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래더] 트위터는 @Rather_0613 (舊 새벽의덕후)

[뷔민국] 지민의 역사 

 

 

W.새벽의덕후

 

 


<Ep. 전 애인 열전 下>

 



아, 박지민 뭐냐 시발. 그래, 나 김태형이랑 싸웠다. 그랬다. 조온나게 싸웠다. 그리고 첫사랑과 존나게 섹스했다. 그게 뭐. 왜. 왜 그랬지. 섹스할 때는 일단 내가 흥분상태기도 했고, 눈에 뭣도 안 보이기도 했고. 약간의 취기가 남아있기도 했다. 취기가 만들어낸 이상한 치기가 지금 내가 나의 아련한 첫사랑과 모텔 이불을 덮고 그 아래는 나체의 몸으로 아침을 맞이하게 했다. 


첫사랑과의 아주 오랜만의 섹스는 솔직히 말하면 참 좋았다. 나도, 정국이도 서로의 몸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정국이는 여전히 섹이섹져였다. 사실, 이전보다 섹스 전에도 좀 더 세진 거 같지만. 아니 내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똑바로 누운 채로 이불 꼭대기를 손에 쥐고 눈만 끔벅대고 있었다. 옆에는 함께 나체인 정국이가 거시기까지 느껴질 만큼 몸을 밀착시켜 모로 누운 채 고른 숨소리를 내고 있었다. 정국이의 숨소리와 이 모텔의 바디워시 냄새가 공감각적 써라운드로 다가왔고, 내 골반에 닿은 정국이의 거시기가 너무 잘 느껴졌다. 아, 박지민 진짜 개쓰레기. 으아아 김태형 그 시발새끼 때문이야!

 



 

"다녀왔습니다."

"어머, 너희 싸웠니. 번갈아가며 외박이네."

"하하, 그럴 때도 있죠."

"아닌데. 우린 안 싸웠는데?"

"....들어갈게요."

 

 

정국이가 나한테 붙여놨던 몸을 돌려서 다른 곳을 보자마자 나는 조용조용 옷을 마저 입고 먼저 방을 나왔다. 핸드폰으로 먼저 가서 미안하다는 연락만 달랑 남겨놓은 채 범죄자마냥 쭈글대며 집으로 들어왔다. 


출근 준비를 하시던 모모님이 나를 비웃으며 반겨주셨고, 두 분의 너무나도 다정한 모습에 나는 방으로 향했다. 문을 여는 것과 동시에 뒤에서 '아, 아직 태형이 방에 있'이라는 소리가 들렸지만 이미 늦었다. 솔직히 어머니들 계신데 욕할 뻔했다. 저 새끼는 왜 평소에는 잠만 쳐 자는 새끼가 이 시간에 침대에 앉아있는 거야. 나는 아차 싶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고 어쩔 수 없다는 생각에 방문을 닫고 그냥 내 침대로 가서 앉았다. 다행히 침대 구조가 마주 보고 있는 구조는 아니어서 현 애인과 싸우고 전 애인과 떡친 후에 다시 현 애인을 마주 보며 앉아있는 불상사는 피할 수 있었다.

 

 

"그럼 엄마들 갔다올게에."

"싸우더라도 칼부림은 하지 말고."

"예, 예. 제발 좀 가세요."

 

 

나는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뒤로 발랑 누워버렸다. 앉아있으면 내 옆쪽 시야로 김태형이 날 보고 있는 게 너무 적나라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냥 모른 척, 되게 피곤한 척하면서 드러누우니 김태형이 야, 하는 소리가 들렸다. 되게 저음이었고 또 너무 갑작스러워서 온몸을 존나 움찔해놓고 못 들은 척 했다. 아 시발 존나 쪽팔려. 그 와중에 놀라고 그러냐 이 쪼다 같은 간 새끼야. 김태형은 한숨을 한 번 푹 쉬었다. 아 좆같아. 또 놀람.

 

 

"너, 전정국 그 새끼랑 잤냐?"

 

 

되게 오랜만에 말하나 보다. 순간 그렇게 말할 뻔했다. 김태형의 목소리는 낮게 잠겨있으면서 중간중간 갈라졌다. 김태형도 솔직히 민망했을걸. 되게 임팩트 있는 문장인데 '그쌕끼랑 잤냑' 이따위로 목소리가 나와서. 분명히 그랬을 거다. 왜냐면 김태형이 말하고 나서 목을 몇 번 큼큼거렸으니까. 새애끼, 너도 쪽팔렸구나? 우리 쪽팔린 거 쌤쌤. 나 혼자서 그렇게 유치 뽕짝하며 김태형의 행동에 깐족거리고 있는데 김태형이 다시 말을 걸었다. 이번엔 제대로 된 목소리였다. 김태형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몸을 일으켰다. 슬슬 빡쳐 오르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잤냐고. 걔랑."

"허, 잤으면. 내가 정국이랑 잤으면."

"너 그, 시발 정국이 소리 좀!"

"뭐, 시발? 너 지금 나한테 욕했냐?"

"너도 나한테 맨날 하잖아!"

"니가 나랑 같냐? 같냐고!"

"야, 박지민!"

 

 

솔직히 김태형이 시발이라 그랬을 때 뭔가 속에서 울컥 치미는 게 있었다. 어제부로 김태형은 그간 나에게 숨겨왔던 많은 모습을 들켰다. 욕 잘하는 거, 가로등 밑에서 허세 작렬하는 거, 그리고 날 박지민이라 부를 수 있는 거. 나는 솔직히 김태형이랑 살아오면서 내 성이 '지'고 이름이 '민아'인 줄 알았다. 하도 김태형이 지민아, 짐나, 찜나 하고 불러대서 내 성을 잊고 살 뻔도 했다. 근데 어제 나랑 싸우면서부터 김태형은 '씨'하는 거친 말도 잘 뱉어댔고 나를 줄곧 '박지민'하고 불렀다. 야, 너 하는 것도 쉬웠다. 굉장히 이상한 포인트지만 난 이게 가장 빡쳤다. 그래서 좀 더 살살 말할 수 있는 걸 더 세게 받아쳤다.

 

 

"왜, 왜. 내가 박지민이다 이 김태형새끼야. 왜 난 안 돼? 너도 맨날 천날 전애인들 만나고 다니잖아!"

"그거랑 이거랑 같아?"

"너 지금 유치하게 내 말 따라 하냐? 그게 뭐가 다른데!"

"난 너처럼 몸 굴린 적은 없어!"

".....김태형 너."

 

   

 

제 분에 못 이겨 말을 뱉어놓고 김태형은 당황한 눈치였다. 아, 씨발. 이라고 아주 정석적인 발음으로 욕까지 내뱉으면서 앞머리 칼을 제멋대로 헝클였다. 솔직히, 아니 진짜 대놓고 엄청 상처받았다. 몸을 굴리다니. 그래 나 전정국이랑 잔 거 맞다. 근데 그게 뭐. 김태형 지도 맨날 전 애인들 만나주고 같이 다니고 그랬으면서. 빤스랑 콘돔까지 받았으면서. 내가 나가지 말라고 그렇게 말해도 그냥 친구 만나는 거라면서 전 애인 부름에 다 나가줬으면서. 나한테는 왜! 존나 이기적인 새끼. 생긴 것만 이기적인 줄 알았는데 모든 게 다 이기적인 새끼였어. 몸을 일으켰다. 김태형은 그런 날 따라 일어났다. 내가 문 쪽으로 가려고 하자 김태형이 날 막아 세웠다.

 

 

"비켜."

"가지마."

"너 뭔데. 나같이 몸 함부로 굴리는 새끼한테 왜 그러는데!"

"가지 말라고 했다. 분명히."

 

 

가면 어쩔 건데 시발. 김태형을 피해 다시 문으로 향하자마자 김태형이 날 돌려세웠다. 그러고는 막무가내로 날 밀어붙였다. 다짜고짜 입을 맞춰오더니 물어뜯기 시작했다. 아 시발 존나 아프네. 나는 이 건방진 새끼를 다시 밀어냈고 밀어내면 김태형은 곧바로 성난 황소처럼 나에게로 와서 입을 부대꼈다. 김태형이 억지로 밀고 누르는 바람에 나는 내 침대에 강제적으로 다시 눕게 되었다. 김태형은 끈질기게 입을 물어 뜯는 걸로는 모자랐는지 아예 내 옷까지 찢어버리려 했다. 김태형이 나보다 키 크면 어쩔 건데. 그래 시발. 손도 크도 발도 크고 눈도 크고 거시기도 나보다 김태형이 크지만 그게 뭐. 나도 남자라 이거야.

 

난 미친놈마냥 엉겨 붙어있던 김태형을 발로 차서 침대 아래로 떨어트렸다. 그 잠깐 사이 서로 몸부림을 신나게 해대서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바닥에 떨어진 김태형은 날 어이가 없다는 듯이 바라보더니 자기 머리를 마구 헝클이고 다리를 제멋대로 차댔다. 왜 저래. 저 미친놈.

 

 

"너, 최악이야. 뭔데 멋대로 이래?"

"최악? 박지민. 너 나한테 최악이랬어?"

"어. 나 박지민이 너 김태형한테 최악이랬어 지금. 왜."

"너. 나만큼 기분 최악이야?"

"어. 존나. 왜, 함부로 몸 굴리는 새끼한테는 이래도 되냐?"

 


나는 걸음을 옮겨 거울 앞에 섰다. 머리도 엉망이었고 김태형이 물어뜯은 입술에는 피도 났다. 저 극악무도한 새끼. 내가 경악한 것은 입술이 아니었다. 김태형이 찢어발길 기세로 잡아 늘인 티셔츠는 내 최애 티셔츠였다. 아, 이거 비싼 건데 시이파알. 나는 김태형 보란 듯이 티셔츠를 벗어서 바닥에 내리꽂았고 다른 옷을 집어서 입었다. 김태형은 허? 하는 같잖은 소리를 내뱉으며 비웃음과 함께 날 보고 있었다. 뭐, 시발 그 비웃음도 잘생겨서 뭐 어쩔 건데. 난 김태형이 벙쪄있는 틈을 타 잽싸게 방을 나섰다.

 

아, 이제 진짜 어디 가냐. 정국이를 부를 수도 없었다. 괜히 나랑 김태형 싸움에 정국이를 끌어들인 것 같아서 나는 모텔에서 눈 뜨고부터 지금까지 정국이한테 죄스러운 기분이었다. 아직 아침이었다. 남들 다 출근할 아침이었다. 좆같이 애인이랑 한방을 쓰는 바람에 싸우면 집에 틀어박혀 있을 수가 없었다. 김태형은 싸웠다고 집에 안 들어 오는 스타일은 아니었고, 난 싸운 사람을 뻔뻔스레 쳐다보지 못하는 병이 있었다. 결국, 늘 집에 있을 현 애인을 피해 가출 청년이 되는 쪽은 나였다.

 

 

"박지민! 너 또 어딜 가. 이 시간에 어딜 가. 전정국 그 새,"

"누굴 만나든. 알 바야?"

 

 

본인 목소리가 졸라리 섹시하다고 자랑이라도 하려는지 깊고도 진하게 목소리를 내리깔고는 욕을 지껄이려는 김태형의 말허리를 잘라냈다. 어쩔 거야. 내가 이러겠다는데. 집을 나와서는 멍하니 서 있었다. 집 나가면 다 돈이고 고생이고 그런 거다 진짜. 가출 아무나 하는 거 아니야.

 

 

 

*

또 문이 닫혔다. 또 지민이는 등을 보였다. 이젠 버릇이지 아주. 홀로 남겨진 나는 아까는 지민이가 있어서 차마 아픈 티를 못 냈던 옆 엉덩이를 문질렀다. 암튼 쬐깐한 게 여기저기 야무지지 않은 구석이 없었다. 아주 야물딱지게 날 바닥으로 꽂아버렸다. 몇 번 더 엉덩이를 문지르고는 그대로 바닥에 누워버렸다. 


저 멍청한 내 애인 때문에 하루하루가 미칠 지경이었다. 안다. 내 잘못이 크다. 그래, 이 싸움의 팔 할은 나한테 잘못이 있다. 난 수년간의 연애 습관을 버리지 못해서 지민이한테 상처를 줬다. 그동안 내 애인으로 있던 애들은 전 애인들을 만나고 다니는 내 행동에 신경 쓰지 않았다. 물론 신경 쓰면 내 쪽에서 먼저 그만 만나자고 하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이런 내 행동이 크게 문제 되는 건지 잘 몰랐다. 지민이가 싫어하는 건 알지만 지민이도 이내 익숙해지겠지, 그렇게 내 방식만 고집했던 것이다.

 

거기다, 나는 지민이의 첫사랑을 망쳐놨다. 그래, 내 잘못이다. 그냥 박지민 하나밖에 안 보고 살아서 박지민에 관한 일이면 무작정 들이받고 보는 편이어서 그랬다. 박지민 말고는 뵈는 게 없어서 그랬던 거다. 그렇다고 이렇게 말 한 번을 제대로 안 섞어주냐.

 

 

"계속 얼굴을 보고 있어야 뭘 풀어도 풀 거 아니냐."

 

 

한숨만 푹푹 나왔다. 나랑은 십 분도 같이 안 있으려고 했다. 내가 없을 시간을 골라서 집에 들어오는 꼴은 깜찍하기도 했다. 차라리 일방적으로 화만 내는 거라면 다리에 매달려 싹싹 빌기라도 했을 거다. 어딜 가든 따라다니며 무릎이 다 깨져도 좋으니 그렇게 매달렸을 거다. 내 탓이 맞으니까, 분명히. 


근데, 근데 왜 하필 우리의 다정하던 세월 중 가장 큰 풍파를 맞이한 이 시점에 전정국이 나타냤느냐 이거다. 외국에 갔으면 살이라도 더 쪄서 오든가. 피부라도 그을리든가. 왜 더 잘나져서 왔느냐 이거다. 그것도 꼭 내 애인님이 환장하는 자태로. 암튼 그 옛날이나 지금이나 전정국은 내 맘에 전혀 들지 않는다.

 

 

"아, 지민이랑은 어떻게 푸나."

 

 

나는 그렇게 누운 채로 잠들었다. 아, 지민이 기다리다가 밤새웠더니 엄청 피곤하네.

 

 

 

_

뭔가 시끄러운 소리가 귀를 때렸다. 나는 슬슬 정신을 차렸고 정신이 들수록 그 소리가 뭔지 정확히 와 닿았다. 내 핸드폰 벨소리였다. 맨바닥에서 그냥 잠들어서 뻐근한 온몸을 겨우 일으켜 핸드폰을 찾았다. 혹시나 하고 기대했지만 번호는 지민이의 것이 아니었다. 그냥 받지 말까 하다가 받았다.

 

 

"여보세요."

 

 

얼마나 잤는지 해가 지고 있었다. 시계를 슬쩍 보니 여섯시가 넘어있었다. 그 불편한 맨바닥에서 오래도 잤다, 김태형. 자다 깨서 갈라지는 목을 정리했다. 아까 지민이 앞에서 분위기 잡다가 받은 개쪽을 또 받기는 싫었다. 받은 전화에서는 별말이 없었다. 헝클어진 머리를 대충 정리하며 다시 말을 건넸다.

 

 

"여보세요."

-저 전정국이요.

"너 뭐야."

-좀 만나죠.

 

 

이 건방진 새끼. 내가 지금 널 만날 짬이 안 나거든? 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전정국의 다음 말 때문에 나는 씻으러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지민이랑 화해하게 해드릴게요.

 

 

지민이라니. 지민이라니! 이 새끼는 꼭 나랑 얘기할 때만 지민이, 지민이 그랬다. 암튼 전정국 박지민 이것들은 쌍으로 이름을 불러가며 사람 속을 뒤집는다. 사실 나는 전정국을 믿진 않았다. 하지만 아침에 뛰쳐나간 지민이가 여전히 연락 한 통 없는 상태에서 그나마 지민이 소식을 귀동냥할 곳은 전정국밖에 없긴 했다. 나와 전정국은 카페에서 만났다. 아, 배고픈데. 밥집에서 보자 할 걸 그랬나, 했지만 이내 지민이의 마음을 아프게 한 나 따위 새끼가 밥은 무슨 밥이냐 하고 정신을 차렸다.

 

 

"뭔데."

"지민이를 그렇게 끼고 살면서, 이게 뭡니까."

"너 이 새끼,"

"이렇게 성질도 욱하시고. 아, 그냥 내가 가질 걸 그랬나."

 

 

전정국의 비꼬기 스킬은 캐나다 왕복 비행기 티켓 값만큼이나 늘어있었다. 열 받아. 아, 존나 열 받아. 나는 그 들끓는 마음을 그저 주먹을 꽉 쥐고 앉아있는 의자를 내리치는 걸로 대신했다. 앞에 앉은 전정국은 여유롭게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셨다. 아, 나도 커피 마실걸. 난 카페에 들어서자마자 무의식적 취향을 드러내며 주문을 했다. 나보다 어린 내 애인의 전 남친 앞에서 레모네이드가 무슨 말이야. 이 병신 같은 김태형. 너는 에스프레소를 시켰어야지. 나는 초조해서 다리를 달달 떨거나하는 불안증세를 보였는데 전정국은 여유롭게 몸까지 젖혀가며 그런 나를 감상했다. 아, 짜증 나. 쟤 관상이 딱 지민이 이상형이야.

 

 

"왜 불렀는데. 너나 나나 오래 얼굴 보면 구역질이나 날 거아냐. 할 말 있음 빨리 해."

"뭐, 그 말에는 동감해요. 아유, 그러니까 좀 잘하지 그랬어요. 편지, 스톨른 한 거 들키지나 말던가."

 

 

뭐? 시발 방금 뭐? 스톨른? 허, 지금 캐나다를 투이어 다녀오셨다고 존나 영어 쓰세요? 시발 뻐킹이다 새끼야. 전정국은 여유롭게 웃으며 굉장히 미국스러운 제스쳐를 썼다. 야, 너 캐나다 다녀왔다며. 나 다 들었거든. 어디서 아메리카 헐리우드 스타병이야. 나는 전정국의 그 같잖음과 고까움에 비웃음을 날렸고 전정국은 여전히 깐족거리며 웃었다. 아 시발 존나 열 받네 레모네이드 저 새끼 코에 부어버릴까.

 

 

"야, 그거는. 하. 맞아 그거 내 탓 맞아. 근데 뭐 어쩌라고. 화해하게 해준다며."

"형도 참, 어지간해요. 그렇게 말했다고 쪼르르, 나오냐. 똥줄 좀 타셨나 봐요. 그렇게 똥줄 타가지고 앞으로 섹스는 어떻게 하려나."

"이 시발!"

"어어, 진정하세요. 여기 공공장손데. 기본 매널 정도는 지켜주셔야죠."

 

 

아, 아 존나 같잖다. 으 시발 존나 좆같아. 이 새끼 뭔데. 얘 지민이 앞에서도 이런대? 그럴 리가. 우리 지민이가 저따위 같잖은 혀굴림에 넘어갔, 을 수도 있어. 지민이가 의외로 혀에 약해. 아니 그것보다 쟤 진짜 왜 저래. 아 쟤 지금 복수라도 하는 거야? 내가 지 편지 가로챘다고? 그리고 시발, 내 똥구멍은 똥만 싸지르거든!

 

 

"형. 제가 지금 편지 때문에 이러는 거 같으세요?"

"아닐 리가 있냐."

"아닌데. 저 유학 가게 된 거 형 때문이잖아요. 형이 그 사진, 저희 집에 친절히 보내줘서."

 

 

아, 어떻게 알았지. 하긴 사진을 이용하는 치사한 수법이 전정국이 학교 다닐 때 나한테 썼던 수법과 유사하긴 했다. 전정국은 집에 도착한 사진을 보자마자 나라고 느꼈을 거다. 늘 본인이 나에게 엿 주던 방식이 그대로 돌아와서. 그래서 인생은 인과응보라 하는 거야 이 어린 새끼야. 그래서 그걸 지금 나도 돌려받고 있고. 


아무튼 전정국이 이걸 알고 있다면 나는 한 번 더 초조해져야 했다. 지민이가 이걸 아는지 모르는지 등골이 오싹해졌기 때문이다. 내 초조함을 눈치챘는지 전정국은 눈을 감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미소 지었다. 왜 저래 쟤 진짜. 나 쟤 싫어.

 

 

"초조하시죠. 지민이가 그거 알까 봐."

"아니? 아닌데?"

"알아요. 제가 아까 말했거든요."

"뭐? 너 이 시발 치사한!"

"치사한 건 형이죠. 강제로 아웃팅을 시키셨잖아요. 그리고 그게 저랑 지민이 헤어진 결정적 이유였는데. 그거까지 숨기고 다시 지민이랑 만나면, 어쩌시려구요. 나중에 이 일 들키면, 그땐 감당하시겠어요?"

  

 

그건 그랬다. 사실 편지는 애교 같은 거였다. 둘 사이의 관계를 완전히 찢어놓은 건 내가 보낸 사진 때문이었다. 어쩌면 그걸 전정국이 밝혀줘서 약간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좀 더 나중에 이걸 알게 되면 그땐 지민이가 날 정말 봐주지도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순간 머릿속을 스쳐가며 들었다. 


아마 그럴 것이다. 지민이한테는 정말 오래도록 간직했던 소중한 사랑이었으니까. 지금 지민이는 어떤 생각을 할까. 한꺼번에 터져서 다행인 걸까, 아니면 엄청난 불행인걸까. 나는 점점 지민이가 보고 싶어졌다. 그 모든 게 밝혀졌으니 이젠 정말 무릎 꿇고 빌고 싶었다. 지민이가 전정국이랑 잤든 안 잤든 상관없었다. 괜찮았다. 지민이만 다시 나에게로 돌아올 수 있다면.

 

 

"지금 저희 아파트 놀이터에 있어요. 저희 집, 잘 아시죠? 우편까지 보내셨는데."

 

 

나는 전정국의 말을 듣자마자 일어섰다. 카페 밖으로 막 튀어나가려 하는데 전정국이 잠깐, 하며 나를 불러세웠다. 뭐야 이 새끼야 빨리 말해. 나 존나 급하니까.

 

 

"저, 다시 캐나다 안 가요. 여기 계속 있을 거예요."

"근데 뭐."

"그러니까 잘 하시라구요. 저 지민이 형이랑 같은 학교 들어갈 거거든요. 형 복학하면 같이."

"이 시발."

"다시 사귈 수 있을지 모르겠는데, 어쨌든. 잘 해봐요. 언제나 긴장하시고."

 

 

전정국은 일어나서 날 툭툭 치더니 나보다 먼저 카페를 나갔다. 나는 한숨을 한번 쉬고는 놀이터를 향해 달렸다. 전정국 말대로 전정국 집은 잘 안다. 어느덧 해는 지고 밖은 깜깜했다. 지민이 겁도 많은데, 이 어두운 시간에 그 무서운 놀이터에 애를 혼자 두고 오다니. 전정국 암튼 여러모로 맘에 안 드는 새끼야.

 

 

"지, 지민,"

"야, 이 시발 변태 새끼야! 너 여기 어떻게 왔어! 이 미친 놈. 여태 미친 놈이야."


"지민아!"

 

 

전정국네 아파트 놀이터로 가자마자 놀이터 옆 벤치에 앉아있는 지민이가 보였다. 그런 지민이를 향해 가려고 했는데, 어떤 다른 실루엣이 지민이한테 엉겨 붙고 있었다. 나는 곧장 지민이를 향해 뛰었다. 그 음산한 놈을 떼어놓고 보니 일전의 그 '맘먀듀떼요'하던 변태새끼였다. 뭐야, 이 새끼 이 동네 살아? 그땐 아니었는데. 지민이한테서 그 새끼를 떼어내고 지민이를 내 뒤로 보냈다. 변태 새끼는 '뭐야 시발,'하더니 내 얼굴을 보자마자 멈췄다. 호, 너 이 새끼 나 기억하는구나?

 

 

"너, 너."

"야아, 너 존나 반갑다. 너 내 얼굴 기억하면 내가 그때 했던 말도 기억 하냐."

"아니 이, 이건."

"뭐야. 김태형 너 얘 알아?"

"아니, 몰라. 내가 미안. 미안해."

 

 

변태새끼는 내가 입모양으로 그 새끼 이름을 중얼거리자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나는 그 새끼가 저 멀리 안 보이고 나서야 지민이를 돌아봤다. 지민이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지민이의 얼굴은 그 어떤 표정도 없었다. 그래, 맞아. 복잡하겠지. 한 번에 용서받을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는 지민이한테 '그네 탈래?' 하고 물어봤고, 지민이는 별 대꾸 없이 그네로 가서 앉았다. 


지민이랑 그네는 꽤 자주 탔었다. 우리는 줄곧 같은 학교를 다녔기에, 학교 끝나면 놀이터로 달려와 놀거나 그네에 앉아서 같이 아이스크림이나 과자를 나눠먹고 그랬다. 잠시 옛 생각을 하다가 지민이를 쳐다봤다. 지민이는 고개를 숙인 채 그넷줄을 손에 쥐고 운동화 앞코로 모래만 파고 있었다.

 

 

"지민아."

 

 

살짝 부른 목소리에도 지민이는 대꾸가 없었다. 입술이 바짝바짝 말랐다. 다시 지민이를 불렀다. 그리고 꼭 해야 할 말도 했다.

 

 

"지민아. 내가 진짜 미안해."

"...뭐가."

"그냥, 요 며칠 일어난 일 전부 다."

"구체적으로 뭐."

"어, 내가 너 싫다는 전 애인들 만난 것도 미안하고. 또 예전에 전정국 편지 버린 것도 미안해."

"또."

 

 

고개를 숙인 지민이의 볼살은 귀엽게 내려와 있었고, 지민이의 통통한 입술이 쭉 밀려 나와 있었다. 그 올망졸망한 모양새로 그래도 나한테 대꾸해주는 게 나는 참 고마웠다.

 

 

"또, 전정국 집에 사진 보내서 너랑 전정국 강제이별 시킨 것도 미안해."

"너 진짜."

"그리고, 싸웠다고 너한테 막말 한 것도 내가 다. 많이 미안해. 잘못했어."

"너는, 아까 그 찌찌병자 새끼도 순식간에 말하는 걸 이렇게 오래 걸려서 말하냐."

"어?"

"미안하다는 그 말이 그렇게 어려웠어?"

 

 

그러고 보니 그랬다. 나는 지민이한테 계속 잘못을 저지르고 있으면서도 지민이한테 사과는 하지 않았다. 오히려 지민이가 전정국을 만난다는 이유로 지민이한테 모난 말을 하기나 했고, 또다시 상처나 줬다. 지민이는 나를 잠깐 째려봤다가 다시 아래를 쳐다봤다. 지민이의 눈에서는 눈물이 뚝뚝 흘렀다. 나는 그네에서 일어서 지민이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그네를 잡고 있는 지민이의 손을 감싸 쥐고 지민이를 바라봤다. 지민이는 필사적으로 내 눈을 피하려고 했지만 나는 그런 지민이를 가만히 바라봤다.

 

 

"그것도 미안. 내가 유치했어."

"너, 이거 쉽게 안 넘어가. 몇 번이고 다시 말하고 그럴 거야."

"응, 그래. 괜찮아. 당연하지. 정말 미안해. 지민아."

 

 

지민이는 그제야 나를 쳐다봐 주었다. 지민이는 울음을 멈추지 않았다. 속이 시큰거렸다. 내가 지민이를 울렸다. 그렇게 한평생 지민이만 좋아했다고 했으면서. 지민이를 울렸다. 나는 지민이 손을 감싸 쥐었던 한 손을 풀어서 지민이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게 더 서러웠는지 지민이는 자기 얼굴에 닿은 내 손을 감싸 쥐고는 더 세차게 울었다. 아, 이게 아닌데. 나는 쭈그렸던 몸을 일으켜서 지민이를 가만히 안아주었다. 지민이는 그런 나를 붙잡고 열심히도 울었다. 


꽤 시간이 흘러서야 지민이는 진정했다. 나는 다시 지민이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지민이는 여전히 훌쩍거렸다.

 

 

"근데."

"응?"

"너, 아까 걔 어떻게 알아?"

"아, 그게."

"걔는 어떻게 아는 건데. 이번엔 숨기지 말고 다 말해라 너."

 

 

지민이는 하도 울어서 먹먹해진 코로도 잘 말했다. 약간 웅얼거리는 느낌이 있었지만 어쩐지 지민이랑 잘 어울렸다. 나는 그런 지민이를 보며 웃으며 말했다.

 

 

"내가 너 스토킹도 좀 했거든. 어떤 새끼들 만나나."

"미친."

"맞아. 너한테 좀 미쳐있어서 내가. 암튼 그때 봤어. 니가 그 새끼 거시기 발로 차고 도망간 다음에 내가 혼 좀 내줬지."

"등신."

 

 

지민이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웃었다. 다행이었다. 지민이가 다시 웃었다. 나는 쭈그렸던 몸을 살짝 일으켜서 지민이의 얼굴에 입을 맞췄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지민이와 나의 화해의 제스쳐로는 딱 적당했다.

 

 

"너. 정국이한테 고마워해."

"또 정국, 암튼 왜?"

"있어. 그런 게."

"나한테 비밀 만들 거야?"

"왜, 안 돼?"

"아니. 지민이는 비밀 있어도 되는데. 그게 전정국이랑 관련된 거면 좀 그런데."

"알고 싶으면 잘해. 이번 일 내가 다 괜찮아지면 그때 말해줄 테니까."

 

 

암튼 깜찍했다. 박지민은. 나는 그런 박지민을 이길 수가 없었다. 예전부터 그랬다. 그냥 내 몸의 모든 유전자가 그렇게 구성되어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절대 박지민을 이겨 먹을 수가 없다. 나는 박지민을 보고 있다가 다시 입을 맞췄다. 이번에는 조금 더 긴 입맞춤이었다.

 


 

 

*의인 전정국

 

 

"형. 여기 이러고 있으면 어떻게 해요."

"어, 정국아. 여기 어떻게 왔어."

"그냥, 예전에 형이랑 다니던 곳 다니다 보니까. 근데 형 얼굴이, 무슨 일 있었어요?"

 

 

지민이 형이 먼저 모텔을 빠져나가는 것쯤은 다 알고 있었다. 솔직히, 한국에 온 목적도 박지민을 다시 만나는 거였다. 처음에는 다시 만나서 화를 내려고 했다. 내가 열심히 보낸 편지와 메일엔 왜 답장 한 통 없었으며, 왜 먼저 연락 한 번 해주지 않았는지. 내가 단 한 번도 그립지 않았냐고 쏘아붙이고 싶었다. 그러나 형의 집 앞에 가서, 그 익숙한 뒤통수를 보자마자 코끝이 아련해져 오는 게 캐나다에서부터 열심히 먹었던 마음은 다 소용없게 되어 버렸다. 


그래, 사실은 그 얼굴 한 번 다시 보고 싶었던 거였다. 내가 너무 그리워서. 내가 참 많이 그리워했다고. 그렇게 말하고 싶었던 거였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형을 만나자마자 별일이 다 생겼다. 아주 어색한 시간 없이 형과 나는 금세 친해질 수 있었다. 일전의 내 편지에 형이 왜 답장을 못 했는지 우리가 왜 헤어지게 되었는지. 나의 첫사랑은 왜 실패했는지. 나는 그 모든 이야길 알아버리게 되었다. 시차 적응도 안 된 오랜만의 그 곳에서.

 

 

"정국아. 나 어떻게 하지."

"왜요."

"그냥, 이제 다 어째야하나 싶어서."

"나랑, 자서요?"

 

 

내 말에 놀이터 구석에서 한껏 웅크리고 있던 형은 화들짝 놀랐다. 참 이 형도 감정표현 한 번 엄청 못 숨긴다. 약간 직설적인 말에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보더니 다시 고개를 돌렸다. ‘뭐, 그런것두 있고.’ 하면서 말끝을 흐리는 게 이런저런 생각이 복잡해 보였다. 


솔직히 지금이 기회라고 생각한 건 사실이다. 시기적절하게도 내가 그리워했던 첫사랑은 현재 애인과 크게 싸웠으며, 나한테는 엄청 미안해하고 있는 상태였다. 게다가 전날 나랑 그리웠고 뜨거웠던 불타는 밤도 보냈다. 이때 내가 잘 구슬리면, 다시 나의 연인으로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주 잠깐,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러나,

 

 

"너한테 미안해서."

"뭐가 미안해요."

"그냥, 내가 술김에 그랬기도 하고. 난 너한테 좋은 첫사랑으로 남고 싶은데. 이젠 그러긴 글렀잖아."

"그건."

"또 이 와중에 나는, 걔가 보고 싶어."

 

 

알 수 있었다. 박지민은 더 이상 나의 연인이 될 수 없었다. 낯선 타지에서 나는 박지민 생각밖에 할 수 없었지만, 박지민은 그의 홈그라운드에서 나와 헤어진 상처쯤이야 금세 다독일 수 있었다. 그리고 나를 기억 저편에 아름다운 것으로 묻어두고 새로운 것을 다시 쌓아가기에 충분한 마음을 갖고 있었다. 


가족에게도 버림받고 타지에서도 차별받던 나와는 참 다르게 살았던 박지민에게 나는 묻어놓은 나를 다시 꺼내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박지민에게 있어서 나와의 사랑은 좋고 아름답게 남겨지길 바라는, 지나간 과거였을 뿐이었다. 아주 딱 한 번만 더, 욕심을 부려보기로 했다. 이대로 포기하기엔 그동안 내 사랑을 짝사랑했던 스스로가 너무 불쌍해서.

 

 

"형. 우리, 왜 헤어졌는지 알아요?"

"응? 그거 너 집에 들켜서 그러지 않았어? 갑자기 유학 가게 되고."

"네. 근데 왜 들켰는지 알아요?"

"왜, 들켰는데?"

"그 형이. 사진 보냈거든요. 우리 집에."

 

 

나름 힘 줘가며 내뱉은 문장에 박지민은 약간 흔들리는 듯했다. 입술을 꽉 깨물고 손으로 의미 없는 장난을 치고 있던 나뭇가지를 부러트리더니 바닥에 던져버렸다. 나는 계속 박지민을 바라봤다. 박지민은 아예 얼굴을 팔로 감싸고 고개를 묻어버렸다. 여러 가지 복잡했을 터였다. 불과 이틀 만에 이 수많은 일들이 박지민에게로 쏟아졌다. 잘 아물게 두었던 상처에 다시 칼을 들이대는 꼴이었다. 


아주 미안했지만, 그래도 이건 어쨌든 박지민이 알아야만 하는 사실이었다. 나와 다시 만나게 되든, 김태형을 다시 만나든 이 일에 대해 알아야 그 다음을 결정할 수 있었다. 한참을 그렇게 얼굴을 묻고 있는 박지민에게 난 재촉하듯 물었다.

 

 

"형. 그래도, 그 형이 보고 싶어요?"

 

 

그 찰나의 순간 동안 나는 심장을 졸여야 했다. 박지민과의 사진이 놓인 테이블에 부모님과 마주하고 앉았던 그때보다도 더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 같았다. 박지민은 묻어놓은 얼굴로 푸우, 푸우 하며 숨을 내쉬고 있었다. 나는 다시 한 번 물었다. 이걸 알고도 그를 좋아할 수 있겠냐고.

 

 

"응. 미운데. 그래도 보고 싶어."

"형 바보예요?"

"그러게. 나 진짜 화나거든? 방금 그 말 듣고 진짜 또 울컥했는데, 근데도 김태형이 보고 싶긴 해. 미운 건 미운 거고, 또 화나는 건 화나는 건데. 김태형이 보고 싶어. 아직, 싫어지지도 않고."

 

 

내가 내 상처를 다 보듬지 못했던 그 시간 동안, 박지민에게는 얼마나 단단한 사랑이 생겨난 것일까. 억울하기도 하고 화도 났다. 그렇지만, 내가 수 년을 사랑하고 짝사랑했던 박지민에게 나는 어떠한 화도 낼 수 없었다. 어쩐지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애원하고 매달렸고 다시 섹스를 했지만 이미 박지민은 날 좋아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게 참 서러웠지만 이미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게 밉기도 했지만 나는 여전히 박지민을 사랑하는 전정국이었다. 박지민의 감정은 내 것과 비슷할 거라 생각하니 이해가 가긴 갔다. 좀 짠내 나긴 하지만 그래도, 박지민이 행복해진다면 어쩌면 그걸로 될 것도 같았다. 


박지민이 잘사는 꼴을 보면 나도 빠르게 정리할 수 있지 않을까. 더 이상 그 어떤 상상도, 의미 없는 기대도 하지 않고 박지민을 잊어갈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이 와중에도 그런 생각을 했다.

 

 

"여기, 잠깐만 있어요."

"응? 어디 가게."

"형. 다시 그 형이랑 잘 되더라도. 긴장 놓지 말아요. 나 형 포기한 거 아니니까."

"정국아."

 

"그 형, 옛날부터 형 되게 좋아했어요. 일부러 나랑 형 못 만나게 하려고 기를 쓰고 그랬거든요. 형은 눈치가 없어서 몰랐겠지만. 형 좋아하는 애들도 꽤 많았는데 다 그 형이 막았어요. 누가 박지민 좋아한다 그러면 찾아가서 박지민은 김태형 소유라 그러고. 암튼 되게 극성이었거든요. 어쨌든, 그 극성 박지민 빠돌이 성공했네요. 그래도 나, 그 철벽 방어 속에서 형이랑 연애까지 했던 남자니까. 형들 늘 긴장해요."

 

 

김태형은 진짜 마음에 안 들었지만, 박지민이 너무 내 마음에 드는 사람이었기에 어쩔 수가 없었다. 몰라, 일단은 박지민이 좋다는 대로 두고 또 이런 일이 생기거나 기회가 생기면 그때를 다시 노리든가. 아니면, 나도 박지민 잘 잊고 다른 사람 만나도 되지 뭐. 아, 전정국 거 엄청 사랑꾼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