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래더] 트위터는 @Rather_0613 (舊 새벽의덕후)

[국민] 초록(初錄)

 

 

W.새벽의덕후

 

 

 

2.

 

 

여행은 여러모로 잘 끝났다. 페러세일링에서 수치스러운 일이 있긴 했지만 그 이후로 이어진 여행들은 다 괜찮았다. 안 좋았던 첫날의 날씨와는 다르게 날이 깨끗하게 풀려서 놀기 좋았고 맛있는 것도 많이 먹었다.

 

한국에 다시 돌아오고 나서도 한참 동안 여행의 여운에 휩싸여 있었다. 아련한 마음으로 여행을 되짚다가도 한 번씩 엉덩이에 질펀한 감촉이 느껴져서 소름이 끼치긴 했다. 그런 나날을 보내다 보니 개강날이 왔고, 꽤 재빠르게 쏘다니는 시간을 따라잡으며 바쁜 나날들을 보냈다.

 



“야, 박찜. 오늘 갈 거지?”

“뜬금없이 뭔 소리야.”

“우리 동아리. 오늘 개파한대.”

“뭔 동아리가 개파를 해.”

“그래도 학교에서 제일 큰 동아리잖아.”

 

 

그렇게 말하며 내 어깨를 팔걸이 삼아 감싸는 김태형을 쳐다봤다. 같이 걷는 내내, 그리고 얘를 알아온 내내 주위에선 잘생겼다고 난리였는데 나는 잘 모르겠다. 하도 봐서 그런가. 얘의 잘생김은 좀 익숙했다. 


뭐라 설명해야 할까. 잘생긴 건 알겠지만 왜들 그렇게 난리인가 싶달까. 그냥 주위에서 잘생겼다고 하니까 그렇구나, 할 뿐이었다. 내가 얘 얼굴을 너무 많이 봐서 그런가. 아무튼 김태형이 그 유명하게 잘생긴 얼굴로 빵긋빵긋 웃으며 내 어깨를 붙잡고 흔들었다. 아, 술 마시는 거 싫은데.

 

 

“가자아. 응? 가자고오.”

“징그럽게 왜 이래.”

“남준 형이 너 꼭 데려오랬거든! 이건 사명이야.”

“웃기시네. 니가 날 꼭 데려가겠다 했겠지.”

“얼, 우리 지민이 천잰데?”

 

 

짙은 눈썹을 까딱거리면서 능글맞게 웃은 김태형은 다시 내 어깨를 붙잡고 나를 흔들었다. 아무래도 여기서 안 가겠다고 하면 하루 종일 나한테 매달려서 칭얼댈 게 뻔해서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내 고갯짓에 김태형이 펄쩍펄쩍 뛰면서 내 주위를 돌아다녔다. 얘는 대체 사람이야, 개야.

 

 

“가는 거다. 간다고 한 거다!”

“알았다고.”

“너 오늘 시간표 나랑 똑같은 거 알지? 어떻게든 못 빠져나간다.”

“넌 니 전공이나 잘 하지 왜 남의 전공까지 들어서 난리야.”

“뭐 어때. 아, 예쁜 애들 많이 들어왔겠지? 응?”

“이번엔 사고 치지 말아라. 또 전처럼 여자 남자 안 가리고 꼬시고 다니다간 윤기 선배한테 죽고 말 거다.”

“에이. 윤기 형 이제 취업반인데 그런 거 신경이나 쓰겠냐?”

 

 

여유롭게 말하는 김태형을 보면서 고개를 저었다. 윤기 선배는 우리 동아리의 지난 회장으로 김태형 때문에 진짜 엄청 고생했었다. 나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잘생긴 김태형에게 동아리에 들어온 신입 회원 중 절반이 고백했다. 얘는 그 어떤 고백도 받아주지 않았지만 모두에게 두루두루 잘 해줬다. 어떻게 단 한 명에게만 잘해줄 수 있냐며 박애주의를 공표하고 다녔다.그런 의미로 쓰이는 박애주의가 아닐 텐데. 


아무튼 김태형에게 홀려도 제대로 홀린 신입 애들끼리 싸움이 터졌고 그거 때문에 동아리가 파탄 직전까지 갔다. 그걸 수습하느라 회장이었던 윤기 선배가 엄청 애썼다. 우는 애들 달래고, 동아리 홈페이지에 김태형이랑 찍은 사진 도배하는 애들 말리고. 그때 윤기 선배 진짜 불쌍했는데.

 

이번엔 그 일을 남준 선배가 떠안을 게 훤히 보였다. 불쌍해.

 

 

“야. 너 때문에 지난 기수가 절반 넘게 나가서 선배들이 얼마나 고생했는줄 아냐?”

“그게 왜 나 때문이야. 본인들 선택인데.”

“와. 넌 진짜.”

“응? 나 뭐?”

“아니다. 됐다.”

 

 

쓰레기다. 라고 말하려다가 말았다. 만일 그렇게 말했다면 ‘나 같은 쓰레기면 벌써 누가 주워서 곱게 모셔놨을걸?’ 하는 뻘 소리를 할 거였다. 그래서 그냥 입을 다물고 김태형보다 빠르게 걸었다. 줄곧 내 뒤로 계속 따라붙으며 왜, 뭔데!를 반복하던 김태형은 지나가던 잘난 새내기를 보고 눈짓하느라 입을 다물었다. 아무래도 이번 개파도 망한 거 같았다.

 

 



_

진짜 망했다.

 

 

“안녕하세요. 이번 신입 기수로 들어온 전정국이라고 합니다.”

“이야, 잘생겼네. 몇 학번?”

“너희보다 두 학번 어리더라.”

“잘 부탁드립니다.”

 

 

휴양지에서 스쳐지나가는 거라고 생각했던 ‘그것’의 주인이 내 눈앞에 있었다. 내가 벌써 3년을 몸담은 동아리의 후배로. 언제나 인체의 미학을 추구한다고 떠벌리고 다니는 김태형은 벌써 그에게 치근대고 있었다. 당연했다. 가만히 서 있는 눈앞의 남자는 완벽한 신체를 가지고 있었다. 눈을 반짝이며 침이라도 흘릴 기세의 김태형을 감시하던 남준 선배는 김태형 옆에 바짝 붙어 서서 간략한 정보만 알려주고는 걔를 데리고 떠났다. 대체 왜. 데리고 갈 거면 나도 데려가지.

 

저 멀리 떠나가는 두 사람을 아련하게 바라봤다. 내 앞에서 날 빤히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져서 두 사람이 보이지 않아졌음에도 계속 봤다. 이제부터 뭘 해야 할지 답이 안 나왔다. 앞에서 큼큼, 하고 헛기침을 하는 소리가 들렸고 나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봤다. 아, 등신.

 

 

“오랜만이에요.”

“네? 저 기억해요?”

“당연하죠. 저희가 좀 특별한 걸 맞댔었는데. 어떻게 잊어요. 혹시, 저 잊으셨어요?”

“뭔데. 너네 뭐 맞댔는데 뭐가 특별했는데!”

 

 

남준 선배에게 끌려간 김태형이 어디선가 튀어나와서 우리 주위를 방방 뛰어다니고 있었다. 그 덕에 조용하게 넘겨보려고 했던 게 개파 장소에 전체 공개가 되어 버렸다. 김태형은 어디서나 존재감이 뚜렷했고, 이 장소에 들어서면서부터 모두의 이목을 잡아끌고 있었다. 그래서 이 새끼가 이렇게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소리를 지르며 뛰어다니면 모두가 이곳에 집중했다.

 

전정국은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김태형을 쳐다봤고, 나는 그런 전정국을 쳐다봤다. 여전히 눈꼴 시리게 잘나긴 했다.

 

 

“야. 김태형 너 이리 안 와?”

“아 왜! 왜 나한테만 그러는데!”

“저 새끼한테 개파 일정 알려준 새끼 누구야! 썅. 야 호석아. 윤기 형 아직이래? 김태형한테는 민윤기가 쥐약인데.”

“민윤기 부르지 마라! 하지 말랬다!”

“왔다 민윤기. 김태형 딱 거기 서. 어딜 가. 너 진짜 정신 안 차리지.”

 

 

정신을 차리려야 차릴 수가 없었다. 술집에 들어서자마자 김태형의 멱살을 쥔 윤기 선배는 내 머리통을 가볍게 톡톡 치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그리고 미친 듯이 뛰어다니는 잘생긴 망아지를 붙잡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윤기 선배에게 제대로 인사도 하지 못하고 끌려가는 김태형을 애잔하게 바라본 뒤에 다시 정면을 쳐다봤다. 눈앞의 그를 보자마자 엉덩이에도 다시금 그 축축한 느낌이 느껴졌다. 축축하고, 차갑고, 질펀하고, 단단한. 그런 느낌. 전정국은 그 소란 틈에서도 나를 가만히 보고 있었다.

 

 

“저는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늦었어요. 아까 아는 척 다 했는데 뭘.”

“이 학교 다녀요?”

“네.”

“언제부터요?”

“스무 살부터요.”

“이 동아리는 왜 들었어요? 혹시 제 스토커예요?”

 

 

빠르게 대화가 오가다가 멈췄다. 내 마지막 말에 전정국이 웃음을 터뜨렸기 때문이다. 탁 터지는 시원한 소리를 내며 웃은 전정국은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몸도 못 가누고 웃었다.

 

 

“아. 진짜 웃겼다. 웃기긴 했는데 너무 갔어요. 저 그 정도 또라이는 아니에요. 이 동아리 우연히 들었어요. 학교에 소문이 워낙 자자하잖아요. 그래서 든 건데 다시 만났네요. 운명처럼.”

 

 

상냥하게 웃으면서 남자는 날 향해 손을 뻗었다. 내 쪽으로 가까이 다가온 손을 보고 있으니 그때 내 손 위를 덮었던 느낌이 떠올랐다. 축축했고, 단단했고. 엉덩이 느낌이랑 별로 다를 게 없네.

 

내가 감상에 젖어있느라 멍하니 있으니 전정국이 날 향해 다가왔다. 그리고는 내 손을 붙잡아 올려 자기 손과 강제로 악수시켰다. 얼결에 맞잡은 손이 위아래로 흔들렸다. 흔들리는 손을 가만히 쳐다봤다.

 

작은 술집을 통째로 빌려 우리 동아리만 오롯이 쓰고 있어서 엄청 소란스러웠다. 분명 전정국을 소개받기 전만해도 그랬다. 그런데 그 소음이 다 어디로 날아가 버렸는지 이 공간이 지나치게 조용한 거 같았다. 맞잡은 손에서 느껴지는, 그때와 조금 다른 감촉도 마주 본 얼굴도 전부 느긋하게 와 닿았다. 그때 여행에서 이 사람 얼굴을 계속 피했다고 생각했는데, 너무도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사귀어요. 우리.”

“에, 네?”

“민윤기 욕하지 말라고! 미친! 박지민 고백 받았다! 여기 보세요! 고백의 현장입니다!”

 

 

전정국이 대뜸 내뱉는 말에 날뛰고 있는 저 김태형보다도 더 미친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구석에서 윤기 선배에게 신랄하게 욕을 먹고 있었을 김태형은 천둥벌거숭이처럼 뛰어다니다가 하필, 하필 저 말을 들었다. 나에게 온 고백을.

 

공간을 지배하는 김태형의 외침에 북적거리던 실내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나는 제발 김태형이 저 멀리 꺼지길 바랐고, 이 앞의 남자가 이 고요 속에서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기를 바랐다. 고작 두 번 만난 사람의 고백을 어떻게 받아. 

 

 

“잊히지가 않더라고요. 그쪽의 엉,”

“미친! 미친! 대미친! 빛탐 예쁜이 박지민, 빛탐 신입 전정국한테 고백받았다!”

“미친 새끼야. 좀 닥쳐봐.”

 

 

내가 바랐던 아주 간단한 두 가지 소원 모두 철저하게 신에게 외면당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전정국이 ‘그쪽의 엉덩이’하고 말하려던 찰나 김태형이 날뛰어줬다는 거다. 진짜 미친 새끼들 사이에 있으려니까 돌아버릴 것 같았다. 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그러니까 사귀어요.”

“아니 저기, 나는.”

“그쪽 아니. 박지민 선배는 나 잊고 지냈어요? 그럴 수가 있나.”

 

 

왠지 말의 뉘앙스가 우렁찼던 나의 노멀한 중요부위를 잊었냐는 것 같았다. 내가 김태형 대신 날뛰고 싶었다. 이 사람이 앞에 있으면 자꾸 엉덩이가 축축해지는 거 같았고, 또 묵직하게 무언가 닿는 느낌이었다.

 

잊었을 리가 없었다. 잊어버렸다면 지금 이 순간 이렇게 분명하게 그 감각을 떠올리지도 못했겠지.

 

 

“근데 지금 분위기를 보아하니 선배님이 너무 부담스럽긴 하겠네요. 이렇게 공개 고백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그걸 이제야 생각한 거예요?”

“그러게요. 그럼 같이 술이나 마셔요. 마셔보다가 다시 얘기하죠.”

“아 왜! 박지민 대답해! 대애 답! 해! 대! 답!”

“야. 김태형. 넌 이리 와. 이새끼야.”

“민윤기 좀 누가 보내라고! 자꾸 나한테 욕한다고! 심한 욕! 진짜 심한 욕!”

 

 

이 정신없는 상황 속에서 문득 깨달은 건, 여전히 전정국과 손을 맞잡은 상태라는 거였다. 그 손을 빼려고 했는데 전정국이 다른 손으로 내 손을 붙잡으며 나를 근처 테이블로 데려갔다. 그리고 딱 나있는 두 자리에 나란히 앉았다.

 

나는 여전히 멍한 상태였다. 민윤기를 몰아내라며 난동을 부리는 김태형 때문에 정신이 없기도 했고, 잡은 손을 여전히 놓지 않고 오히려 주물럭거리기까지 하는 전정국 때문에 당황스럽기도 했다. 내 손을 잡고있는 사람은 테이블에 술잔을 깔더니 친히 잔에 술까지 따라줬다. 그리고 멍한 내 손에다가 잔을 쥐여줬다.

 

 

“마셔요. 우리의 첫 잔.”

 

 

제멋대로 맞춰오는 바람에 의도치 않게 전정국과 건배를 했다. 그리고 본능처럼, 21세기의 대학생답게 잔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잔 든 손을 입으로 가져갔고 잔에 있는 술을 모조리 털어 넣었다. 목을 쑥 훑고 지나가는 술 맛이 쓴 것도 느끼지 못했는데 다시 잔이 채워졌다.

 

 

“술 잘해요?”

“아니요. 잘 못해요.”

“아, 말 놓아요. 선배님.”

“네? 아, 어. 그래.”

“말 잘 놓네. 그런 김에 한잔 더. 짠.”

 

 

어쩐지 내가 말을 놓자마자 저쪽에서도 말을 놓은 거 같았지만 여전히 멍한 상태였기에 주는 대로 족족 받아 마셨다. 내가 지금 누구랑 있는 거지. 여행 갔을 때 봤던 그 사람이 맞나. 이상하게 엉덩이가 축축한 거 같은데. 이 기분은 대체 언제 사라지는 거지.

 

 


**

 

“일어났어?”

“어? 뭐, 뭐야.”

“헐. 설마 잊은 거야? 어젯밤?”

“네? 아, 아니. 응?”

 

 

눈을 뜨자마자 펼쳐진 당황스러운 상황에 골반을 조금 덮고 있던 이불을 쭉 당겨 덮었다. 휑한 가슴을 이불로 가리고 팔을 엑스자로 교차한 뒤에 내 옆에 팔을 괴고 모로 누워있는 전정국을 쳐다봤다. 나는 티를 안 입고 있었는데 전정국은 흰색 반팔 티를 입고 있었다. 뭐지. 무슨 일이 있었지. 여긴 어디야.

 

 

“내 자취방에 온 남자는 형이 처음이야.”

“형?”

“와. 진짜 모른 척 할 건 가보네. 우리의 어젯밤. 진짜 속상하다.”

 

 

아예 전정국이 덮고 있던 이불까지 쭉 빼서 내 몸에 둘러놓고 어벙벙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상처를 받았는지 베개에 얼굴을 묻고는 엉엉 하는 소리를 냈다. 뭔데. 도대체 뭔데. 내가 너 쑤셨니? 아닌데 내 인성으로는 그럴 리가 없는데. 그럼 네가 나 쑤셨니? 라고 하기에도 애매했다. 엉덩이며 뭐 어디 한 군데 아프거나 거슬리는 느낌이 없었다. 숙취로 인한 두통과 토할 것 같은 기분 말고는 멀쩡했다. 전정국이 베개에 얼굴을 묻은 틈에 빠르게 둘러본 주위에는 콘돔을 쓴 흔적도 없었다.

 

정신이 차차 돌아오자 머리가 찌릿하게 아팠다. 댕댕 하고 울리는 머리를 붙잡고 살짝 인상을 찌푸린 뒤에 다시 전정국을 쳐다봤다. 어느새 이불에서 얼굴을 떼어낸 전정국은 묘한 자태를 하고 여유롭게 웃고 있었다. 설마 술김에 사귀기로 한 건 아니겠지.

 

 

“사귀기로 했어?”

“어땠을 거 같은데?”

“어?”

 

 

전정국의 표정을 유심히 관찰했다. 거짓말을 하는 건지, 뭘 숨기고 있는 건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당연하지 내가 독심술사도 아닌데 그걸 어떻게 알아. 나와 줄곧 눈을 맞추던 전정국은 모로 누워있던 몸을 일으켰다. 나는 그런 전정국을 경계하며 몸을 뒤로 좀 뺐다.

 

 

“와. 술에 그렇게 취해놓고도 사귀겠다는 말을 안 하더라.”

“정말?”

“뭐야. 그 다행이라는 말투는.”

“아니, 그 술김에 고백 받아주고 그러면 기억도 못 하고, 또 뭐. 그래서….”

“그래서?”

“…집에 가야겠다고.”

“그건 안 되지.”

 

 

어물쩍 넘어가려고 몸을 일으키는데 전정국은 웃으며 그런 날 붙잡아 앉혔다. 김태형과는 좀 다른 능글맞음이었다. 우리 사이가 이렇게까지 가까워질 일이 있었나 싶어서 당황스러웠다. 술이 웬수지. 주는 대로 다 받아먹더니 결국 이렇게 됐구나.

 

 

“우리 집에 들어와 놓고. 주인 허락도 없이 나가려고 그래?”

“그럼 허락해주면 되잖아. 나가라고.”

“내가 형을? 왜?”

“나 평생 여기 두면 너만 손해일 텐데. 나 되게 잘 먹어. 물도 엄청 많이 쓰고. 전기도 엄청 낭비해.”

 

 

내 말에 턱을 괴고 앉아있던 전정국이 뒤로 넘어가며 웃었다. 배게 위에 얼굴을 박고 침대를 팡팡 내리치며 웃더니 고개만 돌려 날 쳐다봤다. 헝클어진 머리와, 구겨져 있는 흰 티, 그리고 환히 웃는 얼굴이 조화로웠다. 잘생겼다. 다른 사람들이 김태형을 보면 이런 기분을 느끼는 건가. ‘잘생겼다’라는 말의 의미를 잘 모르고 살았는데 전정국을 보고 있으면 그 말이 자꾸 나왔다. 잘생겼네.

 

 

“아 형 진짜 귀엽다. 어떻게 그런 발상을 하지?”

“뭐가?”

“너무 현실적인 협박이잖아. 공과금 무서워서 형 여기 못 가둬놓겠네.”

“그치. 그렇지? 그럼 나 가도 돼?”

“음. 그건 안 돼.”

“왜!”

“나랑 사귀자.”

 

 

침대에 누워서, 흰 반팔티를 입고 고백하는 모습이 묘하게 섹시했다. 다 망가진 까치집 머리를 하고, 자다 깨서 부은 얼굴에 어떻게 잘 살펴보면 눈곱이 껴 있을 수도 있는데 그마저 섹시했다. 누워있는 가슴에 달라붙은 티가 판판한 가슴 모양을 그대로 보여줬고 그 밑으로 은근하게 비춰지는 실루엣이 복근이 있음을 넌지시 알려줬다. 그리고 그 밑에 헐렁한 회색 츄리닝 안에 있는 건. 아, 내 엉덩이.

 

 

“너 진짜 대체 나한테 왜 그래?”

“형 좋아하니까.”

“거기서 나 처음 봤잖아.”

“응. 그때부터 좋아했는데.”

“날? 왜?”

“반했지. 형 잘생겨서.”

 

 

잘생겼다니. 전정국 입에서 나온 말에 나도 모르게 으엑, 하는 괴상한 소리를 내버렸다. 진짜 잘생긴 애가 그렇게 말하니까 꼭 놀리는 거 같았다. 김태형이 매번 나더러 예쁜이, 예쁜이 하면서 조롱하는 것처럼. 내가 이상한 표정을 짓고 있자 누워서 날 올려다보던 전정국이 몸을 벌떡 일으켜 앉았다. 쟤는 뭐 저렇게 온몸이 기운차냐.

 

 

“왜 그런 표정 짓고 있어? 형 귀여운 거 알고 일부러 그러는 거지.”

“너 나한테 억하심정 있어? 놀리는 거야?”

“놀려? 내가? 형을? 말도 안 돼. 나 형한테 진짜 반했는데.”

“대체 내 어디에?”

“엉덩이?”

“야!”

 

 

전정국의 대답을 듣자마자 옆에 있던 베개를 냅다 집어 던졌다. 전정국은 소리 내 웃으며 여유롭게 내가 던진 베개를 받았다. 좁은 침대 위에서 건장한 남자 둘이 참 잘 놀고 있었다.

 

 

“엉덩이는 농담이야. 근데 반했다는 건 진짜. 귀엽기도 하고, 잘생겼기도 하고.”

“놀리지 마. 나 진지해.”

“나도 진지한데. 처음 보고 난 후에, 그러니까 우리 되게 은밀한 그런 일 있고 난 다음에. 여행하는 내내 형 생각만 났어. 다시 마주치고 싶다, 또 보고 싶다. 개강하고서도 형 생각밖에 안 나고. 개파 전까지 있던 수업 다 못 들었어. 형 번호라도 따둘걸, 그 후회 하느라. 아, 맞아. 번호 줘. 이 기회에 번호 좀 따자.”

 

 

정말 진지한 눈빛으로 나와 눈을 맞추고 천천히 해줬던 얘기들을 곱씹고 있는데 말을 마친 전정국이 대뜸 내 쪽으로 몸을 기울여 왔다. 내 허리께를 감싸 안듯 나에게 엉겨 붙더니 무언갈 엄청 열심히 했다. 행여 변태놀음을 하려는 건가 싶어서 긴장하고 있는데 내 몸에 별다른 짓은 하지 않았다. 도대체 뭘 하는 건가 싶어서 몸을 돌려 쳐다보니 내 뒤쪽에, 침대 아래에 떨어져 있던 내 핸드폰을 주워서 자기 번호를 입력하고 있었다. 말리려고 했는데 가까이에서 벨소리가 들렸다.

 

 

“땄다.”

“와. 진짜 대박이다.”

“내가 이렇게 대박인데. 사귀자.”

“너 진짜.”

“아, 쉽게 안 넘어오네. 알겠어. 오늘은 이걸로 넘어갈게. 대신 다음에 만나면 사귀는 거다?”

 

 

바닥에 널브러진 옷을 찾아 주으면서 고백을 참 속 시원히 한다고 생각했다. 이 상황이 웃겨서 헛웃음을 쳤다. 그리고 침대 아래로 손을 휘젓는데 옷이 잘 집히질 않았다. 결국 이불 밖으로 나가 팔을 쭉 뻗어 옷을 헤집었다. 그러고 있는데 어떤 시선이 내 몸뚱이에 달라붙는 거 같았다.

 

 

“근데 엉덩이 말고도 여기저기 예쁜 데가 많네.”

“까불지, 진짜.”

“아니 까부는 게 아니라 감상을 하는 거지. 예쁘다고 해도 자꾸 뭐라 그러냐. 나 진짜 속상하게.”

“뭐. 아무튼 재워줘서 고마웠어. 사례는 내 핸드폰 번호로 한 걸로 하자.”

“와. 밥이라도 사줘야하는 거 아니야? 동아리 선배님이면서! 해장국이라도. 어때? 같이 나갈까? 나 이대로 나가도 되는데.”

 

 

옷을 다 챙겨 입고 가방까지 찾아 맨 후에 머리를 정리하려고 벅벅 긁고 있는데 전정국이 침대 위에 벌떡 일어섰다. 나도 모르게 전정국의 회색 추리닝에 시선이 닿았다 떨어졌다. 그러고 보니 회색 추리닝 저거 선택받은 사람들만 입는 거 아닌가. 잠깐 스치듯 본 거였지만 역시나 대단했다. 와, 박지민 쓰레기 같아. 지금 얼평에 몸평까지 얼마나 한 거야.

 

침대 위를 가볍게 뛰며 잔머리를 굴리는 전정국을 슬쩍 봤다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수 쓰지 마. 간다.”

 

 

내 말에 전정국은 더 이상 치근덕대지 않았다. 정도를 잘 아는 거 같았다. 추리닝 주머니에 한 손을 넣고 다른 손은 얼굴 옆으로 들어 흔들었다.

 

 

“잘 가! 또 와도 돼. 언제든 와도 돼. 형은 다 돼. 지하철은 현관 나가서 왼쪽! 다음에 만나면 우리 꼭 사귀자!”

 

 

대체 어쩌다 저런 애가 달라붙게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닫힌 문 안에서도 ‘잘생긴 지민이 형 잘 가!’하며 질러대는 목소리가 마냥 듣기 싫진 않았다. 아직 술이 덜 깨서 그런가 저 목소리를 들으니 자꾸 웃음이 새어 나왔다. 계단에 발을 올려놓고 서둘러 나오느라 구겨 신은 신발을 제대로 신었다.

 

현관 나가서 왼쪽. 근데 나도 이 동네서 자취하는데. 아무튼 일단 역 쪽으로 가는 게 길 찾는 데 수월하겠다 싶어서 알려준 방향으로 걸었다. 외우고 싶지 않았는데 조금 더 걸으니 너무 익숙한 길이 나와서 나도 모르게 전정국 자취방 경로를 외워버렸다. 밖은 고요했지만 이상하게 ‘사귀자!’하는 들뜬 목소리가 자꾸 들리는 거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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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습니다. 이것은 자세히 보면 캠게! 제가 캠게물을 써봅니다! 예!!


제목인 <초록>은 '첫 기록' 이라는 뜻입니다! 


제목이 담는 의미는 글이 진행되면서 더 뚜렷해질 거 같아요.

다음 편은(...) .....언젠가 나올 겁니다. 예...

그때까지 지루하지 않으시길 바라며...두 편 올리고 갑니다....(총총)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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