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래더] 트위터는 @Rather_0613 (舊 새벽의덕후)

[국민] 초록(初錄)

 

 

W.새벽의덕후

 

 

 

1.

 

 

헤비메탈 음악이 나오다가 컨트리 음악이 나오는 정신없는 라디오 소리가 차 안을 꽉 채우고 있었다. 신호가 잘 안 잡히는지 찌직거리는 소리가 드문드문 음악을 끊어내기도 했다. 혼자 바쁜 라디오와는 달리 창밖의 날씨는 고요했다. 우중충하고 흐렸다.

 

거리도 날씨만큼이나 고요했다. 한국과는 느낌이 전혀 달랐다. 식당에도 사람이 가득 차 있는 곳이 없었고, 다닥다닥 붙어 높이 일어선 피곤한 건물들도 없었다. 그 별다른 특징 없는 도로에서 내 시선을 잡아끈 건 노란 껍데기를 쓰고 뻘건 손바닥이 그려진 신호등이었다.

 

노란색이다. 신기해. 한국에서는 시커먼 껍데기를 쓰고 있는 것과 달리 경쾌한 느낌을 내는 신호등에 자꾸 눈이 갔다. 타국에 도착한 후 가장 이국적이라고 느껴진 게 바로 저 신호등이다. 


그렇게 띄엄띄엄 있는 건물들을 지나고 나면 야자수라고 짐작이나 하고 있는 울창한 나무들이 눈에 가득 들어왔다. 전부 초록이었다.

 

 

“날씨가 안 좋네.”

“그러네. 오늘 뭐 할 거야? 날씨가 중요한가?”

“오늘은 그냥 쉬엄쉬엄 보내자. 숙소 체크인 하고.”

 

 

차 안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잠시 고개를 돌렸다가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가족끼리 온 여행이었다. 우리 식구, 엄마 동생네 식구. 나는 이런 여행을 좋아했다. 내 돈이 전혀 안 드니까. 보통 국내 여행을 했는데 이번엔 큰맘 먹고 해외로 여행 온 거였다.

 

스물하고도 몇 살 더 먹었으면서 여전히 부모님 등골을 쪽쪽 빨아먹고 있는 꼴이었지만, 이렇게라도 여행하는 게 좋았다. 뒤에선 숙소 가서 뭐 할지, 뭐 먹을지 이야기가 한창이었지만 난 창밖의 것들에 집중했다.

 

큼직큼직한 리무진. 큰 바퀴 위로 높은 차체를 가진 자동차. 조용한 마트. 판을 덧대 창문을 막아 놓은 낡은 집. 망가진 집들. 그리고 다시 초록. 어느 곳 하나 북적이지 않는 공간의 한적함 그리고 한산함.

 

 

“그럼 오늘은 짐 풀고 저녁이나 맛있게 먹고 쉬는 걸로.”

“난 고기.”

“그래 고기 먹자.”

“술도 먹어요?”

“먹어야지. 외국 나오면 외국 술은 종류별로 다 먹어봐야 하는 거야.”

 

 

엄마의 단정하면서도 단호한 목소리에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 바람에 창문에 살짝 입김이 서렸다. 창에 그러진 둥근 동그라미를 잠깐 봤다가 엄마를 돌아봤다. 나와 눈이 마주친 엄마는 뻔뻔한 미소를 매달아놓고 나를 향해 눈을 찡긋거렸다. 저 아줌마. 주책은.

 

오고가는 대화 속에 몇 마디 참견을 던지고 나서 고개를 저으며 다시 창밖을 봤다. 해외여행을 간다고 아침부터 바빴다. 늦장대장인 우리 집 아줌마와 아저씨 때문에 밤늦게까지 짐을 쌌고, 잠깐 눈만 붙인 후에 새벽에 집을 나섰다. 아마 이모네도 크게 다르지 않을 거였다. 저 집은 우리보다 늦게 도착했으니까.

 

그래서 그런지 다들 새로운 여행지에 대한 기대감보다는 피곤함이 더 가득해 보였다. 피로도 피로였지만, 무언가를 기대하기엔 날씨가 너무 안 좋기도 했다. 해가 날 기미가 안 보이는 하늘을 살펴보면서 미간을 찌푸렸다. 나름 분위기를 띄워보려던 대화도 멎었다. 다시 컨트리 음악이 들렸다. 창문 위로 톡톡 떨어지는 물방울을 가만히 쳐다봤다. 외국 비다.

 

 

 

**

“나 진짜 이거 하라고?”

“해. 여기까지 와서 발만 담그다 갈래?”

“아니 그래도 이건 좀.”

“네 것도 돈 냈어, 이미. 해야 해. 헤이! 테이크 힘!”

 

 

엄마가 하는 어쭙잖은 영어에 내 귀가 다 벌게졌다. 이 아줌마는 부끄럼도 없는지 계속 손을 위로 쭉 들어 올리고 펄럭펄럭 흔들며 헤이! 라고 소리쳤다. 그 말에 이 시설 담당자로 보이는 외국인이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살이 까맣고 다 낡은 옷을 입은 마른 남자였다.

 

 

“여기도 같이?”

“어어. 같이. 투게더!”

“오케오케. 컴. 타요, 타. 앞? 뒤?”

 

 

우리 집 아줌마나 이 사람이나 말도 안 되는 언어를 구사하고 있었다. 내가 듣기엔 우스워 죽겠는데 두 사람은 의사소통이 척척 진행되는 게 신기할 지경이었다.

 

마른 남자는 짙은 갈색의 손을 엄지만 빼고 모조리 말아 쥐고는 트럭을 가리켰다. 앞과 뒤를 번갈아 가리키는 게 어디 앉을 거냐고 묻는 거 같았다. 앞은 트럭 내부에 앉는 거였고, 뒤는 트럭의 뻥 뚫린 트렁크에 앉는 거였다. 사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앞에는 낯선 가족이 타고 있었고, 트렁크에는 우리 집 망아지들이 타고 있었다.

 

뒤를 가리키자 남자가 고개를 끄덕거리며 오케오케, 하는 소리를 했고 트렁크 위에 나를 올려줬다. 다른 사람들의 짐을 피해 조심스럽게 걸어 트렁크 위에 자리를 잡고 걸터앉았다. 나의 등장에 먼저 앉아있던 동생과 사촌이 히죽거리며 웃었다.

 

 

“오빠도 여기 탔네.”

“타래서. 아 무서운데.”

“쫄보. 야. 오빠 쫄았지? 지금?”

“백퍼. 천퍼.”

 

 

동갑내기 여자애 둘이서 키득거리는 걸 보며 전혀 위협적이지 않을 걸 알면서도 주먹을 쥐여보였다. 내 맞은편에 앉아있던 두 꼬맹이들은 주먹도 엄청 작다며 다시금 지들 머리를 맞대고 웃었다. 무슨 말이라도 하려다가 부릉, 하고 차체에 시동이 걸리는 바람에 입을 닫고 옆을 짚었다.

 

이러다 떨어져 죽으면 어떡하지. 머릿속으론 벌써 차가 출발할 때 내가 뒤로 넘어가서 그대로 머리를 박고 옆을 달려오는 차에 치여 죽는 끔찍한 장면까지 떠올랐다. 절로 얼굴이 일그러지는데 반대편 여자애들은 신나서 꺄, 하는 소리를 질렀다. 그러면서 저 너머에서 배를 기다리는 부모님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쟤들은 겁도 없나 봐. 나보다 어리면서.

 

괜히 입술을 구긴 후에 저 먼 곳을 바라봤다. 다른 사람들이랑 섞여 앉는 게 싫어서 뒷자리를 고르긴 했지만 후회하는 중이었다. 낯설어도 그냥 같이 앉을걸. 트럭 뒤 창문으로 부러운 시선이나 넘겼다. 좀 더 부러워하려고 했는데 도로로 빠져나간 차가 미친 듯이 달리는 바람에 모든 생각이 씻겨 나갔다.

 

 

“우아아! 이거 대박 재밌어!”

“야야. 모자모자. 그냥 손에 잡아.”

“미친 뺨 맞는 기분이야. 완전 웃겨!”

“좋냐? 변태들.”

“오빠가 쫄보인 거거든?”

“맞아. 이 쫄보야 눈 좀 떠!”

“다 뜬 거야!”

 

 

소리를 빽 질러가며 말하긴 했지만 사실 눈을 반 이상 감은 채 제대로 뜨지 못한 상태이긴 했다. 어쩔 수 없었다. 어느 쪽을 바라봐도 미친 듯이 불어오는 바람을 피할 수 없었다. 더운 나라라 세찬 바람이 춥게 느껴지진 않았지만 거슬리긴 했다. 그 누구도 바람이 이정도로 셀 거라고 설명해 준 사람은 없었는데. 괜히 입으로 푸, 푸 하는 소리를 내며 바람에 맞섰다.

 

금방 도착한다고 했는데 체감 시간으론 삼십분은 족히 달린 거 같았다. 바람의 소리와 여자애들이 꺅꺅대는 소리가 정신을 쏙 빼놨다. 촉각과 청각에 닿는 짜릿한 감각으로 미루어 봤을 때 마치 이게 이곳에서 준비한 레크리에이션인 거 같았다. 차가 멈췄다. 내리기도 전에 벌써 지쳐있었다. 그때 덩치 좋은 남자가 차체를 손으로 세게 쳤다.

 

 

“내려, 내려요!”

“우와! 야. 저기 봐. 우리 저거 하는 건가 봐.”

“저거? 저거 맞아. 오케. 재밌어.”

“재밌어요? 아싸.”

 

 

얘들은 나와도 일행이면서 자기들끼리만 팔짱을 끼고 둘이서만 앞으로 쏙 가버렸다. 우리가 하기로 한 활동은 트렁크 뒷좌석에 타기가 아니라 페러세일링이었다. 그러니까 배에 매달려서 하늘을 붕붕 나는 그거.

 

나는 겁은 좀 많은 편이긴 했지만 체험활동 같은 건 두 눈 꾹 감고서라도 해보는 편이었다. 그냥 두 눈으로만 보고 말기엔 아쉽고 아까운 것들이 많았으니까. 그래서 이것도 울며 겨자먹기 심정으로 나오게 된 건데. 하늘 위를 붕붕 날아다니는 낙하산을 보자마자 침이 꼴딱꼴딱 넘어갔다. 건장한 남자가 안내한 곳을 따라가니 작은 선착장이 나왔다. 배를 기다리는 거라고 했다.

 

트럭 앞자리에 앉아있던, 내가 부러워한 일행은 한 가족이었다. 부모님과 아들 한명. 이 팀도 우리와 같은 배를 타는 건지 같은 곳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우리는 가져온 짐이 하나도 없었는데 저쪽은 챙겨온 게 많았다. 바닥에 놓은 짐들을 흘긋대며 관찰하다가 그 짐의 주인들을 다시 쳐다봤다. 중년 부부와 내 또래로 보이는 남자애였다. 키가 크고, 잘생긴 남자애.

 

 

“여기 타요. 컴 히어. 조심조심. 위험해.”

“네에!”

 

 

여자애들은 둘이 손을 꼭 잡고 배에 먼저 올라탔다. 나는 배 안에서 대기하고 있던 사람의 손을 붙잡고 조심해서 배에 올라탔다. 자리를 잡고 앉으니 중년 부부가 탔고, 그 뒤로 내 또래의 남자애가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배 안으로 내려섰다. 아, 나도 혼자 탈걸. 


저 남자애는 모르겠지만 처음 본 이후부터 나 혼자 이상한 경쟁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애꿎은 코만 만지작대면서 속으로 툴툴거리다 다시 그 남자를 쳐다봤는데 눈이 마주쳤다. 뭐야. 왜 쳐다봐.

 

 

“앉아요. 앉아. 씻.”

“오케오케.”

“굿. 좋아요. 이제 출발.”

 

 

직원의 말에 마주쳤던 시선이 다른 방향으로 쪼개졌다. 곧이어 배가 위태롭게 흔들리며 출발하는 탓에 남자의 시선 같은 건 금세 잊었다. 배가 움직이자 아까 트럭 위에서처럼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이번엔 옆에서 물까지 튀었다. 으이씨, 하고 험한 소리가 목을 간지럽혔지만 무서움에 이를 악 물고 있느라 입 밖으로 소리가 나진 않았다.

 

난 무서워 죽겠는데 여자애들은 뭐가 좋은지 팔을 배 밖으로 쭉 뻗으며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배가 육지에서 멀어지고 바다 안으로 더 들어가자 누군가 구명조끼를 들고 나왔다.

 

 

“투. 저스트 투.”

“투? 아아 두 명?”

“예스. 두 명. 두 명씩 타요.”

“어머, 어떡해.”

“퍼스트. 누구? 누구 타요?”

 

 

말을 하는 사람의 손에는 단 두 개의 빨간 구명조끼만 들려 있었다. 여기 있는 사람이 총 여섯 명이니까 둘씩 타면 숫자상으로는 짝이 맞긴 했지만 중요한 건 일행이 두 팀이라는 거다. 그 말인 즉, 누군가는 다른 일행의 사람과 짝을 맺어서 낙하산에 매달려야 한다는 거였다. 등줄기가 서늘했다. 바닷바람 때문은 아닌 것 같았다.

 

두 개의 구명조끼를 바라보던 눈을 여자애들에게 옮겼다. 걔들도 날 보고 있었는지 눈이 마주쳤고 그러자마자 둘은 동시에 씩 하고 웃었다. 본드로 붙여놓은 것처럼 찰싹 달라붙어 있던 여자애들은 손을 번쩍 들었다.

 

 

“우리 둘! 우리 둘이 먼저!”

“야.”

“그럼 내가 오빠랑 타야 해?”

“나도 싫음. 박지민이랑 타기 진짜 싫음.”

“아 진짜.”

 

 

더욱 딱 붙어서 나를 놀리더니 다시 지들끼리 마주보고 웃었다. 십 대는 십 대네. 바닷물 튀는 것만 봐도 웃는 나이인 거 같았다. 깊게 숨을 내쉬며 어느새 좀 젖어버린 머리를 매만졌다. 다른 일행도 회의를 하는 거 같았다. 그 이야기에 집중했다. 저들 중 누군가는 나와 타야했다.

 

 

“어떡하지?”

“당신이 얘랑 탈래?”

“그럼 당신은?”

“저쪽 분이랑 타야지 뭐.”

 

 

내 시선은 쪼리 사이로 삐져나온 발가락을 보고 있었지만 귀는 저쪽에 붙어있었다. 대화를 들어보니 아주머니랑 타는 일은 없을 거 같았다. 저 집 아저씨와 타게 되든 또래 남자애와 타게 되든 둘 중 하나였다. 대화의 흐름이 왠지 아저씨와 타는 방향으로 가던 때였다.

 

 

“엄마랑 아빠 둘이 타.”

“응?”

“오랜만에 놀러 왔는데. 두 분이서 타세요.”

“그럴까?”

“그래주면 고맙지.”

 

 

그 말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고 다시 그 남자애와 눈이 마주쳤다. 급히 쪼리로 시선을 돌리고 괜히 발을 굴렀다. 기분 이상해. 그렇게 각자 일행마다 결정을 끝냈고, 우리 쪽 시끄러운 애들이 먼저 일어섰다. 배는 바다 한 가운데 멈춰있었고, 애들은 배 앞쪽으로 걸어갔다.

 

구명조끼를 들고 있던 사람은 애들을 앞뒤로 나란히 세웠다. 그리고 왠지 엉성해 보이는 줄을 다리사이에 끼우게 하고 몸에 고정시킨 뒤 앉게 했다. 좋다고 손바닥을 마주치며 웃는 애들을 보며 나는 울상을 지었다. 배에 매달린 낙하산을 타는 것도 무서운데 저걸, 저런 자세를 처음 보는 남자랑 해야 하다니.

 

직원이 시키는 대로 옆에 매달린 줄을 붙잡고 기대감에 발을 동동 구르는 애들을 보다가 슬쩍 옆을 쳐다봤다. 나랑 함께 저 낙하산을 타게 된 남자는 시끄러운 여자애들을 보며 웃고 있었다. 쟤 뭐야. 짜증나게 잘생겼네. 같이 타면 비교되겠지. 나보다 키도 크고 덩치도 좋던데. 잠깐 그 사람을 쳐다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남자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거 같아서였다. 왜 자꾸 날 쳐다보는 거야. 물론 나도 보긴 했지만.

 




 

“와. 완전 재밌어.”

“오빠도 진짜 꼭 해!”

“해야 하거든.”

“진짜 대애박. 엄마한테 자랑해야지.”

“나도 나도. 오빠 내 신발.”

 

 

낙하산에 대롱대롱 매달렸던 애들이 다시 배 위로 올라왔다. 얘들이 타는 걸 보고 나는 거의 절망한 상태였다. 엄청 높이 올라간 낙하산은 어느 순간 바닥으로 서서히 내려왔다. 바다를 질주하던 배가 멈추면 그랬다. 하늘 위에 매달려있던 사람들은 서서히 바다 속으로 담금질을 당했다. 나름 재미를 줘보겠다고 장난을 치는 거였다. 저런 거 재미 하나도 없는데.

 

여기는 따뜻한데 하늘 위는 춥다며 오들오들 떨고 있는 애들한테 신발을 건네줬다. 맨발로 타는 거라서 미리부터 신발을 벗겼다. 곧 중년 부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은 여자애들을 보며 흐뭇하게 웃고 있었다. 다정해 보이는 부부는 서로 손을 맞잡고 배 앞까지 갔다. 보이는 것보다도 더 다정하게 앞뒤로 자리하고 낙하산을 붙잡았다. 저 낙하산이 올라갔다가 내려오면 이제 우리 차례였다. 아니, 나랑 저 남자 차례. 언제 봤다고 우리야.

 

 

“잘 다녀오세요.”

“아들 안녕!”

“갔다 올게.”

 

 

서로 혼을 흔들며 보기 좋게 인사한 세 사람이 곧 헤어졌다. 두 사람이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까 가슴을 짓누르며 긴장감이 돌았다. 저 두 분은 어른이라 그런지 바다에 많이 빠뜨리진 않았다. 이 나라에도 공경, 뭐 그런 게 있나.

 

어쨌든 하늘을 시원스레 날던 낙하산이 배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배에 타고 있던 직원 하나가 우리 둘을 가리키며 일어나라고 했다. 내가 울상을 지을수록 우리 쪽 여자애들은 배를 잡고 폭소했다.열심히 걔들을 흘겨봤지만 위협은 전혀 안 되는 듯 했다.

 

 

“잘 갔다 와라 박지민!”

“울지 말고!”

 

 

이씨, 하는 말을 나직하게 내뱉은 후에 배 앞으로 다가갔다. 이왕이면 내가 뒤에 자리하고 싶었는데 직원은 너무나 태연하게 나를 앞자리로 안내했다. 약간의 반항으로 가만히 쳐다보고만 있자 웃으며 정확하게 앞을 가리켰다. 그 완고함에 입술을 비죽이며 앞에 서서 다리 사이에 줄을 끼워 넣었다.

 

그러고 있으니 뒤에 누가 다가와서 서는 게 느껴졌다. 남자의 체격이 워낙 좋아서 든든한 느낌도 있었지만 그것 보다는 낯선 사람이라는 데서 오는 민망함이 더 컸다. 게다가 이렇게 친근감 넘칠 자세일 건 또 뭐야.

 

 

“여기, 여기 잡아.”

“네에.”

“바이바이.”

 

 

친절하게 손까지 흔들며 씩 웃는 직원을 향해 나도 손을 좀 흔들었다. 물론 낙하산 줄을 단단히 잡은 채로 손가락 몇 개만 펴든 모양이긴 했다. 내 다리 옆으로 뒤에 앉은 남자의 다리가 보였다. 뚱뚱하지도 마르지도 않은 탄탄한 다리였다. 나도 한 다리 한다고 생각했는데 옆에 두고 보니 좀 가냘파 보이기도 했다.

 

 

“으으. 뜬다. 뜬다아.”

 

 

점점 배 뒤로 밀려나는 낙하산에 눈을 질끈 감고 손잡이를 붙든 손에 힘을 꽉 주었다. 울먹이는 소리를 내자 뒤에서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웃냐? 웃기냐? 두고 봐. 진짜 내리고 보자. 그런 생각을 하며 생명줄처럼 느껴지는 줄을 더 꽉 잡았다. 뒤로 밀려난 낙하산 덕에 발이 바닷물에 닿았고 차가운 물이 닿자마자 두 다리를 위로 들어 올렸다. 무서워.

 

 

“무서우세요?”

“네? 아, 네 조금.”

“잡아드릴까요?”

“예? 뭐를요?”

 

 

질문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남자가 내 손을 감싸서 붙잡았다. 이 남자는 겁도 없나 봐. 지금 자기 손잡이에서 손을 뗐던 거지? 내 손 잡으려고. 내 손 위를 둥글게 말아오는 손을 슬쩍 쳐다봤다. 이 남자의 손이 꽤 커서 내 손이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잠깐 그 손을 보며 이상한 감정을 느끼다 정면을 보고 기함했다. 방심했다. 남자의 손을 관찰하는 사이 낙하산이 생각보다 더 높이 떠 있었다. 눈을 감아버렸다. 안 보는 게 나았다.

 

 

“으으. 너무 높다아아. 추워.”

“추우세요?”

“네? 아, 네 조금.”

 

 

대체 왜 이렇게 관심이 많고, 내가 하는 말마다 참견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무안할까 봐 나도 대꾸를 다 해주긴 했다. 내가 고개를 조금 끄덕이자 내 허벅지 쪽이 단단하게 조여왔다. 이게 무슨 느낌이야.

 

질끈 감은 눈을 뜨자 내 다리 위에 낯선 다리가 엉겨 붙어 있었다. 아니 춥다니까 이 사람이 지금 뭐하는 거야.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뒤의 남자는 아예 본격적으로 몸을 붙여왔다. 자기 다리로 내 맨다리를 감싸고 있었다. 도대체 뭘 하는 거냐고 따져 묻고 싶었지만 참았다. 참을 수밖에 없었다. 낙하산이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위로 자꾸 떠오르고 있었다.

 

결국 다시 으으, 하는 소리를 내며 이를 악 물었다. 그때 저 밑에서 열심히 달리던 보트가 서서히 속도를 늦췄다. 아무래도 그 때가 온 거 같았다. 바다 속 체험 시간.

 

 

“으아아. 안 돼애.”

“괜찮아요. 죽진 않을 거예요.”

“에?”

“어어. 빠진다. 빠진다.”

 

 

엄청 가까운 뒤에서 들린 낯선 사람의 목소리는 귀뿐만 아니라 별 곳을 다 간지럽게 만들었다. 서서히 낙하산이 속도를 잃고 떨어지더니 내 엉덩이가 차가운 바닷물을 만났다. 어깨 정도까지 빠졌는데, 옆으로 이는 물방울이 하도 세차서 머리끝까지 홀딱 젖었다. 우리가 빠지자 다시 속도를 낸 보트 덕에 물먹은 궁둥이가 축축하게 떠올랐다.

 

 

“으악!”

“괜찮아요?”

“저, 저, 저기. 저기요!”

 

 

물에서 떠오르자마자 악, 하고 소리를 질러야 했다. 세차게 내달려 다시 위로 떠오르는 낙하산 탓도 있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건 내 엉덩이에 닿는, 축축한 궁둥이로 느껴지는 ‘그것’ 때문이었다.

 

 

“왜 그러세요?”

“아니, 저기 지금 혹시!”

“네! 빨리 말하세요. 또 빠진다. 어어어.”

“서, 섰. 으아악!”

 

 

엉덩이에 질펀하고 단단하게 느껴지는 이 느낌은 분명, ‘그것’일 거였다. 그거. 나도 있긴 하고 가끔 깨어나긴 하지만 그래도 때와 장소를 분명히 알고 있는 점잖은 녀석. 그거. 중요한 거기.

 

근데 내 엉덩이에 닿아있는 ‘그것’은 때와 장소를 전혀 구분하지 못하는 거 같았다. 섰냐고 묻자마자 다시금 낙하산이 떨어지고 바닷물에 빠지는 바람에 눈을 질끈 감고 소리를 내질렀다. 다른 팀들 전부 한 번만 담갔으면서! 왜 우리! 아니 나는 두 번이야!

 

그렇게 두 번째 담금질을 당하고 떠오르자마자 나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아까보다도 더 밀착되어 있었다. 내 엉덩이와, ‘그것’과.

 

 

“죄송해요. 떨어져서 잘 못 들었어요!”

“저, 그러니까. 지금 그쪽 그게!”

“네? 뭐가요!”

 

 

귀 옆으로 바람소리가 시끄럽게 지나다니는 탓에 뒤의 남자나 앞의 나나 악을 쓰고 있었다. 나는 보이지 않는 뒤를 향해 얘기하느라 그렇다고 쳐도, 이 남자는 왜 내 귓가에 다고 소리를 빽빽 지르고 있는 건지 몰랐다.

 

나는 여러모로 자극적인 감각에 눈을 질끈 감았다. 아씨 이걸 다시 어떻게 말해. 뭐라고 말해. 고민하는 와중에도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리는 몸이 우리의 소중한 부위들을 부드럽게 비벼주고 있었다. 점점 더 아찔해져오는 감각에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리고 결국 소리를 질러버렸다.

 

 

“그쪽의 거기가 자꾸 엉덩이에 닿거든요?”

“네?”

“거기가, 거기가 섰, 그러니까 선 거 같아요!”

“저 안 섰는데!”

“아닌데요!”

“아니 제 건 제가 잘 알죠! 저 안 섰어요! 정말!”

 


정말 안 섰다고? 그럼 내 엉덩이에 닿는 이게 그냥 노멀한 상태의 그거라는 거야? 와 여러모로 박탈감 느끼게 하는 남자네.

 

나는 슬쩍 뒤를 돌아보려다가 말았다. 자존심이 상했다. 괜히 더운 숨을 훅훅 불어내며 앞에서 밀려오는 바람을 느끼고 있었다. 엄마야, 엉덩이는 엉덩이고 이거 너무 무서워.

 

 

“그, 불편하다면 미안해요!”

“에? 아, 아니에요. 제가 더 죄송합니다!”

“아니요! 제가 죄송하죠! 정말 선 건 아닌데. 사람이 좀 흥분하다보면 곧추서는 경향이 있잖아요!”

“네? 뭐가 서요?”

“예?”

“아. 아아. 아니에요! 으아악!”

 

 

미쳤나 봐. 아니 이 남자는 대체 왜 말을 그런 식으로 하는데? 다른 여러 가지 표현들도 많잖아. 근데 굳이, 굳이! 이 상황에서 곧추선다는 표현을 써야 해? 


불평이 턱밑까지 차오르고 있는데 다시 낙하산이 밑으로 떨어지기 시작했고, 또다시 물에 온몸을 담가버려야 했다. 바다는 새파랬고, 내 얼굴은 보지 않아도 새빨갰다.




----------------------------------------------

네 그렇습니다. 또 새로운 글이에요.

그냥....이것도 써놓은 지는 좀 됐는데 언제 올릴까 하다가 그냥 올립니다.

....단편은 아닐 거 같은데 그렇다고 장편도 아닐 거 같아서

일단 단편에 올립니다. 

뭐 두고 보다가 <중편>카테고리를 만들 수도 있을 거 같아요.



얘는 그냥....네 다음 편을 보신 후에 이야기 나눠봅시다!(..!)

'중편 > [국민] 초록(初錄)'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국민] 초록(初錄) 4  (2) 2018.01.31
[국민] 초록(初錄) 3  (0) 2018.01.29
[국민] 초록(初錄) 2  (8) 2017.08.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