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래더] 트위터는 @Rather_0613 (舊 새벽의덕후)

[국민/랩홉] 길 위에서 전해지는

 

 

W.새벽의덕후

 

 

 

제5장. 외곬

 

 

 

28.

 

 

홀로 남겨진 윤기는 벽에 가만히 기댄 채로 넋을 놓고 있었다. 이따금 시야에 제 호패가 들어올 때마다 헛웃음을 치곤했다. 방 안은 엉망이었다. 꼭 자신의 모습 같았다. 윤기는 늘 제 삶을 엉망이라고 생각했다. 전부 망가진 삶이라고 여겼다. 정말 제 삶을 엉망으로 망가뜨린 건 스스로였음을, 지금에서야 알았다. 남준이 남겨둔 말처럼 제게 도움이 되는 게 아니라면 잊고 살아가도 되었을 텐데, 늘 과거의 것들에 얽매여 사느라 단 하루도 오늘을 살았던 적이 없었다. 늘 어디 얽매여 과거를 되돌아가면서, 오늘을 사는 이들을 시기했다. 우스웠다.

 

그중에서도 유독 지민에게 참 많이 화풀이를 했다. 다 지민의 탓인 것처럼 짐을 지우고, 미움을 덧씌웠다. 비슷한 처지라고 생각해서 더 그랬을까, 이곳에 돌아와 온갖 사람들이 찾고, 반겨주고, 아껴주는 지민의 모습을 보기가 힘들었다. 자신과 닮았던 모습이 하나씩 지워져가는 것 같아서 두려웠다. 그렇게 끔찍한 과거들을 살았으면서 언제나 오늘, 밝게 웃고 있는 지민이 밉기도 했다. 만면에 가득 띤 웃음에 윤기는 그만 속았던 것이다. 저보다도 더 망가지고 아픈 삶을 살아왔던 녀석이라는 걸, 깜빡 잊어버린 것이다.

 

 

“…그만, 하고 싶어.”

 

 

남준에게 맞을 때 터졌던 입가가 쓰렸다. 쓰린 입으로 입맛이 씁쓸한 말을 뱉었다. 힘들었다. 뱉은 말처럼 정말 모든 걸 그만두고 싶었다. 무엇을 원망하며 살았고, 무엇을 미워하며 살았는지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더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쉬고 싶었다. 다들 제자리로 돌아갔다. 쉬고 있을지, 울고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다들 제자리를 찾아갔다. 그런데 윤기는 갈 곳이 없었다. 갈 곳이 없다는 게 딱히 서럽지는 않았다. 제 부모가 자신을 그 집에 보냈을 때부터 윤기는 갈 곳 잃은 신세였다.

 

여철을 따라다니며 좀 좋은 일을 해왔나 싶었는데, 그간 자신이 해온 일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일들이었다. 윤기는 오래도록 방관자로 살았다. 오만방자하게 자라는 도련님을 내버려 두었고, 그 도련님이 멋대로 짓밟는 남준을 외면했다. 그리고 언제나 오늘을 살고 싶어 하는 자신을 모른 척하고 살았다. 윤기는 벽에 기대 길게 숨을 뱉었다. 모든 것을 놓아주자고, 그럴 때라고 생각했다.

 

 

“미안해.”

 

 

그 생각을 하고 나니, 이 말이 튀어나왔다. 그러고 보니 이런 사과의 말을 그 누구에게도 해준 적이 없었다.

 

 

미안해.

 

다 망쳐놓아서. 전부 망쳐버린 사람이 나라서, 미안해.

 

정말, 미안해.

 

 

윤기는 바닥에 멋대로 굴러다니는 유리조각 하나를 집어 들었다. 날카롭게 깨진 조각이 손안에 들어오자마자 쓰린 상처를 만들어냈다. 피가 조금씩 배어 나오는 손을 목가에 가져다 댔다. 막상 전부 놓아버릴 작정을 하고 나니 조금 겁이 나기 시작했다. 덜덜 떨리는 손을 다른 손으로 붙잡았다. 조금씩 긁히던 살이 찢어졌고 피가 손안에서 흘러내렸다. 이미 피투성이인 유리조각을 더 세게 쥐고 목을 향해 꽂았다. 꽂힌 유리조각을 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윤기는 그대로 쓰러졌다.

 

 

 

_

 

“지민아.”

 

 

정국은 지민의 손을 붙잡고 울었다. 지민이 이러고 있는데, 자신은 아무렇지 않게 살아있는 게 싫었다. 다시금 이렇게 지민을 험한 꼴로 만들어 둔 자신이 끔찍했다. 윤기에게 미안한 만큼, 그가 원망스러웠다. 그의 삶이 그만큼 망가진 건, 그렇다고 윤기가 느끼게 된 건 다 제 탓이었다. 제집의 일이었는데 왜 지민이가.

 

그러고 보면 자신을 괴롭히고 싶다는 윤기의 말은 보기 좋게 이루어진 셈이었다. 지금 정국은 그 누구보다 괴로웠다. 눈앞의 지민을 몇 번이고 바라봐도, 자꾸 눈물밖에 나지 않았다. 미안함만 남았다. 이 미안함은, 죄스러움은 처음 손을 붙잡지 않았던, 전쟁이 있던 날부터 남은 생을 평생 지고 가야 할 거였다. 정국은 제 손에 담긴 지민의 손을 매만졌다. 그리고 지민의 얼굴도 쓰다듬었다.

 

 

“네가 그랬지. 벌이라고 생각하고 살라고. 네 눈빛을 벌이라 생각하며 살라고. 헌데 지민아. 그게 어떻게 벌일 수가 있겠어. 널 보는 게, 이렇게라도 널 바라보는 게 어떻게 벌이 돼.”

 

 

정국은 두 손으로 감싸 쥔 지민의 손을 제 이마에 가져다 댔다. 눈물을 참아보려 했지만, 참아지지 않았다. 지민이 깨더라도 이 손을 놓고 싶지 않았다. 평생 후회처럼 남을 손이었다.

 

 

“아프지 마. 아프지 마라, 지민아. 내게 벌을 주기 위해서라도 아프지 마. 아픈 건 내가 할게. 힘든 것도 다 내가 할게. 지민아 너는, 그저 살아만 있어줘. 잘, 살아 있어줘.”

 

 

다시 그 그립던 시절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감히 그럴 마음을 먹을 수도 없었다. 지나친 욕심이었고, 상상만으로도 과분한 사치였다. 다만 정국은 조금의 욕심 정도만 부리고 싶었다. 지민이 계속 잘 살아주기를 바랐다. 힘든 거, 괴로운 거 모두 제가 할 테니 지민은 홀가분하게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가진 게 더는 없어 줄 게 없으니, 지민이 지고 있는 짐이나마 제가 들겠다고 생각했다. 꽤 오래도록 정국은 지민의 손을 붙잡고 울었다.

 

 

 

정국이 방 밖으로 나가자마자 가만히 누워있던 지민이 눈을 떴다. 치미는 눈물을 참아내느라 부단히도 애썼다. 때론 제멋대로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런 모습조차 당차 보이고 멋져 보였던 사람이었다. 그 사람이 이렇게 약한 말을 하는 건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았다. 제 도련님의 말을 들으며 지민도 많은 생각을 했다. 그래, 그게 어떻게 벌이 되겠는가.

 

자신도 죄인이었다. 자신 역시 벌을 받아야 하는 사람이었다. 부모에게 더할 수도 없는 불효자식이었다. 원수나 진배없었다. 지민은 제 도련님을 미워하고 원망하기를 포기했다. 애쓴다고 되는 일이 아니었다. 앞으로는 도련님을 미워하지 못하는 마음으로 그를 잊으며 살기로 했다. 물론 애쓴다고 잊힐 사람이 아니었다. 그저 벌을 받는 마음으로 그렇게 살겠다고 생각했다.

 

손에 잡히는 이불을 꽉 쥐었다. 작게 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고여 있던 눈물이 옆으로 흘렀다. 지민은 몸을 일으켜 앉았다. 상처 난 곳이 따끔거리긴 했지만 이깟 상처쯤은 별게 아니었다. 이 한양을 떠나고 다시 돌아오는 동안 이보다 더한 상처를 받았고, 견뎌냈다. 수많은 길을 거쳐 끝내 돌아오고야 말았던 그 한양이었지만, 한양은 늘 지민에게 아픈 곳이었다. 꼭 지민이 떠나길 바라는 것 같았다. 여기 있지 말라고, 이곳은 네가 있을 곳이 아니라고. 그래서 지민은 다시 떠나고자 했다.

 

가만히 앉아있던 지민이 완전히 일어나 문가로 다가갔다. 창호지가 그려내는 그림자를 가만히 쳐다봤다.

 

 

“태형아.”

 

 

지민이 문을 열며 이름을 불렀고, 이름이 주인은 곧장 뒤를 돌아봤다. 태형은 방안에 함부로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방 앞에 가만히 앉아있길 잘했다. 그 마음이 어떤 마음인지 꽤 자란 지민은 모르지 않았다. 어떤 마음인지 잘 알기에, 그리고 알면서도 받아줄 주제가 못되기에 태형에게 미안했다. 


방 앞에서 저를 돌아본 태형은 올려다보는 눈으로 구석구석 살폈다. 태형은 가빈에서 일어난 일을 뒤늦게 알고는 지민에게 한참을 미안해했다. 저도 일이 있어 자리를 비웠던 거면서, 마치 지민이 죽었다 깨기라도 한 듯 서럽게 울며 내내 옆을 지켰다. 지금도 행여 더 다친 곳은 없나, 상한 곳은 없나 오래도록 살피더니 괜찮은 것을 확인하고 웃었다. 제 웃는 낯이 아주 싱그럽고 예쁘다는 걸, 태형은 알까.

 

 

“괜찮아? 더 아픈 데는 없어? 의원님이 잘 살펴주시긴 했는데, 혹시 모르잖아.”

“태형아.”

“응, 지민아.”

“부탁이 있어.”

 

 

마당에 서서 방안의 지민을 올려다보는 바람에 태형의 곧게 뻗은 목이 잘 보였다. 부탁이 있다는 말에 꼴깍 넘어가는 목울대도 선명하게 보였다. 뭐가 그렇게 긴장이 된 건지 태형은 제 혀를 축이고 손도 꼼지락댔다. 지민은 잠시 숨을 고르고 다음 말을 붙였다.

 

 

“…떠날래? 나와 함께.”

“어?”

“이기적인 거 아는데. 이런 말을 할 사람이, 이런 부탁을 꺼내볼 사람이 너뿐이라. 꼭 함께 가지 않아도 괜찮아. 헌데 난, 떠날 생각이라.”

“가자. 함께 가자.”

 

 

태형의 대답은 거침없었다. 결심에 찬 눈으로 지민을 바라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예의 그 멋들어진 웃음도 한 번 지어주었다. 태형의 대답은 당연한 거였다. 지민의 입에서 너뿐이라는 말이 나온 순간, 태형은 지민과 함께 하기로 마음먹었다. 태형의 웃음을 보며 지민도 웃었다. 저렇게 말해줄 걸 알고, 태형의 마음에 기대서 부탁을 꺼낸 걸 수도 있었다.

 

 

“언제 갈까?”

“최대한 빨리.”

 

 

지민의 말에 태형이 잠시 말이 없었다. 지민은 여전히 웃음 짓고 있었다. 서둘러 떠나고 싶었다. 행여 시간이 조금 흘러 이 굳은 마음이 바래지는 걸 원치 않았다. 바래진 마음이 속에 있는 미련을 드러내는 걸 원하지 않았다. 그 미련이 지민의 발목을 잡아채는 것도 싫었다. 미련이 자꾸 지민을 붙잡아, 제 도련님의 얼굴을 한 번만 더 보고 싶다고 떼쓰는 것도 듣고 싶지 않았다.

 

 

“날이 밝으면, 바로 떠나자. 짐 챙겨서 여기로 올게.”

“태형아.”

“너도 필요한 거 있으면 챙겨둬.”

 

 

그렇게 말하고 빠르게 돌아서는 태형을 잡아 세웠다. 떠나자는 말에 조급해졌는지 바삐 걷던 태형이 큰 눈으로 가만히 지민을 올려다봤다.

 

 

“왜? 필요한 거 있어?”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날이 밝으면 갈래길에 있는 커다란 나무 앞에서 만나자.”

“어?”

“떠나기 전에, 어디 들러볼 데가 있어서.”

 

 

지민의 말에 잠시 고개를 끄덕인 태형은 몸을 돌리더니 곧장 뛰었다. 멀리 뛰어가는 모습을 가만히 보다가 지민은 방 안으로 들어섰다. 미안했다. 태형에게 이런 부탁을 한 제 마음이 얼마나 못난 건지 잘 알았다. 그 못난 마음에 웃으며 대꾸해준 태형이 어떤 것들을 포기하고 자신과 함께해주는 것인지도 잘 알았다. 드디어 비단옷을 입고, 뭇 사람에겐 ‘도련님’ 따위로 불리기도 하며 좋은 삶을 사는 태형이었다. 번듯한 집도 있고, 어마어마한 재산도 있었다. 헌데 그런 것들은 다 젖혀두고 지민과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를 길을 함께 떠나주겠다 했다.

 

언제나 고마웠고, 미안했다. 얼굴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닦아낸 지민이 목을 몇 번 가다듬고 짐을 챙겼다. 맨몸으로 온 한양이었는데, 그간 태형이 챙겨준 게 하도 많아서 옷가지만 단출하게 챙겼는데도 짐이 제법 됐다. 금세 봇짐을 챙겨 메고 언제나 태형이 그랬던 것처럼 방 앞에 앉아있었다. 해가 뜨기에 시간이 조금 남아있었다. 지민의 짐 옆에는 따로 챙겨둔 옷가지가 있었다. 태형이 줬던 여비로 일전에 사뒀던 거였다. 지민은 몸을 일으켰다.

 

 

 

_

 

달음박질을 한 태형은 곧장 집으로 들어갔다. 제 방보다도 먼저 들른 곳은 형의 방이었다. 벌써 일어나 가빈으로 가기 위해 준비를 하던 석진은 놀란 눈으로 제 동생을 쳐다봤다. 하도 오래 쉬지도 않고 달린 탓에 숨이 자꾸 달렸다. 태형은 몇 번이고 호흡을 빼내며 숨을 골랐다. 석진은 입던 옷을 마저 정돈하며 태형을 기다렸다.

 

 

“형. 나, 나 떠날 거야.”

“어? 갑자기 무슨 말이야.”

“지민이와 떠날 거야. 이것저것 필요한 게 많은데. 형이 조금만.”

 

 

자꾸 섞여 나오는 숨과 함께 말을 하려니 제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런 태형의 말을 곧잘 알아들은 석진은 재빨리 제 방을 살폈다. 행여 서툰 길에 넘어져 다치진 않을까 약재도 챙겨 넣고, 어디 가서 곪지 말라고 여비는 넉넉하게 챙겨 넣었다. 방에 있는 제 옷도 아낌없이 모아다 넉넉하게 짐을 챙기면서 석진은 넌지시, 태형에게 물었다.

 

 

“돌아올 거니?”

 

 

제 형의 다정한 질문에 이제는 꽤 고른 숨을 쉬고 있는 태형이 뜸을 들였다. 잠깐 사이에 많은 생각을 하는 듯했다. 그러다 곧 제 형을 바라보며 말했다.

 

 

“…응. 돌아올 거야.”

 

 

그 애가, 그분을 못 잊을 거라서. 결국 다시 오게 될 거야.

 

뒷말을 삼키면서 태형은 웃었다. 석진은 그런 제 동생을 쳐다보다가 다시 짐을 가지런히 모았다. 태형은 알고 있었다. 당장 제 도련님과 마주하는 게 힘겨워 도망칠 마음을 먹은 지민이었지만, 다시 한양 땅을 밟고 말 거였다. 그걸 다 알면서도 함께 떠나겠다고 말했다. 제 평생에, 지민과 단둘이 이곳저곳을 거닐 순간이 언제 또 올까. 한양을 벗어나 둘이서 아무 데나 누워 자고, 이런저런 풍경을 보는 날이 언제 또 올 수 있을까. 그랬기에 태형은 주저 않고 지민과 함께 길을 떠날 수 있었다. 아주 잠깐일지라도 태형에겐 충분했다.

 

 

 

_

 

“거기 누구시오? 이 이른 아침부터.”

“아, 아. 선생님. 절 기억하십니까?”

“응? 아니 너는 민이가 아니냐.”

“예. 저 민이입니다. 살아계셨네요.”

 

 

양의원 댁 마당을 거닐던 지민이 근처에서 들려오는 기척에 몸을 돌렸다. 새벽같이 수련을 나가려던 여철이 어둑한 마당에서 선 이를 불렀다. 곧이어 그 사람이 누군지 알아채고는 얼굴에 반가운 웃음이 잔뜩 피었다. 여철은 대뜸 지민의 손을 붙잡고 흔들었다. 지민도 그 장단에 맞춰 제 손과 몸을 흔들었다. 반가웠다. 의원님을 만나 뵈려던 것인데, 오히려 더 잘 되었다고 생각했다. 반가움에 한참 웃던 여철은 뒤늦게야 지민이 등 뒤로 둘러멘 봇짐을 알아챘다.

 

 

“녀석도. 만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떠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냐.”

“일이 그리되었습니다.”

 

 

여철은 지민의 웃음을 쳐다봤다. 전에도 느꼈지만 참 웃는 게 예쁜 녀석이었다. 절 빤히 보는 얼굴이 무엇을 바라는 거 같아서 여철은 지민을 잠자코 기다려주었다. 날이 점차 밝아졌다. 곧 해가 뜰 거 같았다.

 

 

_

여철과의 만남을 끝낸 지민은 마지막으로 꼭 한 번 가보고 싶은 곳으로 향했다. 해가 뜰 거 같았지만 만나기로 한 장소와 가려는 장소가 그다지 멀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지민은 익숙한 집 안으로 들어섰다. 익숙한 걸음이 마당을 거침없이 거닐었다. 지민은 제가 예전에 살던 방 앞에 섰다. 닫힌 문을 열어봤다. 엉망일 거라고 생각했던 방 안이 깨끗했다. 누가 치워놓은 지 얼마 되지 않은 것처럼 먼지도 쌓여있지 않은 모습이었다.

 

지민은 방 안으로 들어섰다. 깨끗한 방이 낯설었다. 방을 이리저리 둘러보는데 서랍장 위에 제가 아끼던 헝겊뭉치가 있었다. 이게 아직도 있을 줄 몰랐다. 제가 꼭 둥글뱅이라고 부르던 것이었는데. 그 둥글뱅이들에 제 이름과 도련님 이름을 붙여주며 밤마다 손에 꼭 쥐고 잠들었었는데. 그것이 서랍장 위에 나란히 기대 서 있었다. 누가 그랬는지 알 것 같았다. 머릿속에 누군가 떠오르자마자 지민은 제 입술을 깨물었다.

 

 

“참 모질기도 하시지….”

 

 

제 도련님은 끝까지 미련으로 자신을 잡아두었다. 굳이 붙잡지 않아도 늘 도련님께 붙잡혀 있던 자신이었는데. 지민은 행여 쓰러질까 헝겊더미를 만지진 못하고 눈으로만 쓰다듬은 뒤에 제 도련님 방으로 향했다. 그곳 역시 많이 망가진 흔적이 있긴 해도 정돈된 모습이었다. 그 낡은 방에서 옛 기억을 떠올렸다.

 

다정했던 눈빛, 제 몸을 만져주던 손길, 어느 곳 하나 빼놓지 않고 맞춰주던 입술까지. 그 품이 너무도 그리웠었다. 전쟁에서 살아 돌아왔을 때, 그저 미친 척을 하고 그 품을 한 번 안아볼 것을. 그 품에 안겨볼 것을. 떠날 준비를 하고 나서야 후회를 하고 있었다. 다시 한 번만 그 품에 안겨보고 싶었다. 그 품을 파고들고 싶었다. 분명 같은 향료를 썼음에도 도련님 몸에서는 유독 더 진한 향이 났다. 그 향이 좋아서 괜히 더 품을 파고들기도 했고, 목덜미에 코를 묻기도 했다. 그런 몸종의 무례한 행동에도 도련님은 웃어주었다. 때로는 제 몸종의 몸에서 나는 향이 더 좋다며 몸종의 머리통에 코를 박고 숨을 쉬기도 했다. 그때의 그 숨결이, 손길이 다시 떠오르는 것 같았다.

 

 

“…도련님.”

 

 

그 무엇 하나 잊을 수가 없는데, 어찌 자신이 도련님을 모른 척하고 살 수 있을까. 지민이 떠나기로 마음먹은 것은 그 이유 때문이기도 했다. 그를 보고 있으면서 잊을 수가 없어서. 여전히 그에게 연심을 품은 자신을 용서해줄 수 없기에 스스로에게 내린 벌이기도 했다. 지민은 열린 창 가까이 다가갔다. 창 너머에는 제가 살던 곳이 잘 보였다. 도련님은 여기서 어떤 생각을 하며 제가 사는 곳을 바라봤을까. 지민은 그 옛날 도련님이 자주 하던 것처럼 창 너머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잘 지내세요, 도련님.

 

 

 

**

지민이 떠났다고 했다. 태형과 둘이 떠났다고 했다. 기다리고 있던 것인지, 정국은 방 앞에서 석진을 마주쳤다. 석진은 다정스런 말투로 그 소식을 전해주었다. 정국은 그저 고개를 숙여 말을 전해준 것에 감사를 표했다. 다시 그 애를 떠나보냈다. 지민이를, 보내고 말았다. 그때는 손을 뻗지 않았지만, 이번엔 손을 뻗지 못했다. 이렇게 더러워진 손으로 지민을 붙잡고 내 곁에 있어 달라고, 그런 말을 꺼낼 수 없었다.

 

 

정국은 지민이 없는 한양 이곳저곳을 걸었다. 전모를 쓰고 걸어 다니는 기생을 보면 그 옛날의 지민이 생각났다. 그날의 입맞춤도, 고백도 생각났다. 좋아한다는 마음 단 하나로 제멋대로 굴었던 일이지만, 그럼에도 얼굴 붉혀주고 제 손길에 따라와 주었던 지민이 떠올랐다.

 

 

 

“비 오네.”

 

 

이따금 비가 오는 날엔 지민의 생각이 많이 났다. 이제는 더 이상 전처럼 팔을 그어대지 않았다. 그저 처마에 닿아 떨어지는 빗방울에 손을 내밀뿐이었다. 못나게 진 흉은 빗물로 지워지지 않았다. 혹여 지민도 이 비를 맞고 있을까. 쏟아지는 비를 바라보며 지민이 단단한 지붕 밑으로 잘 피해있길 바랐다.

 

 

 

“잘 지내셨어요?”

 

 

가끔은 뒷산에 올라 제 부모의 묘 앞에서 중얼중얼 혼잣말을 했다. 어떤 날은 왜 그랬느냐고 원망하는 말이었고, 어떤 날은 그래도 그립더라고 울먹이는 말이었다. 그렇게 금방 땅으로 돌아갈 줄 알았으면, 제 몸종과의 사이를 방해하지 말아 주지 그랬냐고 투정을 부리기도 했다. 이곳에서 제 부모에게 이런저런 소리를 하다가도 지민을 떠올렸다. 다시 지민을 만나고 싶어서 무작정 작은 몸을 굴려댔던 일부터 시작한 일련의 이야기들이 쉼 없이 떠올랐다.

 

 

“잘 지내고 있지?”

 

 

보고 싶어. 지민아. 널 처음 만났던 그 골목에도 종종 가곤 해. 그 어둑한 골목에서 새하얗게 빛났던 널 보고 정말 많이 놀랐었는데. 괜히 골목에 서서 네가 오지 않을까, 골목의 입구를 쳐다보는 일도 많아. 때론 이 뒷산에 오르곤 해. 아직 시린 겨울이라 꽃이 피지 않았는데도, 나는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꽃이 보여. 그리고 그 꽃 앞에 민망한 듯 서 있던 너도 보여. 나는 평생을 한양에서 보냈어. 평생에 조금 못 미치는 시간은 모두 너와 보냈지. 그래서 나는 한양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너와의 일들을 추억하곤 해.

 

지민아. 너는 나를 잘 잊고 있을지 모르겠다. 너와는 한양 밖으로 나가본 적이 없으니, 한양 밖을 다니는 너는 날 떠올릴만한 게 없겠지. 이번엔 억지로 끌러간 것이 아니니, 조급해하지 않고 많은 것을 보고 다녔으면 좋겠어. 기억할 것들을 잔뜩 쌓아서 나와의 일들은 저 구석 어디에 박히도록, 그렇게 좋은 것들을 많이 겪었으면 해.

 

나는 여기서, 네가 없는 이곳에서 매일 널 만나며 널 잊지 않고 있을게.

 

 

 

**

“이제 여유라도 부리는 거야?”

“어? 아, 아닙니다.”

“됐어. 새삼스레 뭘 그런 말투야.”

 

 

호석이 남준을 흘긋댔다. 그러나 입은 뭐가 좋은지 웃고 있었다. 참 오래 걸려 마주친 눈이었다. 남준을 끌어안고, 남준을 마주 보는 지금이 행복했다. 남준 역시 곧잘 웃었다. 전엔 늘 경직된 얼굴이었는데, 이젠 꽤 부드럽게 다양한 얼굴을 만들어냈다. 남준은 제 손으로 호석 얼굴에 흐르는 땀을 닦아주었다. 가빈의 나비가 다시금 날갯짓을 하고 있었다. 마음이 한결 여유로워진 호석은 다시 춤을 찾았다.

 

 

“그리운 거야?”

“응?”

“그 사람. 떠났다며.”

“응. 그랬다더라.”

“그립나 보네. 그 사람 그리워하느라 나 춤추는 것도 안 보고 넋을 놓고 있던 거야?”

“네 춤에 넋을 놓은 건데?”

 

 

남준의 말에 호석이 얼굴을 붉혔다. 마음이 통한 건 더할 나위 없이 좋은데, 민망스럽기도 했다. 남준이 참 많이 달라졌다. 한 번 제 마음을 표현하더니 이젠 표현을 아끼는 법을 몰랐다. 호석은 괜히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남준을 피하기 위해 애써 돌린 고개가 다시금 제자리를 찾았다. 얼굴의 땀을 닦아준다는 핑계로 남준이 호석의 얼굴을 붙잡고 있었다.

 

 

“전엔 제대로 손도 못 대더니.”

“그 시간들이 아까워서라도 앞으로 많이 만질 거야.”

 

 

역시 아끼지 않고 느낀 그대로를 표현하는 남준에 결국 호석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곤 남준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전 같으면 한껏 놀라 말이나 더듬거렸을 남준은 여유롭게 호석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품이 이리도 넓고 좋은 것을 늦게 안게, 남준의 말마따나 아까웠다. 그래서 호석은 조금 더 그 품을 파고들었고, 세게 안았다.

 

 

“그래도 그리운 거지?”

 

 

대뜸 귓가에서 말을 해오는 탓에 남준이 잠깐 움찔거렸다. 가끔 남준이 이럴 때마다 호석은 그 옛날 바보 같던 서로의 모습이 떠올라 반가웠다. 여전히 남준의 목에 매달린 채로 그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남준이 다정하게 호석을 감싸 안았다. 그의 턱이 어깨에 내려앉는 게 느껴졌다.

 

 

“날 죽지 않게 해줬던 사람이니까, 죽지 않고 잘 살아있길 바라는 거뿐이야.”

“그리운 거네.”

“그립긴 한데, 난 주인님이 더 그리워. 이렇게 안고 있으면 얼굴을 볼 수 없잖아.”

“준아.”

“응, 주인님.”

“아니 그거 말고.”

“응, 호석아.”

 

 

제 이름이 이렇게 듣기 좋은 줄 몰랐다. 그래서 이따금 남준더러 제 이름을 불러달라고 조르곤 했다. 남준에게 안겨, 제 이름을 들으며 호석도 그를 떠올렸다. 마음에 여유가 생기고 나서야 기억이 났다. 그를 예전에도 본 적이 있었다. 다시금 그를 만나게 된다면 아주 좋은 것들로만 모아 상을 차려놓고, 옛이야기나 하고 싶었다. 이렇게도, 저렇게도 엮인 인연이니 반갑지 않으냐고 툭 털어놓고 두런두런 말하고 싶었다. 남준의 그리움에 질투가 나지 않았다. 그런 것 정도는 상관없을 만큼 남준과의 감정이 두터워진 탓이었다. 그뿐 아니라 만일 그가 그때 남준을 죽게 내버려 뒀다면 지금의 호석이 존재할 리 없었다. 그 전쟁에서 죽었거나, 살았어도 이만큼 행복하지 않았을 거다.

 

 

“나도 조금 그립네.”

 

 

남준의 말처럼 잘 살아있길 바랐다. 잘 살아만 있다면 언젠가 이 땅에서 다시 만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면 정말 많은 얘기를 나눠보자고, 그렇게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