱 서로를 원했다. 숨이 다 찰 때까지 갈증을 해소하던 두 사람이 잠시 떨어졌다. 남준은 제 손으로 호석의 얼굴에 묻은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 손길이 너무도 다정해서 호석의 눈가엔 다시 눈물이 흘렀다.

 

 

“왜, 왜 돌아왔어. 그 애는, 그 애는 어쩌고.”

 

 

기껏 제 곁으로 돌아온 남준에게 그러고 싶지 않았는데도 퉁명한 말이 먼저 나왔다. 남준의 시선은 줄곧 호석에게 닿아 있었다. 이런 일이 처음이라 호석은 제 눈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남준은 제 눈앞에 있는 제 주인 말고 다른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 제 주인이 다른 것을 보는 것도 싫었다. 남준은 다른 쪽으로 돌린 호석의 고개를 붙잡아 제 얼굴을 보게 했다.

 

 

“그 애가 나를 죽음에서 구해줬으니. 나도 그 애를 죽음에서 구해줬을 뿐이야.”

“준아.”

“넌 나를 살려놓았으니, 나는. 나는 너를 살게 할 거야.”

 

 

더 이상 호석에게 존댓말을 쓰지 않는 남준이 낯설었다. 그러나 낯선 만큼 반갑기도 했다. 눈물을 매달고 있던 그 서글픈 눈꼬리를 가만히 쳐다보던 남준의 시선이 제 무례함이 닿았던 입술로 옮겨졌다. 다시금 그곳에 짧게 입 맞춘 남준은 제 주인을 쳐다봤다.

 

 

“그러니, 죽지 마. 호석아.”

 

 

줄곧 그랬다. 여기엔, 주인과 하인 같은 건 없었다. 그저 너와 내가 있을 뿐이었다. 그걸 참 늦게도 깨달았다. 주인과 하인이라는 것에 얽매여 사는 바람에 너무 많은 시간을 허비했다. 너와 내가 되어 가만히 서로를 바라보던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다시 끌어안고 입을 맞췄다. 품 안에 넣어 놓은 제 주인을 느끼며 남준은 수없이 되뇌었다. 나의 주인, 나만의 주군, 나의, 나의.

 

 

나의, 호석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