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래더] 트위터는 @Rather_0613 (舊 새벽의덕후)

[뷔민국] 지민의 역사

 

 

W.새벽의덕후

 

 


<Ep. 전 애인 열전 上>

 



"지민이 형?"

 

 

어쩌면 일이 이렇게 되려고 그 일이 벌어졌는지도 모른다.

 

 

 

*

"야. 김태형 이 개새끼야!"

"아, 지민아. 왜 그래. 갑자기 뭔데."

"왜 그래애? 뭔데에? 너 지금 그게 할 소리냐?"

"대뜸 왜 그러는데. 무슨 일인지 나도 알아야지, 응?"

 

"너 이 시발 또 전여친 만나러 갔잖아!"

 

 

아무리 생각해도 김태형은 쓰레기 새끼였다. 시발새끼. 나는 집 도어락이 눌리자마자 방에서 베개를 손에 쥔 채 뛰쳐나갔고 문 안으로 김태형이 들어오자마자 그대로 베개를 잘생긴 얼굴에 꽂아버렸다. 안락한 집에 들어오자마자 맞은 봉변에 김태형은 굉장히 당황했고, 나는 그런 김태형을 보면서 씩씩거렸다. 이 좆같은 새끼. 


사건은 그랬다. 좆같은 바이새끼 김태형에게는 존나 좆같은 일정이 있었는데, 바로 지 전 애인들을 만나고 다니는 것이었다. 사귀고 나서 알게 된 건데 김태형은 대단한 바이새끼이셨고, 나 말고도 남자를 만나본 적도 몇 차례나 있다고 했다. 어찌되었든 김태형은 종종 전 애인으로부터 연락이 오면 받았고, 만나자 하면 만났다. 본인은 아무 감정이 없으니 상관없다고 했다. 


근데 시발, 내가 존나 상관이 있었다. 김태형 같은 존나 잘생긴 애의 전애인 연락이면 딱 봐도 사이즈 나오지 않겠냐고. 좀 더 질척대보려고 그런 거지. 내가 전정국 편지에 침 발랐을 때처럼.

 

 

"지민아. 내가 그랬잖아. 나 걔들한테 아무 감정 없다니까?"

"넌 없겠지. 근데 걔들은? 걔들도 없다 그러냐?"

"없어. 없어 지민아. 그냥 친구야."

"친구 좋아하네, 시발."

 

 

김태형 앞에서 욕은 첫 섹스 날부터 텄다. 이제는 뭐, 집이건 밖이건 열 뻗치면 욕부터 나간다. 김태형을 만나고부터 욕을 안 한 적이 없다. 얘는 분명히 얼굴로만 연애를 했던 새끼다. 상대에 대한 예의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었다. 


내가 이전부터 몇 번이고 그랬다. 나는 싫다고. 너는 아무 감정 없겠지만 걔들이나 나나 감정이 있다고. 나는 애인 있는 너를 굳이 불러내는 걔들이 존나 고깝고, 걔들은 분명 너에게 여러 감정이 있을 거라고. 늘 어두운 저녁 때 불러서 새하얀 새벽에 애를 들여보내는데 어느 애인이 그걸 가만히 두고 보겠냐고. 게다가.

 

 

"이건 뭔데. 뭐라 할 건데. 설명해봐."

"이게 무슨."

 

 

나는 화가 났다는 것을 온몸으로 표현하려고 쿵쿵대며 방으로 들어가 방문 앞에 놓아둔 택배 상자를 집어 들고 김태형한테 건네주었다. 아까 집에 혼자 있는데 받은 물건이었다. 김태형은 안의 내용을 확인하자마자 얼굴을 굳혔다. 그래. 너도 그걸 보고 아무 감정 없다, 따위의 좆같은 소리를 더 이상 할 수 없겠지.

 

 

"아무 감정도 없는데. 그때 잘썼엉, 하고. 하트까지 써가면서 빤쓰랑 콘돔을 보내냐?"

"지민아 이건."

"뭐! 그건 뭐 시발! 왜 그것도 아니라 할 거야? 전 애인님이 똥이라도 지리셨대? 그래서 넌 노팬티가 되더라도 전 애인님께 빤스를 조공이라도 했냐? 거기다, 콘도옴?"

"오해야. 이건 얘가. 하, 얘는 대체 왜."

 

 

김태형 엿먹어 보라고 보낸 거라면 그 전애인 아주 대단히 적중률 높은 친구였다. 그러신 분이면 왜 김태형 옆에서 껄떡대시나, 노량진 가서 스타 족집게 강사라도 하시지. 아님 아육대에 양궁선수로 나가던가. 지금 김태형이 존나게 좆 되셨거든. 택배 상자에는 새로 산 듯한 빤쓰와 콘돔, 그리고 빨간 하트를 그려놓고 입술까지 찍어놓은 웬 변태 기프트 박스가 담겨있었다. 이 새끼, 전애인새끼 안되겠네. 콘돔 일본 거야. 이런 역사에 무지한 새끼. 국산을 애용하자 시발놈아!

 

내가 김태형을 노려보고 있으니 김태형은 그 큰 손으로 -분명 나는 절대 그렇게 못 했는데- 단 한 손으로 택배 상자를 쥐고 다른 손으로는 머리를 쓸어 넘겼다. 아, 시발. 


사실 저거는 내가 김태형이랑 싸우다가도 단번에 KO 당하는 좆같은 제스쳐였다. 왜냐, 존나 잘생겼으니까. 나는 상당한 얼빠였기에 김태형이 저런 식으로 표정 굳히고 입술을 혀로 쓸어내고 이마를 까보이면 거의 무릎도 꿇을 수 있었다. 


김태형은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암튼 굉장히 불리할 때면 저따위 행동을 하곤 했다. 근데 오늘은 안 된다. 이대로 또 어물쩍 넘어가면 김태형은 또다시 전 애인들을 만나고 다닐 거다. 나는 다시 방으로 들어가 핸드폰과 지갑만을 챙긴 채 문으로 향했다.

 

 

"지민아 너 어디,"

"꺼져 김태형."

 

 

사실 말은 ‘꺼져 김태형’ 이라고 했지만 내가 꺼졌다. 날 가로막으려는 김태형의 팔을 밀어버리고 밖으로 나와 버렸다. 뒤에서 '지민아!'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시발 됐다 이거야. 내가 돌아가면 등신이게? 


그래도 오늘은 제대로 한 방 먹인 기분이었다. 김태형의 아찔한 이목구비에 굴복하지 않았다. 잘했어 박지민. 넌 더 이상 김태형 얼굴 호구가 아니야! 몇 번을 생각해도 김태형은 예의가 없었다. 아무리 우리가 일평생을 함께 붙어살아 가족 같은 사이라지만 이건 정도를 지나쳤다. 


지금은 연인사이씩이나 되는데, 내가 그렇게나 싫다고 했던 전 애인을 만나고 다니시다니. 새끼 아주 똥꼬 쫄리게 긴장 타봐라. 그나저나 이제 어딜 가나. 좀 시간 때울 게 필요한데. 집에서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멈춰 서서 향후 발걸음을 고민하던 그때였다.

 

 

"지민이 형?"

 

 

뭔가 굉장히 익숙한 음률이 내 귀를 관통했다. 이 동네에 날 '형'이라 부를 사람은 없었다. 나보다 두 달 반이나 늦게 태어난 김태형은 일평생 날 그렇게 불러준 적이 없었고, 또 내 화를 풀어준다고 형 소리를 달고 뛰쳐나올 인간은 못 되었다. 암튼 이런 갑작스런 타이밍에 날 형이라고 부르는 인간의 등장이라니. 뭐야, 이 대사 뭔가 사탄들의 학교에 루시퍼가 등장한 느낌이잖아.

 

 

"형?"

 

 

나는 한 번 더 '형'을 외치는 목소리에 뒤를 돌아봤고 그곳에는 형 소리가 귀를 관통하자마자 설마설마 혹시나 세상에나 하며 짐작만 했던 그 대상이, 그 애가 있었다.

 

 

"정국, 이?"

"형 맞네요!"

 

 

진짜 전정국이었다. 정국이는 해사하게 웃으며 내 앞으로 성큼성큼 뛰어왔다 오 얘 뭐야. 존나 잘생긴 근육토끼 같았어, 방금. 예전부터 정국이는 잘생겼었지만 그때는 뭔가 아가 같은 매력이 조금 더 있었다면 지금은 조오올라 상남자, 싸나이 중의 싸나이 같은 느낌이었다. 나도 아직 안 갔다 온 군대를 갔다 온 느낌이랄까. 


얘는 유학을 간 게 아니라 용병을 뛰다왔나. 몸 사이즈 커진 거 봐. 뭐야 뭐야, 나 지금 약간 주눅 들려 그래. 갑작스러운 만남에 당황하긴 했지만 그 와중에도 천천히 정국이를 스캔했다. 얘 좀 봐. 작정하고 옷을 입었나 봐. 꽤 넓게 파인 옷 안으로 보이는 쇄골에 어깨라인 대박이다, 진짜. 


오 지져스, 하느님 부처님 천지신령님.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건가요. 김태형이랑 김태형의 전애인 때문에 싸우고 나왔더니 유학 가고 연락 안 되던 제 전애인을 집 앞에서 만나게 된 것은 대체 무엇을 의도하신 건가요. 내가 한참을 그렇게 스캔하며 신과 교감을 시도하는 동안 정국이는 연신 방싯거리고 있었다. 어머 얘 봐, 되게 예쁘네.

 

 

"너 대체 어떻게 여기,"

"저 귀국했어요! 아직은 잠깐이지만."

"진짜? 금방 돌아가?"

"일단 조금 있어 보구요. 아, 그나저나 저 아직도 거기 살아요. 이사 안 가서."

 

 

솔직히 약간 벅차올랐다. 그래 김태형만 전애인 있는 거 아니야. -김태형 전 애인들은 대체로 굉장히 예쁘고 잘생겼다. 존나 끼리끼리 시발- 나도 존잘 전 남친이, 심지어 연하로 있다 이거야! 요새 그 뭐더라. 맞아 영 앤 리치, 빅 앤 핸섬. 그거 딱 전정국이잖아. 리치까지는 모르겠는데 어쨌든 완벽하다 이거거든. 


굉장히 갑작스럽긴 했지만 사실 정국이와의 재회를 단 한 번도 상상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그 좆같은, '맘먀듀떼요'하던 찌찌병자 젖팡매야 새끼도 또 만나면 어쩌나 하는 생각을 살면서 가끔 했는데, 나의 아련하고도 그립던 첫사랑 정국이와의 재회를 한 번도 상상하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여러 장면을 상상했었다. '너 이 시팔 이별 편지만 달랑 보내고 잠수를 타? 내가 그 편지를 물고 빨고 질척,'대는 상상도 하다가 그때 편지 생각에 수치스러워하기도 했고, '어머, 정국아 참 오랜, 으브븝'하는 격정키스섹스멜로도 상상은 했지만 앞에서 청량하게 웃고 있는 정국이를 보니 어쩐지 죄스러웠다. 


수많은 상상을 했지만 지금의 이토록 정국이스럽고 청량한 재회가 나는 참 마음에 들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듯, 황진이 누나가 말했던 것처럼 기나긴 시간을 베어내어 다시 이어 붙인 듯 그렇게 부드러운 재회였다.

 

 

"진짜 반갑다. 어, 그. 시간 있,'

"네. 있어요."

 

 

워, 정국이 너는 여전히 박력 있구나. '시간'이라는 말을 꺼내자마자 대뜸 있다고 하는 정국이를 보고 당황하기도 했지만 이내 웃고 말았다. 그리웠던 그 정국이 맞네.

 

정국이와 나는 우리가 사귈 때 자주 갔던 카페로 향했다. 거기까지 가는 내내 정국이는 많이 바뀐 동네를 둘러보며 '우와'하는 소리를 냈다. 이건 바뀌었고, 저건 그대로네요. 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한국에 들어온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고 했다. 집에 와서 짐도 풀고 지내다가 오랜만에 밖에 나와봤는데 나처럼 생긴 뒤통수 -대체 그건 어떻게 생겨먹은 뒤통수인가- 가 있어서 불러봤다고 했다. 어쨌든 정말 반가운 만남에 정국이랑 오래도록 이야기를 했다. 정국이가 해외에 가 있는 동안 있었던 일을 들으며 나는 김태형이랑 싸운 것도 잊고 깔깔대며 신나게 웃었다.

 

 

"아 근데 왜 그렇게 연락이 안 된 거야."

"네? 연락 안 된 건 형이죠. 내가 편지를 얼마나 보냈는데, 답장 한 번이 없고."

"편지? 딱 한 번 왔어. 그 굿바이인가 뭔가 써 있던."

"그럴 리가요. 내가 캐나다 가자마자 한 달 내내 편지 보내고 이메일도 보냈는데."

 

 

이상했다. 이메일이야 내가 확인을 잘 안 해서 몰랐다고 하지만, 편지는 정말 단 한 번밖에 안 받았는데. 그 내가 울며불며 질척댔던 그 편지. 나는 그냥 '너무 멀어서 그랬나 보다'하고 웃으며 말을 넘겼다. 아, 뭐지. 기분 약간 쎄한데. 뭔가 등골이 간질간질하고 막 그런데.

 

 

"맞다. 형은 아직 거기 사는 거 보니까, 그 김. 아니 그 형이랑 같이 살아요?"

"엉? 누구, 아. 어. 김태형. 뭐, 일평생 같이 살았으니까."

"그렇구나."

 

 

한창 좋은 와중에 김태형 얘기가 나와 버렸고, 나와 정국이 사이에는 약간의 정적이 흘렀다. 서로 앞에 놓인 음료수만 빨고 애먼 곳을 봤다. 김태형은 나와 정국이 사이에 놓기에는 너무 껄끄러운 주제였다. 우선 오늘 대판 싸우기도 했고, 싸운 이유가 전애인을 만나서였는데 지금 내가 그러고 있다. 거기다 김태형은 나의 현애인이기까지 하다. 여러모로 까끌거리는 느낌에 나는 멋쩍게 웃어버렸고 앞에 앉은 정국이도 아메리카노를 쪽쪽 빨아 먹다가 웃었다.

 

약간의 대화를 더 나눈 우리는 이만 헤어지기로 했다. 내가 괜찮다고 했지만 정국이는 기어코 나를 집까지 데려다주겠다 했고, 결국 나는 아주 오랜만에 정국이와 익숙한 길을 걸었다. 얘는 캐나다 가서 키 크는 음식만 먹었는지 이년 전보다 옆에 선 느낌이 더 듬직했다. 몸도 커져서 뭔가, 보디가드를 옆에 두고 걷는 느낌이었다. 


정국이가 너무 달라져서 그런가, 그냥 뭔가 간질간질하고 뭐 그런 느낌이 들었다. 자꾸 그 옛날 첫사랑 시절의 느낌도 나고, 달라진 게 느껴지니까 색다르기도 했다. 걷다가 옆을 빠르게 지나가는 오토바이 때문에 정국이가 날 감싸 안듯이 막아줬을 때는 어쩐지 심장이 쿵, 하는. 말 그대로 심쿵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 와중에 정국이 팔에 핏줄 봤으면 나 쓰레기인 건가. 얘 힘이 더 좋아졌어. 세상에.

 

 

"어, 그럼 나 들어갈게."

"네 형. 그, 연락할게요."

"응. 잘 들어가."

 

 

약간은 뻘쭘한 인사를 나누고 나는 집으로 들어섰다. 기분이 요상하긴 했지만 그래도 김태형이랑 나름 아주 약간은 대등한 잘못을 저질렀으니 오늘은 봐줘야지, 하고 들어섰을 때였다. 나는 웃던 얼굴도 굳히고 문을 연 채로 멍하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현관문 안으로 발을 들이자마자 들린 '아, 전정국?'하는 소리 때문이었다.

 

 

'아, 전정국? 알지. 우리 학교였잖아 걔. 근데 걔는 왜? 어, 어어. 아 진짜? 뭐야. 생각보다 오래 안 있었네. 아. 아니, 나도 걔 잘 몰라. 응. 아 그냥 예전에 걔 좀 골탕 먹인 적은 있거든. 엉. 뭐래. 뭐, 별건 아니고. 걔가 좋다던 애가 있었는데. 어. 몰라 새끼야 내가 말하면 니가 다 아냐. 암튼 전정국이 좋다던 애한테 미친 듯이 쓰던 편지를 내가 중간에 삥땅 쳤거든. 아 뭐래, 그게 뭐 쓰레기야. 쓰레기는 고삐리 건들고 다니는 너 같은 새끼한테 하는 거야.'

 

 

김태형의 말에 내 머릿속에는 '삐-'하는 경고음이 들리는 것 같았다. 아까 카페에서 정국이랑 나누던 대화가 생각났다. 한 달간 보냈다던 그 편지. 서로에게 갑작스럽게 이별을 맞이했을 때 정국이가 보내줬다던 그 편지를 김태형이 중간에서 가로챘던 거다. 나는 집 문을 붙잡고 한참을 멍하니 서있었다. 


방에서 들려오는 김태형의 목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그래, 물론 김태형이. 내 현 남친 개씹존잘 시발바이 김태형이 전정국을 알고 있을 줄은 알았다. 내가 정국이랑 연애할 때 정국이를 덕질하는 수준으로 좋아했으니까. 정국이가 김태형이랑 같은 학교를 다니면서 좋아했던 애는 나밖에 없다. 김태형은 모든 걸 다 보고, 듣고, 알았으면서 그런 짓을 했다. 나는 조용히 문을 닫고 집을 나왔다. 이게 뭐지, 무슨 상황이지.

 

 

"형?"

"어, 정국아. 아직 안 갔네."

"형 들어가는 거 보려 했는데 안 들어가고 있길래."

 

 

아, 그랬구나. 우리 집은 단독주택 형태라 대문 들어가서 집 문을 붙잡고 멍청하게 서 있는 꼴을 가만히 지켜보기 쉬웠다. 정국이는 바로 안 돌아서고 계속 날 보고 있었구나. 아무 소리도 못 들었나. 김태형이 그렇게 큰 소리로 말한 건 아닌데. 


어떻게 정리가 안 되는 머릿속 때문에 멍하니 서 있다가 집 대문 앞에 앉아버렸다. 정국이는 당황했는지 나를 부르며 어정쩡하게 몸을 굽히고 있다가 결국 내 옆에 앉았다. 얼마인지 모를 시간 동안 눈만 끔뻑거리고 있다가 정국이를 돌아봤다. 정국이는 가만히 나를 보며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괜찮은 거예요?"

"국아. 술 먹을래?"

 

 

_

"흐어, 정구아아. 정구아아아."

"형, 형. 괜찮아요?"

"으이씨, 김태형 개애애새끼이이. 그 새끼는 조오올라 개애애새끼야."

 

 

제대로 취했다. 아련했고 나름 아름다웠던 나의 첫사랑 앞에서 나는 제대로 꽐라가 되었다. 김태형은 나의 이 아름다운 첫사랑을 말아먹은 새끼였다. 그때 정국이가 집에 아웃팅을 당하고 강제로 해외로 유배를 당했어도, 그렇게 우리가 이별을 맞이했어도 제대로 된 마무리는 우리 둘이 내는 게 맞았다. 김태형이 장난처럼 중간에서 편지를 채가서 우리 손으로 끝을 내지 못하게 한 건 김태형이 아주 크게 잘못한 거다. 그런 장난질은 지나치게 무례했다.


사귈 때에도 김태형은 예의가 없었다. 김태형은 수없이 많은 애들을 사귀었고 그 많은 애들이 부를 때마다 다 만나줬다. 내가 만난 제대로 된 전애인이라곤 지금 이 앞에 있는 정국이뿐인데. 그리고 그 전애인을 이 년만에 만났는데. 안 그래도 그 일로 여간 빡쳐있던게 아닌데 갑자기 추가된 김태형의 과거 행적들은 제정신으로 감당하기에 버거웠고 한 병, 두 병, 나중엔 소맥까지 말아먹으며 제정신을 말아먹기에 이르렀다.

 

 

"으으. 갈 거야. 나 갈 거야아."

"형, 어디 가게요. 형 잠시만."

 

 

한참을 진상처럼 떼쓰고 욕을 하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키도 작아서 앉았다, 일어났다가 순식간에 이루어지는데 그 짧은 순간에도 자꾸 비틀거렸다. 앞에 앉아있던 정국이가 넘어지려는 나를 붙잡았고 나는 그 팔을 뿌리쳤다. 안 돼. 나 지금 너랑 이렇게 더 가까워지면 안 돼. 그러면 김태형한테 당당하게 화낼 수 없어. 안 돼. 


정국이의 팔을 뿌리치고는 혼자 다시 비틀거리며 걸었다. 정국이는 급하게 계산을 하더니 내 뒤에 바짝 붙어섰다. 눈앞도 헤롱거려서 잘 보이진 않지만 어쩐지 내 양 옆에 자기 팔로 가드를 쳐주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손은 못 대게 하니까 그런가, 우습기도 했다. 소맥을 만 건 내 손인데 술은 다리가 처마셨는지 아주 후덜거리며 걸어갔다.

 

 

"형. 이러다 진짜 다쳐요. 내 팔만 잡고 가요."

"이거 놔아, 나. 혼자 갈쑤 이써어. 흐으."

"형, 제발."

"김태형 그 개애새끼. 시바알! 나아쁜새끼!"

"김태형이 개새끼라면서 어디로 가게요. 그리 가면 집 나오는데."

 

 

정국이의 말에 나는 비틀거리면서도 제 자리에 서 있었다. 그러게, 여기로 가면 나 집인데. 나는 어디로 가야 하니. 결국 나는 서 있던 자리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정국이가 '어어,'하는 소리를 내뱉으며 내 뒤에 쭈그리고 앉았다. 엉엉 울었다. 첫사랑을 앞에 두고 첫사랑의 마지막 편지를 받던 그날처럼 서럽게도 울었다. 


정국이는 나를 가까이에서 다독여주지는 못하고 뒤에서 숨만 푹푹 내쉬고 있었다. 내가 앞으로 가면 김태형이 있고, 뒤를 돌아서면 정국이가 있었다. 어느 곳도 향하지 못한 채 그렇게 주저앉아 있었다. 그 와중에도 김태형을 욕하며 울다가 나는 갈 거라며 몸을 움직이다가 다시 주저앉고 그랬다. 결국 어디든 가겠다며 몸을 일으켰고 휘청거리는 걸음을 몇 번 내디뎠을 때였다.

 

 

"가지 마요. 형."

 

 

정국이의 말에 나는 걸음을 멈췄고 정국이를 돌아봤다. 정국이는 어쩐지 울먹이는 것 같았다. 나는 정말 정국이가 우는 건지 확인하고 싶어서 비틀대며 가까이 다가갔다. 정국이는 나를 가만히 보고 있었지만 입술은 꽉 깨물고 눈은 글썽거린 채 있었다. 그 큰 눈을 한 번 깜빡거리니 눈물이 한 방울 또륵 흘렀다. 


잘생긴 애들은 울어도 꼭 잘생기게 운다. 나는 눈물 콧물 다 짜내면서 엉엉 울었는데. 정국이는 우는 와중에도 내 비틀거리는 몸을 붙잡아줬다. 그 덕에 정국이가 우는 모습은 더 잘 보였다. 아, 오랜만이다 이것도. 정국이 우는 거 내가 정말 좋아했는데. 


나는 뭐에 홀린 것처럼 정국이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내 손길에 정국이는 잠시 멈칫하더니, 그대로 입을 맞춰왔다. 어, 나 지금 뭐 하는 거지. 나 지금 누구랑 키스하고 있지. 낯선 느낌은 아닌데, 그렇다고 되게 친근한 느낌도 아니야. 지금. 뭐 하는 거지 나.

 

 

"저, 정국."

 

"지민이야?"

 

 

아주 잠깐, 전정국과 키스를 해버렸다. 멍하니 눈만 끔벅거렸다. 입술이 떨어지고 나자 술이 조금 깼다. 그때 뒤에서, 내 뒤에서 날 부르는 익숙한 목소리가 또다시 들렸다. 뭐야, 시발. 찾을 땐 멀쩡한 남자 한 놈 안 나타나더니. 원치 않는 순간에만 이렇게 남자들이 꼬인다. 그것도 졸라 잘생긴 현애인, 전애인 콤보로. 고개를 돌려보니 역시나 김태형이 있었다. 꽤 늦게까지 내가 집에 안 들어가니 찾아 나선 듯했다. 어이없어. 지는 맨날 새벽에 들어와 놓고.

 

 

"야, 김태혀엉. 너 뭐야."

"그건 내가 할 소리야 지민아. 왜 거기 있어. 누구랑 같, 너."

"오랜만이에요. 형."

 

 

이상한 삼자대면이 시작되었다. 조금 멀리 서 있던 김태형은 나와 정국이 쪽으로 가까이 다가왔고, 나는 김태형 쪽을 향해 돌아섰다. 김태형은 어쩐지 화난 얼굴이었다. 뭐지. 나 정국이랑 키스하는 거 봤나. 별 말이 없는 걸 보니 그건 못 본 거 같았다.


김태형은 아직도 정국이에게 붙들려있는 내 팔을 보고는 그 팔을 거칠게 떼어냈다. 정국이는 놓지 않으려고 힘을 더 세게 쥐었다. 서로 힘이 얼마나들 센지 그 틈에서 내 팔이 가장 아팠다. 개새끼들. 난 소중하거든! 


고통스러움에 인상을 찌푸렸지만 내 뒤통수를 보는 정국이는 알 리가 없었고, 나 말고 정국이를 보는 김태형도 알지 못했다. 두 사람의 관심 밖에서 가만히 방금 전 대화를 되짚었다. 곱씹을수록 대화가 이상했다. 오랜만? 정국이가 김태형을 만난 적이 있어? 언제? 왜?

 

 

"너 뭐야. 왜 지민이랑 같이 있어."

"그러게요. 근데, 그쪽이 상관할 일은 아닌 거 같은데."

"뭐? 왜 아니야. 나 얘 남친이거든?"

"아아, 그 개새끼라던 남친분."

"뭐 이 새끼야?"

"이 새끼는 지민이 형 전 애인이라고 합니다만."

 

 

어쩐지 한 쪽만 열을 내는 것 같은 싸움이 이어졌다. 내가 놀라웠던 건 정국이가 김태형한테 밀리지 않는다는 거였다. 뿐만 아니라 조롱하는 능력치가 꽤 되었다. 뻔뻔한 말투로 빈정거리는 게 만일 내가 김태형이었으면 못 참고 시발시발하는 욕을 내뱉었을 거였다. 그 와중에 욕을 참고 있는 김태형이 엄청 대단해 보였다. 김태형은 살짝 욱한 것 같더니 이내 천천히 심호흡을 하며 화를 누르고 있었다. 나는 그 사이에서 술이 천천히 깨는 바람에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있었다.

 

 

"나랑 얘기 좀 하자. 지민아."

"그냥 여기서 하시죠."

"지민이랑만 할 얘기 있어. 넌 빠져."

 

 

김태형은 나를 끌고 어디론가 갔다. 아까 거기도 인적 드물고 좋드만. 남자끼리 키스하고 쬐깐한 남자 사이에 두고 장정 둘이서 유치한 싸움 해도 아무도 안 지나갈 만큼. 


김태형은 어둑한 골목으로 날 밀어 넣었다. 나는 아직도 어질한 기분에 골목 벽에 기대 있었다. 시원한 시멘트 벽의 온도가 여러모로 열이 올은 나를 식혀줬다. 김태형은 잠시 숨을 거칠게 쉬며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더니 '아 씨!'하고 소리를 내질렀다. 그리곤 다시 숨을 깊게 내쉬고 내 앞으로 왔다. 이 새끼는 가로등 아래 있어도 존나 새끈빠끈하네. 이 정도면 가로등 불빛이 김태형 빨을 받네. 아주.

 

 

 

"너 뭐야."

"뭐가아."

"뭐가? 너 뭔데. 전정국이랑 왜 그러고 있었는데."

"내가 뭘 했는데, 정국이랑."

"정국이?"

"그래애, 정국이 이 개애새꺄."

 

 

김태형은 그 특유의 빡쳤다는 표정을 지었다. 내가 늘 당하고 화를 참아내게 했던 그 동작을 했다. 시원하게 앞머리를 까넘기는 그거. 근데, 지금 나도 굉장히 빡쳤거든? 김태형님 티존의 영험함이 존나 사라지셨거든? 영빨 존나 없거든? 안 통해. 안 통해 이제!


김태형은 몇 번 제 입술을 혀로 훑더니 내가 기대있는 벽으로 손을 갖다 댔다. 뭐야 이거, 그 뭐더라. 일본말로 뭐 있는데. 카레동인가. ...뭐야 카레 돈가스 같잖아. 암튼 혼자 존나 청춘영화를 찍으신다.

 

 

"너 왜 그래. 왜 이러,"

"김태형 너. 편지 버렸지."

"하, 갑자기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야, 뭐?"

"니가 그랬잖아아. 정국이 편지. 니가 중간에서 삥땅쳤다며어! 시이바알!"

"그걸 어떻게, 지민이 너."

"그래 이 새끼야. 너 전화하는 거 내가 다 들었거덩? 시팔, 그래놓고 지금 니가 나한테 이래? 이래도 돼?"

 

 

빡쳐 있던 김태형의 표정은 당황으로 변했다. 그래, 니가 지금 이렇게 빡칠 게 아니라니까? 태형아. 김태형아. 넌 지금 얼굴만 믿고 나대면 아니 되세요. 왜냐면 내가 진짜 개애빡쳤거든. 세상만사 일이 되려니까 딱 이런 날 그 일을 알게 된 날 내 첫사랑, 너와 내 싸움의 원인 정국이도 만났다 이거거든? 앞에서 당황한 채 서 있는 김태형은 계속 머리를 굴리는 것 같았다. 그래, 굴려봐 무슨 말이 나오나. 나오기나 하겠니? 변명이 되는 일이니 이게.

 

 

"넌, 지인짜 시발새끼야. 내가 정국이 얼마나 좋아했는지 알면서. 다 알았으면서!"

"너 그 정국이 소리 좀 그만,"

"정국이, 정국이, 정국이! 이 씨이팔 김태형아 정국이! 내 첫사랑 나의 정국이 이 개새끼야!"

"박지민. 너 아무리 그래도 지금 니 애인은 나거든?"

"누가 계속 사귀어준다 그랬냐?"

 

 

시이밸놈아. 니가 내 현 애인이면 어쩔 건데, 내 현 남친이면 뭐 시바알. 내 전 남친이랑 존나 눈물 나게 슬펐던 이별 스토리 다 네가 만들어 준거거든요? 이 해바라기씨발아 같은 이 시발아.

 

내가 나의 정국이, 하며 약을 올려대니까 혼자 다시 빡이 친 모양새였다. 아까보다 더 세게 인상을 찌푸리더니 되레 제가 화를 내려고 했다. 방귀 뀐 놈이 성낸다더니, 이 새끼는 설사 똥까지 싸지르고는 분개하시는 중이다. 어이가 없네. 유아인 형이 그랬어. 이럴 때 쓰는 말이라고. 김태형은 내 마지막 말에 여러모로 열이 뻗친 듯했다.

 

 

"너 그게 지금 할 소리야?"

"그럼 넌, 그게 할 짓이었냐?"

"지민아 그건."

"너 내가 그 통화 못 들었으면. 나 평생 속이려 그랬냐?"

"그런 게 아니고."

"아니면. 말은 하려 그랬어? 언제? 나 칠순잔치라도 하면?"

 

 

그래 넌 존나 열 좀 받아봐. 지금 너랑 나중에 누가 더 빡쳐 있는지 대결 한번 해보자고. 김태형은 한참을 고개를 숙인 채 씩씩거렸다. 그러더니 갑자기 고개를 쳐들었다. 뭐야, 존나 놀랬어. 눈 왜 그렇게 크냐. 이것도 빡치네. 지금 나 디스하는 거지, 내 눈 작다고. 시팔.

 

 

"그래서 뭐. 너 그거 들었는데 뭐."

"뭐라고?"

"그거 들었으면, 나랑 헤어지고 다시 전정국이라도 만나게?"

".....못 할 게 뭔데."

"야 박지민!"

"넌 어떻게, 끝까지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가 없냐. 이 쓰레기야."

 

 

나는 마지막 말을 끝내고 김태형을 밀쳤다. 김태형은 허무하게 비켜났고 나는 골목을 빠져나왔다. 골목 끝 모퉁이에는 정국이가 서 있었다. 얘기를 다 들었겠지, 이 정도 거리였으면. 정국이는 날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정국이의 편지를 내가 의도적으로 무시한 게 아니라는 일종의 오해는 풀었겠지만 속은 아주 복잡했다. 차라리 서로 아무것도 몰랐더라면, 그랬으면 더 나았을까. 나는 날 가만히 쳐다보는 정국이를 바라봤다. 내 입은 제멋대로 말을 뱉었다.

 

 

"나 좀 어디로 데려가 줘, 정국아."