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래더] 트위터는 @Rather_0613 (舊 새벽의덕후)

[뷔민슙] 지민의 역사 

(*약간의 슈짐(?)이 있습니다.)


 


W.새벽의덕후

 



<Ep. 지민의 알바>

  


 

아, 짜증나짜증나짜증나짜증나. 아 진짜 열받는다.

 

 

 

"박지민 씨. 그걸 그렇게 하면 되나."

 

 

 

짜증나. 진짜 짜증나. 아. 때려치울까.

 


 

"박지민 씨? 지금 에프 14번 테이블 정리 안 됐는데 뭐해요?"

 

"박지민 씨?"

"지민 씨?"

"박지민?"

 

 

으아아 씨이바알!

 

나는 지금 알바 중이다. 아무래도 부부님과 모모님이 주시는 용돈만 받고 살자니 뭔가 부끄럽기도 하고, 매일 하는 일 없이 뒹굴거리며 놀자니 양심에도 찔려서 알바라는 걸 해보기로 했다. 김태형은 무슨 알바를 하냐며 너는 내가 먹여 살리겠다는 말 같지도 않은 뻘소리를 했지만 나는 빠르게 알바 자리를 찾았다. 


휴학생이라는 이점이 있어서 알바 자리는 쉽게 구할 수 있었다. 그렇게 내가 일하게 된 곳은 뷔페형 레스토랑이었다. 처음엔 괜찮았다. 같이 일하는 분들도 착했고, 발랄했고, 다정했으니까. 알바를 따로 해본 적은 별로 없어서 긴장도 많이 했는데 도와주는 사람들이 많아서 쉽게 일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제 알바를 시작한 지 겨우 일주일째인데 나는 아주 격렬하게 일을 관두고 싶어졌다. 자꾸 내 귀에서 내 이름을 불러대는 이 좆같은 목소리 때문에.

 

 

"박지민 씨 내 말 다 들으면서 왜 대답을 안 해요?"

"네. 저 다 들었구요. 대답 이제 하려고 했구요. 테이블도 진작에 다아 치웠습니다."

"그건 당연한 거고. 박지민 씨 자꾸 다른 직원들이랑 노닥거리지 마세요. 여기 일터입니다."

 

 

아, 아 진짜. 아. 왜 이러지? 아니 이 귀에 인이어를 꽂은 건 나뿐만 아니라 이 가게 직원 전체인데?

 

날 이렇게 열 받게, 빡치게 격렬하게 욕이 나오게 하는 사람은 이 가게의 지점장 민윤기다. 민윤기. 이 시발 민윤기 개새끼. 처음 면접도 이 사람한테 봤는데 그때는 내 앞에 기력 단 하나도 없이 선 채로 웅얼거리며 이것저것 물어봤던 터에 내가 사람을 잘 몰라봤다. 하도 웅얼거려서 나는 뭐 지금 나한테 -내가 너무 새끈빠근해서- 낯가리나 했다. 


별거 아닌 질문이 몇 번 오지도 않았는데 민윤기는 나한테 나올 수 있는 날부터 바로 나오랬다. 여기가 집이랑도 가까워서 내심 붙길 바라고 있던 터라 붙여줘서 감사합니다, 하고 있었는데 개뿔 그때의 나 진짜 죽어라. 왜 사냐, 그런 말 해놓고. 나 여기 일하면서부터, 이 귀에 인이어를 꽂으면서부터 진짜 미칠 것 같다. 처음에 이 인이어로 '박지민 씨'라는 말 들리자마자 엄청 놀랐다.

 

나는 초짜고 경력도 거의 없는 것과 마찬가지라 안내를 위해 입구에 계속 서 있거나 테이블을 돌면서 손님들이 떠난 자리를 치우는 일을 맡았다. 처음에 이런 일들을 배운다고 여기서 일한 지 3개월째라는 호석이 형한테 일을 배웠다. 호석이 형은 참 괜찮은 사람이었다. 호탕하게 웃으면서 친근하게 대해주는데 이 형 덕에 가게에 금방 적응하고 사람들이랑도 친해질 수 있었다. 


아무튼 그런 호석이 형 옆에서 호석이 형이 인사하면 따라하고 중간중간 손님이 없을 때 포스기도 구경하고 일에 대해서 듣기도 하고 그랬다. 그러다 갑자기 귀에서 들린 '박지민 씨'하는 목소리가 진짜 낮고 뭐라 하지 암튼 등골이 막 쭈뼛하고 서는 기분이라 되게 놀랐다. 내가 옆에서 놀라니까 사람이 참 좋았던 호석이 형이 신나게 웃었다. 그때 사람이 좀 덜 좋아졌다.

 

 

'지점장 형 목소리가 좀 음산하지? 그 형 목소리가 그래. 적응하는데 좀 걸릴 거다.'

 

 

일 시작하자마자 들린 목소리에 꽤 당황했지만 그렇지 않은 척, 당당한 현대 남성인 것처럼 대꾸했다. 물론 처음엔 마이크에 입 바짝 가져다 대고 말해야 하는 줄 알고, 또 작게 말하면 안 들릴 줄 알고 유니폼 상의에 달려있는 마이크에 입을 바짝 대고 큰소리로 대꾸했다가 귀 테러 당했다. 


내 우렁찬 대꾸에 저쪽에서 먼저 '악! 시끄러워! 정호석 너 얘한테 이런 거 안 가르치고 뭐하냐!'하는 소리를 해댔다. 귀를 통해 들리는 목소리에 직원들은 함께 터졌고 손님들은 의문의 웃음을 당했다. 아무튼 그 이후로 지점장은 맨날 자기 방에만 틀어박혀 있는 주제에 내 이름을 불러댔다. 막상 들으면 별거 아니거나 내가 알아서 할 일들을 굳이 시키는 거였다.

 

 

"박지민 씨. 내가 오픈 전에 오늘 테이블 어디부터 채우라 그랬죠?"

"에이치요."

"근데 지금 손님 어디로 들어갔어요."

"에프인데, 아 그런데 그거는."

"시끄러워요. 이따 브레이크 때 내 방으로 와요."

 

 

아, 아 진짜 왜 저러냐. 민윤기의 말이 끝나자마자 내가 인상을 쓰니까 옆에 같이 서 있던 호석이 형이 나를 툭 쳤다. 괜찮냐고 입으로 물어왔고 나는 그저 대충 입꼬리만 올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나한테만 왜 그래, 나한테만. 


가끔 같이 일하는 직원들도 지나가다가 나를 보면 동정어린 눈빛으로 바라보며 토닥여주고 위로해주고 그랬다. 너 딱히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며 그저 안타까워 해줄 뿐이었다. 원래 지점장은 말이 많은 편도 아니라고 그랬다. 인이어로 이렇게 목소리 많이 듣는 것도 처음이라 그랬다. 


아니 그러니까 굳이 그 처음인 현상이 왜 내가 여기 들어오자마자 나타난 거냐고. 지금도 그렇다. 물론 에이치부터 채우라고 얘기한 건 맞는데, 손님이 부득불 그 자리로 가겠다는데 그럼 내가 뭐 보쌈이라도 해서 손님을 옮기리? 그 구역에 손님이 하나도 없는 것도 아닌데? 아, 민윤기 진짜 탁상행정이 뭔지 제대로 보여준다 진짜.

 

 

 

"지민아. 가서 상처받지 말고 그냥 네네, 만 하다 나와."

"예에, 아아주 고맙습니다."

"그래 지민아. 잘 하고 나오면 이따 마감하고 형이 케이크 줄게."

"사랑해요."

 

 

어느덧 브레이크 타임이 왔다. 그 시간이 와버렸다. 당연하게 머릿속으로 생각하고 있었음에도 굳이 귀에서는 또다시 '박지민 씨'하는 소리가 들렸다. '내 방으로 와요'라고 아주 도도하게 말하는데 아, 진짜 인이어 부숴버려 진짜. 아 진짜 인이어 밟으면서 막 소리 지르고 싶다. 민윤기 개새끼라고 막 소리치고 싶어. 내가 주방 석진이 형이 케이크 준다 했으니까 참는다 진짜. 


어쨌든 나는 목까지 차오르는 욕을 꾹꾹 참아내며 최대한 차분한 걸음으로 민윤기 방으로 들어갔다. 노크를 하고 방으로 들어서니 아주 사장님 같은 의자에 편히 앉아있는 민윤기가 보였다. 아, 쟤 좀 봐. 아 꼴사나워.

 

 

"부르셨어요."

"불렀지, 내가. 박지민 씨를."

"네."

 

 

민윤기는 젊었다. 스물여섯이랬나. 아무튼 지점장하기엔 꽤 젊은 나이였다. 본인도 그런 자신의 커리어에 꽤 자부심이 있다고 그랬다. 나는 아직 한 번도 한 적이 없지만 회식 때 '아, 스물여섯에 지점장 단 민윤기와 건배 한번 하시죠'하는 뻘소리를 잘 한다고 했다. 진짜 지랄. 


아, 그 대사 아직 한 번도 안 들은 게 그나마 다행이면 다행일거다. 어떻게 지점장까지 된 건지 모르겠다. 뭐, 우리 가게가 매출이 좀 잘 나가고 그런 건 맞는데 그거야 이 동네에 봐줄 만한 프렌차이즈 뷔페가 여기뿐이니까 그런 거지 뭐. 나는 속으로 열심히 중얼거리며 민윤기를 보고 있었다.

 

 

"아무리 일이 서툴다지만 너무 제멋대로인 거 아니야?"

"죄송합니다."

"뭐, 죄송하다고 하면 다 되는 세상도 아닌데. 죄송하단 말밖에 안 나오나 봐?"

 

 

그럼 뭐 새끼야. 내가 너한테 대고 존나 좆같은데 그만해주시죠, 라고 할까? 아 진짜 민윤기 진짜 세계 최고 짜증 난다. 민윤기는 앞에 앉아서 빈정대고 있었다. 아 쟤 자세 봐. 나 갈구면서 다리 꼬고 의자에 기댄 몸 옆으로 틀어가지고 펜을 만지작거리는 게 동작 하나하나 자세 하나하나 다 전부 진짜 꼴사나움. 


그냥 부부님과 모모님이 하사해주시는 용돈 받으면서 백날 천날 편하게 살 것이지 뭔데 밖에 나와서 생고생이냐. 박지민 진짜 상등신. 내가 속으로 나를 무참히 씹고 있는 동안 민윤기는 다리를 꼰 채로 앉아서 의자를 흔들거리고 있었다. 살짝씩 째려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오 민윤기님의 재수 없음이 존나 폭발하시겠습니다. 시이팔.

 

 

"일 잘만 하고 있는 직원들한테 왜 자꾸 말 거는 거지?"

"그건 제가 말 거는 게 아니,"

"그리고 내가 하는 말 다 들릴 텐데 왜 계속 무시하는 거지. 시키는 대로 하지도 않고."

"하, 죄송합니다."

"하? 지금 박지민 씨 한숨 쉬었어?"

"아닌데요."

 

 

난 숨도 못 쉬냐 개새꺄. 니가 그렇게 말도 안 되게 갈구는데 내가 퍽이나 호흡이 안정적이겠다. 아, 앞에 앉아서 계속 씩 웃고 있는 민윤기를 보는데 진짜 부아가 치민다. 아 진짜 열 받네. 민윤기 앞에 달려있는 명패 진짜 집어 던지고 싶다. 내 안의 공격성이 진짜 마구 뿜어져 나오고 싶어 했다. 


이름이 민윤기가 뭐야, 민윤기가. 민뺀질이 더 어울리겠다. 반질반질 윤기가 나는 게 아니라 뺀질뺀질거리면서 사람 갈구는 게 딱 민뺀질이네. 아 민뺀질 진짜 기름종이로 건조하게 만들어버려 진짜. 내가 진짜 조만간 베이비 파우더 가져와서 뿌린다.

 

 

"어쨌든 간에 내가 말하는 거 잘 듣고, 잘 따라주길 바랍니다. 박지민 씨."

"네, 알겠습니다."

"그럼 가 봐요. 쉬는 시간 삼분 남았네."

 

 

개새끼. 너는 내가 인정한다. 민윤기 존나 개새끼.

 

 

_

"지민이 고생했어. 지점장님이 많이 갈궜어?"

"아니에요. 제가 많이 서투르니까 그렇죠 뭐."

"자 여기 아까 말했던 케이크. 먹어봐."

 

 

손님들 다 보내고 마감정리도 다 한 뒤에 직원 몇이 주방에 모였다. 가끔 마감하고 가게의 남은 음식을 먹기도 했다. 디저트 류는 특히 자주 먹었다. 가끔 일하다가도 중간중간 석진이 형이나 다른 주방 사람들이 조금씩 챙겨주기도 했다. 여기가 그래도 나름 이름있는 프렌차이즈라 맛은 꽤 괜찮았다. 약간은 먹는 재미로 일하는 중이기도 했다. 


아까 브레이크 타임 이후로도 마감 전까지 계속 갈굼을 당했다. 이리 가라, 저리 가라. 어느 테이블 고객에게 가봐라. 암튼 내가 무슨 본인 아바타라도 되는 것처럼 부려먹었다. 아니 진짜 인이어 나만 듣는 것도 아닌데 또라이가 틀림없었다.


내가 속으로는 시팔저팔하며 욕을 잘하지만 그래도 일터에서는 꽤 착하고 순한 박지민으로 살고 있어서 같이 일하는 동료들에겐 순하게 굴고 있었다. 뭐 그 덕인지 귀여움도 좀 받아서 이렇게 마감 뒤풀이에서도 잘 챙김 받고 그랬다. 그때 갑자기 하루 종일 내 귀를 맴돌던 익숙한 목소리가 뒤통수에서 들렸다.

 

 

"일을 그렇게 해놓고도 케이크가 넘어가나 봐?"

"아 형, 왜 그래요. 우리 디저트 한두 번 먹는 것도 아닌데에."

"지점장님도 드실래요? 좀 남았는데."

"됐습니다. 거 일 못하는 신입이나 잘 챙겨주세요. 뒷정리 잘 하고 가시고."

 

 

아, 아 좆같은 민윤기. 진짜 민윤기 개새끼라는 말이 안 나올 수가 없다. 민윤기의 갑작스러운 극딜에 인생에 처음으로 케이크 사레가 들려버렸다. 옆에서 석진이 형이 본인이 직접 만들었다는 정체 모를 음료수를 건네줬고 그거 먹고 한 번 더 뒤질 뻔. 와, 이거 뭔데. 진짜 최악. 석진이 형은 주어진 것만 잘 해줬으면 좋겠다. 


아무튼 나는 콜록거리다 민윤기와 마주쳤고 민윤기의 썩소를 봤다. 아, 시발. 시발! 이 시이바알 그래 너 민윤기라 이거지? 니가 민윤기면 나는 박메마름이다 개새꺄. 그래, 너는 윤기 좔좔 기름기 줄줄이고 나는 존나 퍽퍽하다 이거야. 됐냐. 너는 시발 기름 많아서 똥도 미끌거리겠다 시팔! 내 똥은 존나 메말라서 굳은 똥이다! 하늘이시여, 저 박메마름은 민윤기를 낫윤기로 만드는 날 지옥을 가든가 잘 살든가 하겠습니다.

 

 

"아유 지민이 괜찮냐?"

"아, 네 저 괜찮아여."

 

 

속으로 시팔저팔 신나게 민윤기 욕을 하다가 호석이 형이 내 등을 톡톡 두들겨주며 말을 걸어줘서 나는 다시 착한 지민이 모드로 헤헤거리며 깜찍한 말투를 썼다. 뭐 원래 말투도 사랑스럽긴 한데, 아직 덜 친한 사람들이랑 있으면 그 사랑스러움이 좀 심해지는 경향이 있었다. 


아무튼 내가 사레들린 걸 좀 진정시키고 웃으면서 대답하니 여기저기 귀엽다며 쓰다듬는 손길이 다녀갔다. 아 내가 이렇게 어? 귀여움을 받는 사람이라고. 어디서나, 어느 곳에서나! 내가 또 굉장한 게이새끼라 날 갖겠다고 길거리에서 싸움도 났단 말이야. 조올라 쌔끈빠끈한 남자애 둘이서. 그런 개썅존멋게이 박지민한테 도대체 민윤기는 왜 저러는 거야?

 

 

 

_

"찌미나아"

 

 

일을 마치고 나오니 가게 근처에서 김태형이 튀어나왔다. 나는 진로가 고민된다는 핑계로 휴학 중인 반면에 김태형은 휴학하는 것마저 귀찮다며 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진로도 진로고, 군대도 군대인데 뭐 그것보다 그냥 학교를 좀 쉬고 싶었다. 진짜 진로 고민도 되기도 했고. 


과도 다르면서 휴학하지 말라고 칭얼대던 김태형은 나름 학교를 잘 다니고 있다. 물론 되게 제멋대로 다니긴 했지만. 아무튼 내가 풀타임으로 일을 해서 일이 늦게 끝나다 보니 김태형은 늘 나를 마중 나와 있었다. 매번 히죽거리면서 '찌미잉'하는 소리를 내며 나타났다. 그래도 이 좆같은 일과의 끝에서 김태형의 티존을 볼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저 잘생긴 얼굴 보면 쌓였던 스트레스가 풀리는 느낌이었다.

 

 

"오늘은 어때썽?"

"힘들었어."

"관둬."

 

 

김태형의 단호한 말에 웃어버렸다. 얘는 늘 이런 식이었다. 얘는 처음부터 나한테 알바같은 거 하지 말라고 했다. 알바하면 데이트도 자주 못 하고 집에서도 잘 못 보지 않냐며 칭얼거렸다. 그런데 최근에 김태형이랑 싸웠던 일도 있고 해서 매일 만나는 것보다 서로 각자의 일상을 좀 지낼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물론 내가 아르바이트를 한다고 얘랑 뭐 한참 떨어져 있는 건 아니지만 아무튼 하루 종일 내가 얘를 기다리거나 생각하거나 하는 일은 안 해도 됐으니까. 언젠가 한 번은 김태형한테 왜 나 일하는 가게로 안 놀러 오냐고 물어본 적이 있는데 그때 김태형은,

 

 

'이렇게 작고 소중한 지민이가 뽈뽈거리면서 힘들게 고생하는 걸 내가 어뜨케 봐아.'

 

 

라고 했다. 그 표현이 썩 귀여워서 그때 굉장히 기분 좋게 웃었다. 장난처럼 한 말인 것 같았지만 내가 일을 한 이후에 종종 힘들다고 하면 얘는 혀짧은 소리를 내다가도 단호하게 관두라고 그랬다. 내가 하고 싶다고 하니 말리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힘들면 언제든 관두라고 이야기했다. 


뭐, 이렇게 말해주는 김태형이 있어서 내가 일을 계속 다니는 것 같기도 했다. 어쨌든 내가 믿고 기댈 든든한 뒷배경이 있는 거니까. 나는 김태형이랑 집으로 걸어가면서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뭔가를 중얼거릴 기운도 없었다. 일단 빠르게 집에 가고 싶었다. 김태형은 그런 내 옆에 듬직하니 선 채로 손을 잡고 걸어갔다. 말이 좋아 손을 잡고 걸어간 거지 실상은 김태형이 날 끌고 간 거나 마찬가지였다.

 

 

 

"으아, 집이다. 집이야. 태형아. 집에 왔어."

"고생했어, 지민아."

 

 

나는 곧장 침대로 가서 엎어졌다. 김태형은 내 겉옷을 벗겨서 행거에 아무렇게나 던져놨고, 양말도 벗겨주었다. 이런 모양새는 내가 알바를 시작하고부터 약간 새로운 일상처럼 나타났다. 내가 일에 취해서 기절 직전이면 김태형이 이렇게 대충이나마 내 옷을 벗겨줬다. 그러고 나면 김태형이 자기 옷을 갈아입으러 갔고, 그제야 나도 꾸물거리며 겨우 몸을 일으켜 옷을 갈아입었다. 


옷 갈아입는 거 포기하고 싶었는데 그러면 영락없이 김태형이 달려들 거라서 -전에 한 번 그런 적이 있다. 힘들어서 잠옷 바지 입다가 포기하고 있는데 대뜸 김태형이 아예 벗겨버리더니 달려들었다- 옷을 마저 입었다. 나는 침대 머리에 베개를 기대놓고 앉았고, 옷을 다 갈아입은 김태형도 내 침대로 와서 나를 마주 보고 앉았다.

 

 

"오늘은 왜 그렇게 힘들었어."

 

 

의식처럼, 일상처럼 김태형이 나의 하루 일과를 물어봐 주었고 나는 대답을 해 주었다. 같은 침대에 마주 보고 앉아서 나는 졸음 가득한 눈으로 김태형에게 하루 일과를 이야기하고 김태형은 맞은편에 앉아서 턱을 괴고 나를 가만히 보고 있었다. 김태형의 질문이 나오면 나는 뭐에 홀린 것처럼 방언 터지듯 말을 했다.

 

 

"아, 전에 내가 말했던 지점장 있지. 하 진짜. 걔가 나 또 갈구는 거 있지. 하루 종일 귀에서 웅웅거리면서 그 목소리 들었더니 진짜 제대로 노이로제 걸릴 것 같아. 아니 오죽하면 오늘 하다 하다 케이크 사레까지 들렸다니까? 케이크 먹는데 뒤로 와서 갑자기 말 걸어가지고. 아 진짜 내가 지점장 때문에 미치겠어. 아, 아직도 귀에서 박지민 씨, 하는 목소리 들리는 거 같아."

 

 

내가 이렇게 말을 쏟아내듯이 하면 내 앞에 가만히 턱을 괴고 양반다리를 한 채 앉아있던 김태형은 엉덩이를 들썩여 나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와 앉았다. 날 가만히 바라보는 그 눈동자가 퍽 예뻤고, 내 말을 가만히 들으면서 깜박이던 눈의 속눈썹도 예뻤고, 고개를 끄덕이며 짓던 미소도 예뻤다. 솔직히 김태형이 내 힐링봇 같았다. 김태형은 내 말이 끝나면 잠시 그렇게 나를 바라보고 있다가,

 

 

"그랬어?"

 

 

하면서 그토록 다정스럽게 웃어주고 내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김태형의 큰 손이 내 머리통에 올라오면 나는 무언가 무장해제 된 것처럼 몸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하루 종일 나를 누르던 피곤함도, 스트레스도 김태형이 이렇게 '그랬어?' 하면서 웃어주고 머리를 쓰다듬어주면 싹 사라졌다. 그래 민윤기가 다 무슨 소용이고 갈굼당하는 게 뭐 어려운 일이랴. 난 무려 김태형의 티존을 개인적으로 소유 가능한 사람인데.

 

 

"우리 지민이 진짜 힘들었겠다. 눕자, 너 피곤해."

 

 

김태형은 저렇게 말하며 내 머리를 몇 번 더 쓰다듬더니 손으로 내 볼을 톡톡 쳤다. 그리고는 이불을 들쳐서 그 안으로 나를 눕혔다. 나는 김태형이 조종하는 대로 움직였고 김태형은 나를 눕혀놓고 그 옆에 자기도 누웠다. 


김태형은 늘 나를 벽 쪽으로 눕히고 자기는 바닥 쪽에 누웠다. 혹시나 나 떨어지면 아야 -김태형피셜로 김태형은 꼭 이따위 말투를 쓴다- 한다고 늘 이런 자세를 고수했다. 눕고 나면 김태형은 한 손을 내 목 밑으로 넣어서 팔베개를 해주고 다른 손으로는 나를 자기 쪽으로 당겨서 끌어안았다. 나는 김태형의 품 안에 들어가서 김태형이 다독여주는 손길 몇 번에 잠들었다. 내 작은 침대는 성인 남자 둘이 눕기에는 좁았지만 김태형의 품은 넓었기에 삽시간에 잠들 수 있었다.

 

 

 

**


"예? 진짜에요?"

"그렇대. 나도 좀 전에 들은 거야."

"갑자기 왜요?"

"나도 몰라. 직접 원했다고 했나 봐. 아니면 뭐 능력 있으니까 다른 매출 적은 지점으로 가는 걸 수도 있고."

 

"무슨 일 있어요?"

 

 

오늘도 겨우 출근을 했는데 왠지 가게가 소란스러웠다. 직원끼리 모여서 속닥거리는 게 퍽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을 것 같았다. 내가 슬쩍 그 무리 사이로 들어가서 질문을 하니까 직원들이 왔냐며 웃어주고 인사해줬다. 나도 같이 인사하면서 무슨 일 있냐고 물으니 호석이 형이 호들갑스럽게 말했다. 아, 호석이 형은 호들갑 잘 떨어서 호석이 형인가. 아, 이건 좀 안 웃겼다. 인정.

 

 

"야야, 지민아. 너 이제 좀 피겠다."

"예? 갑자기 무슨 말이에요?"

"지점장님. 다른 지점으로 발령 나신대."

"진짜요?"

 

 

오 시발! 할렐루야! 라고 소리치고 싶은걸 진짜 잘 참았다. 여기서 일한 지 이제 한 달쯤 되어가는데 민윤기가, 그렇게 날 갈궈대던, 한 달 일하면서 내내 나를 갈구던 그 민윤기가 떠난다니. 쾌재를 불렀다. 내가 온몸에 퍼져오는 전율에 짜릿해 하고 있을 때 갑자기 가게가 조용해졌고 민윤기가 나타났다. 


민윤기의 등장에 다들 눈짓만 주고받으며 고개를 꾸벅거렸고 민윤기는 평소처럼 인사들을 대충 받으며 제 방으로 갔다. 저 재수 없는 뒤통수도 이제 마지막이라 이거야. 마지막이라 생각하니 어쩐지 더 재수 없어서 한 대 치고 싶어지는 그 뒤통수를 웃으면서 바라봤다. 근데 갑자기 민윤기가 몸을 돌렸다. 아 젠장, 눈 마주쳤어.

 

 

"박지민 씨는 잠깐 따라와요."

 

 

와, 마지막까지 나를 그렇게 갈구고 싶나. 아직 옷도 못 갈아입고 오픈 준비도 안 했는데 오늘 하루 알차게 갈구고 싶으신가. 속으로는 그렇게 꿍얼거렸지만 난 아직까지 을이었기 때문에 억지로 하하, 하고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이고 민윤기의 뒤를 줄줄 따랐다. 방으로 들어서자 민윤기는 자기가 입고 있던 겉옷을 벗어서 책상 위에 대충 올려두고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는 자기 맞은편에 서 있는 나를 가만히 바라봤다. 왜 저러지. 마지막이라 알차게 갈구고 싶은데 어떻게 갈궈야 할지 생각이 안 나서 저러나.

 

 

"아쉽네요."

"에? 네?"

 

 

갑작스런 민윤기의 말에 나는 당황했다. 아쉽다고? 뭐가? 더 못 갈궈서? 뭐지, 진짜 그건가.

 

 

"이제 좀 친해진 것 같았는데. 어쩌다 보니 이별이네요."

"아, 진짜 떠나세요?"

"예 뭐, 그렇게 돼서."

 

 

민윤기는 책상 위로 가지런히 손을 모아놓고 있었다. 손가락을 깍지껴놓고 한쪽 검지만 까딱거리는데 그게 퍽 간지나, 기는 개뿔. 뭐야, 왜 까리한 척이야. 계속 다른 곳을 보다가 쳐다본 민윤기는 퍽 착하게 웃어 보이고 있었다. 사람이 마지막 순간이 오면 달라진다는데 민윤기 간다는 다른 지점이 천당 지점이라도 되나. 뭐 떠나는 게 이 지역이 아니라 이생을 떠나는 표정이잖아. 


민윤기는 그렇게 나를 가만히 마주 보고 있더니 손짓을 했다. 가까이 오라는 것 같은데 뭐야, 내가 민윤기의 개야 뭐야. 왜 저런 식으로 불러. 라고 생각은 했지만 나는 옴찔거리며 민윤기의 앞으로 갔다. 책상 앞까지 바짝 붙어서자 민윤기가 내 쪽으로 몸을 좀 더 숙이더니 뭐라고 속삭였다.

 

 

"꽤, 열정적인 애인을 뒀더라고요. 박지민 씨."

"네?"

"박지민 씨 애인이 나를 직장 내 가혹 행위로 본사에 찔렀어요. 무려 삼 주 동안이나 매일같이 찔렀더라고요. 그 덕에 시말서도 썼고 다른 지점으로 발령까지 났습니다."

"아?"

 

 

나는 민윤기의 말을, 단어를 하나하나 다시 곱씹었다. 잠깐만. 애인? 내 애인? 설마 김태형? 와, 김태형 물론 최근에 안 거긴 하지만 얘 진짜 변태 스토커네. 지금 그동안 내가 맨날 힘들다고 해서, 그리고 그게 민윤기가 그랬다고 해서 얘 찌른 거야? 대박이네. 내가 상황을 이해하느라 어벙하게 서 있자 민윤기가 웃었다. 뭐야, 좀 착하게 잘 웃네. 그러면서 왜 맨날 뺀질거리는 웃음을 지었대.

 

 

"아깝네요. 애인 있는 줄 알았으면 좀 더 다정하게 하는 건데."

"예? 무슨."

"뭐, 그냥. 나도 박지민 씨랑 좀 특별한 사이, 그런 거 되고 싶었는데. 내가 다른 능력은 많은데 연애하는 능력이 좀 부족해서."

"네?"

"뭐, 신이 다 주면 불공평하잖아요. 그쵸? 이미 가진 것도 꽤 넘치는데."

 

 

뭐야, 왜 갑자기 또 저렇게 아가리를 터는 거지. 없는 정까지 다 털어가려 그러는 건가. 그럴 필요 없는데. 털릴 정도 없어요, 이 사람아. 뭐 이별 인사를 저렇게 재수 없게 해, 민윤기는.

 

 

"아무튼, 여러모로 아쉬워요 박지민 씨. 그 이름, 계속 부르고 싶었는데."

"그, 지점장님."

"나중에 그 잘생긴 애인이랑 헤어지면 나 발령받은 지점으로 와요. 그땐 좀 다정하게 굴게."

 

 

그 말을 마지막으로 민윤기는 활짝 웃었고 그만 나가봐도 좋다고 했다. 나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지점장 방을 나왔다. 내가 방을 나오자 친한 형들 몇이 우르르 내 앞으로 왔다. 워낙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있으니 심하게 욕먹었냐고 그러고, 또 마지막이라고 한소리 들었냐고 그랬다. 수많은 질문에 그냥 '아, 아니에요' 하는 얼빵한 소리를 하며 직원 룸으로 들어갔다. 뭐야, 갑자기. 옷을 갈아입으면서 소지품을 꺼냈다. 그때 내 핸드폰에 카톡이 와있는 게 보였다.

 

 

[찌밍아! 이제부턴 힘들지 말구 재밌게 일해!]

[물론 앞으로도 계속 힘든거 이쓰면 나한테 말해줘야행!]

[찌미 괴롭히는거 내가 다 물리쳐주께!]

[우리 찌미잉 때형이가 마이 싸랑행♥]

 

 

김태형은 진짜, 내 인생에서 아주 대단한 부분을 차지하는 새끼임에는 틀림이 없다.

 

 

 

*열남 김태형

 


"아, 그러니까. 대체 언제 확인하실 거냐고요."

 

 

전화기에 대고 벌써 열다섯 번째 통화다. 물론 이 열다섯 번은 오늘 하루 통화량이다. 왜? 나의 사랑하는 지민이의 행복한 직장생활을 위해서 내가 열심히 내조하는 중이다. 우리 지민이 안 그래도 그 작은 몸뚱이랑 작은 손으로 무거운 접시 나르고 그 넓은 식당 돌아다니는 게 마음 아픈데 상사가 괴롭히기까지 하다니. 지민이의 애인으로서 이건 가만히 보고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사실 지민이가 일을 하고나서 삼 일째인가, 일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상사가 갈군다며 슬퍼한 적이 있었다.

 

 

'태형아. 나 진짜 열 받아. 아니 그 민윤기 시발 그 민지렁이 같은 새끼는 왜 나한테 그러지? 왜 나를 갈구는 거야? 염병할 진짜. 그 새끼는 내가 만만하대? 만만이 콩떡이래? 내가 키 작다고 진짜 콩알로 보나.'

 

 

지민이가 그렇게나 속상해했다. 아, 마음 아파. 지민이가 어디 가서 갈굼당할 애가 아닌데. 나는 그 길로 바로 본사에 전화를 걸었고 계속, 아주 계에속 민윤기라는 사람의 극악무도함에 대해 토로했다. 전화 받아주던 상담원이랑 나중에 술이라도 한 잔 할 뻔 했다. 하도 오래 얘기를 해서.

 

 

"꼭 좀 잘 부탁드립니다. 예에."

 

 

상담원이 본사도 이제 알았고 처분도 내렸다고 하니 잠시 기다리라고 얘기해주는 것을 듣고 전화를 끊었다. 아, 아무래도 불안해. 나는 지민이가 일하는 뷔페로 가보기로 했다. 그 민윤기라는 사람을 내가 꼭 만나봐야겠어. 


결심이 서자마자 바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아, 물론 난 언제나 이 가게 근처에 있었다. 혹시나 지민이가 나오면 우연히 만난 척이라도 하고, 안 나오면 퇴근까지 기다리면 되니까.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서 지민이가 있을지도 모를 가게 근처를 은밀하게 기웃거렸다. 그때 남자 화장실에서 누군가 나왔다. 오 지져스, 역시 나는 될 놈이다. 민윤기라는 명찰이 눈에 들어왔다.

 

 

"저, 혹시 민윤기 씨?"

"에, 예?"

 

 

아 뭐야. 낮고 진중한 목소리는 나의 전유물 같은 건데. 침대에서도 지민이가 아주 좋아하는 음색인데. 나의 이 멋들어진 음색과 똑같진 않지만 역시 낮고 나른한 이 목소린 뭐야. 지금 이 목소리를 매일같이 지민이 귀에 대고 속삭였다 이 말이야? 이 사람 변태 맞구만. 일부러 그랬네, 그랬어. 


나는 의아해하는 민윤기를 데리고 가게 반대편으로 걸었다. 민윤기는 사정도 모른 채 그저 내가 이끄는 대로 따랐다. 꽤 인적 드문 비상계단 쪽으로 가서야 나는 민윤기의 팔을 놨다. 그리고 민윤기를 가만히 바라봤다. 음, 생긴 건 지민이가 좋아할 상은 아니야. 지민이는 나처럼 -혹은 제발 망했으면 싶은 전정국처럼- 크고 잘생긴 눈을 좋아해. 키도 나보다 -그리고 자꾸 같이 떠오르는 그 전정국 새끼보다- 작고. 여러모로 지민이 스타일이 아니야. 그건 다행이네.

 

 

"무슨 일이시죠?"

 

 

아, 목소리. 지민이가 이런 목소리 좋아하진 않겠지. 그럼, 지민이는 내 목소리 좋아해. 맞아. 김태형 정신 차리자. 이대로 지민이를 잃을 순 없어.

 

 

"전 지민이를 잃을 수 없습니다."

"네?"

 

 

아 김태형. 뭐하냐. 아, 지민이를 갈구는 극악무도한 상사의 앞에서 이런 헛소리를 하다니. 아, 태형아 얼굴값 하자. 얼굴값. 내가 이제 막, 다시 나의 멋진 목소리로 말을 하려고 하는데 민윤기 쪽에서 먼저 말을 건네왔다. 아, 선수 뺐겼어.

 

 

"우리 직원 박지민 씨 말하시는 겁니까?"

"박지민 씨, 아. 예 맞습니다."

 

 

아, 방금 우리라 그랬지. 우리 박지민이라 그랬지. 아, 이거 전정국 이후로 또 나 거슬리게 하는 사람이네. 아니 왜 지민이는 그렇게 사랑스러운 거지. 물론 지민이는 사랑스러운 게 마땅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거 몰랐음 좋겠다. 백날 천날 내가 물고 빨게.

 

 

"저한테 뭘 말하고 싶으신 거죠?"

"아, 그게. 그쪽이 우리 지민이 괴롭힌다고 들었습니다."

"우리 지민이라. 뭐, 지민 씨가 그렇답니까?"

"네. 그래서 아주 죽겠대요. 전 우리 지민이가 이 가게를 관뒀으면 싶지만 우리 지민이가 그래도 일은 하고 싶어 해서 참고 있는데, 웬만하면 그만하시죠. 우리 지민이 괴롭히는 거."

 

 

그렇게 말하고 민윤기를 향해 웃어 보였다. 어떠냐. 나의 우리 지민이 콤보가. 내가 팔짱까지 끼고 고개를 당당히 치켜들고 승리의 미소를 지어 보이자 저쪽에선 예상대로 당황한 미소, 가 아니라 비웃음을 날렸다. 뭐야, 지금 나 비웃었어?

 

 

"뭐, 어떤 사이이신지 대충 감은 옵니다만. 저는 그쪽 말을 들을 이유가 없는데요."

 

 

뭐야 저 여유는. 지금 프렌차이즈 가게 지점장씩이나 한다 이거야? 지금 한낱 대학생일 뿐인 나 비웃는 거야? 와, 인성도 쓰레기네. 이것도 본사에 찌를 걸 그랬나. 가만, 분명히 아까 상담원이 어제 본사에서 처분 내려서 늦어도 오늘은 전달될 거라 그랬는데. 저렇게 당당한 거보니까 아직 이 사실 모르는가 보네.

 

 

"들을 이유 있으실 텐데."

"아, 부하 직원 애인의 치기는 여기까지 듣겠습니다. 그럼 전 일 때문,"

"본사에 찔렀어요. 제가."

"네?"

"아마 곧 본사에서 연락 올 텐데. 자세한 내용은 직접 들으세요."

 

 

와, 드디어 먹혔다. 드디어 내 앞에 있는 민윤기가 인상을 찌푸렸다. 이건 몰랐던 내용이 맞아. 아 진짜 솔직히 민윤기가 모든 걸 다 알고 있는 사람 같아서 약간 당황했었다. 뭐 말만 하면 다 웃고 알 것 같다 하고 신이야 뭐야. 


나는 민윤기를 향해 마지막 승리자의 태도를 취하기 위해 깔쌈하게 민윤기의 옆을 지나갔다. 민윤기는 무언가 자신이 모르는 내용에 대해 궁리하는 듯했다. 그런 민윤기를 지나치다가 살짝 고개만 옆으로 돌려 비스듬하게 쳐다보면서 -내가 생각하기에 이 각도가 내 얼굴이 극강의 멋짐을 뽐내는 각도다- 말했다.

 

 

"아, 감은 잡으셨겠지만. 저 우리 지민이 애인입니다. 거업나 오래된."

 

 

그렇게 말을 던져두고 나는 멋있게 엘리베이터를 탔다. 아, 방금 좀 멋있었다. 민윤기 짤릴 때까지는 지민이한테 아무 말도 하지 말아야지. 아, 지민이 보고 싶다. 지민이 퇴근까지 3시간 24분밖에 안 남았네. 밖에서 기다려야지. 우리 지민이 얼른 오세용♡ 태태가 오늘도 내조 열씸히 했어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