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래더] 트위터는 @Rather_0613 (舊 새벽의덕후)

[국민/랩홉] 길 위에서 전해지는

 

 

W.새벽의덕후

 

 


제5장. 외곬



26.

 

 

문짝은 달려있지 않은 문턱을 넘었다. 들어선 곳에서 나는 먼지 냄새와 어딘가 시큼한 냄새가 이젠 익숙했다. 늘 이곳에선 이런 냄새가 났던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정국은 익숙한 마당을 거닐었다. 제 옛집은 정국이 자주 찾는 장소였다. 그저 무엇이 그리워질 때마다 이곳을 찾았다. 주로, 그리운 것은 지민이었다.

 

 

“저게 저렇게 작았나.”

 

 

이 집은 한양 땅만큼이나 구석구석 지민과의 추억이 닿아 있었다. 정국은 욕간에 있는, 썩어가는 함지박을 바라봤다. 아주 어릴 땐 지민과 단 한시도 떨어져 있기 싫어서 줄곧 지민과 함께 목욕을 하곤 했다. 당시엔 제 몸종이던 녀석이 욕탕 안에서도 제 시중을 들겠다며 몸 이곳저곳을 박박 닦아주곤 했다. 그러면 어린 정국도 신이 나서 제 시중을 드는 몸종의 몸뚱이를 닦아주었다. 정국이 그럴 때마다 난처해하며 그러지 말라는 지민을 보면서도 그저 철없이 좋아했을 뿐이었다.

 

지민과 함께 씻는다는 것 자체가 정국을 늘 들뜨게 했었다. 저 작은 함지박 안에 딱 달라붙어서 참 오래도록 웃는 소리를 냈다. 그땐 지민과 씻는 게 좋아서, 딱 달라붙어 있는 게 좋아서 목욕 시간이 길었다. 정국이 씻는 시간이 짧아진 건, 지민과 함께 씻는 게 부끄러워졌을 때부터였다. 자꾸 지민만 보면 가슴께가 벌렁거리고, 숨이 어색하게 쉬어졌을 그 무렵부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함께 씻는 걸 피했다. 그땐 함지박에 두 사람이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몸집이 자라기도 했었지만, 그보다도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서로의 몸을 서로가 가장 낯설어했다.

 

가느다랗게 뻗은 목선, 그 밑으로 둥글게 자리한 어깨선, 그 어깨선을 따라 시선을 돌리다 보면 헐겁게 메여진 옷깃 사이로 드러난 길쭉한 뼈가 침을 꼴깍 넘어가게 만들었다. 그때부터 정국은 지민과 함께 씻는 걸 피했다. 대신, 목욕 시간을 반절 이상 줄였다. 지민과 함께 씻지 않으면서 오래 씻을 이유가 사라졌던 탓이다.

 

 

“이게 여기 있었네.”

 

 

다 헐어 이젠 동네의 흉물이 되어버린 집이었지만, 정국에게만큼은 엄청난 보물창고였다. 진귀하고 값나갈 만한 것들은 청군들이, 정국이 쓸어가고 없었지만 그럼에도 보물은 자꾸 나왔다. 집의 시체들을 다 치워내고 나서 정국이 이 집을 종종 찾아 한 일은 손이 닿는 곳부터 집을 정리하는 거였다. 그렇게 이곳저곳 정리하다 보면 이 구석, 저 구석에서 재미난 것들이 많이 나왔다. 가끔 지민이 숨겨둔 것으로 보이는 물건들을 찾아낼 때면 엄청난 반가움에 그것을 붙들고 서서 한참이나 울었다.

 

정국은 몸을 숙여 부엌 구석에 박혀있던 것을 집어 들었다. 천을 두른 손 위로 헝겊뭉텅이가 들어왔다. 제 손에 들린, 먼지 쌓인 것을 보는 정국의 입가엔 오랜만에 다정한 미소가 돌았다.

 

 

“되게 작은 거였구나, 이게.”

 

 

예전엔 한 손에도 채 담기지 않던 게 이젠 손바닥 위에 덜렁 들렸다. 이제는 이름도 잘 기억이 나지 않는, 사련인가 하는 꽤 나이 먹은 계집종이 만들어준 거라며 지민이 들고 왔던 거였다. 옷을 만들고 기우다가 남은 헝겊들을 둥그렇게 말아서 꿰매놓은 거였는데 이걸 집어던지며 노는 건 퍽 재밌는 일이었다. 다만 어느 날인가, 정국이 멋대로 힘껏 던져 멀리 날아간 헝겊더미를 주우러 가다가 지민이 넘어진 뒤로는 더 이상 이걸 가지고 놀지 않았다. 그때의 정국은 지민이 다치는 게 그 무엇보다 싫었다.

 

헝겊더미를 내려다보며 다정함이 묻어있던 정국의 얼굴에 쓸쓸함이 서렸다. 그 애가 다치는 걸 그렇게 싫어해 놓고, 그래놓고 지민을 가장 아프게 한 사람이 본인이었다. 저 때문에 지민이 아주 많이 다쳤다. 이렇게 평생을 후회할 줄 모르고, 그 땅 너머로 숨어버린 제가 너무 미웠다. 차라리 죽게 되더라도 지민의 손을 붙들고 있을 것을. 나란히 죽게 되든, 지민만 살게 되든 곁에 꼭 붙어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정국은 제 손을 그러쥐었다. 손에서 먼지가 풀풀 새어나왔다.

 

 

“다른 것도 어디 있으려나.”

 

 

괜히 괜찮은 척해가며 익숙한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지민은 이 헝겊더미를 좋아했다. 둥글둥글해서 좋다고 하기도 했고, 만질 때 느껴지는 보드라움이 좋다고 하기도 했다. 이젠 너무 오래되고 다 망가져서 거칠어진 헝겊더미라 그때의 지민이 느꼈던 감촉을 느낄 순 없었다. 아무튼, 지민은 이 헝겊더미를 늘 품에 지고 다녔다. 정국이 함께 놀아주지 않아도 그저 좋다며 지니고 다녔다. 그 모습을 본 계집종이 헝겊더미를 이어 붙인 것을 선물해줬었다. 둥그렇게 말아 둔 헝겊더미 두 개를 붙여놓은 것 한 쌍을 양손에 들고 온 지민은 아주 예쁘게 웃고 있었다.

 

‘이건 저고, 이건 도련님이어요!’

 

그렇게 말하며 예쁘게도 웃었다. 그날의 웃음이 떠올라서 정국은 잠깐 시큰해진 코를 매만졌다. 어쨌든 지민이 그렇게도 좋아했던 헝겊더미 한 쌍은 눌 지민의 방 머리맡에 나란히 놓여있었다.

 

 

“아, 여길 아직 안 치웠구나.”

 

 

정국이 먼지 쌓인 방 안으로 들어섰다. 지민의 방은 그간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감히 이 안으로 들어와도 되나 싶어서 수많은 시간을 방문 앞에서 주저하기만 했다. 치워야지, 지민이 돌아오기 전에는 꼭 치워둬야지 해놓고 지민이 변방에서 살아 돌아와 한양땅을 밟을 때까지 발길을 두지도 못했다. 들어선 방은 제 부모의 방에 들었을 때보다도 더 어지러웠다. 정국은 그 먼지더미 안으로 조금 더 들어섰다.

 

우선 창부터 열었다. 풀풀 날리는 먼지가 속을 매캐하게 만들었다. 열린 창 너머로 제 사랑채가 보였다. 정국의 사랑채에도 이쪽을 바라보는 창이 있었다. 더운 여름엔 당연히 열어두고 지냈고 그 창 너머로 늘 지민의 방을 쳐다봤다. 키가 작을 땐 작은 상을 밟고 올라서고 있었고, 좀 더 자랐을 땐 깨금발을 들고 너머를 쳐다봤고, 그보다도 자랐을 때는 창에 팔을 올려두고 턱을 괸 채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지민은 간간히 창 너머로 고개를 빼 들고 정국이 보고 있나를 확인했다. 그러다 눈이라도 마주친 거 같으면 후다닥 창 아래로 숨었다. 그 빼꼼거리는 시선이 좋아서 정국은 늘 창 곁에 머물렀다.

 

시린 겨울에도 답답하다는 핑계로 때를 가리지 않고 창을 열어댔다. ‘지민아’ 하고 나직하게 속삭이는 소리에 굳게 닫혀있던 저쪽의 창도 벌컥 열렸다. 뜨끈한 아랫목에 있다가 갑자기 찬바람을 쐰 지민의 양 볼엔 붉은빛이 가득했다. 양 볼에 곱디고운 매화송이를 매달아 놓고 ‘예, 도련님’하며 수줍게 웃는 게 너무 보기 좋고 예뻐서, 정국은 참지 못하고 버선발이나 맨발로 지민의 방을 넘어들었다. 그런 일은 꽤 잦았다.

 

감상이 길었다. 정국은 괜히 갑갑한 목을 몇 번 긁은 뒤에 몸을 틀어 방안을 살폈다. 먼저 죄 좀이 먹어 더는 쓸 수 없는 이불을 밖에다 던져버렸다. 버릴 것들은 방 밖 마당에 던져둔 뒤에 함께 태워버렸다. 이불을 던져두고 옷가지들도 하나하나 주워 밖으로 던지다가 그 헝겊더미를 발견했다. 전처럼 온전하진 못하고 조금은 뜯겨져나간 꼴이 정말 자신과 지민의 모습 같아 약간 서글펐다. 두 손에 헝겊더미 한 쌍을 모아 쥐고 한참 바라보던 정국은 낮은 서랍장 위에 그것들을 나란히 세워뒀다. 세워두기 전에 잔뜩 먼지 쌓인 서랍장 위를 꼼꼼하게 닦아내는 것은 잊지 않았다. 전처럼 멀쩡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나란히 붙여 세워두니 알아서 잘 기대있긴 했다.

 

그럭저럭 방 정리를 마치고 밖으로 나왔다. 마당에 쌓아둔 좀먹은 이불과 옷가지, 그밖에 다른 것들을 잘 모아 안아 들고 행랑채 쪽으로 향했다. 이런 것들을 태우고 다 타버린 쓰레기들을 치워둘 만한 곳이 행랑채에 있었다. 곧 행랑채에 닿은 정국이 제 품에 가득 담긴 것들을 털어내고 제 몸도 털어냈다. 날리는 먼지가 눈앞에 선했다.

 

 

“설마 했더니. 맞네.”

 

 

그것들을 태울 준비를 하는데 갑자기 뒤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정국은 빠르게 몸을 돌려 기척이 난 곳을 쳐다봤다. 그곳엔 딱히 달갑지 않은 사람이 있었다. 분명히 이 집에 지내던 사람인데, 이 집에 있는 모습이 낯선 사람이었다. 안 본 사이 윤기가 많이 자라서 그런 것일까, 아니면 윤기가 이 집에 없던 세월이 길어서일까. 정국은 그런 생각을 하며 몸을 완전히 돌려세웠다. 그런 정국을 바라보며 윤기는 여유롭게 웃고 있었다.

 

 

“정말 의외네. 도련님이 이런 일도 다 해?”

“왜 여기 있어.”

“질문 한 번 되게 웃기네. 하긴, 이 집에서 쫓겨난 노비 주제에 다시 기어들어 온 꼴이 좀 이상하긴 한가.”

“형.”

“그 말도 엄청 웃기다. 이봐, 도련님. 이젠 날 그렇게 부른다고 해서, 내가 어딘가로 끌려가 멍석말이를 당하고 온몸이 부서져라 얻어맞는 일은 없어. 물론 쫓겨난 노비새끼가 다시 돌아와도 뭐라 하거나 관심조차 주는 사람도 없지만.”

 

 

윤기는 내내 웃고 있었지만 풍기는 분위기는 더없이 차가웠다. 그러면서 꼬박꼬박 도련님이니, 노비니 하는 소리를 붙여 말했다. 그런 말들은 유독 더 힘주어 말하는 거 같기도 했다. 정국은 그런 게 너무 불쾌했다. 말투는 익숙한데 그 안에 섞여 있는 날 선 말투가 영 껄끄러웠다.

 

 

“도련님도 참. 왜 이런 일을 해. 돌아온 이 집 종이 둘이나 되는데. 뭐하러 도련님이 이런 궂은일을 해. 노비들 찾아서 시키면 되는 걸 직접 행랑채에 발을 들이고.”

“거기까지 해. 형이랑 싸우고 싶지 않아.”

“싸워? 도련님이랑 내가? 우습네. 싸우는 게 아니라 노비인 내가 주인인 도련님께 일방적으로 혼이 나는 거겠지.”

“윤기 형!”

 

 

윤기가 말마다 도련님 소리를 했다면, 정국은 형이란 말을 꼭 붙였다. 그 때문에 대화를 할 때마다 두 사람의 기분은 불쾌감으로 물들어갔다. 윤기는 제 앞에 선 도련님을 훑었다. 손에 둘둘 감긴 흰 천이 썩 거슬리긴 했지만, 그래도 멀쩡한 꼴이었다. 그 멀쩡한 꼴이 눈 시리게 꼴사나웠다.

 

‘사랑이겠지요.’

 

얼마 전 들었던 어린 주모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귀에 울렸다. 그 소리는 여름밤 모기보다도 쨍해서 귀를 뜯어내고 싶을 지경이었다. 제 목숨이 가장 소중했던 이 집 도련님은 그 녀석 때문에 제 몸에 생채기를 냈고, 죽겠다고 칼을 빼 들었다. 그 순간의 정국의 표정은 미련도 두려움도 없었다. 정말 죽음을 준비한 사람처럼, 의식이라도 치르는 듯 행동 하나하나에 주저함이 없었다. 그걸 보는 지민의 얼굴에도 통쾌함 같은 건 없었다. 제 인생을 온통 뒤흔들어 망가뜨려 놓은 사람이 죽겠다는데 오히려 앞에서 빼 든 칼날이 제게 향한 것처럼 두려워했다. 사랑. 그런 게 어딨어. 저깟 놈들이 사랑 같은 걸 어찌 알아. 윤기는 잠시 제 입술을 씹었다. 자꾸 정국의 손에 감긴 천이 들어왔다. 겨우 그 손에서 시선을 뗐다. 윤기는 자신을 올곧게 바라보고 있는 정국의 눈을 마주 봤다.

 

 

“여러모로 대단하신 도련님이야. 살아있는 동안 한 번도 놓쳐본 적이 없네. 부, 명예, 권력 같은 거. 어릴 땐 대단한 아버지가 품어주고 있었고, 전쟁 땐 든든한 땅구멍이 지켜줬고, 전쟁이 끝나고 나니까 이젠 부호의 가문에서 거둬두기까지.”

“함부로 말하지 마.”

“그것들을 쥐느라 놓은 거야? 박지민?”

“그 애 이름 꺼내지 마!”

 

 

정국의 숨이 꽤 거칠어지고 눈빛도 사나워진다 싶더니 결국 거칠게 윤기 쪽으로 걸어와 냅다 멱살을 잡았다. 갑작스레 조인 숨통에 윤기가 약간 기침했지만 이내 여유를 찾았다. 제 목덜미를 쥐어놓고도 바들바들 떠는 정국을 보며 비웃음을 날렸다. 애잔해라. 이 도련님은 그저 박지민이라면 이렇게 감정도 못 숨기고, 세상에서 가장 나약해지는구나. 윤기는 이 상황이 즐거웠다. 제 혓바닥에 옛 도련님을 올려두고 멋대로 굴리면 그 도련님은 장단 맞춰 반응을 보여줬다. 세상에 제대로 져본 적 없는 도련님을 이렇게나 무너뜨릴 수 있다는 게 내장에까지 소름이 돋을 정도로 흥미로웠다. 윤기는 조금 더 제 혓바닥을 굴리기로 했다.

 

 

“박지민은 돈도, 명예도, 권력도 그 무엇도 되어주지 못하니까 우리 도련님이 쉽게 놓아버린 건가. 어때, 도련님. 그때를 잘 떠올려 봐. 응? 그런 거 같아?”

“민윤기!”

“허, 이제야 좀 익숙한 말투를 쓰네. 이봐, 도련님. 난 도련님의 그런 표정이 싫어. 위선적이거든. 박지민을 엄청 위하는 척하는데 사실은 도련님이 더 잘 알잖아. 스스로가 어떤 사람인지.”

“내가 닥치라고 했지!”

 

 

끝내 윤기의 도발을 참지 못한 정국이 주먹을 들었다. 단단히 쥔 주먹이 그대로 윤기의 얼굴에 꽂혔다. 그 험악한 손길에 곧장 바닥에 나뒹군 윤기가 얼얼한 제 얼굴을 매만지며 웃었다. 꽤 매운 손이었다. 그간 맷집하나는 단단히 쌓은 윤기도 잠깐 아찔함을 느낄 정도였다. 어디 험한 일 한 번 해본 적 없는 티가 역력한 고운 손이 저런 사나움도 가지고 있다는 게 재밌었다. 바닥에 주저앉아 낄낄대던 윤기는 비틀거리는 몸을 일으켜 세웠다. 옷에 묻은 흙먼지를 대충 털어내고 다시금 제 얼굴을 만졌다. 알싸한 느낌이 쉽게 빠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럼에도 윤기는 웃었다.

 

 

“도련님. 난 이런 게 싫어. 멀끔한 옷에, 여전히 부와 권력을 갖고 있는 도련님이 참 싫어. 너는 이렇게도 멀쩡한데 내 꼴은 이게 뭐야. 도련님이 한양 밖으로 단 한 번도 나가지 않았던 동안, 나는 팔도를 떠돌았어. 도련님이 방에 박혀서 스스로 팔이나 그어댈 동안, 나는 청나라 놈들과 약탈꾼들에게 얻어맞으며 그놈들을 잘라내고 다녔어. 도련님이 두툼한 금침을 두르고 몸을 뉘일 동안, 나는 산에서 낙엽을 덮고 들에서 풀더미나 덮고 지냈다고.”

 

 

윤기는 웃는 얼굴을 풀지 않았지만 설움을 토하듯 말을 쏟아낸 얼굴은 어딘가 서글펐다. 정국을 비웃는 듯했던 그 웃음이 스스로를 향한 것처럼 느껴졌다. 정국은 그런 윤기의 말을 들으며 여전히 거칠게 쉬어지는 숨을 내쉬고 있었다. 오히려 전보다도 숨이 더 거칠었다. 멋대로 지껄이는 윤기의 말에 제대로 대꾸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화가 났다. 윤기는 그런 정국을 흥미롭게 지켜봤다. 얼굴을 몇 번 더 매만진 후에 손을 얼굴에서 떼어냈다. 그러곤 정국 가까이로 걸어가 근처 벽에 삐딱하게 몸을 세웠다.

 

 

“그렇게나 편하고 안락하게 지내던 도련님은 꼭, 박지민만 나오면 망가지더라. 흉하게.”

“하고 싶은 말이 뭐야, 대체.”

“생각해 봐. 내 꼴은 엉망인데 도련님 꼴은 눈이 부실 정도로 멀쩡해. 안 그래도 가진 것 하나 없는 내가, 그 와중에 전쟁 때문에 없는 것마저 잃어버린 내가 도련님을 보면 얼마나 억울하겠어.”

“그래서 바라는 게 뭔데. 돈이라도 줘? 그까짓 거, 바라는 대로 달라면 줘버릴 테니까 제발 작작해.”

“돈. 그런 게 내가 필요할까. 도련님. 아직 이해가 잘 안 되나 본데. 난 그런 태도가 싫다는 거야. 여전히 당신은 돈으로 뭐든 할 수 있고, 난 그 돈이면 어디로든 치워져야 하고. 이런 현실이 더러워서 못 견디겠다고.”

“그럼 나더러 뭘 어쩌라는 건데!”

“도련님은 그냥 그대로 있기만 하면 돼. 이제부터 내가 원하는 대로 도련님을 망가뜨릴 생각이거든. 괴롭게 하고, 나보다도 더 망가진 꼴을 하도록.”

“뭐?”

“도련님을 잔뜩 괴롭힐 생각을 하니까 신이 나서 그랬나. 어떻게 괴롭힐지는 단번에 떠오르더라고. 아주 좋은 소재 하나가.”

 

 

제 앞에 삐딱하게 서서, 선 자세만큼이나 삐딱한 웃음일 입에 띄우는 윤기를 보자마자 정국은 온몸이 차가워지는 걸 느꼈다. 제 앞의 윤기는 제정신이 아닌 모습이었다. 그런 그를 상대하는 자신 역시 제정신을 잃어가는 거 같았다. 윤기의 불안정함이, 자꾸 불안함을 만들어냈다. 정국은 자신을 바라보는 그 뒤틀린 시선을 피하고만 싶었다. 그러나 피할 새도 없이 윤기가 말을 꺼냈다. 그 말에 이번엔 온몸의 피가 빠져나가는 것만 같았다.

 

 

“박지민. 걔를 없애볼까 해.”

“뭐? 민윤기!”

“걔는 뭐, 좀 억울할 수도 있겠네. 근데 어쩌겠어. 업보라고 생각하든가 해야지. 따지고 보면 다 걔 때문이잖아. 내가 이 집에서 쫓겨나 그 개고생하게 된 거. 도련님도 너무 억울해하지는 말고. 본인 업보 때문에 일어나는 일인 거고, 본인의 부모 업보이기도 하고. 그쪽들이 부와 권력을 누리며 산 시간 동안 쌓은 업보, 이렇게 갚는다고 생각해.”

 

 

다시금 양 입꼬리를 당겨 웃는 윤기를 보며 정국이 제 주먹을 쥐었다. 제 업보라면, 제가 지는 게 맞다. 그러니 자신이 망하길 바란다면, 칼로 자신을 찢어내면 그만이다. 헌데 왜 죄 없는 지민에게 그 칼끝을 돌리려 하는지. 지민에게 죄가 있다면 정국을 만난 것뿐이다. 지민의 죄도 곧 자신의 죄인데 왜 지민이 당해야하는 것인지 정국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다시금 자신으로 인해 험한 일을 당하게 할 순 없었다. 정국은 돌아서려는 윤기를 붙잡았다. 그리고 그대로 그 앞에 무릎 꿇었다.

 

 

“나한테 해. 형이 풀고 싶은 거, 다 나한테 해. 그 애는, 지민이는 죄가 없어. 윤기 형.”

“…알아.”

 

 

건조한 윤기의 말에 바닥에 꽂힐 듯 숙여져 있던 정국의 얼굴이 들렸다. 윤기의 얼굴엔 이제 미소마저 없었다. 더없이 서늘한 눈이 정국에게 닿았다.

 

 

“멍청하네. 그래서 그 애를 죽이겠다는 거야. 언제는 걔가 죄가 있어서 청군에게 끌려갔냐?”

“도대체….”

“도련님. 난 도련님이 내 눈앞에서 죽는 걸 바라는 게 아니야. 더없이 처참하게 망가지는 꼴을 보고 싶은 거지. 어? 알아들어?”

 

 

표정만큼이나 서늘한 말투에 정국이 제 이를 꽉 물었다. 윤기의 표정과 말투로 보아하니 정말 일을 치를 생각인 거 같았다. 윤기의 팔을 잡고 있던 정국의 손이 힘없이 떨어졌다. 그러나 곧 그 손은 윤기의 바짓단을 붙잡았다. 행여 윤기를 놓고 있으면 언제 뛰쳐나가 지민을 해칠 것만 같았다. 윤기는 그 손을 잠시 내려다봤다. 그리고는 한쪽 입꼬리만 씰룩이며 웃었다. 제 이를 바득 갈아대던 정국이 바닥을 바라보던 시선을 들어 올렸다. 윤기를 올려다본 그 눈빛엔 어떤 결의 같은 게 차 있었다.

 

 

“그렇게 안 둬.”

 

 

꽤 단호하게 뱉는 말을 들으면서도 윤기는 꿈쩍하지 않았다. 위협조차 되지 않았다. 고작 이 집만이 제 세상인 줄 알고 자라서, 난리 통에는 땅속에만 숨어 산 녀석이 해봐야 뭘 할 줄 알겠냐는 조롱이 마음을 비집고 새어나왔다. 그래서 저 눈빛이 우스웠다.

 

 

“그렇게 안 둔다고? 네가? 도련님. 도련님이 박지민을 지킬 수 있을 거 같아? 아니. 결국 그때와 같은 꼴이 날 거야. 지키기는커녕 놓치기나 하겠지. 그냥 도련님은 돈이나 명예 같은 것들, 그것들이나 잘 붙들고 있어.”

“제발 좀! 나한테 해. 다 나한테 하라고! 우리 부모님과 나 원망하는 거잖아. 그럼 나한테 해, 제발. 그 애 괴롭히지 말라고!”

“그 애를 가장 괴롭히는 게, 누구라고 생각하는데?”

 

 

어딘가를 깊숙이 파고든 윤기의 질문에 정국은 제 온몸 가득 힘을 줬다. 굳게 다문 입 안에선 채 터지지 못한 비명이 끙, 하는 소리를 만들어 작게 새어나왔다. 도저히 그 무엇으로도 받아칠 수가 없었다. 윤기는 그런 정국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붙들린 제 다리를 거칠게 털었다. 바짓단에서 정국의 손을 떼어내고는 그 자리를 몇 번 손으로 털었다. 두어 걸음 정도를 뒤로 물린 윤기가 팔짱을 끼고 서서 정국 쪽으로 몸을 좀 숙였다.

 

 

“도련님. 도련님이 그러고 계신 모습이 너-무 짠해서, 쇤네가 감히 도움이나 드리려고 합니다.”

“제발, 제발. 어? 제발 윤기 형….”

“오래 안 걸리게 할게, 도련님. 일을 치를 때는 주저하지 말라고 배웠거든. 음, 장소는 의미 있는 곳이 좋을 거 같아. 어딘지는 운에 맡겨. 알아서 잘 찾아.”

 

 

말을 마친 윤기는 몸을 들어 올려 자리를 떠났다. 정국은 제 손에 닿은 바닥을 움켜쥐었다. 손바닥에 알알이 흙과 모래가 들어왔다. 정국은 울고 있었다. 다시금 저 때문에 지민을 다치게 할 수 없었다. 운에 맡기라는 윤기의 조롱이 귀에서 울렸다. 다시는, 다시는 지민을 괴롭게 하지 않을 것이라는 다짐을 굳게 하면서 정국이 제 몸을 일으켰다.

 

 

“뭐, 뭐야.”

 

 

정국이 몸을 일으키기가 무섭게 사방에서 웬 사람들이 다가왔다. 덩치도 하나같이 건장했고, 몇 사람은 무기까지 들고 있었다. 칼 같은 예리한 것은 없었지만 얼핏 잘못 맞았다간 곧장 죽을 수도 있을 거 같았다. 정국은 제 주먹을 쥐었다. 누가 만든 상황인지는 뻔했다. 매섭게 눈을 치켜든 정국에게로 누군가 달려들었다.

 

 

행랑채를 빠져나가던 윤기가 어수선해진 안쪽의 소리를 듣고는 걸음을 멈춰 세웠다. 잠시 그 소리를 듣다가 웃으며 다시 걸었다. 미리 준비해두길 잘했다고 생각하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제가 계획한 거사를 치르기 위해선 이 일이 꼭 필요했다. 죽일 필요는 없으니 거동이나마 좀 불편하게 해두라고 일러뒀다. 돈이라면 뭐든 하는 자들이었다. 변방에서부터 챙겨둔 재산을 모조리 여기다 썼다. 재산을 탕진한 데에 후회 같은 건 전혀 없었다. 그저 모든 것을 완벽하게 망가뜨릴 계획이 잘 치러지기를 고대하고만 있었다. 윤기는 지민에게로 향했다. 시기적절하게 날은 어둑해지고 있었다.

 

 

 

_

“또, 또 그쪽입니까.”

 

 

거센소리를 내며 윤기가 앉아있던 방문이 열렸다. 그리고 열린 문 앞에는 지민이 서 있었다. 퍽 화가 난 듯한 얼굴이었다. 윤기는 그런 그를 반갑게 맞았다. 지민은 방으로 들어서며 문을 거세게 닫았다. 지민을 이곳으로 부르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저 편지 한 통이나 써서 하인에게 전달해 달라, 그렇게 일렀을 뿐이었다. 생각보다도 지민을 빨리 나타났다. 그걸 깨닫고 나자, 웃고 있던 윤기의 얼굴이 약간 굳어졌다. 지민은 윤기 맞은편에 가까이 다가가서더니 제 손에 구겨서 움켜쥐고 있던 것을 윤기의 앞에 떨어뜨렸다. 나풀거리며 떨어지는 것을 가만히 바라봤다.

 

 

“대체 왜 이러는 것입니까.”

“그냥. 네가 못하는 거 같길래.”

“못하는 게 아니라 하지 않는 겁니다.”

“못하는 거든, 안 하는 거든. 내가 대신해주겠다고.”

 

 

지민은 제 앞에 앉아있는 사람을 가만히 바라봤다. 그의 비아냥거리는 말투가 귓가에 울렸다. 그의 앞에 떨어진 편지를 다시금 쳐다봤다. 두 사람 다 용기가 없어 보이니, 대신 죽여주겠다는 우스운 말이 적힌 편지였다. 편지는 그 누구도 지칭한 적이 없지만, 분명하게 떠오르는 이는 있었다. 지민은 편지에 적힌, 그가 죽는 꼴을 보고 싶으면 편지를 보낸 하인을 따라오라는 문장을 읽었다. 손에 들린 종이를 세게 구겼다. 죽는 꼴이 아니라, 죽지 않는 꼴을 보려 하인을 따랐다. 아마 편지를 보낸 이도 그걸 바라고 그따위 문장을 적어 보낸 것일 거였다.

 

 

“바라지 않습니다. 내가 바라지 않는다는데, 대체 왜.”

“대신 복수해준다고 생각해. 네 부모를 죽이고, 너를 놓아버린 사람이니까. 그런 사람의 삶이 망가지는 걸, 봐야하지 않겠어?”

“보고 싶지 않습니다. 복수 같은 거, 하고 싶지 않습니다. 제 복수를 대신 하실 요량이라면, 관두세요. 필요 없습니다.”

“그래? 그럼 알겠어.”

 

 

잔뜩 열을 내며 말했는데 앞에 앉은 이가 심드렁하게 말하는 탓에 지민의 기운이 쭉 빠져버렸다. 윤기는 제 앞에 차려진 상을 가만히 보더니 술병을 들어 잔을 향해 기울였다. 태연자약한 태도로 잔을 채우더니 한 잔을 쭉 들이켰다. 그러더니 지민을 보면서 비어있는 잔을 내밀었다.

 

 

“너도 할래?”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장난이라도 하시는 겁니까?”

“아니. 장난은 아니고. 그래, 뭐. 네가 그렇게 싫다는데. 네 복수 대신해주는 거 관둘게. 안 해.”

“…정말이십니까?”

“어. 그 대신, 내 복수할 거야.”

“그게 무슨.”

“잘됐네. 온 김에 구경이나 해. 내 인생 싸그리 망친 새끼, 내가 곧 망가뜨릴 거거든. 아, 망가진 채로 도착하려나. 도착이나 하려나.”

 

 

지민이 넘겨받지 않은 잔을 다시 상 위에 내려놓고 술병을 기울이며 윤기가 말했다. 아까처럼 잔을 채우더니 가득 채워진 잔을 입으로 가져가며 윤기는 지민을 바라보았다. 지민과 마주친 시선을 피하지 않고 그대로 술잔을 넘겼다. 지민은 그가 뱉은 말을 곱씹었다. 작게 몸이 떨려오기 시작했다. 도련님께 무슨 일이 일어나도, 난 것 같았다. 지민은 제가 들어온 문을 향해 몸을 틀었다. 나가려고 손을 뻗었는데 손 바로 옆으로 잔이 날아와 날카롭게 깨졌다.

 

 

“방금 이게.”

 

 

뭐하는 짓이냐고 되물으려 몸을 틀자마자 윤기가 보였다. 저쪽에 앉아있던 이가 언제 여기까지 왔는지 모르겠지만 금세 지민의 앞으로 다가온 이는 싸늘한 표정으로 저를 보고 있었다. 그러고는 지민을 방 안으로 끌어당겼다. 그에게 붙들린 손끝이 따끔거렸다. 깨진 조각이 살을 스친 것 같았다.

 

 

“넌, 여기서 못 나가.”

“나갈 겁니다.”

 

 

그렇게 말하며 몸을 트는데 문 앞에 음식이 담겨있던 접시가 깨지며 떨어졌다. 그것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고, 그 뒤로도 두어 번 더 반복됐다. 문 앞이 엉망이 되어 버렸다. 신을 벗고 들어온 지민이 함부로 내딛기엔 깨진 조각이 문 근처로 넓게 퍼져 있었다. 지민은 다시금 윤기를 쳐다봤다. 이번엔 윤기만큼이나 서늘하고도 매서운 시선을 하고 있었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못 나간다고 했잖아.”

“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겁니까!”

“선한 척, 작작해.”

“무슨 말입니까. 내가 언제.”

“지금도! 너는 늘 그래. 도대체 너 뭔데. 뭔데 그렇게 아무렇지 않은데? 그런 꼴을 겪어 놓고! 왜 다 용서해주는데? 왜 아무것도 하지 않아? 왜 괜찮은 거냐고!”

 

 

지민의 가까이 서 있던 윤기가 거칠게 다가와 곧장 지민의 옷깃을 세게 쥐었다. 느닷없이 잡힌 터에 지민이 제 손으로 윤기의 손을 떼어내려 했지만 겨우 붙들고나 있을 뿐, 그를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윤기는 거칠게 그를 붙잡고 아무렇게나 흔들었다. 틀어 막힌 숨통에 정신이 아득해지면서도 지민은 억울했다. 괜찮다니, 자신이 괜찮다니. 제 꼴이 어땠는지 생생하게 봤던 사람이 누군데, 괜찮다니. 가장 힘들었을 시기의 자신을 그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 그렇게 말하는 게 서러웠다. 서러우면서도, 그렇게 말하는 윤기가 불쌍했다. 제깟 주제에 그에게 연민을 느끼는 중이었다.

 

지민은 여전히 그를 보면, 자신을 구해주던 날을 떠올린다. 깨어난 자신에게 어색하게 웃어주던 모습, 도련님이 나와 자신을 한껏 괴롭게 만드는 꿈을 꾸고 나면 무덤덤하게 물을 건네주던 모습. 대놓고 살갑진 않았지만, 그래도 다정했던 사람이 왜 이렇게 됐는지 분명하게 알 수는 없었지만 얼핏 느끼고는 있었다. 그래서 윤기에게 마냥 모질게 굴 수가 없었다. 윤기의 몸에 힘이 바짝 들어가 숨이 더욱 조이는 바람에 지민은 제가 붙잡은 손을 더 세게 쥐었다. 그러면서도 윤기를 바라봤다.

 

 

“이런 분, 아니셨잖아요.”

 

 

더듬대며 건네는 지민의 말에 윤기가 인상을 찌푸렸다.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데. 윤기는 되묻고 싶었다. 정국의 집에서 지낼 때야 노비라는 신분이 있었지만, 그 집에서 쫓겨난 뒤로 윤기는 그 무엇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제게 이런 사람이 아니었다고 말하는 지민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말해준 적은 없었지만 알 수는 있었다. 아마 좋은 사람이라고 여겼겠지. 그를 구해주고, 함께 지냈었으니까. 고작 그따위 이유 하나만으로 자신을 이렇게 동정하고 아는 척하는 게 싫었다. 윤기는 손에 더 힘을 주고 지민을 벽으로 밀었다.

 

 

“다 아는 척 말하지 마. 그따위 눈빛을 하고! 날 보지 마!”

 

 

악을 내지르고, 속에서 차오르는 분을 이기지 못하고 옆으로 지민을 던져버렸다. 윤기의 손에 멋대로 밀린 지민은 그대로 상 위에 쓰러졌다. 그 바람에 상다리가 부러졌고, 상이 기울었다. 기울어진 상 아래로 그릇들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엎어진 지민이 신음을 내며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엎어지면서 부딪힌 옆구리를 붙잡으며 인상을 쓰고 있었다. 윤기의 시선이 지민이 붙잡은 옆구리에 잠시 닿았다.

 

 

“날 뭐라고 생각하는지는 모르겠는데. 네가 본 게 전부가 아니야. 누굴 구하고, 살리고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난!”

“단순히 절 구해주신 것만으로 판단한 게 아닙니다.”

 

 

이 와중에도, 그렇게 다쳐놓고도 차분하게 말을 꺼내는 목소리가 기분 나빴다. 그렇다면 대체 뭘 보고, 뭘 알아서 자신을 판단했다는 말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윤기는 몸을 완전히 일으킨 지민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곤 곧장 그의 얼굴을 우악스럽게 붙잡았다. 하도 억센 손길에 지민의 눈가에 눈물이 다 돌았다. 손이 떨릴 만큼 억셌던 손에 힘이 조금 빠졌다. 눈을 질끈 감았다 뜬 지민이 윤기를 바라봤다. 손에 힘은 좀 빠져 있었지만 눈에는 여전히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그럼 뭐로 판단했는데. 네가 나에 대해 뭘 안다고! 지금 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 줄 알아?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냐고!”

 

 

다시금 턱을 세게 쥐는 윤기 탓에 지민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이렇게 턱을 세게 쥐어놓고 대꾸를 바라고 있는 건지 궁금했다. 지민은 자신을 향한 윤기의 이상하리만큼 지독한 괴롭힘이 무엇 때문인지 느끼고 있었다. 그가 뱉는 말마다 유독 무엇에 집착하는지도 알았다. 그는 정국의 집안을 미워했다. 원망하고, 증오했다. 막상 돌아온 곳에는 그가 그렇게 미워하고 증오하던 대상들이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날 함께 옛 주인집의 황폐한 모습을 본 이후로 그는 좀처럼 갈피를 못 잡고 있었다. 위태로워 보였다. 지민을 매섭게 노려보던 윤기가 말을 꺼냈다.

 

 

“너나 나나 전씨 가문에 부모 잃고, 신분 잃었는데. 왜 넌 아무렇지 않아. 왜 그냥 넘어가겠다고 하는데. 대체 왜! 넌 그토록 괜찮은데 난 이렇게나 괜찮지 않은 건데. 난 이런 게 싫어. 너도, 전정국도. 전부 망가졌으면 좋겠어. 평생을! 나처럼 괴롭고 외롭게 지냈으면 좋겠어.”

“정녕 그리되면 나아지실 거 같습니까.”

“뭐?”

“그런 방식으로 마음이 풀리신다면 제 인생을 망가뜨리세요. 저도 함께 제 인생을 무너트려보겠습니다. 허나, 이미 다 보시지 않았습니까. 제 인생이 얼마나 망가져 있었고, 얼마나 괴로웠으며, 얼마나 외로웠는지. 직접 보시지 않았습니까.”

 

 

윤기의 손은 이제 지민의 얼굴이 아닌 둥그런 어깨 위로 올라와 있었다. 지민의 마른 어깨를 붙잡은 손은, 지민의 입에서 말이 나올 때마다 세게 힘이 들어갔다. 윤기는 제 앞에서 혼자만 차분한 녀석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깨를 부술 것처럼 쥐고 있다가 악을 내질렀다.

 

 

“너만 아니었으면! 그때 그 골목에서! 쓸데없이 끼어들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거 아냐. 이렇게 되진 않았을 건데! 왜, 그때 왜 끼어들었어! 왜 전정국 앞에 나타났어. 왜!”

 

 

마지막 악을 쓴 윤기가 다시금 지민을 옆으로 밀어버렸다. 몸집이 작고 뼈마디가 얇은 탓에 무게가 가벼운 지민이 저쪽으로 다시금 넘어졌다. 이번엔 상이 있는 쪽이 아니라 반대편으로 넘어졌는데, 넘어지면서 윤기가 흩뿌려놓은 접시 조각에 손을 베어버렸다. 아까 파편에 스친 손은 이제 피도 멎어 가는데, 다른 손에 다시 상처가 생겼다. 다시금 쓰라린 손을 붙잡으면서 지민은 윤기의 말을 되짚었다.

 

골목, 저 사람이 골목을 어떻게 알지. 잠시 거기까지 생각한 지민은 고개만 틀어 윤기를 바라봤다. 아까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거친 숨만 쉬고 있는 그가, 그의 인영을 보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그 사람이구나. 자신보다 먼저 정국의 곁을 지키던, 그 사람.

 

윤기는 엎어진 채로 피가 뚝뚝 흐르는 손을 받치고 있는 녀석을 쳐다봤다. 지민의 말이 다 맞았다. 윤기는 전부 다 보았다. 청군의 천막 안에서 엉망인 꼴로 누워있는 녀석을 봤다. 늘 밝은 척을 해도 시커먼 밤이 되면 이부자리 위에서 서럽게 울던 모습도 봤다. 돌아온 한양에서 자신만큼이나 숱한 좌절에 맞부딪혔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자신이 이렇게 우스운 악을 쓰고 떼를 쓰는 것은 그저 저와 지민이 더 나아지는 게 싫어서, 다시금 사랑받고 잘 사는 게 싫어서라는 것도 안다. 한양에 오기 전까진 너나 할 것 없이 함께 괴로운 생을 살았고, 외로움에 몸서리쳤으면서 한양땅을 밟자마자 달라진 녀석에게 괜한 질투를 느끼고 있었다는 것을, 안다.

 

 

“네까짓 게 대체 뭔데. 대체 뭔데….”

 

 

선 채로 윤기는 눈물을 흘렸다. 왜 우는지는 몰랐다. 그러게 바닥을 향해 푹 숙여진 고개가 어딘가에 닿았다. 뒷머리에 따뜻하고 부드러운 것이 닿았다. 떨리는 등 위로도 다정함이 올라왔다. 어느 틈에 일어난 지민이 윤기를 안고 있었다. 윤기의 울음이 멎었다. 낯설었다. 정말 이 녀석은 대체 어떤 녀석이길래 이런 행동을 할 수 있는 건지 몰랐다. 하필 이때, 이럴 때에 윤기는 제 부모의 말을 떠올렸다. 사랑인지 뭔지 하는 것을 지껄였던 그 말이. 윤기는 제 입술을 물었다. 사랑? 사랑. 그따위 건, 없어.

 

윤기는 고개를 갑작스럽게 쳐들었다. 그리고 잠자고 저를 바라봐주는 지민을 보고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간 자신이 어떻게 굴었는데, 저 녀석은 저렇게 멀쩡한 표정을 지을 수 있는 것일까. 속에서 무언가 일렁였다. 당장 토악질이라도 하고 싶었다. 윤기는 악을 질렀다.

 

 

“날, 날 기만하지 마!”

 

 

윤기는 제가 붙잡은 어깨를 옆으로 집어 던졌다. 지민이 내던져진 방향으로 쓰러졌다. 상 위에 거칠게 부딪히고, 쿵하는 소리를 내며 바닥에 쓰러졌다. 지민을 내던진 윤기조차 놀라 움찔댈 만큼 큰 소리가 났다. 몇 번을 쓰러져도 잘 일어나던 녀석이 이번엔 움직이지 않았다. 윤기는 선 채로 온몸이 굳는 걸 느꼈다. 쓰러진 지민의 곁에서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