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래더] 트위터는 @Rather_0613 (舊 새벽의덕후)

[국민/랩홉] 길 위에서 전해지는

 

 

W.새벽의덕후

 

 

제5장. 외곬

 

 

24.

 

 

 

온종일 질문이 맴돌았다. 그러나 누구냐고 묻지 못했다. 대체 누구기에 날 지켜야 할 네가 나와 멀찍이 떨어져 그 사람 곁에 서 있던 거냐고 물을 수 없었다. 그 자그마한 사람이 뭐기에 너는 때로 그 사람을 보며 웃느냐고 따질 수 없었다. 하다못해 너는 날 지켜야 하는 주제에 난 제대로 바라보지도 않으면서 왜 그 사람은 그렇게 잘만 바라보느냐고 말할 수 없었다. 아마 평생을 가도 따져 물을 수 없을 거였다. 모든 것에 자신이 없었다. 나비라는 자리도 불편했다.

 

 

“혼자 있고 싶어.”

“예.”

 

 

뒤를 따르려는 남준을 멈춰 세웠다. 평소 같으면 방 안까지 따라 들어와 한쪽에 자리를 잡고 우두커니 서 있을 거였다. 그런데 딱 울고 싶은 심정인 지금, 호석은 남준을 방 안에 들일 자신이 없었다. 제 호위무사 앞에서 울고 싶지 않았다. 나약한 이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입술을 꾹 깨물어 울음을 참고 방 안으로 들어섰다. 태연한 척하느라 무던히도 애썼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방 밖에 남은 남준은 호석이 들어가고 사라진 자리를 바라봤다. 텅 빈 자리가 쓸쓸해서 마음이 시렸다. 그렇게 건물 앞을 지키고 있는데 누군가 남준을 불렀다.

 

 

“저, 남준님.”

“무슨 일이십니까.”

“정말, 정말 죄송하지만 도움 하나만 주실 수 있으신지요.”

“저는 지금 이 자리를 지켜야 합니다.”

“압니다.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리 부탁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당장 요리에 필요한 재료가 창고 높이 있습니다. 쌀가마니를 쌓아 올라가도 좀체 닿지를 않습니다. 키가 크신 분이시니, 부탁드리겠습니다.”

 

 

연신 몸을 숙여가며 부탁하는 하인을 가만히 바라봤다. 저도 다름없는 천민일진데, 호석을 지킨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 기방에서 이런 대접을 받고 있었다. 남준은 하인을 한 번, 방 쪽을 한 번 바라봤다. 여전히 복잡한 머리가 신경 쓰였다. 잠시만, 잠시만 바람을 쐬고 오고자 싶었다. 연신 자신을 향해 오래 걸리지 않는다고 말을 뱉는 하인의 목소리가 저를 홀리는 듯했다. 남준은 하인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몸을 돌려 창고로 가는 도중에도 고개가 자꾸만 뒤로 돌아갔다. 아주 잠시만, 잠깐만. 그 말을 되뇌며 남준은 보폭을 넓혔다. 남준을 따르는 키 작은 하인만 졸지에 뜀박질을 해야 했다.

 

 

남준의 기운마저 사라진 건물로 누군가 잽싸게 들어갔다. 넋 놓은 호석이 채 닫지 못한 문틈으로 몸을 집어넣은 사람은 문을 세게 닫았다. 갑작스러운 기척에 호석이 몸을 돌렸다. 행여 제 호위무사인가 하여 반갑기도 했다. 오지 말라는 제 말을 거역하고 저를 보러 와주었나 했다. 그런데 몸을 돌려 마주 본 얼굴에 호석은 제 온몸을 굳히고 말았다.

 

 

“다, 당신이, 당신이 어떻게.”

“오랜만이구나.”

 

 

쾌쾌한 냄새에, 지저분한 옷차림, 전부 망가진 머리까지 어느 곳 하나 멀쩡하지 않았지만 호석은 단숨에 알아봤다. 그 관리였다. 호석을 멋대로 유린하다 제 잘못으로 청으로 끌려간. 관리는 여유롭게 호석의 방 안을 거닐었다. 지저분한 신발이 깨끗한 호석의 방을 더럽히고 있었다. 호석은 그를 따라 시선을 움직였다. 방 중간에 자리한 그는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가며 방을 둘러봤다.

 

 

“여기가 네 방이었구나.”

“무슨, 대체 무슨 짓입니까. 나가시지요.”

“객실보다 훨씬 좋구나. 여기서라면 옛 회포를 푸는 것도 아주 만족스럽겠어.”

“사람을 부를 것입니다. 당장 소리를 지르면 이 방으로 들어올 사람이 수십입니다.”

“헌데, 왜 못하고 있느냐.”

 

 

꼴은 거지와 진배없으면서 뒷짐을 지고 어기적대며 걷는 걸음걸이나, 턱을 쓸어내리는 동작은 옛날 그 호화로운 관리일 때의 모습 그대로였다. 호석은 제 주먹을 꽉 쥐었다. 춤이나 출 줄 알았지 제대로 휘둘러보지 못한 무른 손으로 저 관리에게 저항할 수는 없었다. 그저 온몸으로 퍼져 나오는, 몸이 먼저 느끼는 그 두려움을 참아내고자 잔뜩 힘을 주고 있었을 뿐이었다. 관리는 여유로운 걸음으로 호석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섰다. 호석은 저도 모르게 걸음을 뒤로 물렸다.

 

그의 말이 맞았다. 당장 소리만 지르면 모든 것이 끝날 터인데, 호석은 소리 한 번 지르지 못하고 있었다. 오히려 점점 목소리가 잦아들고 있었다. 호석의 모든 것이 기억하는 본능일 수도 있었고, 버릇일 수도 있었다. 당장 저 관리에게 무슨 꼴을 당할지 몰랐다. 소리를 질러 어떤 신호라도 보내면, 이 방으로 남준이 뛰어들어올 거였다. 싫었다. 그런 꼴을 보이는 게. 그런 호석의 마음을 알기라도 한 듯 관리가 더러운 입으로 웃었다.

 

 

“나, 나는 단지. 일을 크게 만들고 싶지, 않을 뿐입니다.”

“그리도 덜덜 떨면서, 거짓을 말하고 있구나.”

 

 

관리는 한 손으로는 뒷짐을 지고, 다른 손으로는 턱을 쓸면서 호석 가까이 다가왔다. 당장 어떻게 할 줄 알았던 그는 호석 앞에 서서 그 얼굴을 가만히 살폈다. 그러다 그 자세 그대로 호석 주위를 천천히 돌면서 걸었다. 앞모습, 옆모습, 뒷모습. 모든 모습을 찬찬히 살폈다. 어떤 때는 더 자세히 보려고 눈을 게슴츠레 뜨기도 했다.

 

호석은 그 끈적한 시선이 싫었다. 그 시선이 익숙하게 느껴지는 것조차 불쾌했다. 근래에, 남준으로 인해 속이 복잡하고 속상하긴 했지만 그래도 살기엔 괜찮았다. 어느 때나 느닷없이 저를 불러대는 더러운 관리가 없어서, 조금은 살만하다고 느꼈었다. 관리로 인해 더럽혀진 저 자신은 더 이상 남준을 바랄 수 없었지만, 그럼에도 함께 평화롭게 지낼 수 있다는 것에 만족했다. 더는 남준이 그 슬픈 눈으로 방 앞을 지키고 있지 않아도 되었고, 자신 역시 더러운 꼴을 하고 입을 틀어막지 않아도 괜찮았다. 그런데, 대체 왜. 호석은 제 입술을 물었다. 그런 호석을 가까이에서 바라보던 관리가 더러운 숨을 뱉었다.

 

 

“네 무사인지 뭔지가 볼까 걱정하는 것이겠지.”

“제발. 제발 그냥 가주시지요.”

“호석아. 내 꼴을 보거라. 그런 친절한 부탁에 넘어갈 정도로 여유로워 보이는 것이냐.”

“부탁입니다. 허니, 제발.”

 

 

몸과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떨구는 호석을 보며 관리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러다 지저분한 손으로 호석의 매끈한 얼굴을 붙잡았다. 호석의 눈이 크게 떠졌고, 바들바들 떨리는 몸을 천천히 들어 올려 관리를 쳐다보았다. 이 더러운 냄새와, 손길이 낯설지 않았다. 관리는 웃으며 걸레짝과 다름없는 옷의 품을 뒤적거렸다. 그리고 웬 종이 하나를 꺼내 호석의 눈앞에 보였다.

 

 

“이게 무엇인지 아느냐. 알아보겠느냐.”

“이, 이게. 이게 무슨 짓입니까!”

 

 

잔뜩 놀라놓고도 호석은 큰 소리 한 번 내지 못했다. 코앞에 있는 관리에게나 들릴 정도로 소리 질렀다. 관리는 제 입술을 뒤틀다가 웃었다. 그리고 붙잡은 호석의 얼굴을 놓았다. 둘러멘 가방을 뒤적거렸다. 바스락대는 종이의 소리가 호석의 귀에 날카롭게 닿았다.

 

 

“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 겁니까!”

“아직 제대로 무슨 짓을 하진 않았다. 보아하니, 알아본 거 같구나. 어떠냐. 반갑지 않으냐. 내가 모든 걸 잃으면서도 이것들을 지키려고 애쓴 모습을 봤다면, 호석이 네가 참 기뻐했을 텐데.”

“도대체, 그것을 어디서.”

 

 

호석의 눈에 점점 초점이 사라졌다. 여전히 눈앞에서 달랑거리는 종이와, 관리의 손에 들려진 다른 종이들을 보면서 말을 잃었다. 관리는 손에 들린 숱한 종이를 하나씩 꺼내 호석의 눈앞에 한 번 보이고 바닥으로 뿌렸다. 몇 번이고 그런 행동을 반복하는 동안 호석의 시선도 바빴다.

 

 

“호석아. 나 같은 사람에게 부탁을 하려면 이런 식으로 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더럽고 추잡하게.”

 

 

덜덜 떨며, 호석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다. 당장이고 어디론가 내달리고 싶었지만 바닥에 흩뿌려진 저것들을 두고 갈 수가 없었다. 관리는 여전히 손에 들린 종이 더미 중 하나를 들어 올려 잘 살폈다. 그리고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리고 제 혀를 날름거려 입술을 축였다. 관리의 더러운 시선이 닿는 그 종이에는, 문란한 춘화가 그려져 있었다. 색스러운 얼굴도 그려져 있었다.

 

 

“나는 너에게 부탁을 할 생각이다. 그걸 거절한다면 이것들을 저자에 뿌릴 생각이고. 이것들이 저자에 뿌려진다면 온 한양이 알 것이다. 저자에 벌거벗고 다니는 꼬맹이들까지 이 더러운 춘화의 주인공이 누군지 알겠지.”

 

 

그 말을 하며 관리가 손에 들린 걸 전부 바닥으로 뿌려버렸다. 넋 놓고 있던 호석이 순식간에 바닥으로 엎어져 그 종이들을 주웠다. 형형색색. 고급진 색료를 아낌없이 쓴 티가 나는 그림이었다. 호석은 제 손에 들어온 종이를 세게 쥐었다. 빳빳한 종이가 멋대로 구겨졌다. 그러나 관리는 그 모습을 그저 방관하고만 있었다. 호석의 마음이 더욱 두려워졌다. 이런 그림 따위를 더 갖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아찔하게 들었다.

 

가끔 그는 방 안에 손님을 들이곤 했다. 저 자신이 유린당하는 공간에 그 말고도 다른 사람이 들어온다는 게 끔찍했지만 거절할 순 없었다. 들어온 이가 제 호위무사는 아니었으니 그저 죽을 듯한 심정으로 참아내기만 했다. 더러운 짓거리를 하는 동안, 보통은 기예를 선보이는 공간에 짙은 발을 내려두고 손님을 앉혀두었다. 호석은 가끔 기생들에게 엿들었던, 누군가가 지켜보는 것을 좋아하는 그런 색정이 관리에게 있는가보다 그렇게 넘겨짚었다. 그런데 그 짙은 발 너머로 이런 것을 꾸미고 있던 모양이었다.

 

남들은 이 그림들이, 이 모습이 어떻게 나왔을지 모르겠지만 호석은 그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그 지난날들을 참 열심히도 기록해놓은 그림이었다. 바닥에 흩뿌려진 그림들에는 호석의 얼굴만 적나라하게 그려놓은 것도 있었다.

 

 

“아니야, 아니야…. 이건, 이건.”

 

 

아무 말이나 중얼거리며 호석이 바닥을 훑어댔다. 마른 몸이 덜덜 떨렸다. 누가 보아도 이 그림의 주인은 호석이었다. 호석은 바닥에 붙여놨던 고개를 들어 다시금 제 손에 들린 그림 한 장을 쳐다봤다. 몇 번을 보아도 끔찍했다. 저자의 벌거벗은 애들이 보는 것쯤이야 상관없었다. 한양의 숱한 사람들이 이것을 보고 쑥덕거리는 것도 괜찮았다. 이미 남자 기생이라는 이유로 손가락질을 받아왔다. 하지만, 그렇지만.

 

 

“이게 뿌려지고, 떠들기 좋아하는 저잣거리를 뱅글뱅글 돌다 보면 알게 되겠지. 네가 그렇게 끔찍이도 아끼는 그 무사 놈까지.”

“부탁, 부탁이랄 게 무엇입니까. 대체 무엇을 바라고! 내게 이러는 것입니까.”

“무엇이겠느냐. 당연지사, 네놈이지.”

 

 

그는 호석을 너무나도 잘 알았다. 애초에 이 그림으로 하려던 겁박은 저자에 뿌린다는 말에 있는 게 아니었다. 호석은 제 귀로 들은 말에 다시금 이로 입술을 짓눌렀다. 그의 겁박은 저 자신의 호위무사와 관한 것이었다. 나의, 준이에게 보이겠다는 것이 그가 하려던 겁박의 본체였다.

 

 

“어떠냐. 나의 부탁이. 어찌할 셈이냐.”

“…애초에 나에게 선택이랄 것은 없지 않습니까.”

 

 

호석의 말에 그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호석은 여전히 바닥을 훑으며 종이들을 모으고 있었다. 자꾸만 눈물이 흘렀다. 애써 참아냈는데도 속절없이 흘러댔다. 고운 비단옷으로 눈물을 닦아냈지만 더 따끔거릴 뿐이었다. 이 시간이 빨리 지나가길 바랐다. 빨리 지나가 버리고 난 뒤에는 남준이 무슨 일이 있었다는 것을 아예 모르길 바랐다. 그러려면, 더는 울어서는 안 됐다.

 

남준을 옆에 붙여 둔 명분은 호위무사였지만, 그것은 정말 명분일 뿐이었다. 그 애가, 남준이 자신 때문에 어느 곳 하나 다치는 건 싫었다. 차라리 자신이 엉망이 되는 게 괜찮았다. 우습게도 춤이나 겨우 추는 몸뚱이로 남준의 호위무사를 자처하고 있는 꼴이었다. 지금 이 순간도, 행여 남준이 들어올까. 이런 꼴을 보고, 저를 지키겠다고 몸을 상하게 하진 않을까 전전긍긍, 눈치를 봐야 했다.

 

 

“그래, 이 얼굴. 이걸 보고 싶었다.”

 

 

그가 몸을 숙여 앉아 호석의 턱을 우악스럽게 붙잡았다. 아까 그림을 볼 때처럼, 호석의 얼굴을 쳐다보며 더러운 제 혀를 날름거렸다. 그는 호석으로부터 시선을 떼지 못했다. 이 얼굴, 그때도 이런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얼굴이었다. 이토록 처연한 얼굴을 어찌 잊을까. 오히려 못 본 사이에 처연함이 더 농익어있기까지 했다. 관리는 문득 궁금해졌다. 그간 녀석에게 어떤 일이 있던 것인지, 하여 안 그래도 처연한 이 얼굴이 더욱더 처량해진 것인지. 아마, 그 남준이라는 녀석이 얽혀있겠지.

 

만족스럽게 곡선을 그리던 입술이 뒤틀렸다. 호석은 늘 제 밑에 깔려있으면서 그 이름을 불렀다. 귀에 딱지라도 앉게 할 요량이었는지, 참 여러 번 불러댔다. 호위무사랍시고 할 줄 아는 게 고작 문 앞에 멍청하게 서 있는 게 다인 녀석을 숱하게 찾았다. 늘 호석을 옆에 끼고 있고, 몸을 비벼댔던 건 자신이었지만 단 한 순간도 호석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그럴 수 없었다. 그게, 싫었다.

 

 

“그거 아느냐. 전엔 내가 돈과 권력을 쥐고 있었지. 그거면, 그런 것이라면 모든 것을 가질 줄 알았다. 너마저 가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 헌데 다 소용없더구나.”

 

 

호석 앞에 쭈그리고 앉은 그는 마치 옛이야기라도 하는 목소리로 애먼 곳을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호석은 그 말을 듣고나 있는 건지, 가끔 눈을 벅벅 긁으며 바닥이나 보고 있었다.

 

 

“내가 한 일은 반역에 해당하는 일이야. 황제까지 모욕했으니 죽어 마땅한 사람이었지. 그런 내가 어찌 살아서 네 앞에 다시 나타난 줄 아느냐.”

 

 

그는 다른 손까지 뻗어 호석의 얼굴을 붙잡았다. 더러운 손이 호석의 눈물을 닦아냈다. 호석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다. 관리는 저에게 닿는 호석의 눈빛을 보고 허탈하게 웃었다. 평생 이 녀석을 가질 수는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리 살 수 있던 것은 말이다. 바로 비밀을 쥐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대단하신 관리 나으리들과, 황가의 비밀을 손에 꼭 쥐고 있었기에 이 정도 꼴이나마 할 수 있던 것이다.”

 

 

호석은 제 얼굴에 닿은 손을 치워냈다. 관리는 매서운 손으로 내쳐진 손을 그저 내려두었다. 이제 이 밤이면 몇 번이고 만질 수 있는 얼굴일 텐데.

 

 

“비밀이라는 건 말이다. 별게 아니야. 상대가 숨기고 싶어 하는 것, 그게 비밀이지. 그 비밀이란 게 돈과 권력보다 더 대단한 것임을 몸소 배웠다. 그래. 거절할 수 없겠지. 넌 이걸, 할 수만 있다면 어떤 수를 써서라도, 평생을 숨기고 싶을 테니까. 그 녀석이 못 보도록.”

 

 

관리를 노려보는 호석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랫입술을 말아 물고 눈물을 떨어트리는 모습이 여간 아름다운 게 아니었다. 짜릿하게 쾌감이 느껴졌다. 돈도, 권력도, 명예도 다 자신을 떠났지만 이 녀석 하나만 가질 수 있다면 충분히 만족하며 살아갈 거 같았다. 평생 이런 얼굴로 산다고 해도 괜찮았다. 애초에 이런 얼굴을 보고 정을 느꼈었다.

 

관리는 호석의 몸뚱이를 제 쪽으로 잡아끌더니 바닥으로 넘어뜨렸다. 뒤로 넘어가면서 호석이 바닥과 꽤 세게 부딪혔지만 호석은 제가 아픈 것도 느끼지 못했다. 제 옷을 멋대로 헤집는 손이 있어도 저항하지 못했다. 이런 꼴이, 이런 상황이 익숙하다는 게 그저 사무치도록 서러울 뿐이었다. 속에서 다시금 그 이름이 터져 나오려고 했다. 준아.

 

 

“으, 으악, 대체 누구냐!”

 

 

그때 제 위에 있던 이가 악을 내질렀다. 눈을 질끈 감고 있던 호석이 제 눈을 떴다. 호석 위를 가리고 있던 이가 옆으로 치워졌다. 관리가 사라진 시야에는 제 호위무사가 있었다. 호석은 다시 눈을 감고 싶었다. 또, 결국 이런 꼴을 보였다. 늘 이런 꼴만 보이고 있었다.

 

호석을 가만히 바라보던 남준이 제 손에 들린 칼을 다시 위로 쳐들었다. 무엇을 베어낸 것인지 칼에는 이미 피가 묻어 있었다. 호석은 감으려던 눈을 떴다. 남준이 칼을 바닥으로 내리꽂자 다시 악, 하는 소리가 들렸다. 호석은 다급하게 몸을 일으켜 제 옆자리를 쳐다봤다. 관리의 양 허벅다리에서 시뻘건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너, 너.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칼잡이 새끼가. 내가, 내가 누군 줄 알고!”

“네놈이 청국에서 쫓겨나 온 것을 모를 줄 아느냐.”

 

 

남준의 말에 호석이 제 눈을 크게 떴다. 한 번도 그 누구에게도 저런 말투를 쓴 적이 없었다. 허벅다리에서 피를 줄줄 흘리고 있던 관리도 멍하니 남준을 쳐다보고 있었다. 남준은 그 어느 때보다 차갑게 식어있었다. 마치 칼처럼 느껴지는 그 시선을 관리에게 꽂아대고 있던 남준은 그의 뒷덜미를 잡아채 방 밖으로 끌어냈다.

 

나비의 방에서 벌어진 소란에 이미 하인 몇이 마당에 서 있었다. 그들은 남준이 데리고 나온 사람을 쳐다보며 경악했다. 어두운 시간이었지만 몇몇은 그가 자주 드나들던 그 관리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남준의 시선에 사람들이 주춤대며 건물 가까이 닿았다.

 

 

“이 자를 끌어내십시오. 어찌 들어온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멀리 쫓아내십시오. 조금 후에 제가 방에서 나오면 나비를 다른 곳에 옮겨 옷을 갈아입히고, 따뜻하게 두세요. 놀라셨을 겁니다.”

“예. 알겠습니다.”

“헌데 남준님, 이게 무슨 일입니까.”

“제가 나오면 그때 방을 치워주세요. 나비의 옷과 방에서 나온 이불가지들을 모조리 불태우세요.”

“예, 예?”

 

 

그저 제 할 말만 한 남준을 향해 하인들이 의문을 품었지만, 평소보다도 더 차갑고 냉담한 모습에 그저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남준은 집어 던지듯 관리를 마당에 내려놨고, 곧장 몸을 돌려 방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남준은 그 잠깐 사이에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열린 방문으로 보니 호석은 바닥에 엎드려 종이를 줍고 있었다. 대체 저분이 왜 저런 모습으로 있어야 하는지, 남준은 괴로웠다. 방으로 들어서는 기척을 느끼고 호석은 크게 몸을 들썩였다. 남준은 그런 제 주인을 보며 주먹을 세게 쥐었다.

 

 

“왜 가만히 계셨습니까.”

 

 

처음 듣는 화난 목소리였다. 언제나, 어떤 일에나 크게 동요하지 않던 남준이었다. 그래서 목소리도 늘 한결같았다. 그랬던 남준이 화를 내고 있었다. 그게 눈물겹게 반갑기도 했고, 또 서럽기도 했다. 그래서 호석은 입을 뗄 수 없었다.

 

 

“왜 저를! 부르지 않으신 겁니까.”

 

 

제 호위무사의 감정이 조금 더 격해지는 거 같았다. 호석은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 물음에 대꾸할 수도 없었고, 고개를 들어 화가 난 제 호위무사의 표정을 살필 수도 없었다. 또 이런 더러운 꼴을 보이고 말았다. 남아있던 그 어떤 자격마저 사라졌다고 느꼈다. 더는 남준에게 다가갈 수 없었다.

 

 

“대체 왜! 또다시, 제가 당신을 지키지 못하게 만든 것입니까!”

“…그, 그건.”

“대체 왜. 날 자격 없는 사람으로 만드는 겁니까. 대체 왜….”

 

 

남준의 말에 호석은 눈마저 질끈 감아버렸다. 일렁이던 눈을 감아버리자 눈 밖으로 물이 떨어졌다. 호석은 괜한 제 옷자락만 쥐었다. 이런 꼴을 또다시 보이고 말았으니 더 이상 호석에겐 자격이 없었다. 후회스러웠다. 지금의 자신이 이런 꼴일 줄 알았으면, 그나마 아름다웠던 시절에 남준에게 다가가 볼 것을. 나중 일이 어찌 될 줄 알고 단 한 걸음도 다가서지 않았던 것일까. 참 미련 맞게도 이런 상황에 후회나 하고 있었다.

 

감은 호석의 눈앞으로 지난날이 아름답게 그려지고 있었다. 지금보다 추잡하지 않았고, 지금보다 지저분하지 않았던 그때가 자꾸 보여서 더 서글퍼졌다. 그때보다도 더 남준과 함께이길 원하는데, 그럴 수가 없었다. 잊어가고 있었는데 그 관리 때문에 다시 때가 덕지덕지 묻은 몸뚱이를 기억해내고 말았다. 이런 꼴을 하고, 내가 너를 어떻게 잡아. 호석은 다시금 제 고개를 떨궜다. 남준을 향해 다가갈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걸음을 물릴 용기도 없었다. 남준을 아주 포기할 수 없었다.

 

 

“이깟 게 다 뭐라고.”

 

 

겨우 멎어가던 눈물이 남준의 말에 다시금 터지고 말았다. 그래, 이깟 게 다 뭐라고. 남준 같은 아이가 여기 있을까. 호석은 꼭 그렇게 들렸다. 이제 다 질려버렸다고. 이까짓 호위무사 일 따위가 다 뭐라고. 그런 말을 내뱉는 제 남준을 바라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더 눈을 질끈 감고 입술을 세게 물었다.

 

한참을 그러고 있으니 방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잔뜩 굳었던 몸의 긴장이 순식간에 풀렸다. 눈을 떠 방 안을 살피는데 눈앞이 휑했다. 방안이 텅 비어있었다. 그 빈자리를 보자마자 호석은 아무 벽에나 머리를 기대버렸다.

 

방 앞에 잠시 서 있던 남준이 깊은 숨을 내쉬며 걸음을 옮겼다. 그의 손에는 관리가 호석의 방에 멋대로 뿌려놓은 더러운 그림들이 들려 있었다. 남준이 마당에 내려서자 하인들이 남준의 눈치를 살피며 방 안으로 들어섰다. 잠시 뒤를 돌아본 남준은 다시금 제 손을 쳐다봤다.

 

 

“이게, 뭐라고.”

 

 

한숨을 쉬듯 남준이 말을 흘렸다. 여리기도 한참 여리고, 또 우둔하기는 아주 우둔한 제 주인은 지레 겁을 먹은 모양이었다. 그 관리가 뭐라고 지껄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얼추 짐작은 갔다. 이 하찮은 그림들로 어쭙잖은 협박이나 해댔겠지. 그러나 그 어쭙잖은 협박은 약하고 여린 제 주인에게는 퍽 대단한 으름장이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소리도 한 번 제대로 지르지 못하고 혼자 버텨내고 있었겠지. 쿵, 하고 시끄러운 소리가 나지 않았다면 남준은 멍청하게 문밖에 서 있었을지도 모른다. 또 만일, 하인이 이것저것 더 부탁하는 것을 뿌리치고 오지 않았더라면 제 주인이 어떤 일을 당하고 말았을지. 남준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남준이 관리를 찌른 곳은 정확한 급소가 아니었다. 언젠간 피도 멎을 것이고 상처도 아물 것이었다. 그러나 평생 불구로 살아야 할 터였다. 마음 같아선 그 더러운 성기를 잘라버리고 싶었는데, 제 주인이 보는 앞에서 그럴 수 없어 참고 말았다. 그래도 두 다리를 모두 불구로 만들었으니, 두 다리로 제 주인을 찾아올 일은 없었다. 만일 그럼에도, 기어서라도 다시 제 주인을 찾는다면 그때는 두 눈을 멀게 하고 두 팔을 못 쓰게 만드리라. 남준은 그를 한 번에 죽일 생각은 없었다. 평생을, 남은 일평생을 가장 끔찍하고 괴롭게 살도록 만들 거였다.

 

 

“감히, 나의 주인에게.”

 

 

남준은 제 손에 들린 그림을 살짝 들었다. 관리의 더러운 시선이 오롯이 들어가 있어 참으로 더러운 그림이었다. 이깟 게 뭐라고. 이까짓 게 두려워서. 남준은 다시금 손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곧장 부엌간으로 가 아궁이에 그 그림들을 처박아버렸다. 평생에 걸쳐 다신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할 생각이었다. 땔거리로 종이를 아궁이 안쪽 깊이 밀어 넣었다. 혹 누가 보기라도 할까 그림 전부가 새까만 재가 될 때까지 그 앞을 지키고 있었다. 할 수만 있다면 제 복잡한 속도 꺼내 아궁이에 넣고 태워 없애고 싶었다.

 

 

윤기가 남겨놓은 말이 온종일 머리에서 울렸다. 주인 옆을 따라다니면서도 이 자리가 제자리가 아닐까 두려웠다. 저를 죽지 않게 해준 이가 있다는 것은 참 감사한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이 자리를 떠날 수 있을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호석의 옆이 아닌 자신을 생각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런 일이 생기면 남준은 괴로웠다. 제대로 지키지도 못하면서 이 자리에 있는 거 같았다. 그래서 제 주인을 더 괴롭게 만드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 어떤 자격 없이도, 제 주인 곁에 있을 수 있다면. 따닥, 소리를 내며 타오르는 아궁이에 괜히 땔거리를 집어 던졌다. 그게 제 속도 아니면서 활활 타오르는 걸 가만 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