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래더] 트위터는 @Rather_0613 (舊 새벽의덕후)

[국민/랩홉] 길 위에서 전해지는

 

 

W.새벽의덕후

 

 

 

제5장. 외곬

 

 

25.

 

 

지민은 갈피를 못 잡고 있었다. 이 한양 땅에서 이제 무엇을 더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만일 윤기와 이런 사이가 되지 않았더라면, 윤기를 붙들고 어디론가 떠나자고 말했을 거였다. 돌아온 한양은 그리웠던 만큼 괴로웠다. 외롭기도 했다. 행여 어느 길목에서 제 도련님을 만날까 쉽게 돌아다닐 수도 없었다. 이 기방의 좋은 객실에 묵는 것도 불편했다. 태형에게 자꾸 미안함만 쌓였다. 엉망이 되어 돌아온 오래된 동무가 뭐가 그렇게 소중하다고, 태형은 이렇게까지 애써주고 있었다. 불편한 방을 나와 방 앞에 걸터앉아 있는데 저쪽에서 익숙한 인영이 보였다. 태형을 보고 반갑게 손을 흔들려던 찰나, 태형 뒤로 다른 익숙함이 보였다.

 

 

“지민아.”

 

 

태형이 퍽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지민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몰라 두려워하고 있었다. 팔을 죄 긋고 정신을 잃은 정국은 며칠간 치료를 받았다. 지나가던 춘옥은 그 비싼 목숨값을 약값으로 다 쓰겠다며 혀를 끌끌 차기도 했다. 꽤 오래 정신을 차리지 못했던 정국이 눈을 뜨자마자 한 말은 지민을 찾는 것이었다. 뜬금없는 말에 태형이 뭐라 되묻기도 전에 정국은 울었다. 태형의 다독거림에 정국은 내내 ‘다 내 탓이었대. 나 때문이었대.’ 하며 울었다.

 

제정신을 찾자마자 정국은 다시금 정중하게 부탁했다. 지민을 만나야 한다고. 자신이 만나려고 하는 걸 알면 피할 수도 있으니 조용히 데리고 가달라고 부탁했다. 태형은 제 속 깊은 곳을 무언가 짓누르는 것처럼 느꼈다. 거절하고 싶었다. 한 번 만나게 해줬으면 그만인 것을, 자신에게 너무 많은 것을 바라고 있었다.

 

그러나 늘 그랬듯 태형은 그 부탁을 들어주었다. 이쪽도 저쪽도 제정신이 아니었다. 죄책감과 자책으로 자신을 속박하고 감정을 억누르는 두 사람을 가만 보고만 있는 태형조차 정신을 놓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그를 지민의 앞에 데리고 왔다. 태형은 그저, 지민이 조금 더 나아지기만을 바라고 있었다.

 

 

지민은 앉아있던 몸을 일으켰다. 태형의 뒤에 서 있던 정국은 대뜸 앞으로 나와 무릎을 꿇고 바닥에 엎어졌다. 그 행동에 지민도, 태형도 당황했다. 서 있던 지민은 어쩔 줄 모르고 이리저리 움직였다. 그러다 문득 바닥에 내려놓은 손 위를 덮은 흰 천을 보고 부산스레 움직이던 몸을 멈췄다. 익숙한 천이었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지민아. 다 우리 집 탓이래. 아니, 내 탓이래. 정말, 그때 내가 네 이름을, 네 아버지의 이름을 말하지만 않았어도. 네가 이렇게 살지 않아도 됐을 텐데. 미안해. 정말 미안해 지민아.”

 

 

정국은 바닥에 엎드려 연신 머리를 숙였다. 태형은 제가 무슨 말을 듣는 건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지민의 표정을 보아하니 지민은 알고 있는 얘기 같았다. 태형은 그 자리에 서서 갈등했다. 둘만의 자리를 만들어줘야 할 것 같았지만, 이 이야기를 계속 듣고 싶은 충동도 있었다. 태형은 지민을 쳐다봤다. 지민의 표정은 꽤 괴로운 듯 보였다.

 

 

“원한다면, 바란다면 이 자리에서 죽을게. 내가 살아있는 게 끔찍할 수 있어. 그럼 바로 사라질게. 살아서 널 보고, 널 찾고 싶었어. 네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든, 널 꼭 다시 만나고 싶어서 살아 있었어. 변명처럼 들린다면 미안해. 하지만 널 봤고, 지난날도 알게 되었으니 이젠 괜찮아.”

 

 

말을 마친 정국이 제 품을 뒤적거리더니 작은 칼 하나를 꺼냈다. 아마 그동안 정국이 제 몸에 상처를 내고 다니던 그 칼인 것 같았다. 지민은 말없이 그 칼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태형은 자리를 지켜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사달이 일어나도 날 것 같았다. 지민이 아무 말이 없자 정국이 칼집을 벗겨냈다. 아직도 날이 성한 칼이 아찔했다.

 

정국은 정말 죽을 각오가 되어 있었다. 이제 시시하게 몸에 줄이나 그어대는 것은 그만두고 목숨줄을 끊어내고자 했다. 지민을 되찾기 위해 살아있던 것이 맞다. 다만 지민이 돌아왔음에도 되찾을 수는 없었다. 제게 자격이 없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다. 단 한 순간도 정국은 지민에게 자격이 없었다. 정국이 몸을 세웠다. 바닥에 꿇어앉은 채로 정국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다시 지민의 얼굴을 본다면 살고 싶다는 알량한 마음이 들 것 같았다. 죽고 싶지 않을 것 같았다. 천천히 숨을 뽑은 정국이 칼을 들었을 때였다.

 

 

“그만두세요!”

 

 

가만히 있던 지민의 내지름에 감고 있던 눈을 번쩍 떴다. 정국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올려 지민을 바라봤다. 지민은 제 두 주먹을 꽉 쥐고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저러면, 아플 텐데. 그런 생각을 하며 정국은 지민을 바라봤다. 지민의 시선이 사나웠다. 화가 난 듯 보였다. 지민은 달달 떨리는 숨을 뱉은 후 말을 꺼냈다.

 

 

“사세요. 살아 내세요. 제가 이리 바라보는 것을 괴롭게 여기신다면, 괴로우신 대로 사세요. 이 눈빛을, 이 시선을 벌이라 생각하고 사세요. 그대로 이 자리에서 죽어버린다면 제게 또 죄를 짓는 것뿐입니다. 저에게, 정녕 저에게 더 하실 작정이십니까.”

 

 

무어라 말하고 싶었는데 정국이 입을 떼기도 전에 지민이 걸음을 옮겼다. 그 모습을 가만히 보던 태형이 정국의 손에서 칼을 빼앗아 들고는 지민의 뒤를 따랐다. 정국은 지민이 떠난 자리에 앉아서 희미하게 웃었다. 지민을 보고, 지민의 눈빛을 떠올리며 사는 게 어찌 벌이 될 수 있을까. 그게 벌이라면 참으로 무른 벌이라고 생각했다.

 

 

 

“지민아!”

 

 

하도 빠른 걸음으로 이리저리 다니는 통에 지민의 뒤를 따라잡느라 애를 써야 했다. 숨이 찰 때까지 따라다닌 뒤에야 지민이 멈춰 섰다. 세차게도 걷던 지민이 느닷없이 주저앉았다. 태형은 곧장 지민에게 달려갔다. 지민의 앞에 마주 앉아 그 얼굴을 보는 순간 제가 다 울컥하고 말았다.

 

 

“태형아. 태형아아….”

“응, 지민아. 괜찮아. 괜찮아.”

“나에게 어찌 그럴 수가 있어. 도련님이 나에게 어떻게 그래.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데. 왜 살아왔는데. 그분은 어떻게 그리 쉽게 죽겠다 말할 수가 있어. 나도 안 죽었는데. 매일 매일 억지로라도 숨 붙이고 살고 있는데. 그분은 어떻게 그렇게 말해.”

“그러게. 왜 그러셨을까. 도련님이.”

“태형아. 나 진짜, 정말 너무 속이 아파. 가슴을 누가 뜯어내는 거 같아. 이러는 내가 정말 싫고 미운데. 도련님이 사셨으면 좋겠어. 지금처럼 잘 살았으면 좋겠어. 정말 미련하지. 그치.”

“아니야. 지민이가 왜 미련해. 안 그래. 잘 사셔야지. 도련님, 잘 사셔야지.”

 

태형은 눈물겹게 우는 지민을 품에 안고 달랬다. 제 속이 다 눅어 물러지는 걸 느끼지도 못하고 지민을 어르고 달랬다. 지민이 울어서 눈물겨운 거라고, 그래서 저도 우는 거라고 여겼다. 태형도 지민에게 기대 눈을 감았다. 흘러내리는 눈물을 티 안 나게 닦아내고 지민을 다독였다.

 

 

_

 

지민을 달래 방으로 들여보내고 나서 태형은 집으로 돌아왔다. 혹여 방 근처에 정국이 있을까 걱정하는 터에 미리 방 앞까지 살피고 나서 방 안으로 들여보냈다. 집에 들어선 태형은 춘옥의 방 앞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많이 누그러지긴 했지만 여전히 춘옥은 태형에게 두려운 존재였다. 어찌 말을 건네고 방으로 들어서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대뜸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게서 무얼 하는 게냐.”

“아, 마님. 그, 그것이, 여쭐 게 있어서.”

“…들거라.”

 

 

태형은 먼저 방으로 들어서는 춘옥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봤다. 춘옥의 방 안으로 들어가 본 일이 있는지 잠시 생각해봤지만 기억나는 건 없었다. 괜히 마른 침을 꼴딱 삼키고 방으로 들어섰다. 몸이 많이 쇠한 춘옥이 잔기침을 연달아 했다. 태형은 서둘러 방문을 단단히 닫았다. 춘옥이 먼저 자리에 앉았고, 태형은 꽤 멀찍이 떨어져 무릎을 꿇고 앉았다. 손수건으로 입을 막고 기침을 하던 춘옥이 손을 들어 올려 태형을 향해 무어라 손짓했다.

 

 

“예?”

“물을 게 있다 하지 않았느냐. 게서 말할 작정이냐. 이 노인네를 놀리기라도 할 요량으로?”

“아닙니다. 송구합니다. 마님.”

 

 

태형은 다시 한 번 춘옥의 나이가 많아졌음을 느꼈다. 언제나 굳세 보였던 춘옥은 삽시간에 늙었다. 그러나 아무리 늙고 쇠했다고 한들 태형에게는 여전히 무서운 존재였다. 태형은 몸을 깊이 웅크리고 기듯이 춘옥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곤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래. 물을 게 무엇이냐.”

“저, 그것이. 혹 전우흥 대감에 대해 알고 계십니까.”

“그 양반이라면 우리 상단이랑 꽤 진득허니 거래를 해 와서 얼추 알고 있다만. 무슨 일이냐. 전쟁 통에 죽은 양반을, 대뜸.”

“아. 그게. 그렇다면 전우흥 대감이 좌의정에서 영의정으로 관직이 바뀌던 때의 일을 아십니까.”

“전 대감이 영의정이 되었을 때?”

“예. 그때 일어난 일을, 아무거나 좋으니 듣고 싶습니다.”

 

 

태형은 제가 물어놓고도 침을 꼴딱 삼켰다. 괜한 것을 물어 사람을 귀찮게 한다고 춘옥이 다시금 버럭 화를 내진 않을까 두려웠다. 춘옥의 말을 기다리며 잠자코 앉아있는데 비단옷이 껄끄럽게 느껴졌다. 제게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있는 것 같아서 불편했다. 춘옥과 가까이 있으면 특히 더 그랬다. 반면 춘옥은 태형을 그다지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지 않았다. 이따금 잔기침을 하고 손수건으로 코나 훑을 뿐이었다. 애먼 곳을 보며 옛일을 떠올리던 춘옥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임금이 바뀌었지. 반정이라는 이름의 역모였다. 참 독한 사람이지. 수년간 치밀하게도 준비했다더구나. 하도 은밀하게 준비해 나조차 그 흐름을 놓칠 뻔하였지. 시기를 잘 잡아 여기저기 줄을 덧대고 끊어 놓은 게 다행이었지.”

“줄이라면.”

“나라를 갈아엎는 데 중요한 게 무엇인 줄 아느냐.”

 

 

태형은 고개를 저었다. 고작 길바닥에서 발로 뛰어다니기만 한 제가 뭘 알 리가 만무했다. 행여 답을 하지 못해 춘옥을 실망시킬까 태형은 지레 걱정했다. 아무리 춘옥이 저를 사랑채로 불러들이고 석진의 가까이에서 업무를 보게 해주었다고 해도, 춘옥은 춘옥이었다. 태형은 괜히 무릎 위에 올려둔 제 손을 꼬물거리며 뜯었다. 다행히 춘옥은 별다른 말없이 하던 말을 이었다.

 

 

“적의 제거다. 방해가 될 만한 것들을 싹 다 치워야 원하는 나라를 만들 수 있지. 그래서 그때 북인들이 전부 숙청을 당했었다. 재야에 숨어든 사람들까지도.”

“전부요?”

“그래 전부. 씨도 남기지 않고 싹 쓸었다지.”

 

 

태형은 북인이니 숙청이니 하는 말들은 잘 몰랐다. 그저 길을 떠돌며 서인들이 정권을 잡았대, 하는 말을 귀동냥으로 들어본 적은 있었다. 태형은 그 일들이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서인이니 북인이니 하는 것이 다 무엇이며, 숙청이니 반정이니 하는 것에도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때 좀 더 관심 갖지 않은 것이 후회스러웠다. 왠지 마냥 제 일이 아니라고 할 수 없을 거 같았다.

 

 

“그러고 보니 그때 전 대감과 관련해서 이런저런 소문이 있던 게 기억나는구나.”

“소문이요?”

“그래. 전 대감이 어린아이 하나를 찾더라고. 북인들을 찾아 죽이면서 꼭 열 살 남짓한 사내아이를 찾아다녔다더구나.”

“그 아이가 누구입니까.”

“글쎄 소문으로만 떠돌던 이야기라 잘 알진 못한다.”

“이야기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원하는 이야기는 다 들었느냐.”

“…그런 것 같습니다.”

 

 

태형은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깊이 숙였다. 춘옥은 밖으로 나서는 태형을 가만히 바라봤다. 몸은 저리도 번듯한 청년이 되었으면서, 제 앞에만 있으면 영락없이 그 옛날의 꼬마였다. 말투도 누그러뜨린다고 애썼지만 평생을 모질게 살아온 자신이 쉬이 바뀔 리가 없었다. 춘옥은 다시금 기침을 했다. 하루가 다르게 몸이 달라지는 게 느껴졌다. 그래, 갈 때도 되었지. 춘옥은 다시금 단단히 닫힌 방문을 바라봤다.

 

 

밖으로 나선 태형은 제 방으로 가는 내내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반정이니 하는 것들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아무래도 그 일과 지민이 관련이 있는 것 같았다. 낮에 정국이 했던 말과 방금 들은 말을 붙여보자면, 정국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지민을 원했다. 전 대감이 외동아들이던 정국을 끔찍하게 아꼈다는 건 한양 사람들 전부가 알고 있었다. 어떤 수를 써서든 전 대감은 아들의 요구를 들어줬을 거였다.

 

그때 함께 벌어진 일이 반정이었다. 전 대감이 북인이라고 일컬어지는 사람들만 골라 죽이며 그들에게서 지민을 찾았다는 건, 지민의 아버지가 북인이라고 일컬어지는 사람 중 한 사람이었음을 뜻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랬기에 전 대감에게 죽임을 당했을 테고. 거기까지 생각하던 태형은 문득 걸음을 멈췄다. 만일 정국이 지민을 원하지 않았다면, 그땐 어떻게 되었을까. 태형은 한참 동안 움직일 수가 없었다.

 

 

 

_

지민은 다시금 밖으로 나왔다. 제집도 아닌 곳에 오래 있다 보니 이젠 아무도 없는 방에서도 눈치를 보고 있었다. 밖은 벌써 어둑했다. 마당에 내려서니 아까 본 정국이 떠올랐다. 전보다 더 상한 얼굴, 상한 팔. 제 도련님을 숱한 밤 원망했지만, 그렇다고 망가지길 바란 적은 없었다. 지민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흰 천이 감긴 손을 잡아보고 싶었다. 아주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덧없이 걷던 지민이 문득 고개를 들었다. 이곳에 지내다 보니 자꾸 마주치게 되었다. 또, 남준을 만났다. 남준은 불 꺼진 호석의 방을 지키고 있었다. 호석은 그 일이 있고 난 후로 남준을 제대로 보지도 않았다. 피했고, 도망 다녔다. 호석이 그럴수록 남준은 제가 정말 제 주인 곁에 있을 자격이 사라지는 것만 같아서 괴로웠다. 지금도, 호석은 남준을 떼어두고 한창 소란할 가빈으로 가버렸다. 남준은 비어있는 건물만 지키고 있었다.

 

 

“무사님.”

 

 

이곳에서 남준은 늘 ‘남준님’이라고 불렸다. 호석이 제가 붙인 이름을 많은 사람이 부르게 하고 싶다며 가빈의 사람들에게 일러둔 탓이었다. 그런데 꼭 단 한 사람만이 자신을 ‘무사님’이라고 불렀다. 남준은 저를 부르는 목소리를 향해 돌아서기가 두려웠다. 자신을 이토록 혼란스럽게 만든 이를 어떻게 마주해야 할지 몰랐다. 그러나 다시금 무사님, 하고 불러오는 밤공기 같은 목소리에 몸을 돌려세워야 했다.

 

 

“또, 지키고 계시는 겁니까.”

 

 

그 나직한 목소리에 남준은 그저 고개만 끄덕거렸다. 더 이상 이 사람을 보고 싶지 않았는데, 자꾸 마주했다. 남준이 지민을 마주하고 싶지 않은 데에는 아주 큰 이유가 있는 건 아니었다. 다만, 그 얼굴을 보면 좀처럼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지금처럼.

 

 

“혹 괜찮으시다면, 잠시 시간을 빌려도 되겠습니까.”

 

 

꼭 울 것 같은 얼굴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저 눈빛을 도무지 피할 수가 없다. 비슷한 얼굴을 본 적이 있었다. 그러나 남준은 그 비슷한 얼굴을 단 한 번도 이렇게 마주할 수가 없었다. 눈에 담기는 낯익음에 남준은 눈을 거두지 않았다.

 

 

 

_

 

“으아, 뭐라구 해야 하나아.”

 

 

앞에 앉은 녀석은 연신 헤싯거리며 웃었다. 그만 취한 것 같았다. 남준은 그 모습을 빤히 지켜봤다. 어쩐지 이 녀석을 보면 어떤 아련함이 들었다. 그것은 제 주인 호석을 볼 때와 비슷하기도, 또 다르기도 했다.

 

지민은 잔뜩 취한 탓에 남준을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상 위에 팔을 어기적대며 올려놨다. 그리고 그 위에 제 얼굴을 겨우 올려놓으며 해롱거렸다. 눈을 감고 예쁘게 웃은 녀석은 어스름하게 눈을 떠 남준을 바라봤다. 좁게 열린 눈꺼풀 틈으로 저를 보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러니까. 참 좋아요. 무사님을 보면, 참 편하구 좋아요.”

“무슨 말을.”

“저는요. 무사님도 좋구. 그 형님도 좋았구. 도련님, 우리 도련님도 정말 좋아했는데. 나는 누굴 좋아하면 안 되나 봐요. 진짜, 너무. 정말 너무 힘들어요. 무사님도 더 좋아하면 안 되겠죠. 그럼 무사님도 아플 거야. 나 때문에 힘들 거야. 그럴 거야.”

 

 

사람 속을 다 뒤집어엎는 말을 뱉어놓고 본인은 팔자 좋게 상 위로 고개를 박았다. 왠지 세게 부딪힐 거 같아서 남준이 잽싸게 머리와 상 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손 위로 안착한 머리를 조심스레 상 위로 올려두었다. 남준은 허리를 꼿꼿이 세워 앉아 한참을 있었다. 둥그러니 예쁜 뒤통수를 바라보았다. 푸우, 하는 소리를 내며 내쉬는 숨소리가 들렸다.

 

이 녀석은 늘 이런 식이다. 사람을 자꾸 흔들어 놓는다. 호석뿐이던 사람이었다. 언제나 그래야만 했다. 호석은 남준에게 은인이며, 주인이며, 생명이었다. 그런데, 이 작은 사람 하나가 자꾸 속을 뒤집어 놨다. 이름을 알려줬는데도 꼬박꼬박 ‘무사님’ 하고 부르는 것도 그렇고, 대뜸 좋다느니 하는 말을 참 쉽게도 했다.

 

 

“대체 너는.”

 

 

나한테 왜 이러는 것이야.

 

한참 동안 녀석을 바라보다가 겨우 둘러업었다. 기방에서 잡일을 할 때 술 취한 취객을 업어다 데려다 가마에 올려놓거나 객실에 뉘어 두는 일도 가끔 했기에, 혼자 지민을 둘러메는 건 어렵지 않았다. 이전과 조금 다른 점을 찾자면 무게감 정도였다. 작은 만큼 어찌나 가벼운지 사내를 업고 있는 게 맞나 싶었다.

 

지민의 방에는 누가 깔아놨는지 이부자리가 곱게 펴져 있었다. 그 위에 지민을 눕혀두고 이불을 마저 덮어 주었다. 문득 자신은 호석의 이부자리를 정돈해 준 적이 있었나 싶었다. 늘 구석에 가구마냥 우두커니 서서 그저 방 한구석을 지키고만 있었다. 혼자 잠드는 걸 무서워하는 사람이라 딱 그런 일까지만 했었다. 남준은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아마 호석은 알고 있을 거였다. 가빈의 전체가 호석의 귀였다. 어쩌면 남준이 지민과 함께 있었다는 것쯤은, 혹은 그 상 위에 올라온 찬거리마저 알고 있을 호석이었다. 남준은 제 주인이 그리웠다. 꽤 닮은 지민은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취한 것도 전부 마주 볼 수 있는데. 이부자리까지 정리해 줄 수 있는데 제 주인에겐 그런 적이 없었다. 남준의 걸음이 빨라졌다. 호석을 만난다고 해서 그런 것들을 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이대로 자신을 피하게 두고 싶진 않았다. 남준의 걸음이 빨라졌다.

 

 

_

 

“이거 놓으십시오! 저는 몸을 파는 창기가 아닙니다!”

 

 

호석은 점점 아파오는 손목에 인상을 찌푸렸다. 꼭 이런 놈들이 있었다. 기방에 있는 것들은 계집이건 사내건 잠자리를 하는 존재로만 생각했다. 물론 이런 관념은 기방 밖에 은근하게 퍼져있는 관념이기도 했다.

 

이럴 때면 호석은 늘 불쾌했다. 정 그렇게 몸을 섞고 싶으면 기방에서 친히 마련해 놓은 은근짜의 구역으로 가면 될 터인데, 꼭 그곳으로는 가지 않았다. 요란한 잠자리는 끔찍하게 원하면서, 다른 이들의 눈은 또 어지간히 신경 쓰고 있었다. 제 발로 은근짜의 구역에 가지 않는 사람들은, 제 구역으로 은근짜들을 들이기는 또 잘했다.

 

역겨웠다. 전쟁이 터졌을 때 가장 발 빠르게 나라를 버리고 도망간 자들이 기방에는 가장 재빠르게 돌아왔더랬다. 그러고는 그 전쟁을 제가 다 치른 양 목청을 높였다. 호석은 안간힘을 쓰며 이 불쾌한 손길에서 벗어나고자 하였다. 역겨움과 공포가 함께 밀려왔다. 얼마 전의 일이 아직 잊히지도 않았는데. 또 이런 꼴이었다.

 

그나마 같은 사내라고 이만큼 버텼긴 했지만, 아무래도 호석은 춤출 때 말고는 더한 힘을 쓸 수 없었다. 술 먹고 우악스레 몸을 당기는 주정뱅이를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결국 눈을 감고 마음 한켠을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면서 제 가슴 속으로 언제나 되뇌고 있던 그 이름을 뱉어버렸다.

 

 

“준아.”

“으엉? 이놈아. 나는 준이가 아니다. 영균이라고 몇 번을 말하더냐!”

 

 

주정뱅이 놈이 궁금하지도 않았던 제 이름을 내뱉더니 다시 호석의 팔을 잡아당겼다. 손이 새하얗게 질렸을 만큼 우악스럽게도 쥐고 있었다. 호석은 제 손의 상태를 확인하고는 다시 깊은 한숨과 함께 눈을 감으려던 차였다. 무겁고 아프게 조여오던 손목이 가벼워졌다. 욱신거리는 느낌만이 남아 있었다. 감던 눈을 다시 떠 고개를 들자 호석의 앞에 듬직한 등이 널찍하게 서 있었다.

 

 

“놓으시지요. 이 분은 몸을 파는 천한 신분이 아닙니다.”

“뭐어라, 이 부운? 여기 네놈이 이 분이라 불러야 할 사람은 나뿐이니라. 이놈아! 어디 남 앞에서 몸뚱이나 함부로 흔드는 것이랑 나를 비교하는 게야.”

 

 

호석의 되뇜이 주문이라도 되었던 듯, 혹은 중얼거리던 제 마음을 듣기라도 한 듯 눈앞에 서 있는 남준이 눈물겹게 반가웠다. 그러다가 다시금 서러워졌다. 남준을 더 이상 제 곁에 둘 수 없었다. 그럴 자격이나마 없는 것 같았다. 자신이 남준을 살렸다지만, 오히려 남준이 저를 살렸던 적이 많았다. 딱 죽고만 싶던 수많은 날들을 남준으로 인해 살아냈다.

 

분명 그 사람을 만나러 갔었다. 쫑알쫑알 말 많은 반빗아치들의 이야기를 이미 엿들었다. 저처럼 죄 더럽혀지고 못난 사람보다야, 그처럼 예쁘고 웃음 나게 하는 사람이 낫겠지. 호석은 미련을 잔뜩 붙여둔 채로 체념하고 있었다. 밉기도 했다. 언제나 제 곁에 있을 것처럼 굴던 녀석이, 그리도 쉽게 다른 이를 찾을 줄 몰랐다. 반갑기도, 서럽기도, 밉기도 한 녀석은 제 앞에 서서 칼을 뽑아 들었다. 술에 취해 꼬부라진 혀로 막말을 하는 주정뱅이의 목덜미에 칼을 겨누고 내뱉는 단정한 말이 이번엔 사무치도록 가슴을 울렸다.

 

 

“말씀 조심하시지요. 제 평생의 주인이시고, 제가 전부를 바쳐 모든 것을 지키는 유일한 분입니다.”

 

 

참으로 너무하는 녀석이다. 이 녀석은.

 

 

“재, 재수가 없으려니까. 갈, 갈 것이다! 여봐라!”

 

 

호석은 눈을 감았다. 저쪽으로 내달린 주정뱅이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남준이 몸을 돌려 호석의 앞에 서 있었다. 남준의 눈엔 시퍼렇게 멍이 잡힌 제 주인의 손목만 보였다. 그 손을 붙잡아 가까이 보고 싶은데, 그 몸을 들쳐 안고 의원에게로 가고 싶은데 남준은 그저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다. 지민에게는 쉽게도 했던 것들을 이 사람 앞에선 단 한 가지도, 시도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주인님.”

“…됐어. 피곤하다. 그만 가자.”

“약, 이라도 바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이따 부탁하면 돼.”

 

 

제 걱정을 다 해주는 남준에게 와줘서 고맙다고. 널 참 오래도록 찾고 있었다고, 널 내내 피했지만 내내 그리워했다고 말하지 못했다. 이리도 예쁜 가빈의 홍등 거리를 너와 나란히 서서 손을 붙잡고 거닐고 싶다는 말도 하지 못했다. 조용한 걸음들이 고요한 거리를 울렸다.

 

 

 

_

 

“어찌 다들 그럴 수가 있어.”

“무슨 말씀이십니까?”

“누가 물에 빠져 죽기 직전의 너를 건져냈다. 그 사람은 건져내기만 하고 사라졌어. 그런데 다른 사람이 와서 그런 네 몸의 물을 빼주고, 살려주었다. 넌 누구에게 더 마음이 갈 것 같으냐.”

“음, 글쎄요. 단정하기엔 어려운 질문이네요.”

 

 

윤기는 주막에 앉아 술이나 푸고 있었다. 다시 그 기방으로 갈 생각은 없었다. 이 꼴 저 꼴, 신물이 나도록 지켜봤다. 윤기의 옆에서 어린 주모 하나가 달라붙어 술시중을 들고 있었다. 떼어내기도 귀찮아 윤기는 그저 내버려 두고 있었다. 윤기가 잔을 비우자 냉큼 술병을 들어 술을 따랐다.

 

 

“그럼 그 두 사람 중 한 사람에게만 평생을 바칠 수 있겠느냐.”

“평생을요? 생명의 은인이긴 하지만. 음, 평생을 감사할 순 있겠죠.”

“단 한 순간도 떨어지지 않고, 오히려 제 목숨을 바쳐 평생 그 사람을 지키려고 한다면 그건 무엇이냐.”

 

 

어린 주모는 빈 술병을 흔들며 부엌간에 있던 주모에게 신호를 보냈다. 꽤 차갑게 생기긴 했어도 멀끔하게 잘생긴 얼굴이 마음에 들었다. 술도 많이 먹여 매상도 높이고, 잔뜩 취한 그를 어떻게 해볼까 하는 음흉한 생각도 품고 있었다. 주모가 곧장 술병을 들고 왔고 그 병을 받아들고는 다시금 잔을 채웠다. 이 남자는 잔을 채우는 족족 깔끔하게 비웠다. 어린 주모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사랑 아니겠어요? 은혜를 갚는 방식이야 다양할 텐데, 평생 목숨을 바친다는 건. 그새 정이라도 들었나 보죠.”

“사랑? 그런 게 어디 있어.”

“왜 없어요? 여기도, 저기도. 이 주막 안에도 밖에도 널린 게 다 사랑인데.”

 

 

윤기는 어린 주모의 말을 비웃으며 다시 술을 넘겼다. 사랑. 전부 다 사랑이라고 했다. 그게 뭔지. 윤기에겐 거짓뿐이던 그 감정 따위로 말도 안 되는 일들을 하고 있었다. 잔을 내려놓은 윤기는 입을 닦아내며 다시 말했다.

 

 

“그렇다면, 큰 죄를 지은 사람에게 목숨으로 희생하겠다 말할 수도 있느냐. 그 사랑이란 걸로.”

“그 죄가 얼마나 큰데요?”

“글쎄. 한 사람의 인생을 모조리 흔들어 놓은 정도랄까.”

“그렇다면 목숨을 바칠 수도 있겠지요.”

“평생 제 목숨 하나가 제일 귀한 줄 알고 살았던 사람인데?”

“그러담 더더욱 사랑이겠네요. 자신에게 제일 귀한 것을 선뜻 내놓겠다는 거니까.”

 

“그럼 반대로, 그 사람을 죽지 못하게 하는 건?”

“예?”

“내 인생을 모조리 망쳐놓은 사람이 죽음으로 죄를 갚겠다고 하는데, 죽지 말라고 말리는 건? 그것은 무엇이냐.”

“그것도, 사랑이겠지요. 나으리는 사랑을 정말 모르시나 봐요.”

 

 

어린 주모가 잔을 채웠고 윤기는 역시 그 잔을 넘겼다. 입 안 가득 술을 넘기고서는 빠득대며 이를 갈았다. 거짓말. 거짓말이었다. 사랑 같은 건 없다. 윤기의 생엔 그랬다. 그래서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이 그토록 훼방을 놓고자 했는데 저들은 윤기의 뜻대로 망가지지 않았다.

 

지민과 정국은 둘 중 하나 목숨을 잃은 이가 없었고, 남준은 지민을 챙기기야 했지만 결국 제가 지킨다는 사람에게 돌아갔다. 이 어린 주모는 그게 다 사랑이라고 했다. 자신이 들은 마지막 사랑은 부모에게 버림받으면서 들은 것뿐이었다. 그런 게 사랑일 리 없었다. 그래서 윤기는 그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용납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알려주고 싶었다. 내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사랑이 거짓이었던 것처럼, 너희의 그 사랑도 다 거짓일 거라고. 정말 극한의 상황에 닿게 되면 너희도 그 사랑을 포기할 수밖에 없을 거라고. 이번에 윤기는 다시 채워진 잔을 비우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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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진짜 엄청 오랜만에 돌아온 <길.전> 입니다!

세상에나...ㅠㅠ 정말 반가워요.

그동안에도 제 글을 읽어주시고, 올렸던 공지에 기다려주시겠다며 예쁜 말 써주신 덕에 저와 <길.전>이 이렇게 돌아왔답니다!


어떻게 읽어주셨을지는 모르겠어요.

그래도 재밌게, 너무 거슬리지 않게 읽혔으면 좋겠어요.


참 오래 기다리게해서 죄송하고, 그 시간 동안 기다려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부족한 제가 부던히도 애썼던 건 꾸준히 읽어주시고 좋은 말 달아주시는 여러분들이 있어서랍니다!(!!) 


정말 끝에 다다랐어요. 두세 편 정도면 완결이 날 것 같네요.

다시 만나게 되어 반가운 마음에 주절주절 말이 많았습니다.

잊지 않고 찾아주시고, 읽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행복한 봄 보내세요! 미세먼지는 조심하시구요!


(..혹시 길전과 관련해서, 혹은 뭐..여러가지.. 저에 대해? 저의 글에 대해? 궁금한 게 있으시다면 물어보셔도 좋습니다! 댓글로든, 트위터 디엠으로든 답해드릴게요! 사실 연재와 완결이 처음이라 <길.전>이 완결나면 후기 같은 걸 써볼까...하는 주제넘은 생각을 하고 있는데....아니 뭐...그저...그냥....저는 그렇다구요...허허헣 네. 감사합니당!♡ 사랑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