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래더] 트위터는 @Rather_0613 (舊 새벽의덕후)

[국민] 초록(初錄)

 

 

W.래더(舊 새벽의덕후)

 

 

 

4.

 

 

 

며칠간 제대로 된 생활을 영위하지 못했다. 자꾸 전정국이 머리에 떠다녀서 미칠 거 같았다. 뭐만 해도 그냥 머릿속에서 튀어나왔고 걔가 했던 말, 행동, 표정이 전부 떠올랐다. 의지로 참아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게다가 생각하는 걸 좀 멈추려고 하면 어디선가 전정국이 나타났다. 수업이 끝난 강의실 앞이라거나, 동방이라거나, 아니면.

 

 

“와. 나 형이랑 또 일박하는 거야? 어떡해. 설레서 밤새고 왔어 나. 형은 어때? 응?”

 

 

동아리 엠티 가는 차 안에 나란히 앉아있다거나.

 

 

“아 진짜 너무 좋아.”

“야. 넌 뭐가 그렇게 좋냐? 지민이 귀찮아하잖아. 저리 가라고오!”

“저요? 저 지민이 형이 좋은데요. 그리고 형을 더 귀찮아해요. 이 손 치워요!”

“예쁜아. 빨리 네가 쟤한테 뭐라고 그래. 내 말은 안 듣는단 말이야.”

 

“…오늘은 윤기 선배 안 온대요?”

 

 

골이 다 울렸다. 보통은 약간의 차멀미 때문에 속이 울렁거리고 머리가 어지러웠는데 지금은 차멀미를 느낄 새도 없이 옆에 있는 커다란 놈들 때문에 정신이 없었다. 대체 왜 매번 내 양옆에 자리해서 이렇게 사람 머리를 뒤흔드는지 모를 일이었다. 내 말에 운전대를 잡고 있던 남준 선배 대신 조수석에 앉아있던 호석 선배가 웃으면서 뒤를 쳐다봤다.

 

 

“힘드냐? 자리 바꿔줘?”

“이건 자리 바꾸는 걸로 해결될 거 같지 않아서 그래요.”

“야. 박찜. 민윤기가 오겠냐? 걔 연구실 때문에 엄청 바쁘,”

“온대. 후발대로. 후발로 오는 애들 통솔해서.”

“아 왜!”

 

 

윤기 선배가 온다는 말에 얼굴에 화색이 돌려는 찰나, 귀에 대고 소리를 빽 지르는 김태형 때문에 인상을 찌푸리고 말았다. 가까이서 소리 지르지 말라고 뭐라고 하려는데 얼얼한 귀가 웬 손에 의해 막혔다.

 

상황을 좀 파악해보고자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러자 내 뒤통수 쪽으로 다른 손 하나가 또 쑥 하고 들어왔다. 그리고 아예 어깨에 손을 두른 뒤에 자기 몸쪽으로 가까이 잡아당겼다. 멍한 표정으로 어깨에 올라온 손을 한 번 보고 손의 주인을 한 번 쳐다봤다.

 

 

“시끄럽지. 암튼 저렇게 교양이 없다니까.”

“야! 전정국! 어, 뭐야. 왜 그러고 있냐?”

“선배님 때문에 우리 지민이 형 귀가 아프잖아요. 제가 지켜주고 있는 건데요.”

“지키긴 뭘 지켜. 전정국 네가 젤 위험하거든?”

“선배도 그닥 안전한 거 같진 않네요.”

 

 

김태형에게서 멀어지면 뭐하나. 가까이 붙은 전정국은 계속 김태형이 시비 거는 족족 받아치고 있는데. 그 덕에 나는 전정국의 넓은 품에서 두 사람의 싸움을 안정감 있게 감상하는 중이고. 이게 뭔데. 왜 이러고 있어야 하는데. 그나저나 전정국 얘 손은 진짜. 촉감이 왜 항상 좋냐. 크고, 단단하고, 다정하고.

 

 

“와 전정국 내가 선배거든? 너 완전 건방진 거 알지?”

“에이. 제가 뭘 또 그렇게 건방질 거까지야. 그리고 이 차에 저희만 타고 있는 거 아니거든요? 조용히 좀 해주시죠?”

“이제 와서! 같이 시끄럽게 했잖아!”

“선배만 시끄러웠죠. 전 되게 조용히 얘기했어요.”

“야! 전정국!”

 

 

“남준 선배. 차 좀 세워주세요. 저 그냥 걸어갈래요.”

 

 

 

__

 

나는 꽤 자주 진지하게 고민을 해왔다. 과연 내가 삼 년간 몸담고 있는 이 동아리는 무엇을 하는 동아리인가.

 

 

“아 누가 중간에 꺾어 마시나!”

“이 새끼 밑잔 뺐어? 다 마셔 쭉! 그렇지 마셔! 거 봐. 다 들어가네!”

 

“취했어요? 나갈래요?”

“어? 그럴까.”

 

“야 쟤 틀렸다! 미친 쟤 하는 거 봄?”

 

 

여기가 술 동아리인지 연애 동아리인지 게임 동아리인지 3년째 이 동아리에서 열심히 활동하는 중이었지만 아직 파악하지 못했다. 젊은 청년들이 한데 모여 있으니 온갖 거를 다 하고 있었다. 고작 1박의 엠티 동안 쓰이는 역사가 수십 개였다.

 

 

“어? 지민이 거기서 뭐해.”

“아. 쉬는 중이에요.”

“가서 마셔야지 왜 빼. 빛탐 소주탱크가.”

“선배. 죄송한데. 전 소주탱크 아니고 고진감래였어요.”

“…아. 네가 소탱 아니었냐? 미안!”

 

 

저 선배는 얼마 만이야 대체. 또 신입 예쁘고 잘생겼다는 소문 듣고 온 게 뻔한 선배 하나를 쳐다보며 고개를 저었다. 그 선배는 안주 하나를 챙겨 들고 신입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가서 엉덩이를 밀어 넣었다. 저거 봐. 애들이 엄청 싫어하는데 굳이 또 껴요 저길.

 

뭐 예전에는 나도 저 틈에 껴서 연애도 해보고 술에 절어보기도 하고 게임의 신도 조금 될 뻔했는데. 이젠 이렇게 뒤에 빠져서 구경하는 게 더 재밌다.

 

 

“왜 그러고 있어?”

“엄마 깜짝이야. 너 어디서 나타났어?”

“음. 형 머릿속?”

“뭐?”

“내 생각하고 있던 거 아니야? 딱 표정이 그래 보여서 내가 나타나 준 건데.”

 

 

동그란 눈이 천천히 깜박거렸다. 짜증 나. 눈을 왜 저렇게 떠? 되게 예쁘게. 얼마 마시지도 않은 술마저 싹 씻기는 듯 정신이 맑아지는 기분에 고개를 돌려버렸다. 여전히 내 앞에 쭈그리고 앉아서 턱을 괴고 생글거리는 전정국을 가만히 보고 있을 자신은 없었다.

 

질문에 대답할 수도 없었다. 본디 거짓말을 못 하는 선량한 성품을 가져서 그렇다. 전정국 말대로 전정국 생각을 좀 하긴 했다. 이건 요즈음 계속 그랬듯 불가항력이었다. 생각하기 싫다고 생각이 안 나는 게 아니라고.

 

게다가 눈에 안 보여야 생각을 안 하든가 좀 쉬든가 할 텐데 사교성 좋고 사회성 좋은 전정국은 엠티방 안을 이리저리 휘저으며 신나게 쏘다니고 있었다. 사람들 틈에 잘 녹아들어 술도 주거니 받거니, 게임도 주거니 받거니 하는 전정국을 안 볼 수가 없었다. 자꾸 눈에 알짱거리니까 생각도 나고 그랬다. 뭐 무슨 생각이냐고 하면 바니바니 당근당근 하는데 당근 받아서 신난 토끼 같고 귀엽긴 하다는 생각이랄까.

 

 

“미쳤다 진짜.”

“응? 뭐라고?”

“어? 아냐. 왜 가서 더 안 놀고 여기 있어.”

“형이 여기 있잖아. 형 보러 왔어. 그새 보고 싶어져서.”

 

 

그렇게 말하고 아예 내 앞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는 전정국을 보면서 그냥 웃어버리고 말았다. 미쳤지. 쟤를 귀여워하고 있어. 덩치도 되게 큰데. 몸도 좋고. 그렇지만 진짜 귀엽게 생기긴 했다. 동글동글. 동그라미 같아. 머리 모양도 동글동글해. 두상도 동글,

 

 

“형. 우리 오늘부터 1일이야?”

“머, 머리. 여기에 뭐 묻었네.”

“아닌데. 그 느낌 아니었는데. 지금 딱 나 쓰다듬은 건데.”

 

 

전정국이 몸을 더 내 쪽으로 숙이며 눈을 게슴츠레하게 떴다. 말도 잘 안 나왔다. 취했나. 박지민 진짜 한물갔나 봐. 뭘 마셨다고 취해, 취하길. 취해서 아무나 막 만지고 그러냐. 와.

 

정신을 차려보니 눈앞의 동그라미를 보다가 나도 모르게 그 머리통을 쓰다듬고 있었다. 새우깡 머리야 뭐야. 왜 나도 모르게 손이 가냐고. 어떻게든 이 상황을 무마해보려 노력했지만 정말 거짓말 같은 거 못하는 성미라 그야말로 곤욕스러운 순간이었다.

 

 

“그런 거 아니야. 진짜 여기 뭐 묻어서 그랬어.”

“형 얼굴 빨간데.”

“나 원래 얼굴 좀 빨개.”

“눈은 왜 못 마주치는데? 나 좀 봐봐. 사람이 얼굴을 보고 얘기해야지.”

“아니. 내가 원래 사람 눈 보는 걸 안 좋아해서 그래.”

“형. 지민이 형. 아 빨리 여기 좀.”

 

“야. 전정국. 누가 술판 슬쩍 빠져서 작업 걸고 있으래. 너 이리 와.”

“억. 윤기 형 잠시만요. 아니 지금 되게 중요한 순간인데!”

 

 

전정국의 손이 내 얼굴로 다가오고 있었다. 열이 훅 오른 볼을 붙잡아 자기를 마주 보게 할 작정인 거 같았다. 그러면 내 얼굴은 더 달아오를 것이고 나도 잘 모르겠는 지금 이 감정을 어떻게 주체하지 못했을 거였다.

 

아주 다행히. 정말 다행히 윤기 선배가 나타나줬다. 빛탐의 구원자이자 해결사인 윤기 선배는 술 취해서 정신 못 차리는 사람이나 집요하게 누군가를 괴롭히는 사람을 붙잡아 모아두고 얌전히 술을 마시던 중이었다. 그 안에는 당연히 김태형도 있었다.

 

벌써 신입들이나 김태형을 못 잊은 기존 회원들이 김태형 옆에 앉아 같이 술이라도 마셔보려고 난리였다. 김태형 역시 모두에게 활짝 웃어주며 만인의 연인을 자처하려던 순간 민윤기가 나타나 김태형을 채갔다. 김태형이 만인의 첫사랑, 만인의 연인이라면 윤기 선배는 만인의 저승사자였다. 왜? 잡히면 죽으니까.

 

 

“더 쉬어라. 얜 내가 데려갈게.”

“아! 형님!”

“누가 니 형님이야. 쓸데없이 넉살만 좋아서. 가 빨리.”

“지민이 형! 이따가 꼭 만나! 다시 만나면 우리 사귀는! 우읍!”

“닥치고 가자. 형님이 이제 좀 힘들다.”

 

 

윤기 선배는 자기가 자리에 없는 틈을 타 다른 술자리에 슬쩍 낀 김태형의 뒷덜미까지 잡아서 끌고 갔다. 산만한 남자애 둘을 한 손에 끼고 유유히 걸어가는 게 멋있기도 하면서 소름 끼치기도 했다. 진짜 저승사자 같네.

 

아무튼 윤기 선배는 동아리 내에서 꽤 무섭기로 소문난 사람이었다. 그래서 김태형을 채가도, 잘 놀고 있던 누군가를 술자리에서 빼내도 다들 뭐라고 반발하지 않고 순응했다. 윤기 선배의 말을 곧이곧대로 듣지 않고 도망가다 잡히기라도 하는 날에는 정말 죽는 날이었다.

 

내가 보기에 선배는 그냥 굳이 정 주지 않는 타입인 거 같았다. 아예 정을 안 주는 건 아니고 줘도 티를 잘 안 내는 거랄까. 근데 오래 알고 지내다 보면 되게 자상하고 웃긴 선배인데.

 

나도 처음엔 윤기 선배를 엄청 무서워했다. 표정도 딱딱하고 목소리도 낮고 말투도 뭔가 무서웠다. 그래서 눈도 잘 못 마주치고 그랬는데. 내가 선배를 덜 무서워하게 된 계기는 내가 전정국만할 때, 그러니까 신입일 때 엠티에서 있었던 일 때문이다.

 

 

 

 

*

 

“아씨 어떡해….”

 

 

머리가 엄청 울렸다. 술을 얼마나 먹은 건지 지난밤 일은 생각도 안 났다. 주위에는 시체 같은 사람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아직 창밖엔 해가 뜨지 않은 시간이었다. 잠에서 깨자마자 엄청난 두통과 구토감이 밀려왔다. 놀라운 능력이 생겨 있었다. 무려 코안에서 술 냄새를 맡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어떤 기억도 안 났다. 토도 하고 싶고, 소변도 보고 싶었다. 근데 화장실이 밖에 있었다. 좀 멀리.

 

 

“아이 진짜루우. 김태형은 어디 갔어.”

 

 

이럴 때 요긴하게 쓰이는 건 김태형뿐이었는데 바닥에 엎어진 시쳇더미에서 찾는 게 불가능했다. 있긴 한 건지 의문스러웠다. 위아래로 죽겠는데 도무지 저 어둠에 홀로 나갈 자신이 없었다. 그때 다시 한번 속에서부터 욱, 하고 구역질이 올라왔다. 더 참는 건 무리였다.

 

 

“괜찮냐?”

“으어어. 아. 선배님.”

“뭘 또 딱딱하게 선배님, 선배님이야. 넌 애들한테 다 그러더, 야 너 괜찮아?”

 

 

다시 한번 토악질이 안에서 욱, 하고 밀려오고 소변도 방광을 터뜨릴 것처럼 날 압박했다. 그걸 참다 보니 모든 몸에서 피가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온몸이 차게 식어갔다. 시체가 되는 간접경험을 하는 느낌이었다.

 

그런 날 보던 윤기 선배가 눈을 크게 뜨고 날 붙잡았다. 그 바람에 몸이 살짝 흔들렸고 정말 죽을 거 같았다. 이젠 생사의 갈림길에 서 있었다. 윤기 선배가 무서운 건 나중 일이었다. 나는 선배의 옷을 붙잡았다.

 

 

“화장실 좀 같이 가주세요. 제발요.”

 

 

 

 

소변도 시원하게 봤고, 토도 시원하게 했다. 급한 불을 처리하고 나니 이 화장실 밖에서 모든 소음을 들었을지도 모르는, 들었다고 확신이 드는 윤기 선배를 어떻게 마주해야 하나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수치심이라는 게 되살아났다. 끔찍했다.

 

 

“야. 지민아. 괜찮냐?”

“어, 어. 네! 이제 나가요!”

“무리하지 말고 다 되면 나와. 여기 있을게.”

 

 

없으셔도 되는데. 하는 말은 차마 못 했다. 아직 밖은 어스름할 거였다. 방까지 혼자 갈 자신은 전혀 없었다. 세면대에 손을 씻어내고 잠시 심호흡을 했다. 천천히 문을 열고 나가자 선배가 피우던 담배를 급히 끄고 날 쳐다봤다.

 

 

“괜찮은 거 맞지?”

“네. 감사합니다. 또 죄송하구.”

“됐다. 뭘. 가자.”

 

 

선배가 몸을 일으켰고 나한테서는 조금 멀찍이 떨어져 걸었다. 그 거리가 무서웠다. 선배도 무섭긴 한데 주위가 더 무서웠다. 뭔지 모를 게 발을 채갈까 봐 두려움에 떨었다. 그래서 몸을 더 선배 쪽으로 붙였다. 옆에서 날 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그, 무서워서요.”

“어?”

“제가 겁이 좀 많아서.”

“…나도 무섭냐?”

“네?”

 

 

느닷없는 질문에 애먼 땅만 보던 고개를 들어 올려 선배를 쳐다봤다. 애꿎은 뒤통수를 긁으며 날 쳐다보는 선배의 모습이 어쩐지 웃겼다. 저 선배가 저런 느낌이었나.

 

 

“좀 무섭긴 해요.”

“내가? 왜?”

“그냥 잘 모르겠는데. 약간 분위기가 그렇달까? 조금 무서워요.”

“무서워하지 마. 나 무서워하는 애들 다 말 안 듣는 애들이야. 말 잘 듣는 애들한테는 잘해줘 나.”

 

 

그 말에 웃음이 나왔다. 줄줄 말을 읊어내는 선배의 모습도 웃겼고, 말 안 듣는 애들이 무서워한다는 말도 웃겼다.

 

 

“왜 웃어.”

“선배 무서워하는 제 친구 생각나서요.”

“누구, 아. 그 김태형? 잘생긴 애?”

“네. 걔가 선배 엄청 무섭댔거든요.”

“딱 인상이 말 안 듣게 생겼더라.”

 

 

그 말에 다시 한번 웃음을 터뜨렸다. 아까보다도 더 큰 웃음이었다. 선배도 웃고 있었다. 윤기 선배의 웃는 얼굴은 처음 보는 거 같았다. 계속 인상을 조금 쓰고 있어서 차가운 느낌이었는데. 웃으니까 완전 다른 사람이었다. 좀 말랑말랑해 보이기도 하고.

 

 

“근데 선배.”

“어?”

“왜 자꾸 딴 데 보고 얘기하시는 거예요? 저 지금 되게 못생겼어요? 쳐다보기도 싫게?”

 

 

그 말에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던 선배가 날 바라보더니 다시 웃었다. 되게 잘 웃는 사람이었구나. 혼자서 깨달음을 얻고 어깨를 살짝 들썩였다. 가만히 서서 잠시 웃은 선배는 웃음을 멈추고 날 쳐다봤다. 아직 얼굴엔 웃음기가 가득 남아있었다.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너 담배 안 피우는 거 같아서.”

“네?”

“아까 너 기다리면서 담배를 좀 피웠거든. 냄새 뱄을 거 같아서. 담배 안 피우는 애들 냄새도 질색하잖아.”

 

 

말을 마치고 가만히 서 있는 내 등을 두어 번 두드린 후에 다시 걸었다. 나도 멍하니 서 있다가 선배를 따라 걸었다. 뭐야. 같이 들어온 신입 애들이나 선배들이나 다 윤기 선배 무섭댔는데. 오히려 되게 자상했다. 다들 말 안 듣는 애들인가.

 

 

“근데 선배. 저 담배 피우는데.”

“어?”

“저 담배 안 피운다고 누가 그래요?”

“아니. 그냥 너 안 피우게 생겨서…. 피워?”

“와 선배 그렇게 안 봤는데 선입견 있으시구나. 외모로 사람 막 평가내리고.”

“아. 아니 나는 그런 게 아니고. 지민아.”

 

 

내 말에 선배가 당황한 듯 걸음도 멈췄다. 날 보는 눈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 멍한 얼굴이 웃겨서 겨우 진지하게 잡아놨던 얼굴 근육을 다 풀어버렸다. 큰 소리를 내며 웃는 나를 선배가 내려다봤다. 아직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거 같았다.

 

 

“농담이에요. 저 담배 안 피워요. 선배 의외로 순진하네요? 표정 진짜 웃긴 거 알아요?”

“야. 와. 나 진짜 놀랐어.”

“그래 보여요.”

 

 

눈을 찌르는 앞머리를 뒤로 넘기면서 다시 웃었다. 자꾸 그 놀란 표정이 생각났다. 어쩔 줄 모르고 무슨 말도 못 하던 입술도 웃겼다. 멍하니 서 있는 선배를 뒤로하고 먼저 걸었다. 하늘도 좀 밝아져 있었다. 뒤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들렸다. 머지않아 선배가 내 어깨 위로 팔을 걸어왔다.

 

 

“이 쪼끄만 게 하늘 같은 선배를 놀려?”

“언제는 선배라고 하지 말라면서요.”

“넌 평생 선배라고 불러라. 와. 진짜. 괘씸해서.”

“근데 선배. 저 선배랑 키 똑같은 거 같은데. 왜 쪼그맣다고 해요?”

“야! 박지민 너.”

 

 

선배가 어깨에 두른 팔에 힘을 줘서 당겼고 그대로 머리를 헝클였다. 졸지에 헤드락이 걸린 채로 머리털을 털리고 있었다. 그마저 웃겨서 괴롭힘을 당하면서도 웃었다. 선배한테는 약한 담배 냄새가 났고 새벽 공기는 시원했다. 꽤 좋은 기억이었다.

 

그 이후로 윤기 선배는 나에게 더 이상 무서운 사람이 아니었다. 내가 말을 잘 듣는 애라서 그런가. 정말 잘 챙겨줬다. 술자리에서 곤란해 보이면 잘 빼줬고 화장실 가기 무서워하는 거 같아 보이면 담배를 피우겠다고 자리를 털고 일어나면서 나를 슬쩍 쳐줬다. 선배의 담배냄새와 함께한 화장실도 꽤 많았지. 다, 추억이다.

 

 

 

 

*

 

어디선가 누가 가져온 술을 나눠 마시며 그때 일을 떠올렸다. 그땐 진짜 풋풋했고 싱그러웠는데. 물론 지금도 그렇겠지만 그때 내던 분위기와 지금 갖고 있는 분위기는 다를 거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씩 달라지고 있을 테니까. 어떤 면에선 성숙해질 거였고 어떤 면에서는 오래도록 서투를 거였다. 그래서 괜히 그때의 나를 추억했다. 이제는 낼 수 없는 그 느낌이 있으니까. 아마 서른이 되면 이 순간의 나를 추억하게 되겠지만.

 

 

그렇게 가만히 있는데 어디선가 노랫소리가 들렸다. 왁자지껄했던 게임판은 이미 사람들의 전멸로 조용해진 지 오래였다. 저마다 이야기를 하거나 그냥 잠자코 쉬고 있었다. 그 조용한 틈에 목소리가 들렸다. 굉장히 담백하고 예쁜 목소리가.

 

 

“쟤 노래 잘한다.”

“…그러네.”

“쟤가 걔 아니야? 너 좋다고 따라다니는.”

 

 

동기의 말에 과자를 집어 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얀 플라스틱 숟가락을 든 채로 노래를 하는 애를 쳐다봤다. 잘생겼고, 예쁘고, 날 좋아한다는 전정국을.

 

 

“근데 쟤는 나이도 어리면서 뭔 저 노래를 부르냐.”

“그래도 되게 잘 하는데 뭘.”

“그건 그래. 근데 명곡은 명곡이다. 저 노래 제목이 뭐더라?”

“지금 부르네.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죽인다. 진짜 잘 부르네. 쟤.”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고개를 끄덕였다. 과자를 집어 입가에 가져다 댄 채로 멍하니 있었다. 진짜 언제 노래를 부르는 거야, 싶다가도 너무 잘 불러서 가만히 감상만 하고 있게 됐다. 저 얼굴에 저 몸매에 저런 노래 실력이면 너무 사기 아닌가.

 

눈을 감고 가만히 노래 부르던 전정국이 천천히 눈을 떴다. 그 끝에 내가 있었다. 아주 잠깐 숨이 멎는 거 같았다. 이상했다. 고백 노래도 아니었는데 벅찼다. 그냥 그 맑은 음성에, 깨끗한 감성에 담겨버린 거 같았다. 취했나 봐. 별생각이 다 드네.

 

 

“야 앵콜! 다른 것도 불러줘. 빨리 뭐하냐 쟤한테 신청곡 넣어.”

 

 

노래를 끝마치자 난리가 났다. 더 불러달라며 온갖 사람들이 말을 붙였다. 박수도 터졌다. 나 역시 가만히 앉아 박수를 치고 있었다. 아직도 멍했다. 노래를 부르던 목소리가 다시 들리는 거 같았다. 전정국은 내 쪽으로 오고 싶어 했던 거 같은데 사람들에게 막혀 결국 몇 곡을 더 뽑아내야 했다.

 

귀찮을 법한데도 사람들이 부탁하는 대로 정성껏 노래를 불러줬다. 노래 부르는 걸 좋아하는지 아는 노래도 많았다. 그 노랫소리를 나도 귀담아들었다. 안주에서 손을 뗀 지는 오래였다. 무릎을 세워 끌어안은 채 술만 마시고 있었다. 근데 달았다.

 

 

“큰일 났다….”

 

 

종이 소주잔을 손에 쥔 채로 무릎 가까이 얼굴을 숙였다. 심장이 뛰었다. 취해서 그래, 취해서. 이건 취해서 그런,

 

 

“형. 우리 나갈까?”

 

 

계속 귓가로 되뇌던 그 목소리가 선명하게 들렸고 심장은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고 전정국과 눈이 마주졌다. 이리저리 살피더니 날 천천히 일으켜 세웠다. 나는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한 듯이 그 애가 이끄는 대로 따랐다.

 

 

“형 취했지. 뭔 술을 혼자 그렇게 마셔. 같이 마시든가. 아무튼 나가서 바람 좀 쐬자.”

 

 

그렇게 얼굴 쓰다듬지 말지. 다정하게, 소중한 걸 잡듯이 내 어깨 감싸지 말지. 나보다 더 키가 커서 목덜미에 뿌린 향수 냄새 맡게 하지 말지.

 

 

“안 추워?”

“…응.”

 

 

찬바람 쐬게 해서 정신이 들게 하지 말지. 알딸딸한 정신에 내가 내 감정 오해했다고 여기게 두지. 이런 기분 느끼게 하지 말지.

 

 

“정국아.”

 

 

왜 결국, 내가 이름을 부르게 만들었니. 정국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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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으시면서 자연스럽게 느끼셨을 수도 있지만 굳이 덧붙여봅니다.

<초록>의 내용적 배경은 실제와 많이 다릅니다.

군대 문제도 없고, 동성애가 특별하게 여겨지지 않습니다.

혹시 읽으시면서 '뭐 이래?' 싶으셨다면 너그러이 이해바랍니다.


어떻게 보면 판타지와도 같은 설정일 겁니다.

매우 현실적인 내용이지만 현실과는 다르기도 합니다.

극의 진행과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매끄럽게 풀어내기 위함입니다.


부디 재미있게, 흥미롭게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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