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래더] 트위터는 @Rather_0613 (舊 새벽의덕후)

[국민/랩홉] 길 위에서 전해지는

 

 

 

W.새벽의덕후

 

 

제5장. 외곬

 

 

23.

 

 

한참 엎드려 울던 정국은 제 몸을 일으켜 앉았다. 크지 않은 방의 구석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윤기는 별말 않고 방을 나섰지만, 수많은 말을 들은 것처럼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엿들은 대화를 떠올렸다. 과거의 일을 떠올렸다. 그날의 어린 마음만 아니었으면, 그날 괜한 객기를 부리지만 않았어도. 참 늦은 후회가 밀려왔다.

 

용서할 수가 없었다. 그날의 자신을 용서해줄 수가 없었다. 평민이 되어 잘 살 수도 있었는데. 가족들과 함께 행복하게 지냈을 수도 있었을 텐데. 그랬다면, 그랬으면 도련님과 몸종 같은 게 아니라, 조금은 더 나은 관계로 시작할 수 있지 않았을까. 쓸데없는 미련들이 자꾸 엉켰다. 어쨌든, 결국 일을 이렇게 만든 건 자신이었다.

 

멍한 눈을 돌려 윤기가 몇 번 집어 들었던 술병에 고정시켰다. 곧이어 술병 가까이 손을 가져갔다. 아직 내용물이 많이 남아있는 병을 멍한 표정으로 쥐었다. 술병을 잡은 팔을 가만히 쳐들었다. 그리고 곧 손에 힘을 풀었다. 정국의 앞으로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병이 깨졌다. 밖은 아직까지도 시끄러웠다. 그래서 이 방 안의 소란에 관심 가져주는 이는 없었다. 정국은 깨진 조각들 중 꽤 큼지막한 것을 집었다.

 

날카롭게 깨진 조각은 집어 들기만 했음에도 손을 베어냈다. 작게 피를 비추는 손에는 상관하지 않은 채 정국은 그 조각을 더 세게 쥐었다. 조금씩 피가 배어 나오던 손이 금세 피범벅이 되었다. 그 손으로 곧장 다른 팔을 그었다. 꽤 괜찮은 비단옷이 뜯겼다. 그 안의 흰 천도 뜯겼다. 팔에서도 피가 떨어졌다. 정국은 이를 꽉 물었다. 이에 힘을 준 만큼 조각을 쥔 손에도 힘을 주었다. 다시 팔을 향해 손을 움직였다. 제대로 아물지 못한 흉터 위로 새 상처들이 덧대어졌다. 팔에도, 손에도, 거침없이 상처를 냈다.

 

끔찍해. 가장 끔찍해. 처음 모든 일을 어그러뜨렸을 때와 달라진 게 하나도 없었다. 정국은 언제나 제멋대로였다. 제멋대로 제 마음을 판단했고, 지민을 얻기 위해 애를 썼다. 저 좋자고, 제 곁에 붙여두고 싶다고 몸종으로 만들어 달라 떼썼다. 지민은 영문도 모른 채 대단하신 양반집 외동아들의 몸종이 되어야 했다.

 

 

“지민아…. 으으, 지민아.”

 

 

지민을 좋아했다. 그 마음을 숨기고 싶지도 않았다. 그저 조금 더 분명하게 확신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래서 괜히 제 일을 잘하고 있는 하인을 건들기도 하고, 만져보기도 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좋아한다고. 아주 많이 좋아하고 있다고. 그 마음을 깨달은 다음엔 그 애와 더 오래오래 함께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 애는 원하지도 않았던 기생 분장까지 시켜가며 일대를 소란스럽게 만들었다. 함께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제멋대로 생각해서 했던 행동이었다.

 

참 많이 좋아했다. 그 마음을 숨기지도 않았다. 그래놓고 전쟁이 터지자 혼자만 숨어버렸다. 팔을 그어대며 지난날을 돌이켰다. 생각해보니 언제나 정국은 ‘나를 위한’ 일들만 했다. 단 한 번도 그 애를 위해본 적이 없었다. 나의 마음을 위해 지민을 들쑤셨고, 나의 오랜 행복을 위해 지민을 이용했고, 나의 안위를 위해 지민을 놓았다. 드디어 지민을 만나고서도, 정국은 또 제멋대로 굴었다. 멋대로 지민을 끌어안았고, 멋대로 다음을 기약하고 싶어 했다. 그 시절들을 보내고서도 결국 그대로였다.

 

 

“전정국! 대체 뭐하는 거야! 밖에 아무도 없습니까!”

“무슨 일이십니, 아니 저게 대체.”

“다른 말은 붙이지 말고 어서 의원을 불러주세요. 절대, 누구에게도 본 것을 말하시면 안 됩니다.”

“예, 예 알겠습니다. 도련님.”

 

 

과거부터 차근히 제 행동을 되짚어오던 정국은 하나의 장면이 떠오를 때마다 제 팔을 그었다. 그러던 손이 어디에 붙들렸다. 흐릿한 눈으로 제 앞에 선 인영을 바라봤다. 하도 울어 잘 맞지 않던 초점이 천천히 맞아 들어갔다.

 

 

“너 정말. 진짜 왜 이러는 거야!”

 

 

눈으로 들어온 건 태형이었다. 제 비단옷을 찢어 정국의 팔 위에 꾹 누르고 있었다. 정국은 그저 힘없이 태형을 바라봤다. 만일 자신이 없었더라면 지민은 태형과 정을 나눴을까. 제가 없었더라면 지민은 더 행복했을까. 아니, 어쩌면 자신이 아니었더라면 두 사람은 만남조차 하지 못했을 터였다. 두 사람은 고작 제 몸종과, 제집에 드나드는 하인이었으니까. 이 와중에도 그런 게 참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모습이 다시금 끔찍했다.

 

 

“지민이….”

“지민이는 자. 잠들었어. 도대체 이런 버릇은 어디서 배운 거야. 여기 더 낼 상처가 어디 있다고.”

“나한테, 왜 그래?”

 

 

정국의 물음에 태형이 인상을 찌푸렸다. 뭘 묻고자 하는지 몰랐다. 전부 양보했더랬다. 지민이 돌아온 것을 혼자만 알고 있었을 수도 있었고, 지민을 어르고 달래 저 멀리 도망칠 수도 있었는데도 태형은 양보했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지민이 그걸 바랐다.

 

너덜거리는 팔을 하고 아픈 티 하나 내지 않는 정국을 쳐다봤다. 벌건 눈가와 부은 눈을 대충만 봐도 얼마나 울었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았다. 그런데도 여전히 정국은 울고 있었다. 상처 위로 찢어 덮어둔 옷 조각이 피로 축축해졌다. 다시 옷을 찢으려고 한 팔로 정국의 팔을 잡아두고 제 옷을 쥐었을 때였다.

 

 

“내가, 죽는 게 더 낫겠지.”

“무슨 소리야.”

“내가 사라지길 바라겠지. 많은 사람들이. 내가 살아있는 게 여러 사람에게 고통이니까.”

“이렇게 팔을 찢어 놓으니까 헛소리나 하는 거 아니야. 닥쳐. 입을 확 찢어놓기 전에.”

 

 

태형은 인상을 쓴 채로 제 옷을 들었다. 이로 잡아 물고 옷을 다시 뜯어냈다. 짜증이 났다. 누군 평생을 살아도 이 정도인데. 평생을 지민과 얼싸안고 지냈어도 결국 나중의 기억이 될 뿐인데. 그 애를 온통 차지하고 있으면서 저렇게 나약한 소리를 하고 있었다. 팔도, 마음도 제 앞에 앉은 옛 도련님은 전부 너덜거렸다.

 

 

 

*

 

“어? 윤기 형? 윤기 형!”

 

 

뭘 바라고 이곳에 다시 왔는지 몰랐다. 옛집 행랑채에서 잠시 몸을 뉘이고 다시 이 기방을 찾았다. 혹시나 싶어 정국이 지내던 집을 기웃거렸지만, 정국은 보이지 않았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다시 이곳을 찾았다. 그러다 낯선 부름을 들었다. 자신을 형, 하고 부르는 소리가 낯설었다. 뒤를 돌아보니 꽤나 반가운 표정을 짓고 있는 남준이 보였다.

 

 

“아. 남준아.”

“여기 어떻게 있어. 한양에는 어떻게 온 거야. 스승님은? 형 몸은 괜찮아?”

“말도 많다. 원래 그랬냐?”

“아. 그랬나. 좀 놀라서. 한참 쳐다봤어. 정말 형인가 싶어서.”

 

 

보는 사람이 다 시원해지도록 입꼬리를 죽 당겨 웃는 얼굴이 오랜만이었다. 그간 이 기방을 드나들면서 한 번은 마주치겠다, 말을 섞겠다 싶었는데 그게 오늘인 거 같았다. 윤기는 완전히 남준을 향해 돌아섰다. 녀석이 하도 잘 자라서 눈높이가 썩 맞진 않았다. 윤기는 저도 입꼬리를 올리며 걸음을 몇 번 뒤로 물렸다. 남준은 그런 윤기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제 걸음을 앞으로 옮겼다. 고작 한 발을 뗐을 뿐인데 보폭이 커서 윤기의 뒷걸음질은 의미 없게 되었다.

 

 

“스승님은?”

“아직 변방에. 뜻을 품고 계신 분이잖아.”

“아. 살아 계시는구나.”

“…마지막 인사를 나눴을 때까진. 살아 계셨어.”

 

 

윤기의 말에 두 사람 사이가 조금 어색해졌다. 괜한 말을 붙인 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윤기를 남준이 붙잡았다. 윤기는 남준을 신기하게 바라봤다. 이 한양 땅에서 자신을 기억하고 반겨주는 사람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남준이 자신을 완전히 잊었을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이 정도로 반길 줄은 몰랐다. 아마 스승님으로 엮인 사이라 그런 걸 거라고, 그렇게 여겼다.

 

 

“너는 여기서 뭐 해?”

“아. 지키는 중이야. 그분을.”

“그분? 아, 예전에 널 살려주셨다던?”

“응.”

 

 

남준이 제 뒤를 살짝 가리키며 말했다. 저 안에 언제나 지켜드린다는 말을 버릇처럼 하던 ‘그분’이 계신 거 같았다. 윤기는 잠시 남준이 가리킨 그 너머를 바라봤다. 그리고 다시 남준을 바라봤다. 문득 재밌는 생각이 났다.

 

 

“네가 그렇게 지키는 이유가, 네 목숨을 살려줬기 때문이라고 했지?”

“응.”

 

 

남준의 표정과 말투는 단단했다. 표정이 편해 보이기도 했고, 좀 굳은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남준이 ‘그분’을 대할 때는 퍽 복잡한 모양이었다. 윤기는 고개를 숙이며 웃었다. 목숨을 살려줬기에, 지킨다고 했겠지.

 

 

“죽지 않게 만든 것과, 살려준 것은 뭐가 다를까.”

“응?”

“만일 널 죽지 않게 만들어 준 사람이 따로 있다면, 넌 어떨 거 같아?”

“그게 무슨 소리야.”

 

 

윤기는 여전히 웃음을 매달고 있었다. 그런데 그 웃음이 퍽 다정하다거나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남준은 문득 불쾌해졌다. 윤기는 언제나 다정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누군갈 이렇게 불쾌하게 만드는 사람은 아니었다. 윤기의 다음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그게 어떤 말이든지 남준을 불쾌하게 할 것 같았다. 윤기는 몇 번이고 터져 나오는 웃음을 손등으로 막으며 이곳저곳을 쳐다보다가 다시금 남준을 바라봤다.

 

 

“그런 사람이 있으면, 넌 지금 하는 일. 그러니까 저분을 지키는 일을 그만둘 거냐?”

“…대체 형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네. 자리를 너무 비웠다. 나 그만 가볼게.”

 

 

남준이 뻣뻣한 표정으로 돌아섰다. 그런 남준의 팔을 붙잡고 윤기가 돌려세웠다. 아까까진 웃고 있던 거 같은데 윤기의 표정이 싸늘했다. 무엇을 바라고, 무엇 때문에 자신에게 이런 얘기를 하는 건지 몰랐다.

 

 

“그 골목에 나도 있었어.”

“뭐?”

 

 

맥락 없이 대뜸 뱉어진 윤기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어 인상을 찌푸렸다. 어느 순간부터 윤기의 대화를 좀체 이해할 수 없었다. 뻑뻑하게 굳어있던 머리를 열심히 굴렸다. 겨우 윤기의 입에서 나온 ‘골목’과 ‘살려내다’라는 말을 연관 지을 수 있었다. 아무래도 남준이 한 번 죽었다고 생각한 그 날의 이야기를 하는 모양이었다.

 

 

“돈으로 사람을 매수해 널 패게 만들었던 사람이, 그때 내가 모시던 도련님이었어.”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네 숨이 넘어가기 직전에, 널 구했던 사람은 따로 있어. 아마 네가 모시는 분은 그 골목에서 모두가 빠져나가고 버려져 있던 널 살려준 거겠지.”

“뭐하자는 거야. 나한테 그런 말을 하는 이유가 뭔데?”

“그냥, 순서를 알려주는 거야.”

 

 

윤기는 제멋대로 말을 지껄였다. 궁금하다 물은 것에는 제대로 답해준 게 하나도 없으면서 묻지도 않은 말에 대해선 주절주절 말도 많았다. 이런 말이나 들을 줄 알았으면 알아보지 말 것을. 남준은 윤기를 붙잡아 세운 자신을 탓했다. 열심히 굴러가던 머리가 아파왔다.

 

멋대로 말을 남긴 윤기는 미련 없이 돌아섰다. 그런 윤기의 몸을 붙잡았다.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윤기에게 뭐라고 말하고 싶은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과거의 일을 다시 떠올리고, 윤기의 말과 그날의 장면을 이어붙이는 것만으로도 벅찬 상태였다. 그러나 이대로 윤기를 놓을 수가 없었다. 남준보다 여유로운 윤기는 자신을 잡은 팔을 뿌리치지 않고 가만히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다 지금 상황이 영 어려워 보이는 남준에게 도움이나 줘야 할 거 같았다고, 참 제 스승님다운 생각을 했고, 행동까지 해 보였다.

 

 

“너. 지금 이러고 있는 거, 그분이 널 살려줬기 때문이야? 단순히 그 이유 때문이라면, 지금 네가 그러고 있는 걸 다시 생각해봐야 하지 않겠어?”

“내가 왜. 왜 그래야 하는데. 대체.”

“뭐, 지금 너의 그분이 널 살려주긴 했겠지. 근데 남준아. 만약 그날 그분이 오기 전에 네가 죽어버렸다면, 이러고 있을 수나 있었겠어? 누군가를 지키고, 번듯하게 서서 사람답게 지낼 수야 있었겠냐고.”

 

 

윤기를 잡고 있던 팔을 떼어냈다. 다시금 그를 붙잡은 것을 후회했다. 그냥 미련 없이 보내버릴 것을, 이따위 말이나 덧붙여 듣자고 그를 붙잡고 있었다. 뭐라고 반박해야 하는데, 그럼에도 나의 주인은 그분이 맞다고. 저 안에 계신, 너무 아름다워 감히 바라볼 수도 없는 그분이 맞다고 얘기해야 하는데 좀처럼 말이 나오지 않았다. 답답한 제 입을 그저 깨물기나 했다. 윤기는 걸음을 옮기기 전에 남준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생각해보면, 지금 그분이 널 온전히 살려주신 것도 아니지. 따지고 보면 몸을 이리 건강히 만들어 준 것은 양의원님이고, 칼을 쓰고 움직이게 만들어 준 것은 스승님이신데. 그분은 대체 뭘 하셨니?”

“그만둬!”

 

 

그 외침에 윤기가 하던 말을 멈칫했다. 약간 당황한 기세는 보였지만 그렇다고 기가 죽은 모양새는 아니었다. 굳은 표정이던 윤기가 금세 미소를 보였다. 미소를 지은 채로 남준을 바라봤다. 처음과 달리 자신을 바라보던 얼굴에 반가움 같은 건 없었다. 싸늘하게 식은 눈으로 어서 가라며 눈치를 쏴댔다. 그 익숙함에 윤기는 한 번 더 웃었다.

 

 

“아, 이건 그냥 궁금할까 봐 덧붙이는 건데. 너 죽지 않게 해준 사람. 그 고마우신 분. 너도 아는 사람이야. 보니까 최근엔 좀 친해진 거 같던데. 박지민이라고, 알지?”

 

 

그 말까지 남기고 윤기는 자리를 떠났다. 남겨진 남준은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그따위 말들은 다 상관없었다. 조금 혼란스럽기야 하겠지만, 남준의 자리는 여기였다. 언제나 자신의 그분, 호석을 지킬 거였다. 마음을 다잡고자 그런 생각을 하는데 생각 틈으로 자꾸 윤기의 목소리가 비집고 들어왔다. 미리 알았더라면, 윤기의 말처럼 진작 알고 있었다면 그때도 이 자리에서 이런 생각을 했을까. 그때도 제 주인을, 주인으로 섬기고 있었을까.

 

 

 

“무사님, 무사님.”

 

 

멍한 귀로 무어라 하는 소리가 들렸다. 남준이 몇 번 눈을 깜빡였다. 뻑뻑하게 말라 있던 눈에 물기가 돌았다. 남준은 저를 부르는 소리의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필, 그 자리에 그 애가 있었다. 지금 제 머리를 이토록 복잡하게 만들고, 쓰지도 않던 부위를 한참이나 뱅글뱅글 돌아가게 만든 이. 하필 그날 그 골목에 있어서 이토록 사람을 괴롭게 만드는 이. 그래서 참으로 오랜만에 만난, 유일한 가족 같은 사람을 더 이상 반길 수 없게 만든 이. 지민이 멀지 않은 거리를 좁혀오고 있었다.

 

 

“무사님. 괜찮으십니까?”

“…괜찮습니다.”

“가만히 서 계시기에. 그런데 왜 여기 계십니까? 저번에 뵈었을 땐, 다른 곳에 계셨던 거 같은데.”

 

 

지민이 다정하게 건넨 말에 남준은 지레 흠칫했다. 저번에 뵈었다는 그 말이 언제를 말하는 것일까. 그 골목을 얘기하는 건 아닐까. 다시금 ‘무사님?’ 하며 말을 걸어오는 목소리에 남준이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가만히 지민을 바라봤다. 처음부터 이상하게 익숙했던 사람이었다. 엉망이 된 얼굴로 지은 구슬픈 표정에 마음이 철렁거렸다. 남준은 그때의 자신이 왜 그랬는지 얼핏 알 것 같았다.

 

닮았다. 제 주인과. 대체로 드러나는 얼굴이 마치 곧 울 것 같은 게 비슷했다. 소란스럽지 않게, 나직하게 말하는 목소리도 그랬다. 그러다 한 번씩 웃을 때면 가늘게 휘어지는 눈꼬리와 가슴을 무너뜨리는 얼굴이 그랬다. 지금처럼 남준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어느 것 하나 재촉하지 않는 모습까지도.

 

 

“제가 지키는 것은 자리가 아니라, 사람입니다.”

“아. 그러시구나.”

 

 

가볍게 올라가는 입과, 그렇게 웃을 때면 얇게 휘어지는 눈을 보았다. 남준은 제가 지민을 보고 있는 건지, 호석을 보고 있는 건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꼭 같은 서글픈 얼굴, 저를 죽지 않게 하고, 저를 살려낸 과거. 왜 그렇게나 닮아서 난데없이 혼란을 주는 것일까, 이 사람은.

 

 

“어떤 분이십니까? 무사님이 지키시는 분.”

 

 

그렇게 물어오는 말에 남준이 잠시 지민에게 두었던 시선을 뗐다. 등 뒤로는 저를 살려준 호석을 두고, 앞으로는 저를 죽지 않게 해준 지민을 두고 있었다. 아무렇게나 두던 시선을 다시 지민에게로 가져갔다. 지민은 여전히 재촉하지 않은 채 잠자코 있었다.

 

 

“절, 살려주신 분입니다.”

 

 

그 답을 듣고 지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자신도 누군가 떠올랐다. 끔찍한 곳에서 저를 구해줬던 이. 험한 길에 함께 서 있었고, 기나긴 길을 함께 걸어와 준 이. 그리고 다시금 저를 지독한 현실로 밀어 넣은 이. 달갑지 않은 얼굴이 떠오르는 바람에 괜히 씁쓸함을 느껴야 했다. 더는 붙일 말이 없었다. 남준도 무어라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때 등 뒤에서 기척이 났다. 두 사람이 동시에 기척이 난 곳을 바라봤다.

 

가빈의 일을 처리하고 나오는 길이었다. 근래의 호석은 여러모로 울적해 있었다. 평생 사랑할 것 같았던 예악을 놓은 지 오래되었다. 전쟁이 터지고, 관리에게 더러운 꼴을 당하면서 호석은 춤을 놓아버렸다. 제 모든 것이 아름답지 않았다. 이런 몸뚱이를 하고, 춤을 더럽힐 수 없었다.

 

더럽힐 수 없는 것은 더 있었다. 곁에 달라붙어 있는 제 호위무사가 그랬다. 지금 웬 작은 녀석과 나란히 서 있는 저 호위무사. 저 사람은 언제부터 이곳에 있었는지, 그리고 대체 언제부터 남준과 저리도 가까웠는지 의문이 쌓였다.

 

가빈의 나비라는 자리에 앉았어도 호석이 할 수 있는 건 별로 없었다. 그래서 무언가 달라진 남준을 어떻게 할 수 없었다. 당장 내 곁으로 오라고 소리치고 화낼 수 없었다. 그저 가까이 붙어 서 있는 두 사람을 바라보기만 했다. 오래 보진 못하고 눈을 금방 돌려버렸다. 어쩐지 남준이 조금 달라진 시기와, 저 이를 본 시기가 비슷한 거 같았다. 호석은 고개를 저었다. 괜한 생각이었고, 유치한 생각이었다.

 

 

“이만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세요. 기회가 닿는다면 또 뵈어요.”

 

 

지민은 저렇게 나중을 기약했다. 남준은 그저 고개만 끄덕인 채 제 주인에게로 향했다. 주인은 호위무사를 보지도 않은 채 걸었다. 지민은 꼿꼿하게 걸어가는 사람을 바라봤다. 아름다운 이였다. 그다지 화려하지 않은 옷을 입고서도 드러난 태가 귀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지민은 제 꼴을 돌아봤다. 저 이와 비교도 할 수 없는 꼴이었다.

 

더 이상 사람은 보이지 않는 마당을 쳐다보다가 몸을 돌렸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는 걸음을 다시 뗐다. 앞뒤로 나란히 선 두 사람을 보면서 옛일이 떠올랐다. 귀한 도련님 뒤에서 종종걸음으로 따라다니던 때가 떠올랐다. 그 도련님을 다시 보고 싶었다. 보고 왔으면서, 또 보고 싶었다. 서러움에 눈물이 찼지만 눈을 부릅뜨고 참아냈다. 그러면 안 되는 거였다.

 

스스로에게 몰아붙이듯 하는, 그러면 안 된다는 말은 너무도 잔인했다. 그러지 말라고 관둘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셨고, 자신은 평민에서 천민이 되어버렸다. 다정할 수 있던 세월이 한순간에 망가진 게 도련님 때문이라고 했다. 당연히 그 사실은 참 미웠다. 대여섯 살 되던 꼬마의 어린 마음이 한 집안을 쉽게 망가뜨릴 수 있다는 게 허탈하기도 했다. 그런데도 지민은 제 도련님을 미워하지 못하고 있었다.

 

부모와 다정할 수 있던 세월은 망가졌지만, 지민의 삶은 퍽 다정한 편이었다. 도련님 덕에 많이 웃었고, 천민 주제에 잘 챙겨 먹었다. 제 손을 놓아버린 도련님 덕에 온갖 더러운 꼴을 다 보고 말았지만, 그 서러운 나날을 버텨내게 해준 건 도련님과의 추억이었다.

 

 

“도련님…. 도련님.”

 

 

결국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혼자 있으면 이게 문제였다. 그래서 언제나 지나가던 하인에게 말을 붙이고, 태형이 있으면 수다를 떨곤 했다. 그러나 영영 도련님 생각을 하지 않을 순 없었다. 손을 얼굴 위로 덮었다. 텅 빈 마당에서 지민은 한동안 웅크리고 있었다. 제 쓸쓸한 등을 도련님이 다시금 안아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서럽게 울며 해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